육군 ()

육군 기
육군 기
국방
제도
지상전(地上戰)을 주임무로 하는 군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지상전(地上戰)을 주임무로 하는 군대.
개설

육군은 지상전투를 수행할 수 있도록 편성되어 있고, 지역을 탈취 또는 확보함으로써 최후의 승리를 획득하여 지키는 데 그 목표를 두고 있다. 또한, 육군은 항공기의 지원을 받아 공수 또는 공중기동작전을 수행한다. 육군의 작전은 다음 세 가지 형태로 크게 나눌 수 있다.

(1) 공격작전

적을 격멸할 목적으로 적의 방향으로 진격하는 적극적인 작전 형태로서, 전투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2) 방어작전

적의 공격을 저지, 격퇴하고 우군의 부대시설과 활동을 방호하며 공세이전(攻勢移轉)을 위한 여건을 조성하기 위하여 실시되는 작전이다.

(3) 지연작전

부대가 불리한 상황하에서의 전투를 회피하고 차후 작전에 대처하기 위하여 후방으로 이동하거나 적으로부터 이탈하는 작전으로 철수·철퇴(撤退)·지연전으로 구분된다.

이상 세 가지 작전형태에 기초를 두고 공지(空地)작전·전자전·전술핵작전·화학전 등을 융통성 있게 수행한다.

육군의 창설 과정

(1) 초기 활동

8·15광복과 더불어 우리 겨레는 무엇보다도 먼저 튼튼한 자주국방력을 보유하여야 한다는 것을 간절한 소망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군사경력을 가진 뜻있는 젊은이들이 각처에서 궐기하여 국가방위를 위하여 사설군사단체 혹은 유사군사단체를 조직하기에 분주하였다.

이 시기에는 하룻밤 사이에도 수십 개의 단체가 탄생하여 1945년 11월에는 60여 개나 난립하였다. 이들을 계보별로 보면 일본군·만주군·중국군·광복군 출신으로 대별할 수 있는데, 이들 단체 중에는 좌익계 단체도 상당수가 있어서 미군정 당국은 1946년 1월 국방경비대 창설을 앞두고 사설군사단체에 해체령을 내렸다.

(2) 기간요원 양성

국방경비대 창설에 즈음하여 미군정 당국이 직면한 과제는 한국군에게 미식 군사훈련을 시키는 것이었으며, 또한 이 군사훈련에 있어서 제일 먼저 부딪힌 난제는 언어장벽을 해소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 첫단계로 영어를 해득할 수 있는 장교를 양성하기 위하여 1945년 12월 5일 서울 서대문에 있는 감리교신학교 건물에 군사영어학교를 설치하게 되었는데, 이 교육을 위하여 군정 당국과 적극적으로 협조한 인사는 이응준(李應俊)과 원용덕(元容德)이다.

개교 당시 입교한 학생 수는 60여 명이었으나 수시로 추가 입교하여 200명으로 증가하였고, 1946년 2월 27일에는 교사를 현재의 육군사관학교 자리로 이전하였으며, 그 해 4월 30일 110명의 학생을 임관시켰다. 이때 임관된 장교들이 창군의 주역을 맡게 되었으며,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형근(李亨根)·채병덕(蔡秉德)·정일권(丁一權)·최경록(崔慶祿)·민기식(閔機植) 등을 비롯하여 후일 6·25전쟁 때에 훌륭한 지휘관으로서 혁혁한 공훈을 세운 장교들이 많았다.

(3) 육군 창설

1946년 1월 15일 경찰후비대라는 성격으로 발족한 남조선국방경비대의 창설과 더불어 태릉에서 제1연대를 창설하고, 그 해 2월 1일에는 국방경비대 총사령부를 서울 남산동에 설치하여 각 도별로 모병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4월까지 제2·3·4·5·6·7·8연대를 각도에 창설하였다. 같은 해 5월 1일에는 태릉에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를 설치하고 우선 제1기 사관후보생 50명을 선발, 입교시켜 장교양성에 착수하였다.

한편, 국방사령부는 1946년 4월 8일 「군정법령」에 의하여 국방부로 개칭되었다가 다시 같은 해 6월 14일 통위부(統衛部)로 개칭되었고, 이에 따라 그 예속기구인 국방경비대는 조선경비대로, 국방경비사관학교는 조선경비사관학교로 각각 개칭되었다. 1946년 11월에는 제9연대 증설을 비롯하여 1948년 5월에 이르기까지 제10·11·12·13·14·15연대 및 독립기갑연대 등 8개연대를 증설하여 모두 16개 연대로 증편되었다.

연대 수가 늘어남에 따라 여단(旅團)창설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947년 12월 3개 연대를 1개 여단으로 한 제1·2·3여단을 창설하고 1948년 4월까지 제4·5여단을 창설하였는데, 그 해 11월 제4여단이 제6여단으로 개칭되었다.

한편, 군사교육기관으로는 경비사관학교를 비롯하여 통신·군기·보병·위생·자동차 및 제1·2·3훈련학교를 설치하고 미국에 유학생을 파견하여 중견간부들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그 해 9월 1일 미군정청으로부터 정권을 인수함에 따라 조선경비대는 비로소 대한민국의 정규군으로서 역사적인 새 발족을 보게 되었다.

계속하여 11월에는 「국군조직법」이 국회에서 통과됨에 따라 12월 15일 종전의 통위부는 국방부로 개칭되었고, 국방부에는 참모총장, 육군본부에는 총참모장을 보직하였는데, 초대 육군총참모장에는 이응준 준장, 참모부장에는 정일권 대령이 각각 임명되었다.

1948년 11월에 다시 4개 연대를 증편하는 한편, 1949년 1월에 제7여단을 창설하였고, 그 해 6월까지 3개 연대를 추가 편성하여 총 6개 여단에 20개 연대로 확장하였으며, 5월 12일에는 6개 여단(1·2·3·5·6·7여단)을 사단으로 승격시키고 제8사단과 수도경비사령부(후에 수도사단으로 개칭)를 창설함으로써 남조선경비대로 발족한 이후 3년 5개월 만에 8개 사단(22개 연대)의 정규육군으로 성장하였다.

1950년 6·25전쟁 개전 당시 육군의 전투부대는 8개 사단 6만7900여 명으로서 지원 및 특파부대를 포함하여 9만6000여 명이었다. 전쟁 기간 중에 제1·2·3군단과 10개 사단을 추가로 창설하여 1953년 7월 휴전 때에는 보병 18개사단으로서 병력은 55만으로 증강되었다.

육군의 편성

(1) 병과

국방경비가 발족되면서 여러 병과가 창설되었는데, 초기에는 잠정적으로 병과간 이동이 자유로웠으나 「국군조직법」이 제정되면서 보병·기병·포병·공병·기갑·항공·방공·통신·헌병 등 9개 병과로 분류되어 병과별 표지도 제정되고 기구편성도 이루어졌다. 6·25전쟁 기간 중에 수송·화학·정훈·군종·여군 병과가 창설되었는데, 전쟁이 끝난 뒤 기병병과는 없어지고, 방공은 포병에 통합되었으며, 정보병과가 생겼다.

1988년에 기본병과는 보병·포병·기갑·공병·통신·정보·항공·화학·병기·병참·수송·부관·헌병·경리·정훈 등 15개 병과이었으며, 특수병과는 의무·법무·군종·여군 등 4개 병과로서 도합 19개 병과였다. 이 가운데 여군 병과는 1990년 1월 11일 폐지되었다. 또한, 이들 병과 내에서도 특기에 의하여 직능을 세분하고 있으며, 각 병과 장병의 양성은 훈련소와 병과학교에서 담당하고 있다.

(2) 제복 및 계급제도

남조선국방경비대가 창설될 당시에는 우리 손으로 군복을 생산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지 못하였고, 그렇다고 미군의 군복을 제대로 공급받지도 못한 실정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은 일본군이 저장해 두었던 군복을 그대로 착용하거나 약간 개조하여 착용하였다. 그 뒤 미군의 군복을 공급받으면서 외견상 미군과 흡사한 때도 있었으며,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3년 동안의 전쟁기간에는 전투복만을 착용한 때도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무질서하였던 군복제를 정비하여 그런대로 우리의 제복을 가지려는 노력이 계속되었으며, 1960년대에는 군복에 대한 관심이 군의 차원을 넘어 국가적 차원으로 확대되어 1962년 군인복제를 각령으로 정하고, 1967년부터는 대통령령으로 규제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 역시 미군의 군복 영향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으나 자주군대로서의 복제가 정립되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에 이르러 국가경제의 비약적인 발전과 함께 군의 제복도 보다 한국적인 것을 추구하게 되어 미군의 군복 냄새가 풍기던 흑갈색(서지복)과 카키색을 배제하고 우리 것으로 토착화하려는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때부터 우리의 복제에 맞춰 우리 손으로 만든 군복을 착용하게 되었다.

한편, 계급과 계급장은 창설과 동시에 제정하였으나 당시 계급구조는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당시의 군대계급을 본따 장교를 영관·위관으로 구분하고, 영관은 정령(正領)·부령(副領)·참령(參領)으로 하였으며, 위관은 정위(正尉)·부위(副尉)·참위(參尉)와 준위로 구성하였다. 그 당시 장관급(將官級)을 두지 않았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는 창군 당시의 형편으로 보아 장관급의 대상자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곧 있으리라는 예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계급장은 국방경비대 장교의 임관을 앞두고 제정이 시급하였으나 적절한 안이 없어 당시 국방사령부 경비국 경찰이 무궁화모양의 계급장과 모표를 사용하고 있어 이를 참작하여 임시로 무궁화 모양을 위관 계급장으로 정하고, 영관급 장교의 계급장 제식은 제정하지 못하였다.

그 뒤 한 달도 못되어 1946년 2월 1일 채병덕 정위가 참령으로 진급하게 되자 영관급 계급장이 없어 부득이 정위계급장에 참위계급장을 가하여 4개를 부착하기도 하였다. 이를 계기로 영관급을 포함한 새로운 계급장 제정이 요구되어 1946년 4월 5일 미군 준위계급장을 모방하여 도안했는데, 즉 가로 1.5㎝, 세로 4.5㎝의 황금색 구형(矩形) 금속바탕 위에 영관은 태극, 위관은 작은 구형을 정위·부위·참위 순에 따라 각각 3개·2개·1개씩 배열하였다.

그러나 계급호칭이 시대감각에 맞지 않다 하여 1946년 12월 1일부로 현재와 같이 영관은 대령·중령·소령으로, 위관은 대위·중위·소위로 각각 호칭하고, 장관급을 추가하여 대장·중장·소장·준장 등으로 구분하였으며 계급장도 동시에 제정하였다.

휴전 후에 정복착용의 빈도가 점차 늘어남에 따라 계급장의 크기와 형태가 정복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품위가 결여되어 1954년 5월 15일 장관급 계급장은 그대로 두고 영관과 위관계급장만을 개정하였다.

즉, 영관은 지름 2㎝의 원형 속에 9개의 ‘대나무 잎사귀’를 둥글게 배열하고 가운데에 소형 위관급 계급표시인 마름모[菱形]를 세운 상태로 한 은색 계급장을, 위관은 세로 2㎝, 가로 1㎝의 마름모를 세운 형태로 하되 소위·중위·대위는 은색, 준위는 황금색으로 하였다. 그 뒤 1975년에는 지금까지 사용해오던 장관급 계급장이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것과 동일하므로 성형(星形) 밑에 무궁화표지를 추가 부착하여, 1975년 9월 30일 우리 나라 고유의 특성을 갖도록 제정하였다.

그런데 영관급 계급장은 경찰의 경위에서 경정까지의 계급장과, 위관급 계급장은 순경에서 경사까지의 계급표지와 유사하여 계급식별의 혼선을 초래하는 경우가 가끔 발생하였다. 이에 육군에서 영관 및 위관 계급장제식의 변경을 건의하여 1980년 1월 9일 대통령령으로 장관급과 같이 영관 및 위관급 계급장에도 무궁화표지를 부착하도록 개정하게 되었다.

(3) 부대편성

육군의 부대구조는 지상작전 사령부, 2작전 사령부와 수도방위사령부, 특수전사령부, 항공작전사령부, 교육사령부, 군수사령부, 인사사령부, 육군사관학교, 육군3사관학교 및 기타 육군 직할부대로 편성되어 있다. 그리고 군사령부 예하에는 군단사령부 및 사단과 포병, 공병, 통신, 보급/정비 등 전투지원 및 전투근무지원부대로 편성되어 있다.

지상작전 사령부는 전방의 전선을 담당하고, 2작전사령부는 그 이남의 책임지역을, 수도방위사령부는 서울 지역을 담당하며, 그 외 부대는 각각 특수전·항공작전·군수지원·교육훈련·행정지원 등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육군의 기능은 육군의 정책 및 군사력 소요를 제기하고, 육군의 편성, 교육훈련, 인사, 군수, 동원·예비군 작전지원을 하며, 기타 육군의 운영에 관한 사항 관장한다.

① 육군본부: 1946년 2월 22일 태릉에서 국방경비대 총사령부로 발족하여 그 뒤 조선경비대 총사령부로 개칭되었다가 정부수립과 동시에 육군총사령부로 개칭되었으며, 1948년 11월 30일 「국군조직법」의 제정, 공포로 육군본부로 개편되어 2000년 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육군본부기구편성은 초기에는 총참모장 밑에 행정 및 작전참모부장을 두고 인사·정보·작전·군수국과 특과감실로 구성하였다. 1953년 5월 9일 총참모장을 참모총장으로 개칭하고 밑에 참모차장을 두었는데, 1959년 1월 육군본부기구를 전면적으로 개편하여 참모총장과 참모차장 밑에 5개 일반참모부장제(관리·인사·정보·작전·군수)를 채택하고 특과감실은 소관별로 일반참모부장의 조정통제를 받게 하는 편제로 개편되었다.

그 뒤 몇 차례 기구가 개편되었으나, 총장·차장 밑에 개인참모와 일반참모부장제도가 존속하고 있으며, 특과감실은 일반참모부장의 통제를 받고 있다. 2000년 말 현재 그 기구편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 기획관리참모부는 육군의 정책, 군사력 소요제기, 중·장기 기획·계획 수립, 방위력 개선, 운영유지 사업의 소요 제기와 집행·통제, 예산·회계 등을 기획, 관리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인사참모부는 복지·사기·체육·군기강 관련 업무, 각종 의식, 행사계획을 수립하여 시행하는 임무를 맡고 있고, 정보작전참모부는 정보·작전상황의 유지와 전파, 군사보안, 대외 정보교류의 업무, 교육훈련, 작전지원 ,동원·예비군 운영업무 등을 담당하며, 군수 참모부는 군수지원의 계획 수립과 시행, 군수물자의 소요제기 및 조달, 군수물자의 보급·정비 및 수송, 그리고 시설 동원업무를 맡고 있다.

그리고 지휘통신참모부는 정보화 계획을 수립, 통신·전산 및 정보체계 관련 소요의 제기 및 관리, 정보화 관련 인력관리와 교육을 담당하고, 감찰감실은 군사검열, 안전, 특명 사항의 조사 및 회계감사, 민원업무 조정·통제, 소원수리 및 고충처리 등을, 법무감실은 군사법원 및 군 검찰의 운영, 형사 정책, 법령의 제정 및 개정, 법령의 자문과 해석, 법규관리, 소송, 배상, 행정심판, 징계 업무, 계약안 및 조약안의 검토 등을 맡고 있다.

이어 정훈공보실은 그야말로 홍보, 공보업무를 관장하고, 육군의 공식 대변인 업무를 수행하고, 인사운영실은 장교, 준·부사관, 군무원의 인력관리, 인사업무를 맡으며, 공병감실은 시설의 계획 수립과 집행, 군수용 부동산 관리를, 헌병감실은 군풍기 유지, 범죄예방과 수사, 요인경호 등 군사경찰 업무를 맡고 있으며, 부관감실은 병의 인력 충원 및 인사관리와 운영, 인사처리, 병적기록유지, 문서·행정·군사우편·인쇄·행사서무에 관련 된 업무를 맡고 있다.

의무감실은 보건·진료·환자 수송·방역·약무 업무를, 군종감실은 신앙활동·인격지도·선도활동, 기타 종교관련 업무를, 군사연구실은 군사(軍史) 및 전사(戰史) 편찬, 자료수집·관리, 군사자료 수집·관리, 전적 기념의 건립 통제·관리를, 분석평가실은 정책·주요사업 평가분석, 전시자원을 분석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② 1군사령부: 전방부대를 지휘하기 위하여 1953년 12월 25일 제1야전군사령부를 창설하고 미군 지휘하에 있던 1·2·3군단의 작전지휘권과 육군본부로부터 보급·정비·의무·후송 등의 후방지원과 행정책임을 부여받아 야전군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으며, 그 뒤 계속적인 발전을 거듭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19년 1월 제3야전군사령부와 통합하여 육군 지상작전사령부가 창설되었다.

③ 2군작전사령부(옛 2군사령부): 1954년 10월 31일 후방지원을 전담하기 위하여 제2군사령부를 창설하고 전군에 대한 군수지원과 후방 경비임무를 수행하게 하는 한편, 지역단위별로 예하 관구사령부와 예비사단 등을 창설하여 후방작전을 지휘하게 하였다. 2007년 '2군사령부'를 ‘2군작전사령부’ 개칭하였다.

④ 3군사령부: 1973년 1월 월남전이 종식되자 그 해 3월에 철군한 주월한국군을 기간으로 7월 1일 창설되었다. 그리하여 기존 제1군사령부와 제3군사령부를 조정, 배치하여 작전지휘에 균형을 유지하게 하였다. 이로써 육군은 전방방어를 보다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되었으며 전력강화는 물론 합리적인 부대관리를 기하고 있다. 2019년 1월 제1야전군사령부와 통합하여 육군 지상작전사령부가 창설되었다.

⑤ 특수전사령부: 1958년 4월 1일 특수전 수행을 위하여 특전여단으로 창설되었다가 1969년 8월 18일 특전사령부로 개편되었다. 그 뒤 많은 훈련과 경험축적으로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⑥ 수도방위사령부: 1961년 6월 1일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하에 서울 남산에 수도방위사령부를 창설하였는데, 1963년 제3공화국 출범과 함께 12월 17일 해체됨과 동시에 육군본부 예속으로 수도경비사령부를 창설하였다.

그리하여 수도 서울의 안녕과 질서유지 및 재해복구를 위한 대민지원, 경호경비임무를 수행하였다. 1968년 1·21사태 때는 긴급히 출동, 북한 공산군 124군부대 소탕전에 참가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북한의 대남전략과 현대전 양상에 비추어 전쟁도발 때에는 서울에서 격전이 예상되므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수도서울은 반드시 지킨다는 방위개념에 입각, 부대의 증개편이 이루어졌으며, 1984년 1월 1일부로 수도방위에 관한 지휘체제를 단일화하여 수도방위사령부로 발족되었다.

⑦ 항공작전사령부: 그 동안 제대별로 항공전력을 보유, 분산 운용함으로써 전력소요 및 정비·유지비용이 과다 발생했던 점, 통합전투력 차원의 기동전 수행부대가 편성되어 있지 않아 유사시 공중강습부대의 편성, 운용시 작전 적응성에 미흡했던 점을 해소키 위한 목적으로 1999년 4월20일부로 창설되었다.

또한 앞으로 펼쳐질 전쟁의 형태에 대응하기 위해 입체고속 기동전 수행능력은 필수적인 것이다. 따라서 육군 항공전력을 효율적·적극적으로 운용할 필요가 있으며 이러한 목적의식을 바탕으로 그 위치를 잡아가고 있다.

⑧ 교육사령부: 1951년 8월 1일 부산에서 교육총감부로 발족되어 교육훈련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였으며, 1954년 7월 6일에는 휴전으로 인한 교육수요가 증가됨에 따라 교육총본부로 개편되었고, 1960년 6월 1일에는 전라남도 광주에서 전투병과 교육사령부가 창설되어 보병·포병·기갑·항공·화학 등 병과학교의 교육을 통제하였다.

그 뒤 발전을 거듭하여 전투발전과 교육발전을 통합하기 위하여 1981년 5월 1일 육군교육사령부를 창설하여 전 육군의 각 병과학교를 관장, 연구체계를 과학화하는 한편, 미래지향적인 육군의 전력개발과 필승의 전투발전 및 정병육성에 노력하였다. 1982년 6월 16일 광주에서 다시 대전으로 이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⑨ 군수지원사령부: 2군사령부(현 2군작전사령부)가 창설되면서 육군의 군수지원임무를 2군이 담당하여오다가 1960년대를 맞이해 새로운 획득과 분배개념에 따른 적합한 군수기구의 창설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1960년 1월 15일부로 군수기지사령부를 창설하여 모든 군수시설을 2군사령부(현 2군작전사령부)로부터 인수받고 전군의 군수지원을 담당하였다.

그 뒤 1970년대에 이르러 국력의 급진적인 신장과 자주국방을 위한 강력한 군수지원기구의 창설이 불가피하게 되자 1970년 12월 15일을 기하여 군수사령부를 창설하고 기지 및 야전의 군수지원체제를 강화하여 전 육군에 대한 군수지원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⑩ 화생방방호사령부: 1999년 6월 1일 에 창설되었다. 도시지역 독가스 테러에 대비한 신속대응부대로서의 임무수행과 군·관·민 화생방 방호를 위한 통합작전기구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⑪ 훈련소 및 군사학교: 6·25전쟁이 발발하자 그 해 8월 14일 제1훈련소를 경상북도 대구에 창설하였으며, 1951년 11월 1일에는 제2훈련소를 충청남도 논산에 창설하여 신병의 양성기관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1훈련소는 그 뒤 1951년 1월 21일에 제주도 모슬포로 이동하였다가 휴전 후인 1955년 12월 13일에 해체되었다.

병과학교는 병과별 직능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1948년에 창설하였는데, 같은 해 8월 통신학교를 비롯하여 1949년 12월까지 병기·헌병·정보·포병·군의·경리·병참·군악 학교 등 10개 학교를 창설, 직능교육을 담당하였다. 전쟁중에 기갑·공병·수송·부관 학교와 여자 의용군교육대가 새로 창설되었다.

한편, 육군의 정규장교를 양성하기 위한 사관학교는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에서 비롯된다.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는 1946년 5월 1일 태릉에서 설립되었고, 초대 교장에 이형근 소령이 취임하였으며, 경비대기간장교의 보충요원을 양성하여오다가 정부수립 후인 1948년 9월 5일 국군창설로 육군사관학교로 개칭되었다.

교육기간은 제1기부터 제7기까지는 45일부터 3개월 간으로 제각각이었고, 제8기부터 6개월로 되었는데, 6개월마저도 간부양성에는 충분하지 못하여 제10기생부터 4년제로 본격적인 정규장교 양성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당시 여건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제10기생(생도 제1기)은 2년제 과정으로 모집하였다가 입교 후에는 또다시 1년으로 단축되었다.

그 뒤 1950년 6월 1일 생도 제2기생이 입교하여 대망의 4년제 정규사관교육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북한공산군의 남침으로 졸업을 20일 앞둔(7월 14일 졸업 예정) 제10기생(당시 생도 제1기)과 입교한 지 20여 일에 불과한 생도 제2기생들은 조국의 위난을 구출하기 위하여 용감하게 출전하였다.

사관생도들은 포천 부근의 부평리전투를 비롯하여 갈매리전투·광나루전투 등 전후 8차례의 격전을 치렀다. 그 뒤 제10기생은 7월 10일 대전에서 임관되었으며, 생도 제2기생은 8월 15일 동래에 설치된 육군종합학교에 편입되어 종합 1기 혹은 종합 2기로 임관되었다.

전란으로 휴교되었던 육군사관학교는 1951년 10월 31일 경상남도 진해에서 정규 4년제로 재개교되었고, 제11기생이 입교하여 육사의 전통을 다시 잇게 되었으며, 그 뒤 육군사관학교는 1954년 6월 24일 진해에서 서울 태릉으로 이동,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68년 10월 15일 광주(光州)와 경상북도 영천에 단기사관학교로 제2사관학교와 제3사관학교가 각각 창설되어 고졸 이상의 자원자를 모집, 초급간부 양성임무를 수행하였다. 교육기간은 1969년도까지는 44주, 1970년도에는 62주로 연장하였다가 1971년 이후부터는 102주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1972년 4월 16일에 제2사관학교가 폐지되고 제3사관학교에 통합되어 단일교로 교육이 실시되었고, 1974년도부터는 제3사관학교의 입교자원을 우수자원으로 확보하고 장교의 자질향상과 군의 정예화, 개인복지향상과 예편 후의 사회기여도의 증진 등을 감안하여 교육수준에 상응한 자격을 인정하도록 하기 위해 초급대학으로의 인가문제가 검토되었다.

그 결과 1974년 12월 21일 공포된 법에 따라 3사관학교를 수업연한 2년제 초급대학으로 간주하고, 졸업자에 대해서는 전공 분야에 따라 각각 인문계와 이공계 초급대학의 졸업자격을 부여하였다. 또, 육군간부에게 고등군사학을 연구 및 습득시키기 위하여, 6·25전쟁 동기에 접어들었던 1951년 10월 28일 대구에서 육군대학이 창설되었다.

육군대학은 1954년 7월 진해로 이동하여 군발전에 선봉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정예간부 육성을 교육목표로 삼았는데, 군 운용에 필요한 최고수준의 전술을 비롯한 군사지식을 체득하게 하는 군사교육기관으로 성장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4) 예비군

1948년 11월 20일 육군의 한 구성요원으로서 국토방위의 필요성에 따라서는 정규군에 편입할 수 있도록 하는 호국군이 편성되었다. 그 구성은 지원제로 하되 신분은 예비역으로 하고 생업에 종사하면서 각자의 거주지에 주둔하고 있는 연대에서 소요의 군사훈련을 받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1949년 1월 4개 여단과 예하에 10개 연대를 창설하고 호국군사관학교를 설치하여 호국군 간부를 양성하였는데, 1949년 8월 병역법의 공포에 따라 호국군사령부 및 호국군은 해체되었다.

그 뒤 대한청년단을 주축으로 1949년 11월 초에 청년방위대가 예비군의 성격을 띠고 편성되기 시작하여 1950년 5월 말에 전국적인 조직을 완료하였다. 청년방위대는 전국 시·도지구별로 사단급에 해당하는 방위단, 그 밑에 시·군단위로 연대급인 지대, 면단위로 대대급인 편대, 이(里)단위로 구대(중대) 또는 소대를 편성하였다.

간부는 해체된 호국군 간부를 우선적으로 보병학교에 입교시켜 40일간의 군사교육을 마친 뒤 예비역소위로 임관시켰다. 청년방위군은 1950년 6월 모든 조직과 정비를 끝내고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가기 시작하였으나 6·25전쟁의 발발로 기간요원들은 현역에 편입되고 대원들은 군에 입대하였다. 6·25전쟁 기간중에는 예비군으로 국민방위군이 있었다.

국민방위군은 1950년 12월 「국민방위군설치법」을 공포하여 만 17세부터 40세 미만의 장정을 지역단위로 편성하였다. 그러나 1951년 1월 4일 서울 철수로 국민방위군은 지역단위로 남하하였으며, 이 기간에 간부들이 국고금과 식량·의복·보급물자 등을 부정처분, 착복한 사건이 발생하여 국내외의 지탄을 받자 1951년 4월 30일 국회의 결의에 의하여 해산되었다.

1968년 1·21사태, 1월 23일 푸에블로호납치사건 등으로 북한의 도발이 극렬하여지자 종래의 유엔군 중심의 국방태세에서 자주적인 방위태세로 전환되어야 할 필요성에 따라 1968년 4월 1일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었다. 향토예비군은 창설된 이래 질적·양적으로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면서 전시에 즉각 동원하는 것은 물론, 후방 방위태세를 구축하여 민방위대 편성과 더불어 전후방 동시 전장화에 대비할 수 있는 총력전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육군의 작전

(1) 6·25전쟁

1950년 6월 25일 새벽을 기하여 북한 공산군은 38도선 전역에서 전차를 선두로 일제히 기습남침을 하여 왔다. 그와 동시에 대규모의 유격대를 동해안으로 상륙시켜 정규 및 비정규전의 배합전술로 공격을 가하여 왔는데, 이는 50일 이내에 부산을 점령하고 전 한반도를 공산화하기 위한 전략달성을 위해서였다.

당시의 전투력을 비교해보면 북한 공산군 10개 보병사단, 1개 전차여단, 3개 독립연대, 5개 경비행단 등 지상군 19만6680명과 해군 4,700명, 공군 2,000명으로 총 병력은 20만3800명인 데 비하여, 한국군은 8개 보병사단, 2개 독립연대 등 9만6140명의 지상군과 해군 6,956명, 공군 1,897명으로 총 병력은 10만4993명에 불과하였다.

한국군은 전방지역인 개성·포천·춘천·강릉 및 옹진지역에 4개 사단 및 1개 여단을 배치하여 전방방어임무를 수행하였고, 그 밖의 부대는 서울·대전·대구 일원에 전개되어 공비토벌과 후방지역 경계임무를 수행하도록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장비의 열세였다. 개전 초기에 북한 공산군의 보유장비는 야포 122㎜ 179문, 76.2㎜ 곡사포 380문이었으며, 박격포 120㎜ 226문과 82㎜ 950문, 61㎜ 1,142문, 37㎜ 54문이었고, 기갑장비로 T34전차 242대, 76.2㎜ 자주포 176대, 장갑차가 54대였다.

이에 비하여 한국 육군은 105㎜ 곡사포 88문(M-3)과 57㎜ 대전차포 140문밖에 보유하지 못하였으며, 박격포 81㎜ 384문, 60㎜ 576문이었고, 대전차화기로서 성능이 미약한 2.36인치 로켓포 1,900문(전차파괴력이 전혀 없었음), 장갑차 24대에 불과하여 화력면에서도 적수가 안 되었다.

북한 공산군이 남침을 개시한 지 2, 3일 만에 서울이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가고, 파죽지세로 밀어닥치는 기세에 밀려 1950년 9월에는 낙동강전선에서 방어에 임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6·25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그 해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되었고, 다음날인 16일에는 낙동강전선에서 한국 및 유엔군의 총 반격작전이 개시되어 일일 평균 20㎞ 속도로 북진이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1950년 10월 1일에는 다시 38도선을 돌파하고, 10월 10일에는 한국군 제1군단이 원산을 점령하였으며, 10월 26일에는 압록강변 초산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11월 7일 다시 철수를 개시하여 37도선인 평택∼삼척선까지 후퇴하였다가 1951년 1월 25일에 다시 반격하여 3월 23일에는 38도선을 확보하였다.

이렇게 육군은 건군 초기부터 전쟁에 휩싸였으며, 1950년 6월 25일 의정부전투를 시작으로 1953년 7월 27일 휴전성립 때까지 사단급 이상의 대규모 주요 격전만도 100여 회를 실시하였다. 또한, 사변기간 중 공비토벌작전으로 호남, 중동부, 경상북도 동해안 지역 및 제주도 한라산 일대까지 소탕작전을 실시하였는데, 토벌작전에 동원된 병력은 총 9개 사단, 5개 유격대대, 10개 경비대대와 그 밖에 국민방위군 1개 연대 및 경찰 29개 대대였다.

(2) 월남전 참전

1964년 월남정세가 극도로 악화되자 미국의 지원권유와 더불어 월남정부의 간곡한 구원요청에 따라 우리 정부는 국회의 동의를 얻어 한국군 파월을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우선 지원군으로서 의무부대와 태권도교관단을 파견한 데 이어 1965년 2월에는 공병과 수송부대를 증파하였는데, 그 통상명칭을 ‘비둘기부대’라고 호칭하였으며, 사이공에는 주월한국군 군사원조단을 설치하였다.

그 해 10월에는 전투부대로서 수도사단(맹호부대)을 파견하고, 이어서 1966년 8월에는 제9사단(백마부대)을 증파함으로써 파월 병력은 5만 명에 달하였고, 종전의 주월한국군 군사원조단은 주월한국군 사령부로 개편되었다. 한국군의 월남 파병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해외 원정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유아시아 공동방어전선의 일익을 담당하였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7년 5개월 동안의 파병기간 중 육군이 수행한 크고 작은 작전과 대민지원의 성과는 지대하였으며, 또한 이를 계기로 우리의 국위가 국제사회에 크게 선양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경제발전에 기여한 바도 적지 않았다.

육군의 교육훈련

육군은 기본목표를 전쟁억제에 기여하고, 지상전에 승리하며, 국민편익을 지원하며, 정예강군을 육성하는 데 두고 있다. 그리고 육군은 필승의 정예부대를 육성하여 유사시 전투임무에 적응할 수 있는 태세를 유지하기 위하여 교육훈련의 기본목표를 세웠다. 첫째 투철한 군인정신과 강인한 체력의 전투원 육성, 둘째 현대전의 과학화에 부응할 수 있는 전문기능인 육성, 셋째 적보다 절대우위의 전투력을 갖춘 부대육성 등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본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설정된 교육훈련 방향은 다음과 같다.

(1) 정신교육

정신교육은 국토방위의 사명을 지닌 개인 및 부대가 견지하여야 할 가치관의 확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에 따라 확고한 국가관에 입각한 애국애족의 충성심과 승공사상을 바탕으로 군인정신을 함양하여 군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정신적 자질을 배양하는 한편, 엄정한 군기, 왕성한 사기, 굳건한 단결심을 드높여 필승의 신념을 길러낼 수 있도록 교육하고 있다.

(2) 기능교육

기능교육은 각개 전투원으로 하여금 사격술·총검술·각개 전투 등과 같이 전투기술과 무기 및 장비의 조작·정비, 그리고 그 기술적·전술적 운용요령 등에 관한 재능을 기르게 하여 이를 습관화시키는 교육이다. 기능교육을 위한 습관의 형성은 관습을 올바르게 기르기 위한 정확성, 고벽을 예방하기 위한 적시적 교정, 훈련의 단계와 시간을 배분하기 위한 합리성, 용의주도한 훈련을 지속적으로 실시하기 위한 반복성 등의 제원칙을 철저히 적용하고 있다.

또한, 고도의 기술수준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하여는 끊임없이 기능을 연마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고, 목적의식이 뚜렷한 구체적인 훈련을 실시하며, 일정한 수준으로 심화될 때까지 중단없이 실시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있다.

(3) 학술교육

학술교육은 장병의 지능을 개발하기 위한 강의 위주의 이론교육으로서, 그 목적은 직무수행에 필요한 일반 및 군사지식을 부여하고 아울러 전기·전술과 내무교육을 위한 기초를 제공하는 데 있다.

사병에 대한 학술교육은 기본적인 과목으로 제한하고, 실기의 숙달이 요구되는 과목은 실기훈련 위주로 실시하며, 간부에 대한 학술교육은 직업군인으로서의 전문화교육의 일환으로 계급과 직책에 상응하는 광범위한 일반지식 및 군사지식을 점진적으로 심화시킬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강도 높게 실시하고 있다. 특히, 학술교육에서 습득한 지식이 잊혀지기 전에 실지에서 체험하도록 하거나 일상생활을 통해 이를 실행하도록 교육하고 있다.

(4) 전술교육

전술교육은 실전에서 요구되는 전술적 행동을 완성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이에 따라 각급 지휘관에게는 실병지휘능력을 배양하는 데 주안을 두고 실시하며, 각개 전투원에게는 정신력과 체력을 단련하고 개인전기를 완성하여 전투력을 유기적으로 조직화할 수 있도록 실시하고 있다.

전술교육은 먼저 원리원칙을 습득시키고 여러 가지 형태의 전술훈련을 통하여 그 적응능력을 기른 다음 실병지휘훈련으로 전술교육을 완성하기 때문에 단순한 내용으로부터 복잡한 내용으로, 쉬운 것으로부터 어려운 것으로, 원리원칙에서부터 응용으로의 점진적인 발전을 도모하여나가는 방법을 취한다.

또한, 현대전은 집단적인 안전보장개념에 입각한 국가간의 협정에 따라 연합작전을 수행하여야 할 상황이 많으므로, 모든 부대는 연합작전훈련 때 상호간의 협조체제, 각종 지원요소의 이용절차 및 운용요령, 전력요소의 적시적절한 통합운용능력을 배양하는 교육을 하고 있다. 기리고 21세기 과학화 교육훈련의 목표는 정보화, 과학화 시대에 부응하고, 미래 지상전투에서 승리를 보장할 수 있는 개인 및 부대를 육성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5) 체력단련

체력단련은 육체적 단련을 통하여 운동기능과 아울러 강인한 정신력을 길러 전장에서 당면하게 될 어떠한 위험과 곤란도 능히 극복할 수 있는 전투체력을 육성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전투체력의 단련은 주로 근력·순발력·지구력·기민성 등의 운동요인단련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체력의 단련은 계획적이고도 합리적인 체육교육을 비롯, 모든 교육훈련과 병영생활 전체를 통하여 상호관련하에 지속적으로 실시될 수 있도록 지도하고 있다.

육군의 전력 증강과 자주국방태세 강화

육군은 1973년 주월군의 철수와 함께 북한 공산군의 기갑부대 운용양상에 대처하고 부대구조를 기계화·기동화할 필요성에 따라 1개 기계화보병사단을 창설하고, 동시에 1974년부터 1981년을 목표연도로 한 1차 율곡계획(전력증강계획)에 착수하여 후방사단의 전력화, 전방사단의 4각편제로의 개편, 개인화기의 전면교체, 비사단(非師團)포병부대의 증·창설, 육군항공전력의 대폭증강 등 획기적인 전력증강으로 자주국방의 기틀을 다졌다.

이와 아울러 방위산업능력도 1970년대 말에는 소화기는 물론 각종 공용화기와 대구경화포의 생산과 장갑차·전차 등을 자체 개조하기에 이르렀고, 1978년도에는 중장거리유도탄과 다연장로켓의 개발에 성공하였다. 한편, 1973년 7월 제3군사령부를 창설하였고, 1975년 현전선 고수개념을 설정, 경인지역방어사령부를 수도군단으로 개편하고 5개 훈련단을 창설하였으며, 중서부 주요 기계화부대 접근로에 40㎞에 달하는 전략적 방어방벽을 완성하였다.

또한, 월남 패망에 자극되어 1976년부터 ‘팀스피리트’ 한미연합훈련을 시작하여 매년 그 규모를 확대실시하였고, 1978년 11월에는 한미연합사령부를 발족시켜 안보협력의 동반자적 관계로 발전시켰다. 1979년 말 10·26사건과 12·12사태, 그리고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등을 거치면서 국가적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1983년 소련의 ‘대한항공기격추사건’, 또 같은 해 북한에 의한 ‘버마 아웅산암살폭파사건’, 1986년의 ‘금강산댐건설착공’, 1987년 12월의 ‘대한항공기폭파사건’ 등 거듭되는 외환에 대처하여 육군은 국가보위의 최후 보루로서 그 사명을 다하여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였다. 이로써, 안정과 번영이 보장되는 가운데 제10회 아시안게임과 제24회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가능하게 하였다.

아울러 1980년대에 들어와서 육군은 자주국방력 강화에 더욱 주력하였다. 육군은 1970년대까지의 사실상 수세일변도의 전략과 태세에서 탈피하여 보다 공세적인 ‘공세적 방위전략개념’을 정립하고, 이를 기초로 강력한 ‘공세주축 전력확보’에 주력하여 1980년대 전반에 1개 기동군단을 확보하고 1개 기계화보병사단과 2개 상비사단, 10개 동원 및 향토사단, 그리고 10개 특공부대를 추가 확보함으로써 명실공히 자주적 지상전투태세를 확립하였다.

아울러 1981년 5월에는 육군교육사령부를 창설하여 한국적 교리개발과 미래지향적인 전투발전업무를 전담하게 하였으며, 한편 지휘체제면에서도 1984년 수도경비사령부를 군단급의 수도방위사령부로 증편하고, 1987년 4월 3개 군단사령부를 창설, 재정비하였다. 이러한 전력증강과 함께 방위산업도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1982년 이후 토미사일이 장착된 500MD헬기를 국산화하였고, 1985년에는 한국형전차(88전차로 명명)를 개발하여 생산하기에 이르렀으며, 또한 중거리유도탄을 개발, 1987년에 실전배치하는 등 고도의 전자무기체계까지도 국산화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육군은 2000년대 세계화에 걸맞는 첨단 과학기술을 갖춘 무기와 정예강군 육성에 더욱 노력하고 있다.

참고문헌

『국방사』(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4)
『창군전사』(육군본부, 1980)
『육군발전사』(육군본부, 1970)
『한국전사』(국방부,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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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성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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