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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SP, 1950년대)
음반(SP, 1950년대)
국악
개념
소리를 기록했다가 재생하는 원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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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소리를 기록했다가 재생하는 원반.
내용

기보법(記譜法)이 소리를 기록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이는 언어에 대한 문자와의 관계처럼 음악의 문자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문자로서의 의미가 아니고 직접 소리를 담았다가 필요할 때 이를 재생하고자 하는 인류의 욕망은 녹음기술의 발달로 달성된다. 1887년 미국의 에디슨(Edison,T.)이 유성기(축음기)를 발명한 데서 소리에 대한 기록이 시작된다. 이때 소리를 기록한 것은 원반이 아니고 원통이었다. 최초로 기록된 소리는 에디슨의 육성으로 된 ‘매리는 어린 양을 가졌네(Mary had a little lamb.).’였다.

그 이후 축음기는 많은 발전을 통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데, 기계적인 발달뿐만 아니라 인류의 생활양태도 변화시켰고, 특히 음악 자체의 변화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1887년 베를리너(Berliner,E.)가 원반형의 음반을 발명했는데, 에디슨의 원통형과 시장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되자 원통형은 급속히 쇠퇴하고 원반형이 각광을 받게 된다. 이 원반형이 오늘날 음반의 효시가 되었다.

얇은 원반면에 팬 가는 홈에 파형적 변화로 소리를 기록한 음반은 수록시간과 음질 혁신에 따라 SP(standard play), LP(long play), 스테레오(stereo) 및 CD(compact disk)로 나눌 수 있다.

① SP:SP음반은 1분간 78회전의 빠르기에, 재질은 경질고무로 되어 있다. 지름은 10인치 혹은 12인치로 되어 있으나 10인치가 주종을 이룬다. 음반의 외주(外周)로부터 내주로 향하여 일련의 소용돌이 모양을 한 음구(音溝)에 소리가 파형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 면의 수록 시간은 10인치의 경우 최장 3분으로, 짧은 악곡의 수록은 가능하지만 교향곡이나 협주곡 등 연주 시간이 긴 작품은 몇 장에 나누어 수록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② LP:SP의 수록 시간이 짧은 단점을 보완, 개발한 것으로 long play의 머리글자를 따서 LP라고 부른다. 지름 30㎝에 회전수 1분간 33과 3분의 1회전으로 되어 있고, SP와 마찬가지로 외주에서 안으로 돌면서 파형으로 기록된 신호를 읽도록 되어 있다.

1948년 미국의 컬럼비아(Columbia)에서 개발한 LP로 인하여 음반산업은 급격히 성장하고 음향재생기기의 발전도 이에 비례하여 성장하였다.

LP의 제조공정은 녹음된 마스터 테이프(master tape)를 래커(lacquer)판에 소리골을 새기는 작업부터 시작된다. 이 작업을 커팅(cutting)이라 한다. 커팅된 래커 마스터에서 네거티브(negative:father라고도 함)를 뜨고 네거티브에서 포지티브(positive:mother 혹은 모판이라고도 함)를 떠낸다. 다시 포지티브에서 스탬퍼(stamper:자판)를 떠낸다. 이 스탬퍼로 음반을 찍는데, 음반의 원료는 염화비닐에 안료/정전기방지제 등을 배합하여 사용한다.

③ 스테레오:LP시대에서부터 음향기기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고조되어 질 좋은 코드가 등장하였다. 녹음기술이 발달하자 ‘고충실도’라는 의미의 ‘하이파이(Hi-Fi:high fidelity)’기기가 탄생하였다.

1931년 영국인 블룸레인은 녹음을 입체음향으로 시도해 보았다. 이어 독일의 텔레푼켄회사, 미국인 에머리 등이 입체음향의 녹음에 도전하였다. 그 뒤 1956년 영국의 데카사가 아주 단순한 방식의 입체음향 녹음에 성공하였다. 이에 자극을 받은 미국의 RCA빅터회사는 웨스턴 일렉트릭사에 새 기술을 의뢰하였고, 미국의 컬럼비아 회사에서도 피터 골드마크에 의해 연구가 시작되었다. 1957년 웨스턴 일렉트릭사는 실험을 완료하고 미국식과 영국식 두 가지의 입체음향 녹음방식을 미국음반산업협회(RIAA)에 제출하였다.

1958년 2월 스테레오 레코드용 앰플리파이어(amplifier)가 등장하여 본격 스테레오시대가 열렸다. 모노럴 (monoral)시대로부터 입체음향시대로의 발전은 ‘소리의 재생’이라는 개념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스테레오 음반은 음악 연주회장의 분위기까지를 그대로 재생시켜 주었던 것이다.

사람의 귀가 좌우 양쪽에 붙어 있어서 발음체의 거리·위치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원리와 같이 2개의 스피커에서 음이 나오는데, 똑같은 소리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녹음시 다른 위치에서 소리를 잡은 것이 재생되어 임장감(臨場感)을 느낄 수 있다.

④ CD:콤팩트디스크(compact disk)의 머리글자를 따서 CD라고 부른다. 지름 12㎝의 얇은 원반 한 면에만 음악을 수록하는데, 재생시 잡음이나 소리의 왜곡이 적고 다이내믹 레인지(dynamic range)가 넓은 음질상의 장점 외에도 최대 기록 시간이 74분42초나 되는, LP에 비해 여러 면에서 진보된 음반이다. CD를 양면 모두 사용하면 2시간30분 정도의 기록을 할 수 있으나 현재의 CD 규정에는 한쪽 면밖에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있다.

CD는 홈이 패어 있는 LP와는 달리 디스크 표면이 아주 평평하게 되어 있다. 은색으로 되어 있는 부분에 신호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부분을 현미경으로 확대해 보면, 피트(pit)라고 불리는 서로 다른 돌기가 나선형으로 감겨 있다. 이 돌기의 위치 및 길이가 변화하여, 마치 모스부호를 연상할 수 있는 모양으로 디지털(digital)신호가 기록되어 있다.

기록된 신호를 읽는 방법은 부호가 기록된 피트에 레이저(laser)광선을 쏘아 반사광을 전기신호로 변환시키는 광학식을 채용하고 있다. 레이저광선은 디스크에 직접 접촉하지 않고 신호를 읽기 때문에 디스크의 마모가 없다.

CD의 제조공정은 아날로그 (analogue)인 음성신호를 부호화시킨다. 즉, PCM(pulse code modulation)방식으로 디지털화하여 고밀도 마그네틱테이프(magnetic tape)에 기록한다.

이 디지털오디오신호에 제어신호의 일종인 서브코드(subcode) 등을 부가하여 테이프 마스터를 제작한다. 디스크 마스터링 과정에서는 초정도로 연마된 유리 원판 위에 감광제를 0. 12μm두께로 일정하게 코팅하여 레이저 빔(laser beam) 디스크에 장착, 테이프 마스터의 오디오신호와 서브코드에 에러(error) 검출 및 재생하기 용이하도록 EFM(eight-to-fourteen modulation) 변조를 거쳐 레이저 빔 레코더(laser beam recorder)에 입력한다.

이 신호는 고출력 레이저 빔을 개폐하여 회전하는 유리판 위의 감광제 막을 부분적으로 노광시킨다. 레이저 빔 레코딩이 끝나면 유리판 위에 현상액을 뿌려 노광된 부분의 감광제를 녹여낸다. 이로써 감광제 막에 미세한 구덩이들이 생기는데, 이 위에 금속반사막을 진공 증착하면 디스크 마스터가 완성된다.

이 디스크 마스터로부터 똑같은 신호를 가진 다수의 CD를 복제할 수 있는 니켈 원판(nikel father)을 만든다. 이 원판에는 신호가 음각으로 전사되는데, 이를 다시 떠서 모판 및 스탬퍼를 얻는다. 스탬퍼를 원판으로 투명수지를 사출 성형하여 원래의 디스크 마스터와 똑같은 신호를 갖는 투명수지 기판을 형성한다. 그 신호면 위에 진공 증착으로 얇은 금속 반사막을 형성하고 보호막을 입히면 CD가 완성된다.

이러한 제조공정은 최고의 정밀도와 청결도를 요하기 때문에 클린룸(clean room)에서 이루어진다. 실내의 미세한 먼지, 온도, 습도, 진동 등의 환경관리가 반도체 제조공정만큼이나 엄격하다.

1976년 네덜란드의 필립스(Philips)에 의해 CD가 개발되기 시작, 1979년에 일본의 소니(Sony)와 공동개발 계약을 맺었고, 1982년 10월말부터 상품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CD는 발표되자마자 곧바로 경쟁체제에 돌입, 음반시장의 총아로 등장하여 재생음악계의 판도를 순식간에 바꾸어놓았다. LP의 등장으로 SP가 사라졌듯이, ‘환상의 음반’으로 불리는 CD의 등장으로 인하여 LP의 세력은 급속히 쇠퇴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CD가 음반시장의 대부분을 점유하여 40여 년간 음반의 대명사가 되어온 LP는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원통형 유성기를 한국에 들여온 것은 1884년 알렌에 의해서였다. 그 뒤 조정에서는 일본인 기술자가 녹음장치를 가지고 고종 앞에서 명창 박춘재(朴春載)의 노래를 취입하였다. 노래가 끝난 뒤 녹음기 속에서 소리가 울려 나오자 고종은 깜짝 놀라며 “춘재, 네 명(命)이 10년은 감하였겠구나!”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녹음기가 정기(精氣)를 다 빼앗아 간다고 생각하였다.

우리 나라 음악을 녹음한 음반이 최초로 발매된 것은 1908년 미국 빅타 레코드(Victor record)에서 취입한 것이다. 이때 취입된 것이 몇 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까지 밝혀진 것으로는 김창환(金昌煥)의 <춘향전> 등 몇 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박팔괘의 가야금과 김창환의 <춘향가>는 희귀한 음반이다.

1910년 설립된 일본 축음기상회는 서울에 지사를 두고 1913년부터 1925년까지 속칭 나팔통식 취입이라 하여 기계식 취입방법으로 우리 나라 음악을 많이 취입하여 발매하였다.

이 때 음반 취입에 공헌한 이는 문예부장으로 있던 이기세(李基世)였다. ‘일○조선소리판’,‘닛{{%124}}노홍’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는데, 일○조선소리판 라벨에는 와시표라 하여 독수리 도안이 그려져 있으며, 닛{{%124}}노홍 라벨에는 태극도안이 그려져 있다.

이 두 가지는 같은 회사 제품으로 라벨번호도 같아서 같은 곡, 같은 번호가 라벨제목만 다르게 나왔다. 라벨 번호는 K101에서 K230 정도까지, K501에서 K650 정도까지, K800에서 K850 정도까지 나왔으며, 로열판으로 6001에서 6170 정도까지 나와 모두 약 500여 종이 나왔다고 하겠다.

일본 축음기상회에서 취입한 음악은 대부분 우리 나라 전통음악이고 약간의 서양 음악과 유행가가 취입되었다. 전통음악은 판소리/민요/창가가 주를 이루고 가야금병창, 산조, 가곡, 풍류도 있다.

중요한 연주자로는 송만갑(宋萬甲), 이동백(李東伯), 김창룡(金昌龍), 강소춘(姜笑春), 강남중(姜南中), 김추월(金秋月), 신금홍(申錦紅) 등 판소리 명창과 박춘재, 문영수(文泳水), 김홍도(金紅桃), 백모란(白牧丹), 길진홍(吉眞紅) 등 경기소리 명창을 꼽을 수 있으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음반이 많다.

이 무렵 일본 니토(日東)레코드회사에서는 제비표 조선레코드가 나팔통식 취입방법으로 우리 나라 음악음반을 냈는데, B1에서 B110까지 110여 장이 나왔다. 제비표음반도 대부분 전통음악이며 귀한 음반이 많다.

1925년에는 전기녹음방식이 처음으로 발명되었고, 일본에서도 빅타, 컬럼비아, 폴리도르(Polydor) 등 외국 음반회사와 합작으로 전기녹음방식으로 취입하는 회사가 나오게 되어 1927년에는 일본 빅타회사, 1928년에 일본 컬럼비아회사, 같은 무렵에 일본 폴리도르회사가 우리 나라에 영업소를 두고 우리 나라 음악을 취입하여 발매하기 시작하였다.

즉, 일본 빅타축음기주식회사는 라벨번호 49001에서 49630 정도까지 약 630종 정도 낸 것으로 보이며, 또한 주니어판으로 KJ1001에서 KJ1410 정도까지, 로열판으로 스타(Star) KS2001에서 KS2050 정도까지, KA3001에서 3050정도까지 내어 모두 약 1,700종의 우리 나라 음악음반을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축음기상회에서는 전통음악이 주가 되었으나 일본 빅타축음기주식회사의 경우에는 초기에 하규일(河圭一)의 <언편>·<언락> 등 전통음악이 주가 되었고 뒤에는 유행가가 증가한다.

1928년에는 일본 축음기상회가 미국 컬럼비아와 합작으로 일본 컬럼비아레코드사를 내고 기존의 일본 축음기상회 서울지사를 이어받아 우리 나라 음악을 취입, 발매하였다.

컬럼비아레코드사에서는 일본 축음기상회 시절에 기계식으로 취입한 것을 복사하여 쓰기도 했지만 전기식으로 취입한 것을 많이 냈다. 라벨번호는 40001에서 40950 정도까지 950여 종을 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주니어판으로 리갈(Regal) C100에서 C470 정도까지, 로열판으로 C301에서 C400 정도까지, C2001에서 C2040 정도까지, 44001에서 44050 정도까지, 1에서 200 정도까지 나온 것으로 보이고, 리갈 로열판으로 C2001에서 C2030 정도까지가 나와서 컬럼비아레코드사에서는 로열판·주니어판까지 합하여 1,740여 종이 나온 것 같다. 컬럼비아레코드사에서 나온 음반 중 중요한 것은 이동백의 <심청가>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같은 무렵에 일본 폴리도르레코드사에서는 서울에 본점을 두고 왕평(王平)이 문예부장을 맡아 서산호주(徐珊瑚珠)의 <계락 界樂> 등 우리 나라 음악을 취입, 발매했는데, 역시 전기식으로 취입하여 라벨번호 19001에서 19480 정도까지 약 480여 종이 나온 것 같다.

1927년에는 서울에서 이철(李哲)이 오케레코드(Okeh record)회사를 설립하였다. 이 회사는 일본제국 축음기회사와 제휴하여 세웠으나 독자적으로 운영하였으니 우리 나라 사람이 세운 최초의 레코드회사인 셈이다.

오케레코드사에서는 라벨번호 1501에서 2000까지, 주니어판으로 12000에서 12330 정도까지, 20001에서 20170까지 나온 것 같으며, 로열판으로 5001에서 5020까지, 3001에서 3020까지 나온 것으로 보아 모두 약 1,040여 종 가량 나온 것으로 보인다. 오케레코드 중 좋은 것으로는 박중근(朴重根)의 <고금영웅 古今英雄> 등 여러 가지가 있다.

1930년대에는 시에론(Chieron), 다이헤이(Taihei), 기린(Kirin), 쇼지쿠(Shochiku), 돔보(Tom-bo), 코리아(Corea), 밀리온(Million), 디어레코드(Deer record) 등 군소 레코드회사들이 생겼다.

시에론레코드회사는 서울에 지부를 두고 라벨번호 1에서부터 330 정도까지, 로열판으로 2000에서 2020 정도까지의 우리 나라 음악음반 약 350종 정도를 취입해서 발매하였는데, 그 중 중요한 것은 이화중선(李花中仙)의 <소상팔경 瀟湘八景>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다이헤이레코드회사에서는 8001에서 8320까지, 로열판으로 8601에서 8660까지, 5001에서 5070까지, 7001에서 7040까지, 그 밖에 여러 번호로 나와 모두 약 490여 종이 나온 것 같다. 대부분 유행가인데 전통음악 음반 중 중요한 것은 권명학(權明學)의 <회심곡> 등을 들 수 있다.

기린레코드회사에는 151에서 230 정도까지 모두 80여종이 나왔는데, 이영산홍(李暎山紅), 이진봉(李眞鳳)의 <매화타령>·<늴릐리아> 등이 좋은 음반이다. 코리아레코드회사에서는 1001에서 1050 정도까지 약 50여 종, 로열판으로 H1에서 H10 정도까지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 중 코리아악단의 <염불>·<타령> 등이 두드러진다.

밀리온레코드회사에서는 801에서 830 정도까지 30여 종이 나온 것 같고, 그 중 조소옥(趙素玉)의 <육자배기> 등이 눈에 띈다. 쇼지쿠레코드회사에서는 S1에서부터 겨우 수십 종이 나온 것 같고, 한성기의 <군로사령> 등이 보인다. 디어레코드회사에서는 라벨번호 D1에서 겨우 수십 종이 나온 것 같고, 이진봉·김옥엽의 <이별가> 등이 보인다.

이 밖에도 돔보조선레코드회사에서 라벨번호 50001에서부터 수십 종이 나온 것 같고, 코메르카·마르코·리베라·레코르도에서도 201에서부터 수종이 나왔는데, 이소향의 <호접몽 蝴蝶夢>등이 보인다.

광복 후에는 킹스타(King star레코드회사)에서 박초월(朴初月)·박귀희(朴貴姬)의 <남원산성> 등 수십 종의 SP음반을 냈다. 1950년대 후반부터 LP가 들어왔고, 1960년대에는 우리 나라에서도 LP로 취입한 음반이 발매되어 SP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1960년대 전반에는 킹스타레코드회사, 신세기레코드주식회사, 대도레코드회사에서 10인치 LP레코드를 냈고, 후반에는 신세기레코드주식회사·지구레코드공사·도미도레코드회사·대도레코드회사·킹스타레코드회사·유니버살레코드회사·성음제작소 등 여러 회사에서 12인치 LP레코드를 내기 시작하였다.

이 가운데 전통음악 음반 중 중요한 것을 들면 신세기레코드주식회사에서 나온 <국악대전집>·<임방울수궁가전집>·<임방울 적벽가전집>, 지구레코드공사에서는 <박녹주 흥보가전집>·<김연수 걸작선>등을 들 수 있다.

근래에 나온 우리 나라 전통음악 음반 가운데 중요한 것은 문화재관리국에서 발행한 <한국의 음악(1∼4)>, 국립국악원에서 발행한 <한국음악(1∼14)>, 뿌리깊은나무에서 발행한 <뿌리깊은 나무 판소리>·<뿌리깊은나무 팔도소리> 등을 들 수 있다.

참고문헌

『문예총람-음악개관』(이상만, 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76)
『야화 가요 60년사』(황문평, 전곡사, 1983)
『류셩귀 5호』(류셩귀잡지사, 日音蓄音器商會,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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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김진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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