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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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등록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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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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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백관(百官)의 통솔과 서정(庶政)을 총괄하던 최고의 행정기관.
이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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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당(都堂), 묘당(廟堂), 정부(政府), 황각(黃閣), 낭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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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백관(百官)의 통솔과 서정(庶政)을 총괄하던 최고의 행정기관.
내용

도당(都堂)·묘당(廟堂)·정부(政府) 또는 황각(黃閣)이라고도 하였다. 의정부는 1400년(정종 2) 4월에 세제(世弟: 왕위를 물려받을 왕의 아우)인 정안군(靖安君) 이방원(李芳遠, 뒤의 태종)의 주도하에 정권과 병권을 장악한 대신(大臣)·종친(宗親)·훈신(勳臣, 공신)과 1279년(고려, 충렬왕 5) 이래로 국정의 최고 의결·집행기관이었던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과중한 권력을 약화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방향에서의 정치기구 개편책에 따라 도평의사사를 개편하면서 성립되었다.

이후 조선시대를 통하여 운영되다가, 조선 말기에 이르러 1895년(고종 32) 내각(內閣)으로 개편되고 1896년(건양 1) 의정부로 환원된 뒤 1907년(융희 1) 다시 내각으로 개편되면서 소멸되었다. 1896년 이후의 의정부는 그 명칭과는 달리, 그 기능과 편제상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운영된 의정부와는 성격이 다르기에 여기서는 제외한다.

의정부는 성립시에는 그 명칭과는 달리 도평의사사의 기능·직제가 거의 그대로 계승되었다. 즉, 기능은 고려 말의 도평의사사의 최고 국정·의결기관으로서의 기능과 문하부(門下府)의 백관의 서무를 관장하는 기능이 포괄되었고, 관직명도 문하좌정승 등이 계승되었다.

그러다가 1401년(태종 1) 7월에 종래까지의 기능에 주관(周官) 3공(三公) 즉, 태사(太師)·태부(太傅)·태보(太保)의 직장(職掌)인 ‘논도경방(論道經邦)·섭리음양(燮理陰陽)’의 기능이 융합되어 ‘백관을 총괄하고[摠百官], 서정(庶政)을 평리하며[平庶政], 음양을 다스리며[理陰陽], 나라를 경륜하는[經邦國]’ 것으로 규정되었다. 동시에 유명무실한 문하부의 혁파와 함께 문하부적인 관직명을 의정부적인 명칭으로 개칭하였다. 이로써 의정부는 명실상부한 조선시대의 정치기구로 개편되었다.

이때에 규정된 의정부 기능은 총괄적이고도 그 역할 분장이 모호하였다. 이 점에서 이후 왕권 등과 관련되어 의정부가 육조를 지휘하면서 국정운영을 주도하는 의정부서사(議政府署事, 의정부擬議)제나 육조가 국왕에게 직접으로 정사를 보고하고 지시를 받으면서 국정운영을 주도하는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가 운영된 때에도 그대로 기능이 계승되어 『경국대전 經國大典』에 법제화될 수 있었다.

또 『경국대전』이 반포된 이후의 조선 전기는 물론 비변사(備邊司)의 대두로 의정부가 명목상의 최고 관아가 된 조선 후기에도 그대로 계승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의정부의 실제 기능은 왕권의 강약과 왕의 자질 여부, 의정부 대신의 자질, 의정부와 육조·삼사(三司,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상호관계, 원상제(院相制), 비변사의 대두, 당쟁, 세도정치 등의 모든 요소와 관련하여 수시로 변천하였다. 의정부는 1400년(정종 2)부터 1414년(태종 14) 4월까지는 의정부서사제가 실시되어 국정을 총괄하기는 하였지만, 태종이 왕권 강화를 위하여 육조직계제를 실시하자 점차 약화되었다.

1414년부터 1436년(세종 18)까지는 육조직계제가 실시됨에 따라 그 기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그러다가 1436년부터 1455년(단종 3) 윤6월까지와 1516년(중종 11)부터 1592년(선조 25)까지 의정부서사제가 다시 부활되면서 의정부가 국정운영을 주도하였다. 또 1455년(세조 1) 윤6월부터 1516년(중종 11)까지는 육조직계제가 부활됨에 따라 의정부는 다시 약화되었다.

한편 이런 중에도 세조 말년에 이르러 원상제가 운영되면서는 의정부나 육조보다 원상이 국정의 실권을 장악하였고, 이러한 경향은 예종·성종 초로 계승되었다. 성종 후기와 중종 중기에는 삼사의 대두로, 연산군 대에는 국왕의 방종으로 의정부·육조의 기능 발휘가 제약되었다. 중종 초에는 정국공신(靖國功臣)인 박원종(朴元宗)·유순정(柳順汀)·성희안(成希顔) 등의 의정 진출로 의정부의 권한이 강화되기도 하였다.

1592년부터 1864년(고종 1)까지는 1554년(명종 9)에 설치된 비변사가 임진왜란을 계기로 육조 등을 지휘하면서 중앙과 지방의 모든 군국기무(軍國機務)를 맡게 됨에 따라 의정부는 실권을 비변사에게 빼앗기고 형식적인 최고기관으로서만 존속하게 되었다. 1864년 2월에 이르러 의정부는 종래까지 비변사가 맡았던 기능 중에서 외교·국방을 제외한 모든 업무를 돌려받음에 따라 옛 기능을 거의 회복하였다. 더욱이 1865년 3월에는 비변사가 의정부에 병합됨에 따라 옛 기능을 완전히 회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1864년부터 1873년(고종 10)까지는 고종의 생부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섭정으로, 1873년부터 1894년까지는 왕비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여흥 민씨가 집권하였기에 실질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의정부가 수행한 국정은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었지만, 1400년부터 1592년 사이에는 대체로 형정(刑政)·노비·경제·군사·의례·복제(服制)·입법·시무조진(時務條陳)·인사·교육·과거·풍속·부역(赴役)·축성·진휼(賑恤)·구료(救療)·사행(使行)·통교·불교·국도경영(國都經營)·진봉(進封)·공신책록·역사편찬 등의 모든 국사에 참여하였다.

1592년부터 1864년 사이에는 비변사가 육조 등을 지휘하면서 정치·군사·외교 등 모든 국정을 관장하였으므로 이음양(理陰陽)과 관련된 여러 의례(儀禮)를 담당함에 그쳤다. 이러한 활동은 국왕으로부터 명을 받아 행하는 수명(受命) 활동, 상언(上言)·상소 등을 통하여 의견을 개진하는 계문(啓問) 활동, 국왕의 지시를 받아 정사를 논의하거나 정사 논의에 참여하는 의의(擬議) 활동으로 수행되었다.

그 활동 경향은 왕권이나 의정부·육조 등의 기능과 관련되어 의정부 기능이 강력한 시기에는 계문 활동이 중심이 되고, 육조 기능이 강력한 시기에는 의의 활동이 중심이 되었다.

의정부관원은 의정부가 성립된 1400년 4월에는 도평의사사로부터 의정부로 명칭만 개칭되었을 뿐 종래까지 도평의사사를 구성하였던 문하부·중추원(中樞院)·삼사(三司, 재정기관)의 종2품관 이상, 실무를 담당한 경력사(經歷司)의 경력(經歷)·도사(都事)와 검상조례사(檢詳條例司)의 검상(檢詳)·녹사(錄事) 중 중추원의 3군부(三軍府)로 개칭, 이관되었다.

이와 관련되어, 중추원 계만이 제외되면서 문하부의 문하좌·우정승(정1품, 각 1인)·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郎贊成事, 종1품, 2인)·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정2품, 4인)·정당문학(政堂文學, 정2품, 1인)·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정2품, 1인), 삼사의 판삼사사(判三司事, 종1품, 1인) 삼사좌·우사(정2품, 각 1인), 경력사의 경력·도사와 검상조례사의 검상·녹사로 구성되었다.

그 12일 후에는 성립시의 관원에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의 대학사(大學士, 정2품, 1인)와 학사(종2품, 2인), 삼군부(三軍府)의 중·좌·우군총제(摠制, 종2, 각 2인)가 증가되어 개국 초 도평의사사의 구성원과 비슷하였다.

그러다가 1401년 7월에 문하부를 혁파하고 문하부낭사를 사간원으로, 삼사는 사평부(司平府)로,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는 승추부(承樞府)로, 예문춘추관은 예문관과 춘추관으로 각각 개칭 및 독립관아화하는 조치와 함께 문하부적인 관직명을 의정부적인 관직명으로 고쳤다.

또한 종래의 삼사·예문춘추관·삼군부 계를 제외하면서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의정부좌정승·의정부우정승(정1품, 각 1인)·의정부찬성사(종1품, 2인), 의정부참찬사(議政府參贊事, 4인)·의정부문학(1인)·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정2품, 2인), 의정부사인(정4품, 2인)·검상(정5품, 1인)·녹사(정8품, 2인)로 구성되었다.

이로써 의정부는 문하부 등의 합의기관적 성격을 탈피하고 의정부 관원만의 단독기관이 되었다. 이후 1466년(세조 12)까지의 사이에 왕권과 의정부·육조기능 등과 관련되어 10여 차례의 변천을 거치면서 다음 [표 1]과 같이 영·좌·우의정(정1품, 각 1인), 좌·우찬성(종1품, 각 1명), 좌·우참찬(정2품, 각 1품), 사인(舍人, 정4품, 2인), 검상(정5품, 1명), 사록(司錄, 정8품, 2인) 등으로 확립되었다.

[표 1] 조선전기 의정부관원 직제변천 (()안은 인원)


태 종 세 종 세 조
1년
(1401)
14년
(1414)
15년
(1415)
18년
(1436)
19년
(1437)
12년
(1466)

1품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1) ------〉 -----〉 ------〉 ----〉 --〉 ---〉 -----〉 영의정(領議政)(1)
좌정승(左政丞)(1) ------〉 판부사(判府事)(2) 좌의정(左議政)(1) ----〉 --〉 ---〉 -----〉 좌의정(1)
우정승(右政丞)(1) ------〉 우의정(右議政)(1) ----〉 --〉 ---〉 -----〉 우의정(右議政)(1)

1품
찬성사(贊成事)(2) ------〉 동판부사(同判府事)(2) 좌참찬(左參贊)(1) 찬성(贊成)(1) --〉 ---〉 좌찬성(左贊成)(1)
우참찬(右參贊)(1) 우찬성(右贊成)(1)

2품
참찬사(參贊事)(4) ------〉 혁파(革罷) 참찬(參贊)(1) (2) ---〉 좌참찬(左參贊)(1) 좌참찬(左參贊)(1)
문학(文學)(1) 지부사(知府事)(2) 혁파 우참찬(1) 우참찬(1)
참지사(參知事)(2) -----〉 혁파

4품
사인(舍人)(2) ------〉 -----〉 ------〉 ----〉 --〉 ---〉 ------〉 사인(2)

5품
검상(檢詳)(2) ------〉 혁파 복설(復設) ------〉 검상(檢詳)(1)

8품
녹사(錄事)(3) ------〉 사인 복설(復設) ------〉 사록(司錄)(2)

이것이 『경국대전』에 명문화되면서 큰 변동 없이 1894년까지 계승되었다. 다만 1785년(정조 9) 『대전통편(大典通編)』 편찬 이전에 사록 1원이 감소되고, 1865년 비변사의 의정부 합속에 따라 비변사낭청에 속하였던 공사관(公事官, 참상∼참하관) 11원이 의정부 구성원으로 편입되었다. 의정부와 의정부관원에 소속된 이속(吏屬)은 성립시에는 의정부에 녹사, 6방(六房) 녹사, 전리(典吏, 36인), 조예(牲隷, 160인) 등이 배속되었다. 그 뒤 여러 차례의 변천을 거치면서 인원이 축소되고 체계화되었다.

이후 『경국대전』의 편찬과 함께 의정부에는 아전(衙前) 12인, 서리(書吏) 14인, 조예 20인, 차비노(差備奴) 24인, 근수노(根隨奴) 36인, 의정에게는 아전·서리 각 1인, 조예 4인, 근수 5인, 반당(伴倘) 9인, 찬성에게는 아전 1인, 조예 2인, 근수 5인, 반당 9인, 참찬에게는 아전·서리·조예 각 1인, 근수 4인, 반당 6인, 사인·검상에게는 조예·근수 각 1인, 사록에게는 조예 1인이 각각 배속되는 것으로 법제화되었으며, 이것이 후대로 계승되었다.

한편 의정부관원은 그 관아의 기능·직질과 관련되어 많은 관직을 겸대하였다. 이미 의정부가 성립되기 전부터 문하좌·우정승이 판상서사사(判尙瑞司事)를 겸하면서 문·무반의 인사권을 장악한 바 있다. 하지만 의정부가 성립된 초기에도 정2품 이상관은 판이·호·예·병·형·공조사(判吏·戶·禮·兵·形·工曹事), 판승추부사(判承樞府事), 판의흥부사(判義興府事), 도통사(都統使), 훈련관도제조(訓鍊觀都提調), 삼군도총제(三軍都摠制), 판의용순금사사(判義勇巡禁事司), 지의흥부사(知義興府事), 총제(摠制),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 등을 수시로 겸임하면서 인사·군사 분야에 광범하게 참여하였다.

또 국가백사를 당상관을 통하여 국왕에게 직결시켜 효과적으로 국정을 수행하기 위하여 1423년(세종 5) 3월에 당상관의 겸직을 규정한 예겸제조(例兼制調)제의 정립과 함께 영의정부사는 종묘서(宗廟署)·봉상시(奉常寺)의 도제조, 좌의정은 문소전(文昭殿)·인수부(仁壽府)·승문원(承文院)·사재감(司宰監)·도화원(圖畵院)의 도제조, 우의정은 광효전(廣孝殿)·승문원(承文院)·군자감(軍資監)·성문도감(城門都監)의 도제조, 좌찬성은 예빈시의 제조, 좌참찬은 내섬시(內贍寺)의 제조, 우참찬은 인순부(仁順府)의 제조를 각각 겸하면서 그 관아의 업무와 관원의 인사를 지휘하고 관장하였다.

이 예겸제조제는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변천되었다가 『경국대전』에 명문화되면서 확립되고, 그 뒤 관아를 증설함에 따라 확대되면서 다음 [표 2]와 같이 계승되었다.

[표 2] 의정부 당상관 예겸직

관직 세종5년 경국대전(1485) 속대전(1746) 대전통편(1785) 대전회통(1865)
영의정 종묘서도제조 경연영사 -----------〉 -----------〉 경연영사
봉상시도제조 홍문관영사
(또는 좌, 우의정)
-----------〉 홍문관영사 홍문관영사
세자시강원사 -----------〉 예문관영사 예문관영사
영춘추관사 -----------〉 -----------〉 세자시강원사
승문원도제조 -----------〉 -----------〉 영춘추관사
관상감영사 -----------〉 -----------〉 승문원도제조
-----------〉 -----------〉 관상감영사
비변사도제조*1 -----------〉 비변사도제조
선혜청도제조*2 -----------〉 선혜청도제조
제언사도제조*3 -----------〉 미등재
준천사도제조*4
좌의정 문소전도제조 경연영사 -----------〉 -----------〉 경연영사
사재감도제조 세자시강원부 -----------〉 -----------〉 세자시강원부
도화원도제조 (또는 우의정) (또는 우의정)
인수부도제조 감춘추관사 -----------〉 -----------〉 감춘추관사
승문원도제조 ------------〉 -----------〉 -----------〉 승문원도제조
비변사도제조*1 -----------〉 비변사도제조
선혜청도제조*2 -----------〉 미등재
제언사도제조*3 -----------〉
준천사도제조*4
우의정 광효전도제조 경연영사 -----------〉 -----------〉 경연영사
군자감도제조 감춘추관사 -----------〉 -----------〉 감춘추관사
승문원도제조 ------------〉 -----------〉 -----------〉 승문원도제조
성문도감도제조 비변사도제조*1 -----------〉 비변사도제조
선혜청도제조*2 -----------〉 미등재도제조
제언사도제조*3 -----------〉
준천사도제조*4
좌찬성 예빈시제조
세자시강원이사
(또는 우찬성)
-----------〉 -----------〉 자시강원이사
(또는 우찬성)
좌참찬 내섬시제조
우참찬 인순부제조
* 1. 1541년(중종 36)∼1556*명종11), 1592(선조 25)∼1865(고종 2).
* 2. 1652년(효종 3)∼1894(고종 31)
* 3. 1746년(영조 22) 이전∼1865(고종 2)
* 4. 1760년(영조 36)∼1865년(고종 2)

의정부관원의 제수는 조선 전기에는 의정 이하 모든 관원이 상시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비변사의 대두와 함께 인조 즉위 때에 “비변사를 설치한 이후부터는 찬성과 참찬은 양병지방(養病之坊)이 되었고, 사인과 검상은 기악지사(妓樂之司)가 되었다.”(『동국통지(東國通志)』)고 하였음과 같이 영·좌·우의정은 항시로 운영되었지만, 좌·우찬성은 거의 임명되지 않았다. 그리고 사인과 검상은 운영과 미운영이 교차되었으며, 좌·우참찬은 항시 운영되기는 하나 소수만이 비변사당상을 겸대하고 정청에 참여하는 등으로 미약하였다. 또 찬성 이하는 이조의 상신에 따라 제수되었지만, 의정은 특별히 현임 의정의 천거·복상(卜相)에 따라 제수되었다.

의정부의 정사는 시기적으로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삼의정이 합의하여 처리하였고, 찬성·참찬은 의정을 보필하였으며, 사인·검상·사록은 이속을 지휘하면서 다른 관아·관원과의 업무연락과 부내의 행정을 처리하였다. 1400년부터 1554년까지 의정은 물론 찬성·참찬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554년 이후에 비변사가 정1품아문으로 설치, 운영되면서 3의정은 비변사도제조가 되어 비변사에 참여한 반면에, 찬성·참찬은 여기에서 제외됨으로 인하여 약화되었다.

그리고 의정부정사가 삼의정의 합의에 의하여 수행되었다고는 하나 국왕의 신임을 받는 한둘의 의정이 주도한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그 경우로는 하륜(河崙, 태종대), 황희(黃喜, 세종대), 황보 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수양대군(首陽大君), 이유(李愉, 단종대), 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세조∼성종 초), 박원종·성희안(중종 초), 윤원형(명종대) 등이 있다.

또한 찬성·참찬도 판이조사·판병조사를 겸임할 때에는 인사권을 장악하는 등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 밖에 사인·검상·사록은 의정부의 기능과 관련되어 모두 문관으로 임명하고, 재직기간이 만료되면 높은 지위로 승진되며, 사인(정4품)에 결원이 있을 때에는 정5품직인 검상을 재직기간에 관계없이 승진시키는 등의 혜택이 부여되었다.

의정부관원이 행한 각종 정사 및 의정부관원의 제수와 동정을 기술한 일기체의 사서로 『비변사등록 備邊司謄錄』이 작성되었는데, 현재 1646년(인조 24)부터 1859년(철종 10)까지의 필사본 34책이 전하고 있다. 이에는 1654년(효종 5)∼1663년(현종 4년 7월) 사이의 78년 동안의 기록이 누락되어 있다.

조선 초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정치적 목적에서 도평의사사를 혁파하고 설치된 의정부는 조선 말기까지 국정의 최고기관으로서 존속되었고, 1894년 12월 내각으로 개편되면서 폐지되었다가 1896년 9월 내각을 의정부로 개칭함에 따라 일시 부활되었으나 1907년 6월 내각제도로의 환원과 함께 완전히 소멸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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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제도연구」(이광린, 『동방학지』8, 1967)
집필자
한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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