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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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조선체육회 초대이사, 전조선야구대회 심판으로 활동한 체육인.
인물/근현대 인물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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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조선체육회 초대이사, 전조선야구대회 심판으로 활동한 체육인.
내용

생몰년 미상. 오성학교(五星學校)와 중앙기독청년회 영어반을 졸업한 야구인으로 오성학교 시절부터 야구선수로서 활약하였다. 1917년 봄에 오성학교와 중앙기독청년회 출신의 야구선수들과 함께 고려야구구락부를 조직하여 같은 해 5월 인천에서 원정경기를 가졌으며, 7월에 동경유학생야구단과 경기를 가졌다.

그 당시 유학생야구단의 일원이었던 이중국(李重國)과 만나 일본인이 구성한 조선체육협회와 맞서는 민족체육단체를 조직하기로 약속하였다. 운동용품도 취급하던 광신양화점을 자영하면서 여기에서 많은 국내야구인과 접하였다.

1920년에는 변봉현(邊鳳睍)·이중국과 함께 「체육단체의 필요를 논함」이라는 글을 『동아일보』창간호에 게재함으로써 체육단체 조직을 구체화시켰다. 1920년 6월 16일 인사동 명월관지점(전의 태화관)에서 조선체육회 결성을 위한 발기인으로 참석하였다.

장두현(張斗鉉)·고원훈(高元勳) 등과 같이 창립준비위원 10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조선체육회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조선체육회 창립총회에서 첫 이사진 8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임되었으며, 조선체육대회의 첫 번째 사업인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를 개최하도록 하고 심판을 맡았다.

1923년 5월 23일에는 윤치영(尹致暎)·허성(許城)·이석찬(李錫贊)·유용탁(柳容鐸) 등과 함께 조선야구협회를 발기하여 그해 6월에 조선야구협회를 창립하였다. 그 뒤에도 1922년 12월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선발된 프로야구단을 초청하는 등 우리나라 야구에 꾸준한 관심을 가지고 이를 발전시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참고문헌

『한국체육사연구(韓國體育史硏究)』(나현성, 교학연구사, 1981)
『대한체육회사(大韓體育會史)』(대한체육회편, 1965)
집필자
정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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