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의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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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구곡시화도 병풍 제11폭 구곡 문산도
고산구곡시화도 병풍 제11폭 구곡 문산도
회화
인물
조선후기 「고산구곡도」의 제9곡인「문산도」를 그린 문인. 서화가.
이칭
계명(季鳴)
청류(淸流)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75년(영조 51)
사망 연도
1833년(순조 33)
본관
전주(全州)
출생지
경기도 광주(지금의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일대)
주요 관직
강원도 통천군
목차
정의
조선후기 「고산구곡도」의 제9곡인「문산도」를 그린 문인. 서화가.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계명(季鳴), 호는 청류(淸流). 경기도 광주(지금의 강남구 수서동 일대) 출생. 전주 이씨 광평대군파 14세손으로 아버지는 희중(曦中)이다.

생애

1803년에 김홍도(金弘道) 등과 함께 「고산구곡도」를 그리는데 참여하여 제9곡인 「문산도(文山圖)」를 그린 것으로 보아 일찍이 서화에 재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07년에 식사마시 중 진사시에 응시하여 3등으로 급제하였다. 1825년에 강원도 통천 흡곡(歙谷)의 현감으로 부임하였고, 1829년에는 흡곡현에 향교를 세웠다. 1830년 7월에 현감을 그만두었고, 1833년 69세로 사망하였다. 묘는 충청남도 아산의 덕대동에 있다.

작품세계

이의성은 서화와 관련된 기록 중에 나타나지 않아 잘 알려져 있지 않다가 「문산도」와 「해산첩」이 발굴되면서 주목을 받았다. 이 중 「문산도」는 젊은 시절의 작품이고, 오래 전승된 「고산구곡도」를 모본으로 한 그림이다. 그러므로 그다지 개성이 발휘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작품에 참여한 여러 작가들이 모두 당대의 내로라하는 명수들이었으므로 이의성이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것으로 평가받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의 진면목은 「해산첩」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작품은 현재 20면으로 전해진다. 금강 내산과 외산, 관동 팔경 중의 일부 및 설악산 지역의 명승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 화첩은 그림으로만 꾸며졌다.

각 면에 그려진 경물의 이름을 쓴 화제(畫題) 아래에 ‘淸流(청류)’와 ‘李氏義聲(이씨의성)’이라는 주문방인이 찍혀 있어서 이의성의 작품으로 판단되고 있다.

이 작품의 구성과 내용, 소재와 기법 등은 김홍도·김하종(金夏鐘)·이풍익(李蘴瀷) 등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까지의 금강산 그림들과 비슷하다. 또한 이의성이 1825년에서 1830년 사이에 금강산에 가까운 흡곡의 현감으로 재직한 것과 1833년까지는 사망한 것을 감안하면 이 작품은 19세기 초의 작품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작품은 구룡연·비봉폭·계조굴·환선정·옹천 등을 그리며 경물의 형태를 묘사하는데 치중하지 않고 필획을 통하여 재구성하는 수법을 애용하였다. 반면에 대호정·가학정·시중대·영랑호·청간정 등 큰 규모의 경물들은 넓고 깊이 있는 공간 속에 원근에 따른 형태와 대기의 변화감을 비교적 잘 표현하였다. 그러나 이의성의 개성은 앞의 경우에 더욱 분명하게 발휘되었다.

문기(文氣) 넘치는 이러한 표현은 그 이전에 정수영(鄭隧榮)에 의하여 시도되었다. 객관적인 형태나 양감, 기세의 표현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고 독특한 운필과 자유로운 재구성, 감각적인 청신한 채색을 강조하는 성향을 드러내었다.

이 작품을 통하여 19세기 초엽경 남종문인화의 격조와 실경의 분위기를 잘 조화시킨 진경산수화의 새로운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금강산도(金剛山圖) 연구』(박은순, 일지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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