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호 ()

인물
대한제국기 보성학교 경영자, 서북협성학교 교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 육영사업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5년(고종 22)
사망 연도
1932년
출생지
함경북도 명천
관련 사건
안중근사건(安重根事件)
정의
대한제국기 보성학교 경영자, 서북협성학교 교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 육영사업가.
개설

함경북도 명천 출신. 이용익(李容翊)의 손자이며, 이현재(李賢在)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7년에 보성학교(普成學校: 고려대학교의 전신)의 설립자인 할아버지가 죽자 그의 뒤를 이어 보성학교의 제2대 교주가 되었다.

당시 일제통감부는 학부(學部)를 통하여 보성학교를 관립화 또는 예속화하려고 학교경비의 부족액을 기부하겠다는 회유책을 폈으나 이종호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그 뒤로도 권유와 위협이 계속되었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안중근사건(安重根事件)연루혐의라는 죄목으로 안창호(安昌浩)·이갑(李甲) 등과 함께 붙잡히기도 하였다.

한편, 1907년 1월에는 이준(李儁)·이동휘(李東輝) 등 함경도유지들과 함께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조직하였으며, 이어 이 학회에 속성사범과(速成師範科)를 설치하여 소학교교원을 양성하였다.

1908년에 한북흥학회가 서우학회(西友學會)와 합동하여 서북학회(西北學會)로 개칭하면서 두 학회가 경영하던 학교도 통합되어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로 새출발을 하게 되었는데, 이종호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 밖에도 강화 보창학교(普昌學校)와 청주 보성학교(普成學校) 등을 사재로 경영하고, 안창호를 도와서 평양 대성학교(大成學校)의 설립에도 기여하였다. 또한, 인쇄소 보성사(普成社)를 통하여 많은 서적과 교과서를 간행, 전국의 각 학교에 무료로 배부함으로써 근대교육의 보급에 이바지하였다.

1910년 국권상실 후 보성학교의 경영을 천도교로 인계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권업회(勸業會)를 조직,『권업신문』을 발행하고 4개처에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 뒤 상하이로 갔다가 1917년 일본경찰에 붙잡혀 귀국, 고향인 명천에서 1년간 거주제한을 받았다. 1918년에 상경하여 천도교에 이관된 보성학교 재단을 인수하려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한국 개화교육 연구』(손인수, 문음사, 1980)
『고려대학교 육십년지』(고려대학교, 1965)
『서북학회월보(西北學會月報)』3-15(1908.2.)
『황성신문(皇城新聞)』(1908.1.25)
집필자
손인수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