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독립선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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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독립선언을 주도한 일본 유학생들
2・8 독립선언을 주도한 일본 유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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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1919년 2월 8일 도쿄[東京] 유학생들이 발표한 독립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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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19년 2월 8일 도쿄[東京] 유학생들이 발표한 독립선언.
내용

일명 조선청년독립선언이라고도 한다. 3·1운동 전후에 발표된 독립선언서는 모두 셋이다. 첫째는 1918년 11월 만주·러시아령에서 발표한 「무오독립선언서」, 둘째는 「2·8독립선언서」, 셋째는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발표된 「3·1독립선언서」이다.

2·8독립선언서는 학생들에 의해 작성되었다는 점과 3·1운동 발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데 특색이 있다. 동경유학생들은 이미 한말 때부터 대한흥학회를 조직하고 학회지 『대한흥학보』를 간행하여 국내에 배포하는 등 애국개화운동에 기여하였다.

1910년 망국 이후에는 조선유학생학우회·조선기독교청년회·조선학회·조선여자친목회 등 자치단체를 조직하여 회원들의 애국사상을 고취하였다. 특히, 조선유학생학우회는 1912년 10월 조직되어 동경유학생 전원이 자동 가입되었으며, 회지 『학지광(學之光)』을 발간하였다. 한편, 웅변·토론·강연·졸업생축하회·신입생환영회 등 모임을 열어 회원의 애국사상을 고취하였다.

재일유학생들이 한국의 독립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부터라고 하겠으나, 1918년 1월 종전을 앞두고 미국대통령 윌슨(Wilson, T. W.)이 발표한 평화원칙 14조와 그 해 11월 성립된 휴전조약에서 직접적인 자극을 받아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게 되었다.

특히 1918년 12월 15일자 『저팬 애드버타이저 The Japan Advertizer』(神戶에서영국인이 발간한 영자지)에 「한국인, 독립을 주장 Korea, Agitate for Independence」이라는 제하에 재미동포들이 독립운동에 대한 미국의 원조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미국정부에 제출하였다는 보도기사와, 12월 18일자 「약소민족들 발언권 인정을 요구」라는 기사에 뉴욕에서 열린 세계약소민족동맹회의 2차 연례총회에서 파리강화회의 및 국제연맹에서 약소민족의 발언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등의 보도에 유학생들은 크게 고무되었다.

이와 같은 소식을 접한 재일유학생들은 1919년 1월 6일 동경 간다(神田)에 있는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웅변회를 열어 “오늘의 정세는 우리 조선민족의 독립운동에 가장 적당한 시기이며, 해외의 동포들도 이미 실행운동에 착수하고 있으므로 우리도 마땅히 구체적 운동을 개시하여야 한다”고 결의하였다.

실행위원으로 최팔용(崔八鏞, 早稻田大學 3년)·서춘(徐椿, 東京高等師範學校 3년)·백관수(白寬洙, 正則英語學校)·이종근(李琮根, 東洋大學)·송계백(宋繼白, 早稻田大學)·김도연(金度演, 慶應大學) 등 10명을 선출하였다.

실행위원들은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이를 일본정부가 각국 대사·공사, 그리고 일본 귀족원·중의원 양의원에 보내기로 결의하였다. 그들은 1월 7일 청년회관에서 200여 명의 회원들이 모인 가운데 이와 같은 결의사항을 보고하고 만장일치로 동의를 얻었다.

실행위원 중 전영택(田榮澤)이 신병으로 사퇴하자, 베이징으로부터 서울을 거쳐 동경으로 온 이광수(李光洙, 早稻田大學)·김철수(金喆壽, 東京帝國大學) 등이 추가되었다. 총 11명으로 구성된 실행위원들은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다.

기초위원으로 백관수·김도연·이광수 등이 선출되었으나, 실제 문안작성은 이광수가 전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완성된 선언서 초안 한 부는 송계백과 최근우(崔謹愚)에 의해 국내로 전해져, 중앙학교 현상윤(玄相允)·송진우(宋鎭禹)·최남선(崔南善)·최린(崔麟) 등을 흥분시키기도 했다.

최팔용은 1919년 2월 7일 일문으로 된 「민족대회소집 청원서」를 동경 시바구[芝區] 고야마정[小山町]에 있는 이토인쇄소[伊藤印刷所]에서 1,000부를 인쇄하였다. 그리고 「독립선언서 부(附)결의문은 국문·일문·영문 등으로 작성 되었기 때문에, 7일 밤 김희술(金熙述) 집에서 국문·일문(600부)을 등사판으로 밀고 영문은 타자를 쳤다.

이튿날 아침 10시 준비된 청원서와 선언서를 먼저 우편으로 동경주재 각국 대사관·공사관과 일본정부의 각 대신, 일본 귀족원·중의원, 조선총독 및 각 신문사로 보내고, 오후 2시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학생대회를 열었다.

600여 회원의 환호 속에 역사적인 「2·8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대부분의 동경유학생 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독립선언회의에서 독립실행방법을 토의하려 하였으나, 관할 니시간다[西神田]경찰서장의 강제해산 명령으로 이뤄지지 못하고 실행위원 10명이 붙잡혔다. 그런데 이광수는 이미 1월에 중국으로 떠난 상태였다.

2월 12일 유학생 100여 명이 다시 히비야공원[日比谷公園]에 모여 이달(李達)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독립선언서」를 재차 발표하려 하였으나 이달 등 13명이 붙잡혀 해산되고 말았다.

같은 달 23일 또 변희용(卞熙鎔)·최재우(崔在宇)·장인환(張仁煥) 등 5명이 조선청년독립단 민족대회촉진부 취지서를 인쇄하여 히비야공원에서 배포하고 시위운동을 벌이려 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붙잡히고 말았다.

같은 해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유학생들은 조선독립단 동맹휴학촉진부를 결성하여 동맹휴학운동을 전개하거나, 고국으로 돌아가 3·1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일제의 통계에 따르면 1919년 2월 8일부터 5월 15일까지 재일유학생 359명이 귀국하였는데, 그 중 127명이 서울로 돌아왔다고 한다.

젊은 동경유학생들이 기초하여 발표한 「2·8독립선언서」는 일제침략행위를 역사적으로 설명하고, 병합이 민족의 의사를 무시한 일제의 군국주의적 야심의 사기와 폭력에 의해 이뤄졌음을 규탄하였다. 또한 식민지정책의 야만적 성격을 폭로하였고, 일제와 열강은 마땅히 동양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해 한국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선언문은 두 가지 점에서 「3·1독립선언서」보다 의미있다고 할 것이다. 첫째, 이 선언서는 최남선이 「3·1독립선언서」를 기초할 때 참고한 문헌이었다는 점이다. 최남선은 이광수의 문장을 한층 다듬었으나, 문맥은 같은 것이며 “되도록 온건하게 쓰라”는 손병희의 지시에 따라 2·8선언서의 과격한 표현을 대폭 연화시켰을 뿐이다.

특히 선언서 말미의 결의문 4항을 공약 3장으로 바꾼 최남선은 “일체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야 하며 배타적 감정을 삼가하라”고 주장하였다. 결의문을 건의문으로 변조하였다고는 할 수는 없으나 독립을 요구한다는 「2·8독립선언서」의 강력한 의사표시가 부드럽게 표현된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다.

둘째, 「2·8독립선언서」는 정당한 방법으로 민족의 자유를 추구한 것으로, “만일 이로써 성공하지 못하면 온갖 자유행동을 취하여 최후의 일인까지 열혈을 흘릴 것이며, 영원한 혈전을 불사한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3·1독립선언서」에서는 단 한마디도 피의 전쟁을 언급한 일이 없으며 공약 3장 2에서, 다만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2·8독립선언은 무단통치하에 신음하는 2000만 민족의 고통과 강렬한 독립요구를 한층 절실하게 표명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한국독립운동사』 2(국사편찬위원회, 1966)
『삼·일운동50주년기념논문집』(동아일보사, 1969)
『항일학생민족운동사연구』(정세현, 일지사, 1975)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신용하, 을유문화사, 1985)
「이·팔학생운동에 대하여」(정세현, 『숙대사론』4,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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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박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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