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은 경기도 부천시, 서쪽은 황해, 남쪽은 시흥시, 북쪽은 김포시와 접하고 있다. 위치는 동경 124°36'~126°47', 북위 36°55'∼37°58'이다. 면적은 1,062.6㎢이고, 인구는 295만 3,883명(2018년 기준)이다. 행정구역으로는 2016년 기준으로 8구 2군 1읍 19면 130행정동(135법정동) 261행정리가 있다. 시청은 인천광역시 남동구 구월동에 있다.
지형은 항만시설이 입지한 해안매립지와 주거지 및 공업용지로 활용되는 간척지를 제외하고는 기복이 작은 구릉지 또는 낮은 산지로 구성되어 있다. 산지 지형을 중심으로 볼 때, 인천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북부의 계양산(桂陽山, 395m) · 철마산(鐵馬山, 227m)으로 이어져 내려와 십정 · 간석동 일대에서 동쪽으로 뻗어 만월산(滿月山, 186m) · 철마산(鐵馬山, 201m) · 거마산(距馬山, 209m) · 관모산(冠帽山, 160m)에 이르는 북 · 남 · 동남 주향(走向)의 산지가 가장 규모가 크고 연속성이 뚜렷한 산지이다. 대체로 부평지역을 다른 인천지역과 가르는 경계 역할을 한다.
구해안선에 인접한 남북방향 산지는 하단부가 단상의 평탄면을 이루고 시천천 · 공촌천 · 심곡천 등 소규모 하천이 황해로 흘러든다. 그 곡지(谷地)들은 후빙기에 개석되어 만입을 이루었는데, 만입부에 방조제를 구축하고 근해의 섬들을 연결해 넓은 매립지를 구축하였다.
이 산지의 동쪽에는 굴포천 · 청천천 등 하천이 관통하며, 이를 따라 충적평야가 넓게 발달해 예전에는 굴지의 곡창지대로 손꼽혔다. 현재도 일부에서는 벼농사가 진행되고 있어 부평평야의 흔적을 보이나, 도시가 확장됨에 따라 계산동 · 부개동 · 부천 중동 및 상동 등 대부분이 대규모 택지로 개발되었거나 개발 중에 있다.
또 다른 주향의 산지는 인천의 구중심지를 동서방향으로 가로지르는 구릉성 산지이다. 월미산(月尾山, 94m) · 응봉산(應峰山, 82m) · 송림산(松林山, 59m) · 도화산(桃花山, 51m) · 수봉산(壽峰山, 112m) 등 낮은 구릉들이 구도심의 해안에서부터 간석동 일대까지 고립적으로 분포해 앞의 북 · 남 · 동남 주향의 산지와 만난다.
이 구릉성 고립산지 주변의 곡지는 예전에 바닷물이 드나들던 갯골이었고, 이 갯골 일대는 넓은 간석지가 발달해 간척에 의해 염전과 농경지로 활용되었다. 이 간척지는 나중에 경제개발계획으로 경인공업단지가 조성되면서 공업단지 및 주택지역으로 개발되었다.
구중심지의 신포동 · 답동 · 배다리 · 주안 일대는 펄이 두꺼운 지층을 이루는데, 이것은 이 지역이 예전에는 해안이었거나 갯골이었음을 보여 주는 단서이다. 이 구도심의 동∼서 방향 산지의 낮은 구릉들은 여러 개의 단위지역을 분리하는 역할을 했고, 이들을 연결해 주는 화도고개 · 싸리재 · 황골고개 · 독쟁이고개 등을 따라 도로망이 형성되었다.
인천의 남쪽에서 동∼서 방향으로 달리는 문학산(文鶴山, 213m) · 노적산 · 청량산(淸凉山, 157m) 일대의 산지는 구도심의 동∼서 방향 산지보다 규모도 크고(100∼200m 정도), 또한 약 5㎞ 정도로 연속성을 가지며 펼쳐져 있다.
이 동∼서 방향의 연속산지는 인천의 시가지가 남쪽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아 왔는데, 최근에는 이 산지의 남쪽에 대규모 주택단지인 연수지구가 개발되었으며, 행정적으로 미추홀구와 연수구를 가르는 경계선 역할을 한다.
이 산지의 북사면과 승학산(122m) 사이의 관교 · 문학동 일대는 좁은 분지를 이루며, 개항 전까지 인천지역의 중심지가 입지해 있었다. 또 이 산지의 동쪽으로는 승기천이 흘러 서해안으로 유입하는데 그 주변은 넓은 평야지역이었고, 근대 이후 염전으로 개발되었다가 현재는 대규모의 남동공단이 조성되어 있다.
인천 앞바다는 조석간만의 차가 대체로 8m에 이르는데, 항구 발달에 악조건인 이러한 조차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갑문식 독을 설치하였다. 앞바다에는 영종도 · 영흥도 · 덕적도 등 여러 섬들이 둘러싸고 있으며, 그 안쪽의 월미도가 내항을 가로막아 항만이 조성되어 있다.
원래 해안은 복잡한 리아스식 해안을 이루고 있었으나 간척에 의한 해안매립으로 해안선이 거의 직선화되었다. 항구도시이지만 경기만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 해양의 영향은 비교적 적다.
연평균기온은 11.7℃, 1월 평균기온 -1.7℃, 8월 평균기온 25.7℃이며, 연강수량은 1,170㎜이다. 기온의 연교차는 27.3℃로서 비슷한 위도의 서울 27.9℃, 수원 28.4℃, 원주 29.3℃에 비해 적다.
서구 원당동과 불로동 등 인천 내륙지역에서 발굴 조사가 진행되어 구석기 시대의 고토양층과 구석기 유물이 확인됐다. 또 신석기시대 유물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미추홀구 학익 · 문학 · 주안동 등지에 고인돌(支石墓)이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에는 부족세력이 자라고 있었다고 보이며, 이것이 『삼국사기』의 비류(彌鄒忽國) 건국설을 뒷받침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백제에 속해 미추홀이라 불렸으며 백제가 중국과 통교하는 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백제가 동진(東晉)에 사신을 파견한 372년(근초고왕 27)부터 475년(문주왕 1) 웅진으로 남천하기까지 약 100년 동안 지금의 미추홀구 옥련동 능허대(凌虛臺) 밑 한나루[大津]를 통해 중국과 통교하였다.
그 뒤 한강 유역이 고구려의 영토가 되자 이 곳에 매소홀현(買召忽縣)이 설치되었다. 진흥왕 때는 신라의 영토가 되었으며, 757년(경덕왕 16) 소성현(邵城縣)으로 개칭되어 율진군(栗津郡)의 영현이 되었다.
1018년(현종 9) 소성현은 수주(樹州)에 속하였다. 숙종 때 소성현이 모후 인예태후(仁睿太后)의 출신지라 해 경원군(慶源郡)으로 개칭, 승격되었고, 인종 때도 모후 순덕왕후(順德王后)의 출신지라 해 인주(仁州)로 개칭되어 지주사가 파견되었다.
1390년(공양왕 2)에는 7대 어향(御鄕)이라 해 경원부로 승격, 개칭되었는데, 이것은 문종조에서 인종조까지 7대에 이르는 동안 이 곳 인주이씨 집안에서 다섯 왕비가 나왔고, 다섯 임금이 인주이씨 왕비의 소생이었기 때문이다. 인주이씨는 80년간 외척으로서 정권을 잡았던 귀족정치시대 최대의 문벌귀족이었다.
자연도(紫燕島: 지금의 영종도)는 고려와 송나라와의 국교와 교역에서 중간기항지로서 경원정(慶源亭)이라는 객관(客館)이 설립되어 송나라의 사신과 상인들을 접대하던 곳이다.
1392년(태조 1) 경원부가 인주로 환원되었다가 1413년(태종 13) 인천군(仁川郡)으로 개편되었다. 1460년(세조 6) 세조의 모후인 세종의 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외향이라 해 인천군이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이곳에는 지금도 김포굴포지가 남아 있는데, 김포굴포는 인천 쪽의 서해와 김포 쪽의 한강을 연결하려던 운하계획이다. 고려시대 이후 조운하는 데에서 중도에 강화 손돌목과 같은 험로가 가로놓여 있어 안전한 운송이 어려웠는데, 이 험로를 회피할 방도로 강구된 운하계획이었다.
이것은 고려시대부터 계획되다가 조선 중종 때 김안로에 의해 착수되어 양편에서 동시에 공사를 진행시켜 40리에 달하는 운하를 팠으나, 중간에 가로놓여 있는 원통현을 뚫지 못해 공사가 중단되었다.
근세에 들어와 이곳은 문호개방과 통상을 요구하는 열강과의 관계에서 갑자기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프랑스함대가 나타나 정박한 곳이 물치도(勿淄島, 작약도) 앞이고,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국함대가 나타나 정박한 곳도 물치도 앞이었다.
1875년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 때는 영종도가 일본군함의 포격을 받아 함락되기도 하였다.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이 화도진(花島鎭)에서 체결되었고, 이어 한영수호통상조약과 한독수호통상조약도 이곳에서 체결되었다. 1883년 인천이 개항됨으로써 서양의 근대문물을 수입하는 수도의 관문으로서 우리나라 근대화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1895년 23부제 실시에 따라 인천부가 설치되었고 1896년 경기도 인천부가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개항장으로 국한되고, 구인천부의 대부분과 부평군이 통합되어 부천군이 신설되었으나 1936년과 1940년의 부역확장에 따라 이 지역들이 다시 인천부에 편입되었다.
1949년 인천시로 개편되었다. 1950년 6·25전쟁 때 9월 15일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수도를 회복하고 패주하는 공산군의 북상로를 차단함으로써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인천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80년 월미도 상륙지점에 표지석을 세우고, 1984년에는 송도 청량산 아래에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을 세웠다.
1963년 1월 1일 부천군 작약도가 편입되었고, 1968년 1월 1일 동 · 중 · 남 · 북구의 4개 구가 설치되었다. 1974년 제2독이 준공되어 국제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는 동시에 우리나라 공업화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1981년 7월 1일 직할시로 승격되었으며, 1988년 서구와 남동구가 신설되어 6개 구가 되었다.
1989년 1월 1일 김포군 계양면과 옹진군 영종 · 용유면이 편입되어 도시과밀화현상을 해소하고 인천 앞바다의 섬지역을 확보함으로써 해양관광시설 용지를 마련하였다. 1995년 1월 1일 광역시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3월 1일 북구가 부평구로 명칭이 변경되고 계양 · 연수구가 신설되었다.
청동기시대의 유물 · 유적으로는 연수구 옥련동 인천광역시립민속박물관의 학익지석묘(인천광역시 기념물, 1995년 지정), 미추홀구 숭의동의 주안지석묘, 서구 대곡동의 검단 대곡동 지석묘군(인천광역시 기념물, 1995년 지정)이 있다.
산성은 미추홀구 문학동의 문학산성(인천광역시 기념물, 1986년 지정)과 북구 계산동의 인천 계양산성(사적, 2020년 지정) 등이 있으며, 봉수지로는 미추홀구 문학동의 성산봉수대지(일명 문학산봉수대지)와 서구 가정동의 축곶봉수대지(일명 봉오재봉수대지)가 있다.
국방유적으로는 남동구 논현동의 논현포대, 서구 연희동의 연희진지 · 연희포대지, 동구 만석동의 묘도포대지, 중구 북성동의 북성동포대지와 항동의 제물포포대지 및 영종도의 영종진지, 동구 화수동의 화도진지 등이 있다. 논현포대는 1982년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고, 화도진지는 1990년 인천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불교 유산으로는 중구 운남동의 용궁사(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1990년 지정), 미추홀구 옥련동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소장의 원대철제범종(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1982년 지정) · 송대철제범종(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1982년 지정) · 관음좌상(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1982년 지정) · 목조여래좌상(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2022년 지정) · 목조보살좌상(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1990년 지정), 중구 신생동 인천광역시공보관 앞의 삼층석탑, 미추홀구 동춘동부도, 북구 계산동의 봉일사지삼층석탑 등이 있다.
유교 유산으로는 미추홀구 관교동의 인천향교(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1990년 지정)와 계양구 계산동의 부평향교(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1990년 지정)가 있다. 그리고 미추홀구 용현동의 이윤생 · 강씨정려(인천광역시 기념물, 1990년 지정)도 있다. 영정으로는 연수구 동춘동의 정우량영정(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1986년 지정)와 김재로영정(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1989년 지정)이 있다.
고건축물로는 중구의 인천답동성당(사적, 1981년 지정), 미추홀구 문학동의 인천도호부관아(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1982년 지정), 북구 계산동의 부평도호부관아(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1982년 지정), 중구 중앙동의 (구)인천일본제1은행지점(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1982년 지정), 항동의 인천우체국(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1982년 지정), 송학동의 (구)제물포구락부(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1993년 지정), 동구 창영동의 인천창영초등학교(구)교사(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1992년 지정) · 인천기독교사회복지관(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1993년 지정) 등이 있다.
이외에도 건물지로서 중구 북성동의 월미도행궁지, 북구 계산동의 욕은지 · 어사대, 연수구 옥련동의 능허대지, 서구 가정동의 가정지, 검암동의 허암지, 미추홀구 문학동의 학산서원지, 중구 내동의 지계표석 · 인천감리서지, 전동의 전환국지 등이 있다. 욕은지는 1982년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으며, 능허대지는 1990년 인천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분묘로는 서구 석남동의 조서강묘(인천광역시 기념물, 1990년 지정), 경서동의 류사눌 묘(인천광역시 기념물, 1990년 지정), 심곡동의 숙의문씨묘, 미추홀구 연수동의 이허겸묘와 동춘동의 이세주묘 · 정우량묘, 남동구 운안동의 김재로 묘(인천광역시 기념물, 1990년 지정), 도림동의 조정만묘(인천광역시 기념물, 1990년 지정) 등이 있고, 서구 공촌동에 심즙 신도비(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1995년 지정)가 있다.
서구 음암동의 인천 경서동 녹청자 요지(사적, 1970년 지정)가 있다.
가좌동과 미추홀구 주안동의 김포굴포지, 중구 인현동에 용동큰우물(인천광역시 민속자료, 1996년 지정)이 있다.
무형유산으로는 남사당놀이 · 봉산탈춤 · 강령탈춤 · 궁시장, 은율탈춤 · 풍어제(서해안배연신굿 및 대동굿) · 황해도평산소놀음굿 · 완초장 등이 있다. 남사당놀이는 1964년, 봉산탈춤은 1967년, 강령탈춤은 1970년, 궁시장은 1971년, 은율탈춤은 1978년, 풍어제는 1991년, 황해도평산소놀음굿은 1988년, 완초장은 1996년에 전부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또한 삼현육각, 단소장, 인천근해의 뱃노래 · 갯가노래, 정악대금, 주대소리, 대금장, 가곡이 있다. 삼현육각은 1985년, 단소장은 1985년, 인천근해의 뱃노래 · 갯가노래는 1988년, 정악대금은 1989년, 주대소리는 1992년, 대금장은 1993년, 가곡은 1995년에 전부 인천광역시 무형문화재(현, 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보호수로는 서구의 인천 신현동의 회화나무(천연기념물, 1982년 지정), 중구 운남동의 용궁사 느티나무(인천광역시 기념물, 1990년 지정), 계양구의 계산동 은행나무(인천광역시 기념물, 1992년 지정), 남동구의 장수동 은행나무(인천광역시 기념물, 2021년 지정)가 있다.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인천향교와 부평향교가 있었다. 인천향교는 행정지명의 변천에 따라 이전에는 부천향교(富川鄕校)라고도 했으며, 1398년(태조 7) 지금의 미추홀구 문학동에 건립했는데 1940년에 폐쇄했다가 1946년에 복구하였다. 부평향교는 1127년(인종 5) 계양산 남쪽 기슭에 세운 향교이다. 그 밖의 교육기관으로 1702년(숙종 28)에 건립한 학산서원이 있었다.
근대교육기관으로는 개신교가 들어오면서 포교의 수단으로 선교사가 1892년에 설립한 인천영화여학당(仁川永化女學堂)과 영화학당이 최초이다. 그 뒤 「외국어학교관제」가 공포됨에 따라 1895년에 관립한성외국어학교(官立漢城外國語學校) 인천지교(仁川支校)가 세워지고, 「소학교령」에 따라 1899년 부평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한편, 지방 유지들이 설립한 사립학교로는 1899년에 일신학교(日新學校), 1900년에 인천사립박문소학교(仁川私立博文小學校), 1903년에 제령학교(濟寧學校)와 인명학교(仁明學校) 등이 개교하였다.
광복 후 시세의 확장에 따라 교육기관 또한 팽창했으며, 특히 고등교육기관으로 1954년 인하대학(仁荷大學)이 설립되어 1972년에 종합대학교로 승격했고, 1962년 인천교육대학, 1979년 인천대학이 설립되어 1989년에 종합대학교로 승격하였다. 그 밖에 인천전문대학 · 인하공업전문대학 · 대헌공업전문대학 · 경기간호전문대학 · 인천간호전문대학 등이 설립되었다.
특수학교는 1955년에 설립한 인천농아학교(仁川聾啞學校)와 1958년에 설립한 경기맹아학교(京畿盲啞學校)가 있는데, 모두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을 실시한다. 정신박약아의 교육을 맡고 있는 학교로는 1973년에 설립한 인천승희학교와 1975년에 설립한 인천송원학교가 있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43개교, 중학교 134개교, 고등학교 123개교, 특수학교 7개교, 가천대학교 메디컬캠퍼스 · 경인여자대학교 · 인하공업전문대학 · 인천재능대학교 · 한국폴리텍Ⅱ 대학 인천캠퍼스와 경인교육대학교 · 인하대학교 · 인천대학교 · 청운대학교 인천캠퍼스 · 인천가톨릭대학교 등이 있다.
인천의 고유한 민속놀이로는 경신역마(慶信驛馬)놀이와 청황패(靑黃牌)놀이를 들 수 있다. 경신역마놀이는 남동구 만수동에 있는 경신마을에서 연희되던 놀이이다.
옛날 이 마을에는 역(驛)이 있어서 역졸들이 매년 봄 · 가을에 말 다루는 훈련을 했는데, 이 장면을 연극적인 몸짓과 재담으로 엮어 춤극으로 만든 것이다. 역용마(驛用馬)타기와 태마(?馬)다루기 등 말을 다루는 놀이와 역리 · 역졸부인 · 역승과의 삼각관계를 그린 무극으로 구성되어 있다.
청황패놀이는 예전에 원도사(猿島祠)에서 인천도호부사가 해마다 봄 · 가을 두 차례 원도신을 비롯한 인근 섬들의 신에게 뱃길의 안녕과 풍년 · 풍어, 그리고 부내(府內)의 무액 · 무질(無疾)을 축원하는 제를 지낸 데에서 유래된 놀이라고 한다.
‘猿島祠諸島神合祀神位(원도사제도신합사신위)’라고 쓴 신위기 앞에서 축원을 올리며 고사를 지낸 다음 향반 · 육방관속을 거느린 수령이 지켜보는 앞에서 여덟 마당으로 구성된 놀이를 차례로 펼쳤다.
놀이꾼들은 청과 황의 두 패로 나누어지는데, 청은 바다를 뜻하며 어부를 상징하고, 황은 땅을 뜻하며 농부를 상징한다. 그러나 이곳의 주민들은 대개 반농반어(半農半漁)로 생계를 이어가기 때문에 놀이에서도 승패를 가르지 않고 양자 승으로 해 풍농과 풍어를 모두 기원하였다.
대표적인 동제로는 미추홀구 동춘동 동막(東幕)의 ‘도당(都堂)굿’과 문학산의 ‘안관당(安官堂)고사’를 들 수 있다. 동막의 도당굿은 현존하는 이 지방의 도당굿으로는 규모가 가장 큰 것이다.
신주는 도당할아버지와 할머니인데, 당사(堂舍)가 따로 없고 짚을 엮어 올린 두 무더기의 짚단을 이용한다. 제를 지내기 10일 전에 이를 준비하는데, 관장할 당주(堂主) 3명을 선정하고, 제일에는 전문무당을 데려다 도당굿을 벌인다. 예전에는 매년 음력 3월 5일경에 길일을 택해 지냈지만, 요즈음은 비용 등의 문제로 3년마다 한 번씩 지낸다.
이 고장에는 「사모지고개전설」 · 「갑옷바위전설」 · 「박창보전설(朴昌輔傳說)」 등 많은 지명전설과 인물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미추홀구 문학동에 있는 사모지고개에는 마치 동이처럼 꼭대기에 구멍이 움푹 들어간 바위가 있는데, 옛날 그 구멍 안에 삼해주가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이 고개를 삼해주현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고개를 넘어가는 사람들이 고개를 오르느라 숨이 차고 목이 마르면, 그 술을 떠 마셔 갈증을 풀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술은 단 한 잔만 마셔야 되는 것인데도 언젠가 한 사람이 욕심을 부려 한꺼번에 석 잔이나 마셔 버리는 바람에 그만 술이 말라 없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문학산에는 갑옷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둘레에 큰 금이 나 있어 뚜껑을 닫아 놓은 석함 모양을 하고 있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옛날 어느 장수가 이 바위에 석함을 파고 자기의 갑옷과 투구를 감춘 다음 뚜껑바위를 덮어 놓았는데, 그 뒤 이 바위를 건드리는 사람은 벼락에 맞아 죽었다.
언젠가 문학산 안관당의 당지기가 정말 바위 속에 갑옷이 들어 있는지 확인하려고 바위 밑둥을 망치로 깨뜨리기 시작했더니, 벼락이 내려쳐 그만 혼비백산해 도망치고 말았다. 지금 바위 아래쪽이 떨어져나간 것은 그 때문이라고 한다.
남동구 간석동에는 박창보라는 아주 힘이 센 장사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힘도 장사지만 담력도 대단해, 당시 관가에서도 겁을 내 잡지 못하던 도적의 괴수를 붙잡아 목을 베었다.
그러자 도적의 졸개들이 복수를 하려고 박창보의 집에 들이닥쳤는데, 박창보는 꾀를 내어 자기 부인의 옷을 입고 쇠도리깨를 휘두르며 도둑 몇 명을 쓰러뜨렸다. 이를 본 도둑들은 “이 집은 여편네까지 모두 장사이니 그대로 있다가는 뼈도 못 추리겠구나.” 하며 도망갔다고 한다.
이 밖에 아기장사와 용마에 얽힌 「천마산 흔들못전설」을 비롯해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공략하기 위해 지세를 살폈다는 「소래산전설(蘇來山傳說)」, 중구 신흥동의 「서낭나무전설」, 말을 타고 지나가면 말의 발이 땅에 붙어 버린다는 「길마산 서낭당전설」, 중구 답동의 흉가에 얽힌 전설 등이 있다.
이 고장은 일찍이 도시화되었기 때문에 노동요를 찾아보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현재까지 전승되는 민요로는 유희요가 주종을 이룬다. 「달노래」 · 「달풀이노래」 등 여성들의 음영민요가 전승되고 있다.
「달노래」는 “달아달아 밝은달아 이태백이 놀던달아/이태백이 죽은후에 누구로놀자 바라느냐/……산도좋고 물도 좋은데 초가삼칸 집을 짓고/양친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지고.”와 같다.
「달풀이노래」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변하는 정경을 읊은 음영민요이다. 이 노래의 가사는 “정이삼월은 두신해도리화 좋고/사오유월은 녹음방초 경치좋다/칠팔구월은 황국단풍 더욱좋고/십일이월은 합리춘풍이 설중매로다.”와 같다. 또한 여성들의 음영민요로 임을 그리워하는 내용의 다음과 같은 노래도 있다. “……나는죽어 나비되고 너는죽어 꽃이되어/삼춘가절 호시절에 쌍쌍이 놀아보세.”
「고사반노래」의 가사는 “……건국은면에 천시댁에/호구역사 풀어주자/호구역사 풀어주자/강남은 소한국/우리나라에 대한국/손님마마 쉰세분/나오실때 어떤손님이 나오시나/말잘하는 호방손님/글잘하는 문무손님/자나굵으나 녹두손님/삼세분이 나오실때/앞강두 열두깡/뒷강두 열두깡/이십사강을 건너실때……”와 같다. 이 노래는 동네에 당제가 있는 날, 당(堂)에 올라가 신에게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의식요의 일종이다.
인천의 경치를 노래한 「인천팔경」은 “에이 아니노지 못하리라/계양산하 부평들에/황금고도 주안으로/약사암에 돌아들어/수봉무덕 한량만나/문학산 약수터로/청양송도 능허대에/……얼씨구절씨구 지화자좋은데/인천팔경이 여기있소.”와 같다.
그 밖에 다른 지역에서도 널리 불리는 「노랫가락」이 있는데 “충신은 만조정이요/효자열녀는 가가재라/화형제 낙처자니/붕우유신 하오리라/우리도 성주모시고/태평성대를 누려보자…….” 하고 부른다. 「상여소리」, 꽃의 특징을 한시에 토를 달아 읊는 「꽃노래」 등도 전승되고 있다.
지목별 토지 분포를 보면 임야가 413.477㎢, 논이 87.581㎢, 밭이 189.276㎢, 대지가 83.624㎢, 공장용지가 21.016㎢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2008년 현재). 강화 · 옹진군을 행정구역에 포함해 확대되면서 경지와 임야의 비율은 증가했으나, 이들 경지 및 임야는 도시개발과 더불어 용지의 전용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농어업 인구는 2008년 현재 말 1만 4038명에 불과하며, 이들은 주로 시설채소 · 화훼류 등 근교농업작물을 재배하고 돼지 · 젖소 · 한우 등 축산업도 한다. 경기만 일대의 수산업은 조기 · 갈치 · 새우 등의 어획과 굴 · 백합 · 바지락 등의 양식이 활발하다. 이들 수산물은 연안부두 · 소래포구 · 영종도 등에 집산 후 판매된다.
일제강점기 이후 남양만 일대와 쌍벽을 이루었던 인천 일대의 천일제염업은, 현재 대부분의 염전이 폐쇄되어 공장지대나 택지로 전용되면서 소금 생산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2차 산업과 관련해 인천은 수도권 공업지대의 한 축으로서 핵심적 구실을 담당해 왔는데, 이는 국제무역의 창구인 항구도시라는 점과 대소비시장인 수도권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 풍부한 노동력 시장에 접해 있다는 점 등의 입지조건에 힘입은 바 크다.
인천의 2차 산업은 1918년에 갑문식 부두가 건설됨으로써 본격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1930년대에 만주사변을 계기로 현 동구의 해안가에 목재 · 방직 · 금속 · 기계 · 전기 · 화학 등의 군수산업을 중심으로 한 임해공업지구가 들어섰고, 이후 항만공업도시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성장은 1960년대에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시행되면서 이루어졌다.
1969년에 한국수출산업공단 제4단지가 조성되었고 1973년에는 가좌동에 한국수출산업공단 제5단지, 도화동에 기계 · 금속공업 중심의 기계공업단지, 도화 · 가좌동에 제재 · 철강공업 중심의 지방공업단지 등이 준공되었으며, 1974년에는 주안동에 한국수출산업공단 제6단지, 1977년에 주안수출입단지, 1980년에 인천제재단지 등이 차례로 완공되었다.
또 1986년서구 경서동 일대의 매립지에 경인주물공단, 1992년 승기천 하구 일대의 남동구 해안과 염전을 매립한 땅에 남동공업단지 등이 조성되어 도시 성장의 중추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2008년 현재 제조업체수는 21,105개이며, 종업원수는 22만1,762명이다. 정유 · 자동차 · 중장비 · 전기기기 · 금속 · 유리 · 합판 · 가구 · 악기 · 의복 · 제분 · 식품 등 다양한 종류의 공업이 발달해 있으며, 특히 정유업, 제1차 철강재, 일반식료품, 중장비제조업 분야의 생산량이 많고, 자동차 · 합판 · 가구 · 의복 · 전기기기 등의 제조업체가 많은 종업원을 고용하고 있다.
인천은 개항과 더불어 외래문물 수입의 전초기지로서 국제무역과 상업이 번성했으나, 경인선 철도와 경인국도가 개통되면서 서울의 관문도시 및 배후도시로 자리 잡게 되어 그 독자적 기능이 축소되었다.
개항기의 상업중심지는 일본 조계지에 인접한 신포동 일대였으나, 광복 이후 동인천역을 중심으로 인현 · 송현동 일대가 새로운 상업중심지로 등장하였다. 부평역 일대도 경인철도와 국도가 개통되면서 새롭게 시가지가 조성되었고 부평지역의 상업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1970년대 이후에는 인천의 인구와 시역이 확장되면서 경인국도변의 주안동 · 석바위 · 간석동 일대가 인천의 새로운 상업중심지로 부상했으며, 이를 중심으로 기존의 부평과 인천의 분리된 상권이 하나로 통합되고 있다.
일반시장이 89개, 백화점이 6개 있으며 총 251개의 금융기관이 있다. 인천은 송도 신도시에 미디어밸리를 조성하는 등 정보 · 통신산업을 집중 육성해 첨단산업도시로 탈바꿈하기 위한 노력도 계속하고 있다.
2차 산업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항만시설은 1918년 조수간만의 차를 극복하기 위해 갑문식 독을 완공한 이후 계속 확충되어 현재는 내항에 제8부두까지 조성되어 있다. 연간 화물처리능력은 1억517만7,744t이나 수출입 화물량은 계속 증가해 항만시설이 부족한 실정이며, 이를 위해 북항을 개발하는 중이다.
내항 바깥의 연안부두는 연안어업의 중심지인 어항으로서 작용하며, 또한 연안항로의 기점으로서 경기만 일대 도서지역으로 여객을 수송한다. 내항의 국제여객터미널에는 중국 웨이하이(威海) · 톈진(天津) 등을 연결하는 국제노선이 개설되어 있다.
영종도에 있는 인천국제공항은 동북아시아의 거점공항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서울과의 연결성을 높이기 위해 신공항고속도로와 신공항철도가 서구와 계양구를 지나 건설되었다. 또한 이 노선과 나란히 서해안과 한강을 직접 연결하는 경인운하도 건설되고 있다.
교통은 1899년에 완공된 경인선 철도가 1965년에 복선화되었으며, 1972년에는 전철이 개통되고 1974년 서울지하철 1호선과 연결되어 서울 도심과의 연결성이 더욱 높아졌다. 또한 구로∼부평간의 경인선 복복선이 개통되어 여객 수송에 도움이 되고 있다.
도시교통의 혼잡을 완화하기 위한 3개의 인천지하철 노선이 건설 중에 있는데, 이 중 1호선은 1998년에 완공되어 주민의 교통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관광열차로 널리 알려졌던 수인선 협궤열차는 현재 운행이 중단되었으나, 복선전철공사가 곧 추진될 예정이다.
1968년에 개통된 이후 우리나라 경제개발에 큰 역할을 담당해 온 경인고속도로는 용현동 연안부두에서 서울 신월인터체인지를 지나 영등포까지 연결된다. 이 도로는 경인공업지역의 핵심 동맥으로서 통행량이 폭증해 서인천에서 신월까지 8차선으로 확장되었으며, 인천 도심구간도 확장하고 있는 중이다.
1992년에 완공된 제2경인고속도로는 연안부두에서 서울 시흥동을 연결하며, 서창인터체인지에서는 신갈∼안산간의 고속도로와 만나 내륙지역 및 남부지역으로 화물을 수송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또한 부천과의 시계를 따라 서울외곽순환도로가 건설되어 있어 수도권 일대의 교통 혼잡이 크게 개선되었다. 이 외에 2006년 6월 기준 수도와 영종도 국제공항을 잇는 공항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있고 공항 철도를 운행 중에 있다. 2008년 현재 인천광역시의 15세 이상 경제활동인구는 211만 4,000명이고 취업률은 59.5%, 실업율은 2.25%이다.
인천의 관광자원은 위치 및 기능별로 해양관광자원과 산업관광자원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시기별로는 개항 이전의 토착문화유적과 개항 이후의 유입문화유적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해양관광지로는 문화의 거리가 조성되어 있는 월미도, 새롭게 조성될 인천국제공항의 배후에 있는 을왕리해수욕장과 팔미도해수욕장, 송림이 우거진 작약도, 종합어시장과 연안여객터미널이 있는 연안부두, 청량산 남쪽으로 각종 위락시설이 밀집해 있고, 관광어촌으로 새롭게 번성하고 있는 소래포구 등이 유명하다.
각종 공업단지들도 인천관광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구도심 북쪽 해안의 화수 · 송현임해공업지구, 송림동 매립지 일대의 인천제재단지, 1960년대 후반 이후에 준공된 도화 · 주안 · 가좌 · 효성동 일대의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 및 지방공업단지 등이 갯골연안도로 및 경인고속도로를 따라 일렬로 이어져 입지하고 있다.
이 외에 남동구 해안과 염전 일대를 매립한 땅에 1992년에 조성이 완료된 남동공업단지, 1986년에 준공된 서구 해안매립지 북쪽의 경인주물공업단지 등은 경인공업지대의 한 축을 이루는 인천의 공업발달상을 잘 보여 주는 산업관광자원이다.
인천에는 오래된 역사유물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먼저 개항 이전까지 인천지역의 중심지였던 문학산과 계양산 일대 및 영종도 등에서 각종 신석기시대 석기류가 발견되었고, 고인돌 등 청동기시대 유적도 다수 발견되어 연수구 옥련동의 인천시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미추홀구 옥련동의 능허대지는 백제가 중국과 교류하던 통로로서 현재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문학산과 계양산에는 각각 산성이 일부 남아 있으며, 문학산 북쪽 관교동에는 인천향교 · 인천도호부관아, 계양산 남쪽 계산동에는 부평향교 · 부평도호부관아 있다. 서구 경서동의 녹청자도요지도 중요한 관광자원이다.
불교유적으로는 원대철제범종 · 송대철제범종 · 관음좌불상 등이 시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개항 이후 유입된 외래문화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구도심인 중구 중앙 · 송학 · 항 · 답동 일대에 후기 르네상스 양식으로 건설한 일본제일은행지점 · 인천우체국 · 제물포구락부회관 등이 있다.
또 종교건축물인 답동성당 · 성공회성당도 외래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중구 선린동 일대에는 옛 청국 조계지였던 차이나타운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고, 그 위쪽으로 예전의 각국 조계지였던 곳에는 현재 자유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또한 개항 이후의 유적지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구해안을 따라 건설되었던 서구 연희동의 연희진지, 동구 만석동의 묘도포대지, 중구 북성동의 북성동포대지, 동구 화수동의 화도진지, 항동의 제물포포대지, 영종도의 영종진지, 남동구 논현동의 논현포대지 등 구한말 해안경비 진지들이 있다.
시의 북동부에 위치한 구. 면적은 45.57㎢로서 인천광역시 전체의 4.4%를 차지하고 인구는 33만 4332명(2015년 현재)이다. 구청 소재지는 계산동이다. 본래 계양산 일대의 이 지역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부천군 부내면의 북쪽과 김포군 계양면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1940년 부천군 관할이던 부내면이 인천부의 확장과 더불어 그 관할 하에 편입되었고, 계양면은 여전히 김포군 관할 하에 있었다.
1968년에는 구제의 실시와 더불어 부내면 지역이 서곶면 지역과 합쳐져 북구가 되었고, 1989년에는 계양산의 북쪽, 김포군 계양면이 북구로 편입되었다. 1995년에는 인천이 광역시로 개칭됨과 아울러 광활한 북구의 관할구역이 경인고속도로를 기준으로 그 남쪽의 부평구와 북쪽의 계양구로 분리되었다.
이 지역의 중심에 솟아 있는 계양산은 인천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그 남쪽에는 부평지역의 중심지였던 부평도호부가 입지하고 있었다. 부평도호부는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경인선 철도와 경인국도가 개통되면서 부평역 인근지역이 상업 및 교통의 중심지로 성장함에 따라 구읍으로 전락해 버렸다.
계양산과 그 남서쪽으로 뻗은 철마산을 경계로 서구와 맞닿아 있으며, 임꺽정의 전설이 남아 있는 장명이고개를 통해 현 서구지역으로의 교통로가 조성되어 있다. 계양산의 남쪽과 동쪽으로는 계산천 · 굴포천이 흘러 부평평야의 끝자락을 이루어 과거에는 대규모로 벼농사가 이루어졌으나, 지금은 간선도로망을 따라 시가지가 조성되어 있고 계산동 일대에는 대규모 택지가 개발되고 있다.
계양산 북쪽지역은 50m 내외의 구릉성 산지가 매우 발달해 있고, 그 분수령의 산록을 따라 시천천이 흘러 황해로 흘러들며, 귤현천 · 계양천 등은 북쪽으로 흘러간다. 그 골짜기들은 충적층으로 덮여 있으며 논으로 이용된다. 즉, 계양산 북쪽지역은 임야와 경지가 매우 많이 분포해 있고, 남쪽지역은 대지 및 공장용지로 많이 이용된다. 토지이용은 농경지가 46.4%, 임야가 29.8%, 대지 및 공장용지가 11.1%, 도로용지가 5.8% 등이다.
구의 남쪽 경계를 이루는 경인고속도로의 효성 · 작전동 일대에는 전자 · 섬유 · 식료품 · 기계 등의 공업이 집중적으로 발달해 있다. 공장지역의 북쪽으로는 시가지가 조성되어 서비스업과 금융업이 발달해 있으며, 주거지가 계속 증가함에 따라 인구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경인고속도로의 부평톨게이트를 통해 서울, 부천과 인천의 서구 및 중 · 동구 구도심지역으로의 접근성이 양호하며, 307번 국도를 통해서는 김포지역으로 직접 연결된다. 농촌경관이 그대로 남아 있는 구의 북쪽지역은 인천국제공항으로 연결되는 신공항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있고 및 신공항고속철도가 시험운행 중에 있다. 이 노선과 나란히 경인운하의 건설도 추진 중에 있다. 아울러 수도권외곽순환고속도로도 서울과의 접경 부근에 건설 중에 있어 지역경관의 급속한 변모가 예상된다.
문화유적은 계양산성 · 봉일사지삼층서탑 · 부평향교 · 부평도호부관아 · 욕은지 · 어사대 등이 있다.
효성(曉星) · 계산(桂山) · 작전(鵲田) · 계양(桂陽) · 서운(瑞雲) · 용종(龍宗) · 박촌(朴村) · 동양(東陽) · 귤현(橘峴) · 상야(上野) · 하야(下野) · 평(坪) · 노오지(老吾地) · 선주지(仙住地) · 이화(梨花) · 오류(梧柳) · 갈현(葛峴) · 독실(纛室) · 목상(木霜) · 다남(多男) · 장기(場基) · 임학(林鶴) · 병방(兵房) · 방축(防築) 등 23개 동이 있다.
시의 서남부에 위치한 구. 면적은 24.84㎢로서 인천광역시 전체의 2.4%를 차지하고 있고 인구는 40만 4893명(2015년 현재)이다. 구청 소재지는 숭의동이다. 본래 인천부의 구읍(舊邑) · 서(西) · 남촌(南村) · 조동(鳥洞) · 다문(多門) · 주안(朱安) 등 6개 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다주(多朱) · 문학(文鶴) · 남동(南洞)의 3개 면으로 개편되었고, 1962년 남부 · 문학 · 주안 · 남동에 4개의 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68년에는 구제 실시와 더불어 이들 4개 출장소를 묶어 남구로 개칭되었고, 1988년에는 승기천 동쪽이 남동구로, 1995년에는 문학산 남쪽이 연수구로 분리, 신설되었다. 남구는 2018년 미추홀구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지형은 남쪽 연수구와 경계를 이루는 문학산의 줄기가 동서로 뻗어 뚜렷한 산줄기를 형성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낮은 구릉지를 형성하고, 그 위에 시가지가 조성되어 있다. 주안동에서 발원해 남쪽으로 흐르는 승기천 일대는 하천과 조류에 의해 퇴적된 평야지역이었는데, 현재는 하도가 직선화되었고 주변 토지는 공업 및 상업용지로 바뀌고 있다.
현재의 경인고속도로 가좌인터체인지에서 만입해 간석동까지 이르렀던 갯골은 이 구의 북쪽 경계를 이루는데, 이 일대의 간석지는 간척에 의해 염전과 농경지로 활용되다가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계획과 더불어 공업단지로 변모되었다.
구의 중앙부는 주로 상업지와 주택지로 개발되었으며, 용현 · 학익동 등 서부 해안 인접지역에는 전자 · 화학 · 유리 등의 공업지역, 북부의 도화 · 주안동 일대에는 목재 및 가구제조 · 전자기계 · 화학 · 유리 등의 공업지역이 조성되어 있다. 토지이용은 농경지가 5.2%, 대지 및 공장용지가 49.1%, 임야가 10.6%, 교통용지가 16.7%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인국도와 경인선 전철이 구의 중심부를 통과하며 핵심 교통로를 이루어, 여러 곳에 상업중심지가 형성되어 있다. 구의 북쪽을 통과하는 경인고속도로는 도화인터체인지를 통해 이 구와 연결되며, 남쪽 문학산의 북사면을 따라 지나는 제2경인고속도로는 건설 예정인 문학인터체인지를 통해 이 구와 연결되어 교통이 더욱 편리해질 것이다.
관교 · 문학동은 선사 및 역사유적지가 산재한 인천의 중심지였으나, 개항 이후 서쪽의 한적한 어촌이었던 제물포가 근대도시로 발전하면서 구읍으로 전락했다가, 최근에 다시 구월동 지역과 더불어 광역화된 인천의 중심지로서 거듭나고 있다. 이 일대에는 인천도호부관아 · 향교 · 문학산성 · 성산봉수대지 · 학산서원지 등이 있으며, 이 외에 주안동의 김포굴포지, 숭의동과 학익동의 고인돌, 도화동의 수봉공원 등의 관광지가 있다.
도화(道禾) · 숭의(崇義) · 용현(龍現) · 학익(鶴翼) · 주안(朱安) · 관교(官校) · 문학(文鶴) 등 7개 동이 있다.
시의 남동부에 위치한 구. 면적은 57.01㎢로서 인천광역시 전체의 5.4%를 차지하고 인구는 53만 1395명(2015년 현재)이다. 구청 소재지는 만수동이다. 본래 인천부의 남촌면과 조동면 및 주안면 일부에 속하는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부천군 남동면과 다주면에 편입되었다가, 1940년에 다시 인천부에 속하게 되었다. 1962년 출장소가 설치된 뒤 1968년에 구제 실시와 더불어 남구(현 미추홀구)의 관할이 되었다. 1988년에는 남구(현 미추홀구)에서 분리되어 남동구로 독립하였다.
서쪽으로는 승기천을 사이에 두고 남 · 연수구와 경계를 이루고, 북쪽과 동쪽으로는 철마산 · 만월산 · 거마산 · 관모산 등이 부평구와 부천 및 시흥시와의 경계를 이룬다. 남쪽 해안에 인접해서는 오봉산이 솟아 있고, 이 산지 사이를 만수천이 흘러 평지를 이루는데, 이곳에 농경지와 염전이 조성되어 있었으나 최근에는 토지이용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
특히 승기천 연변 평야지대의 고잔 · 논현동 일대에는 남동공업단지가 건설되어 북쪽의 시가지와 연결되는 중이다. 남동공업지역에는 2008년 현재 4,399개 업체가 입주해 있다.
대체로 1980년대 이후 개발이 활발히 진행되어 현재 도시와 농촌의 경관이 혼재하면서 발전해 나가고 있다. 구월동에는 시청 · 교육청을 중심으로 한 행정중심기관들이 이전, 입지해, 그 일대가 중심업무 및 상업지구로 변해 가고 있다. 또한 농수산물도매시장 · 인천종합터미널 · 인천종합문화회관 및 대형 백화점 등이 밀집해 있다.
구월동에서 북쪽으로 이어져 경인 및 수인국도와 만나는 간석오거리에 이르는 구간은 금융기관이 가장 많이 집중해 있는 등 상업기능이 탁월한 중심지로 바뀌었다. 이 중심상업지구에 인접한 간석 · 구월 · 만수동 일대에는 대규모 주택지가 조성되어 있다. 토지이용은 농경지가 23.2%, 임야가 24.8%, 대지 및 공장용지가 25.8%, 도로용지가 11%를 차지해, 다른 구에 비해 여전히 임야 및 농업적 토지이용이 상대적으로 높다.
구의 북쪽은 경인선 철도 및 경인국도를 통해 인천의 서부 · 북부지역과 연결되며, 도로망은 구월동 및 간석동 일대의 중심상업지구와 남동공단지역 모두에서 대체로 규칙적인 패턴을 보여 새롭게 개발된 지역임을 나타낸다.
이 중심업무지역에는 연수동 아파트단지 및 남동공단지역으로부터 부평지역으로 이어지는 인천지하철이 건설되고 있어 앞으로 교통난 해소에 크게 기여할 전망이다. 제2경인고속도로는 북쪽의 중심상업지구와 공업지구를 분할하면서 구의 중앙부를 동서로 통과하고, 서창동에서는 서해안고속도로와 연결되어 지역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부천시와의 경계를 따라서는 서울외곽순환도로가 건설 중에 있다. 구의 남쪽 해안을 따라 고잔동까지 달리는 능해로는 장차 인천국제공항과 송도 신도시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문화유적은 도림동의 조정만묘, 운연동의 김재로묘, 논현동의 호구포포대지 등이 있으며, 만월산의 약사사, 관모산의 인천대공원은 시민의 휴식처로 자리잡고 있다. 남동쪽 끝에 있는 소래포구는 어항으로서의 기능이 점차 약화되고 있으나 여전히 새우파시(波市)로 유명하다.
구월(九月) · 고잔(古棧) · 논현(論峴) · 만수(萬壽) · 장수(長壽) · 간석(間石) · 서창(西昌) · 운연(雲宴) · 도림(桃林) · 수산(壽山) · 남촌(南村) 등 11개 리가 있다.
시의 서부 북쪽 해안가에 위치한 구. 면적은 7.19㎢로서 인천광역시 전체의 0.7%를 차지하고 인구는 7만 2572명(2015년 현재)이다. 구청 소재지는 송림동이다.
본래 인천부 부내면의 일부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다소면의 송림 등 5개 동을 병합해 인천부에 편입되었고, 1962년에는 동부출장소가 설치되어 그 관할 하에 있었다. 1968년 구제 실시에 따라 송월동을 제외한 북부출장소와 동부출장소가 통합되어 동구가 설치되었다.
북쪽의 해안 인접지역은 일제강점기부터 매립된 땅으로,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임해공업지역으로 성장하기 시작했고, 이후 동쪽으로 주안, 부평공단과 연결되어 경인공업지역의 서쪽 끝을 이룬다. 현재는 이 공장지역에 중화학 · 방직 · 유리 · 전기 · 제철 · 제강공업 등이 발달해 있으며, 대우중공업 · 인천제철 · 동국제강 · 한국유리 등 대규모 공장이 입지해 있다.
공장지대의 남쪽은 송림산 일대의 낮은 구릉지가 발달했고, 그 위에 구한말 이후 자연발생적으로 성장한 한국인 취락을 모체로 주택지역이 형성되어 왔다. 또한 간선도로를 따라 시가지 지역이 형성되어 경인선 철도를 경계로 중구와 맞대어 있다. 예전에는 이 구릉성 산지 사이로 좁은 해로가 형성되어 작은 배들이 내륙 깊숙이 들어오곤 하였다.
구시가지 지역은 공장지대와 인접해 있어 주거환경이 불량하고, 중심기능도 미추홀구 및 남동구 일대로 이전되고 있어 지속적인 인구감소 현상을 보인다. 토지이용은 대지가 40%, 공장용지가 34.1%, 교통용지가 14.8% 등으로 대부분이 도시화되었다.
남쪽 경계에는 경인선 철도가 통과하며, 공업지역을 따라 형성되어 있는 도로가 서쪽으로는 월미도 및 인천항 부두, 동쪽으로는 경인고속도로 및 서구 해안 매립지역의 공업지역으로 연결되어 있어 큰 역할을 한다. 주거지와 시가지 구간은 송림동 로터리를 중심으로 간선도로가 사방으로 뻗어 있으나, 그 외에는 구릉지의 지형적 제약 및 주거지 밀집 때문에 도로의 폭이 좁고 또한 불규칙한 패턴을 보인다.
북쪽 구해안선을 따라 만석동의 묘도포대지, 화수동의 화도진지 등 구한말의 방어유적지가 분포하고 있으며, 특히 화도진지는 1882년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된 역사 깊은 곳으로서 현재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고 매년 문화축제가 벌어진다. 만석동에 속한 작은 섬 작약도도 관광지로 이름이 높다.
만석(萬石) · 화수(花水) · 화평(花平) · 송현(松峴) · 송림(松林) · 금곡(金谷) · 창영(昌昌) 등 7개 동이 있다.
시의 북동부에 위치한 구. 면적은 32.00㎢로서 인천광역시 전체의 3.1%를 차지하고 인구는 55만 5844명(2015년 현재)이다. 구청 소재지는 부평동이다.
본래 부평군 군내 · 서 · 마장 · 동정 · 모월곶 · 석곶 등의 7개 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부내면과 서곶면으로 개편되었다.
1962년에 부평출장소와 서곶출장소가 각각 설치되었다가 1968년에는 두 출장소를 통합해 북구를 설치하였다. 1988년에는 서곶출장소 지역을 서구로 분리, 독립시켰으며, 1995년에는 경인고속도로 북부의 계양산 일대가 계양구로 분리되고 나머지 부분이 부평구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른다.
대체로 서쪽은 철마산 · 호봉산, 남쪽은 만월산 · 철마산 등으로 막혀 있고, 그 산지에서 발원한 굴포천 · 청천천 등이 동쪽으로 흐르며 평야지대를 이룬다. 과거 벼농사의 산지로 이름 높았던 부평평야는 현재 공장지역과 시가지 및 주택지로 조성되어 있고, 부천시와의 경계 부근에서는 아직도 벼농사가 이루어지나 이곳도 조만간 대규모 택지지구로 변모하게 될 예정이다.
토지이용은 전체 면적의 24.3%가 임야로 남아 있고, 경지가 14.8%, 대지 및 공장용지가 34.7%, 도로용지가 11%를 차지한다. 구의 중앙부인 경인고속도로와 경인전철 사이의 토지는 거의 시가지화 되었으며, 특히 부평역 일대는 부평구와 계양구를 포함하는 부평지역에서 지가가 가장 비싼 상업중심지를 이룬다.
본래 조선시대까지 부평지역의 중심지는 계양산 남쪽 아래에 입지하고 있었는데, 구한말 경인선 철도 및 경인국도가 구의 남쪽에 개통되면서 새로운 중심지로서 자리 잡게 되었다. 부평의 3차 산업의 성장은 1960년대 이후 이 구의 북부와 계양구 지역에서의 공업의 성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경인고속도로를 따라 청천 · 갈산동 일대에는 계양구 효성동 일대와 더불어 한국수출산업공단 제4단지가 조성되어 전자 · 섬유 · 기계 · 화학 · 금속 · 식료품 · 자동차 등의 공업이 발달해 있다. 갈산동 일대에는 대우자동차 공장이 입지하고 있다.
고속도로를 통한 편리한 교통이 공업입지에 큰 역할을 한다. 남부의 경인철도와 경인국도를 통해서는 서울 및 인천지역으로 연결되며, 경인고속도로와 경인국도 사이에 펼쳐진 시가지는 일제강점기 이후 평야지대에 새롭게 조성되어 도로망이 잘 발달해 있고 비교적 규칙적인 모습을 띤다. 경인전철의 부평역과 경인고속도로의 부평인터체인지를 잇는 도로를 따라 지하철이 건설되고 있는데, 개통 후 교통난 해소에 큰 도움을 줄 전망이다.
녹지율은 낮은 편이나, 시가지 곳곳에 조성되어 있는 작은 공원들과 주변의 그린벨트 지역에 조성된 공원 등이 시민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새롭게 조성된 시가지나 공업용지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유서 깊은 유물 · 유적은 그리 많지 않다.
부평(富平) · 산곡(山谷) · 청천(淸川) · 갈산(葛山) · 삼산(三山) · 부개(富開) · 일신(日新) · 구산(九山) · 십정(十井) 등 9개 동이 있다.
시의 북서부, 경기만에 면하고 있는 구. 면적은 114.00㎢로서 인천광역시 전체의 10.9%를 차지하고 있다. 인구 50만 4606명(2015년 현재)이다. 구청 소재지는 심곡동이다. 본래 부평군의 모월곶면(毛月串面)과 석곶면(石串面)에 해당되는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서곶면으로 개편된 후 1940년에 인천부에 편입되었다. 1962년에 서곶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68년에는 북구에 포함되었다가 1988년에 다시 서구로 분리, 설치되었다.
지형적 특징을 살펴보면, 동쪽에 계양산 · 북망산 · 철마산 등이 솟아 있어 그 동쪽의 계양 · 부평구와 경계를 이루며, 공촌천 · 시천천 · 심곡천 등의 하천이 구의 동북쪽 계양산 줄기에서 발원해 서쪽으로 흐르면서 평야를 발달시키고 있다.
이 구의 특징은 해안 간척에 의한 땅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는 점이다. 구의 동쪽에 솟아 남북방향으로 달리는 산지는 해안선에 인접해 그 곡지가 만입을 이루었는데 여기에 방조제를 구축해 염전이나 농경지로 개발했으며, 최근에는 인근해의 사도(蛇島) · 청라도(靑羅島) · 율도(栗島) · 장도(獐島) 등의 섬을 연결해 대규모 간척사업이 진행됨에 따라 토지가 크게 증가하였다.
이 간척지역은 아직 구체적인 토지개발이 진행되고 있지는 않으나 신공항고속도로와 신공항철도, 그리고 경인운하 건설 등의 개발이 진행되면서 아울러 그 경관이 크게 변모할 전망이다.
대체로 구의 남쪽, 경인고속도로 가좌인터체인지 부근의 가좌 · 석남 · 신현 · 가정동 일대에는 전자 · 기계 · 제재 · 가구제조 · 식료품 등의 공장이 밀집해 있으며, 1960년대 개발 초기부터 택지와 상가가 개발되어 있었다.
율도지역에는 석유 · 화학공업이 발달했으며, 간척지 북쪽의 경서동에는 경인주물공단이 조성되어 관련 공장이 집적되어 있다. 반면에 구의 북쪽, 김포와의 경계지역인 검암 · 시천동 일대는 여전히 농업적 경관이 그대로 남아 있어 농업적 토지이용이 이루어지고 있다.
구의 중부에 해당하는 심곡 · 연희동 일대에는 3개 지구 총 134만㎢ 규모에 달하는 대규모 택지가 조성되고 있으며, 아울러 서구 행정의 중심기관들이 입지해 서구의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다. 토지이용은 임야가 29.5%, 농경지가 34.1%, 대지 및 공업용지가 10.4%, 교통용지가 5.9% 등을 차지해 임야와 경지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매우 높다.
경인고속도로가 동쪽 산지지역의 하단부를 따라 남북으로 달리며, 가좌인터체인지 · 서인천인터체인지를 통해 서구와 연결된다. 최근에 확장 및 직선화 작업이 완료된 305번 지방도는 남북으로 달려 인천에서 김포를 연결한다.
동아매립지 위에 건설된 8차선의 남북간 연결도로도 구체적인 개발이 진행되면 인천 북항 및 김포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계속 증가하는 인천 내항의 화물량을 분담시키고자 개발하고 있는 북항은 이 지역의 변화에 커다란 요소가 될 것이다.
남북간의 도로망에 비해 동서간의 도로망은 계양산 · 철마산 등의 산지로 인해 그다지 발달하지 못하였다. 그 중 서울 88고속도로와 서해안 쓰레기매립지를 연결하는 일명 쓰레기매립도로는 서구 및 계양구 북부지역의 지역변화를 촉진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고 있다. 이미 공항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있고 신공항고속철도가 시험운행 중에 있으며 경인운하가 추진되고 있는 등 21세기 이 지역의 변화는 급격할 것으로 전망된다. 2006년에는 검단지구가 수도권 신도시 개발지역의 하나로 지정되어 2010년 12월 입주 예정이다. 검단지구는 지역의 발전을 견인할 것으로 예상된다.
문화유적은 가정동의 축곶봉수대지, 연회동의 연희포대지 및 연희진지, 석남동의 조서강묘, 경서동 금산의 유사눌묘와 인천녹청자도요지, 심곡동의 숙의문씨묘, 가좌동의 김포굴포지, 검암동의 허암지 등이 있으며, 이 외에 신현동의 회화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검암(黔巖) · 백석(白石) · 시천(始川) · 경서(景西) · 연희(連喜) · 공촌(公村) · 심곡(深谷) · 가정(佳亭) · 신현(新峴) · 석남(石南) · 원창(元倉) · 가좌(佳佐) · 대곡(大谷) · 불로(不老) · 마전(麻田) · 금곡(金谷) · 오류(梧柳) · 왕길(旺吉) · 당하(堂下) · 원당(元堂) 등 20개 동이 있다.
시의 서남부에 위치한 구. 면적은 49.07㎢로서 인천광역시 전체의 4.7%를 차지하고 있다. 인구 31만 9052명(2015년 현재)이다. 구청 소재지는 동춘동이다.
본래 이 지역은 1906년인천부 구읍면(舊邑面)의 일부(지금의 선학동 지역)와 먼우금면(遠又爾面)이 개칭된 서면(西面)에 해당되는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부천군 문학면으로 통합되어 그 관할이 되었다.
1940년에는 남동 · 부내 · 서곶면과 더불어 다시 인천부로 편입되었고, 1968년 구제 실시에 따라 남구(현 미추홀구)에 속하게 되었다. 1995년에는 문학산 남쪽지역을 남구(현 미추홀구)로부터 분리해 연수구라 부르게 되었다.
지형은 미추홀구와의 경계를 이루는 문학산 줄기가 구의 북쪽을 동서로 달리고, 그 한 줄기인 청량산이 남쪽으로 이어져 이 지역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마치 학이 날개를 펼친 형상으로 주변 일대에는 선학 · 청학 · 학익동 등 관련 지명이 많이 있다.
동쪽에는 승기천이 남동구와 경계를 이루며 흐르는데, 이곳은 과거에 큰 갯골이어서 주안지역까지 바닷물이 들어갔으나 현재는 주변일대가 모두 간척되어 연수구 쪽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청량산의 서쪽도 대부분 간척에 의해 형성된 땅이다. 본래 이 지역은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기 전에는 벼 · 보리 · 콩 등 곡물이 많이 재배되던 곳이었으며, 청량산 서쪽 옥련 · 동춘동의 해안가는 수산물이 많이 생산되었고, 넓은 갯벌이 형성되어 있던 패류의 보고였다.
현재는 대부분이 아파트 단지로 변했으며, 해안지역은 간척사업이 계속 확장되어 송도 신도시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토지이용은 농경지가 12.9%, 대지 및 공장용지가 26.1%, 임야가 25.8%, 교통용지가 13.5%를 차지한다.
계획적으로 조성된 주거단지이므로 도로망은 비교적 규칙적인 모습을 띠나, 북쪽 시내와의 연결도로가 많지 않아 출퇴근시의 교통 혼잡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이다. 공사 중인 문학터널은 시내와의 연결망을 높여 주고 제2경인고속도로로 바로 연결될 것이며, 또한 지하철 1호선이 구의 동쪽을 지나고 나중에 송도 신도시까지 연결될 예정이어서 이 지역 교통문제 해결에 도움을 줄 전망이다.
아울러 수인선 전철도 이 지역을 통과할 예정이다. 해안매립지 위에 건설된 해안도로는 인천항에서 남동공단으로 바로 이어 주며, 건설 중인 송도 신도시와 인천국제공항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문화유적은 동춘동의 부도, 이세주묘, 정우량묘, 옥련동의 능허대지 등이 있다. 청량산 서쪽 기슭에는 인천상륙작전기념관과 인천시립박물관이 있다.
옥련(玉連) · 선학(仙鶴) · 연수(延壽) · 청학(靑鶴) · 동춘(東春) 등 5개 동이 있다.
시의 중서부, 해안가에 위치한 구. 면적은 133.19㎢로서 인천광역시 전체의 12.7%를 차지하고 인구는 11만 4493명(2015년 현재)이다.
구청 소재지는 관동1가이다. 본래 이 지역은 제물포라 불리는 작은 어촌이었는데, 개항 이후 부내면(府內面)이라 해 인천감리(仁川監理)의 직할지가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부내면에 부천군 다소면의 일부 동리가 편입되어 새롭게 설치된 인천부의 관할이 되었다.
이후 매립지가 늘어나고 관할구역이 계속 확대되다가 1962년 중부출장소의 관할이 되었고, 1968년에는 동부출장소의 송월동을 포함해 중구로 확대, 개편되었다. 1973년에는 월미도가 편입되었고, 1989년에는 옹진군의 영종도 · 용유도가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지형은 월미산 · 응봉산 · 도원산 등 낮은 구릉성 산지가 동서로 펼쳐져 있고, 이 구릉지 사이로 싸리재고개 · 도원고개(황골고개) 등의 교통로가 조성되어 있다. 이 구릉성 산지의 남쪽은 저지대로 대부분 해안매립에 의해 조성된 땅이며, 구 면적의 약 2/3를 차지하고 그 위에 항만시설이 입지해 있다.
자유공원이 있는 응봉산의 남사면과 서사면은 개항 이후 일본 · 청국 등의 조계지가 있던 곳으로, 특히 일본 조계지였던 남사면 일대에는 식민지 통치를 위한 각종 업무시설이 밀집해 있었고, 그 주변에 주거지가 형성되어 있는 등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현재에도 내항을 둘러싸고 있는 이 지역의 중앙 · 관동 일대에는 항만 관련 업무시설, 금융기관, 중구 행정관청 등이 밀집해 있다. 이곳에서 동인천역을 잇는 도로를 따라 자리 잡은 신포 · 인현 · 내경동 일대는 상업기능이 특화되어 인천의 중심지가 되어 왔는데, 1970년대 이후 주안 및 간석 · 구월동 지역이 새로운 중심지가 되면서 중심기능이 이전되고 인구가 감소하는 등 상대적으로 쇠퇴하고 있다.
인천의 구중심지였던 이곳은 도로가 협소하고 주거 밀집도가 높아 재개발 필요성이 높은 지역으로 상주인구가 계속 줄어들고 있다. 구의 서쪽, 내항 바깥에 위치한 월미도 매립지 일대의 북성동 지역에는 항구 접근성이 요구되는 제당 · 목재 · 합판 · 조선 등의 공업이 발달하였다.
내항의 남쪽에 매립된 땅인 항동에는 연안부두가 있어 연안해운의 중심기능을 담당하며, 종합어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토지이용은 농경지가 23.1%, 대지 및 공장용지가 6.7%, 임야가 46.5%, 도로용지가 3.9%를 차지한다.
이 지역의 교통망은 구릉지를 따라 조성되어 있기 때문에 대체로 불규칙한 패턴을 보인다. 1899년에 완공된 경인선 철도는 월미도 입구, 인천역이 종점이며, 구내에 동인천역 · 도원역 등이 설치되어 있다.
인천항은 1918년에 최초의 갑문식 독이 완공된 이후 계속 항만시설이 확충되어 서해 제일의 국제무역항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500t급 이하의 소형 어선 및 연안여객선은 내항 바깥 연안부두에 접안할 수 있도록 항만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영종도와 용유도를 연결한 대규모 매립지에 건설된 인천국제공항은 21세기 세계 항공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으며, 여러 개의 연륙도로를 통해 인천 및 내륙지역으로 연결되고 있다.
문화유적은 인천감리서지 · 전환국지 · 제물포포대지 · 북성포대지 · 영종진지 · 답동성당 · 제물포구락부회관 · 일본제일은행지점 · 인천우체국건물 · 지계표석 등이 있으며, 영종도 송산리 신석기 유적지와 월미도행궁터 등이 있다.
자유공원과 문화의 거리가 조성되어 있는 월미도는 인천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전망이 뛰어나다. 용유도에는 을왕리해수욕장이 있다.
관동1가(官洞一街) · 관동2가 · 관동3가 · 중앙동1가(中央洞一街) · 중앙동2가 · 중앙동3가 · 중앙동4가 · 해안동1가(海岸洞一街) · 해안동2가 · 해안동3가 · 해안동4가 · 해안동5가 · 해안동 6가 · 항동1가(港洞一街) · 항동2가 · 항동3가 · 항동4가 · 항동5가 · 항동6가 · 항동7가 · 북성동1가(北城洞一街) · 북성동2가 · 북성동3가 · 송학동1가(松鶴洞一街) · 송학동2가 · 송학동3가 · 사(沙) · 신생(新生) · 신포(新浦) · 답(畓) · 신흥동1가(新興洞一街) · 신흥동2가 · 신흥동3가 · 선화(仙花) · 도원(桃源) · 율목(栗木) · 유(柳) · 경(京) · 내(內) · 용(龍) · 인현(仁峴) · 전(錢) · 선린(善隣) · 송월동1가(松月洞一街) · 송월동2가 · 송월동3가 · 운남(雲南) · 중산(中山) · 운서(雲西) · 운북(雲北) · 덕교(德橋) · 을왕(乙旺) · 남북(南北) · 무의(舞衣) 등 52개 동이 있다.
인천광역시 북서부 한강의 입구 황해에 위치한 군. 면적 411.33㎢로 인천광역시의 39.3%를 차지하며, 인구 6만 7667명(2015년 현재)이다. 1개 읍 12개 면 186개 리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강화읍 관청리이다.
주 섬인 강화도를 비롯해 석모도 · 교동도 등 큰 섬을 중심으로 10여 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강화도는 한강 · 임진강 · 예성강이 합류하는 하구에 위치한다. 강화도와 김포반도 사이의 염하는 과거 삼남지방의 세곡을 수운을 통해 서울로 운반하는 중요한 길목이었는데, 밀물과 썰물 때 조류가 대단히 빨라 선박 통행에 많은 지장을 주었다. 최고봉인 마니산(摩尼山, 469m)을 비롯해 혈구산(穴口山, 466m) · 진강산(鎭江山, 443m) · 고려산(高麗山, 436m) 등 300∼400m 내외의 저산성 산지들이 산재해 있다.
오늘날 강화도에서는 강화문화제, 고인돌축제, 참성단 축제 등을 마련하여 진행되고 있다. 2005년 12월 말 기준 562개소의 문화재 내지 사적지가 확인되었으며, 이 가운데 83개소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어 관광 자원이 풍부하다. 또한 1990년대 이후 인천가톨릭대학교가 설립되었고, 안양대학교강화캠퍼스가 자리 잡게 되었으며, 가천의과학대학교 등이 개교되어 교육도시로서의 모습도 갖추고 있다.
강화만 연안 일대는 좋은 어장을 갖추고 있어 새우 · 조기 · 가무락 · 숭어 · 도미 등 수산업이 발달했으나, 내륙에서 발달한 농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위축되었고, 총 인구의 6%만이 수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새우젓으로 유명한 내가면 외포리는 수산업의 중심 어항이며, 백합 · 굴 · 김 등의 양식업도 일부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육지 및 서울로 연결되는 두 개의 도로 중 하나인 4차선 48번 국도는 김포를 지나 강화대교를 통해 강화읍까지 이어지고 있다. 1970년에 개통된 강화대교는 강화읍 갑곶리와 김포시 월곶면 포내리를 연결하는 길이 694m의 다리이다. 최근에는 수도권에 인접한 역사, 문화 관광지로서 각광을 받으면서 교통 수요가 폭증해 만성적 정체현상을 보이고 있다.
강화대교의 개통으로 정기버스노선이 대폭 증편되어 1982년 이후 서울방면은 150여 편, 인천방면은 100여 편, 수원방면은 80여 편 등 급속도로 늘어나게 되었다. 1997년 8월 30일 강화 · 서울 간 4차선 도로 확장, 너비 19.5m의 4차선 신강화대교 개통, 서울 및 인천과 서해안 고속도로로 연계되는 서울 88제방도로 및 외곽순환도로와의 연결은 강화 발전에 가속도를 붙여주고 있다. 또한 2002년 8월 강화 초지대교가 개통되었으며 해안순환도로 개설공사가 2010년 준공 목표로 추진 중에 있다.
황해의 경기만에 도서로 이루어져 있는 군. 면적은 172.07㎢로서 인천광역시의 16.4%이고, 인구는 2만 962명(2015년 현재)이다. 원래 옹진군은 황해도 연안에 있던 군이었는데, 광복 후 경기도로 편입되었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섬으로만 이루어진 군이 되었다.
군은 백령도(白翎島) · 대청도(大靑島) · 연평도(延坪島) · 덕적도(德積島) · 영흥도(靈興島) 등 25개의 유인도(有人島)와 75개의 무인도(無人島)로 이루어져 있다. 대부분의 섬들은 산세가 험하여 산지와 구릉지로 이루어져 있다.
대청도의 삼각산, 선갑도의 선갑산 · 덕적도의 국수봉 등은 300m가 넘는 봉우리들이며, 이외에는 200m가 넘지 않는 산들이 여러 섬에 산재해 있다. 계곡과 해안에만 평지가 매우 좁게 형성되어 있는데, 계곡을 흐르는 하천의 유로가 짧아 넓은 평야를 형성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영흥도 · 백령도 등 큰 섬의 해안에는 갯벌을 매립한 간척지가 넓게 조성되어 있어 농경지로 활용되고 있다. 이 간석지는 경기도와 인천광역시 전면의 서해안 일대에서 매우 넓게 형성되어 있으며, 해수의 영향을 덜 받는 내륙의 간석지에는 염생습지(salt marsh)가 발달되어 있기도 하다.
백령면 연화리에는 백령중화동교회를 비롯하여, 옹진 백령도 사곶 사빈(천연기념물, 1997년 지정) · 옹진 백령도 남포리 콩돌해안(천연기념물, 1997년 지정)이 있다. 백령면 진촌리에는 반공유격전적비와 옹진 백령도 진촌리 맨틀포획암 분포지(천연기념물, 1997년 지정)가 있으며, 덕적면 진리에 3·1운동기념비가 있다.
이 군은 도서지역인 관계로 수산업이 발달되어 있으나, 대부분 반농반어의 특성을 보이고 있어 상대적으로 농업생산에 비해 그 비중이 약하다. 또한, 수산업 인구는 점차 줄어들고 있으나 덕적도와 영흥도 인근 어장에서는 꽃게 · 새우 · 민어 · 피조개 등과 대청도 · 연평도 등 서해 5도 일대에서는 조기 · 홍어 · 까나리 · 우럭 · 복어 · 꽃게 등이 어획되고 있다.
특히, 연평도 근해의 조기어장은 예로부터 유명한데, 1967년에는 약 5만 톤이 어획되는 등 30년 전에는 우리나라에서 조기가 가장 많이 잡히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주항인 연평항에는 4∼6월이 되면 우리나라 전역에서 어부와 상인들을 태운 어선들이 몰려들어 ‘조기파시(波市)’가 형성되었었다. 그러나 현재에는 어족의 고갈로 명맥만 겨우 유지하고 있다.
교통은 인천과의 해상교통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으나 군내 도서들 간의 자체 연결망은 미약하고 따라서 각 도서내 육상교통망의 발달도 미약한 실정이다. 인천∼백령도간에는 쾌속선이 운항중에 있으며, 이외에도 주요 도서인 연평도 · 대청도 · 소청도 · 영흥도 · 덕적도 · 자월도 · 북도 등으로 인천 연안부두에서 출항하는 정기여객선과 행정선이 운항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