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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을 주원료로 발효시켜 만든 조미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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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을 주원료로 발효시켜 만든 조미료.
내용

장이라는 글자가 동양의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주례 周禮≫ 선부(膳夫)로 장 120동이란 표현이 나온다. 또 ≪사물기원 事物紀原≫에서는 주공(周公)이 장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장의 정체에 대하여 ≪주례≫의 주(註)에서 말하기는 “장에는 해(醢)나 혜(醯)가 있다.

해는 새고기·짐승고기·물고기 할 것 없이 어떤 고기라도 이것을 햇볕에 말려서 고운 가루로 하여 술에 담그고, 여기에 조로 만든 누룩과 소금을 넣어 잘 섞어 항아리에 넣고 밀폐하여 100일간 어두운 곳에서 숙성시켜 얻은 것이다. 혜는 재료가 해와 같으나 청매(靑梅)의 즙을 넣어서 신맛이 나게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주례≫ 속의 장인 해와 혜는 분명히 육장(肉醬)이다.

해는 소금으로 고기의 부패를 막으면서 발효에 의하여 단백질을 아미노산이나 펩타이드로 분해시킨다. 또 누룩에서 당분이 생성된다. 그리고 술을 넣었기 때문에 알코올과 생성된 산에 의하여 좋은 맛과 향기를 가지게 되는 것으로 중국 본래의 조미료이다.

우리 동이권(東夷圈)에서는 장을 콩으로 만들었다. 오늘날 농학계에서는 콩의 원산지를 만주라 본다. 만주는 고구려의 옛 땅이므로 콩재배의 개발은 우리들의 조상에 의하여 이루어진 셈이다. 최근 한반도 내에서도 콩의 야생종과 재배종의 중간 종이 발견되었다.

중국의 앙소·용산의 농경문화의 유물에는 콩이 보이지 않는다. ≪관자 管子≫에 의하면 서기전 7세기 초엽에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지금의 만주 남부인 산융(山戎)을 제압하고, 여기서 콩을 가져와서 융숙(戎菽)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와같이, 우리들의 조상은 스스로 개발한 콩을 교묘하게 가공하여 장을 만들어낸 것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고구려조에서는 고구려 사람들이 발효식품을 잘 만든다고 하였다. 이것이 어떤 종류의 발효식품인지 분명하지는 않다. 서기전 4세기경의 황해도 안악3호고분(安岳三號古墳)의 벽화에 우물가에 발효식품을 갈무리한 듯한 독이 보인다.

≪해동역사 海東繹史≫에서 ≪신당서 新唐書≫를 인용하여 발해의 명산물로서 책성(柵城)의 시(豉; 메주)를 들고 있다. 발해는 고구려의 유민이 세운 나라이다.

여기서 말하는 시에 대하여 ≪설문해자 說文解字≫에서는 배염유숙(配鹽幽菽)이라 하였다. 숙(菽)이란 콩이고 유(幽)는 ‘어둡다’ 뜻이니 어두운 곳에서 발효시킨다는 것이다. 여기에 소금을 섞으면 곧 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의 청국장에 해당하는 산국(散麴)이다.

콩을 개발하였고 일찍이 온돌의 원형인 갱(坑)을 가지고 있었던 고구려 사람들이 이러한 발효식품을 만들게 된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시가 다음과 같은 문헌에 보이기 시작하였다. ≪춘추좌씨전≫의 소(疏)에서는 “≪상서 尙書≫에서 국 끓이는 데 매실과 소금만을 쓴다고 하였다. 옛날의 조미료는 매실과 소금이고 시는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또, ≪예기≫의 내칙(內則)이나 ≪초사 楚辭≫의 소혼(招魂)에는 음식에 관한 이야기가 그렇듯 많이 나오는데도 시에 관한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한대(漢代)의 ≪급취편 急就篇≫이라는 책에 비로소 염시(鹽豉)라는 말이 나온다. 이로 미루어 시는 진한대(秦漢代)부터 중국에 나타나게 된 것이라 하겠다.

시는 중국 자체에서 개발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진대(晋代)의 ≪박물지 博物誌≫에서는 시를 외국원산이라 하였다. 송대(宋代)의 ≪학재점필 學齋佔畢≫에서도 구경(九經) 속에 시라는 글자가 없고, 방언(方言)에 시가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중국으로 보아서는 시란 외래품이라 하겠다.

≪사기≫의 화식전(貨植傳)에 의하면 일반 제조업자의 이윤이 10분의 2 정도인 데 비하여 시 제조업자의 이윤은 10분의 5에서 10분의 3 정도나 된다고 하였다.

시의 재료가 본디부터 알려진 것이라면 그렇게 많은 이윤이 있을 리 없다. 따라서, 시 제조업자는 외래의 시 제조의 비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윤이 커서 부자가 된 것으로 추측된다.

고구려사람이 발효식품을 잘 만들고, 발해의 명산물로서 시를 들고 있으며, 콩의 원산지가 동이권이고 중국사람 스스로 시를 외래품이라고 한 것을 생각하면 오늘날의 청국장에 해당하는 것이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이 땅의 북부에서 싹터 중국에 가서 시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므로 본디의 중국의 장은 해란 이름의 육장이고, 우리의 장은 시란 이름의 두장(豆醬)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인들이 두장을 시라 표현한 까닭은 ≪석명 釋名≫의 석음식(釋飮食)에 보면 “시(豉)는 시(嗜 : 즐긴다는 뜻)와 같은 음이다.

오미(五味)를 조화하는 데 시를 쓰면 그 맛을 즐길 수 있다. 따라서 제나라 사람들은 시(嗜)와 같은 음인 시(豉)를 쓴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500년 초엽의 ≪제민요술 齊民要術≫에 보면 구체적인 시 제조법이 기록되어 있다. 즉, 콩을 삶아 익혀서 어두운 방에 놓아두면 곰팡이가 번식하여 황의(黃衣)가 덮이게 되고 단백질이 분해된다.

이것을 씻어서 균사(菌絲)를 제거하고 짚이 깔려 있는 움 속에 놓아두면 짚에 붙어 있는 낫도균 등에 의하여 콩성분이 더욱 분해되고 점질물(粘質物)도 생성된다. 이것을 햇볕에 말린 다음에 물에 우려내어 조미료로 쓰기도 하고 건조시키지 않고 그대로 쓰기도 한다. 오늘날의 청국장과 매우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우리 나라 삼국시대의 장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 본기 신문왕 3년(683)에, 왕이 김흠운(金欽運)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는데 납채(納采)로서 미(米)·주(酒)·유(油)·밀(蜜)·장(醬)·시(豉)·포(脯) 등 135수를 보냈다는 내용에 보인다. 여기에서는 시와 장을 구별하고 있다.

장은 무엇일까? 일본의 ≪다이호율령 大寶律令≫(701)의 대선직(大膳職) 주장(主醬)에 보면 장은 장(醬)·시(豉)·말장(末醬)의 셋으로 정리되어 있고, ≪쇼소원문서 正倉院文書≫ 덴페이 11년(739) 정세장(正稅帳)에도 말장이라는 말이 나오면서 ‘미소’라 읽고 있다.

이 미소라는 말의 어원에 대하여 아라이(新井白石)는 그의 ≪도우가 東雅≫라는 책에서 고려의 장인 말장이 일본에 들어와서 그 나라 방언 그대로 ‘미소’라고 불렸다고 하였다.

일본에서 말장을 우리 나라의 방언 그대로 미소라고 하였다면 미소의 어원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만주어로 장을 ‘미순(misun)’이라 하고, 또 ≪계림유사≫ 고려방언에서는 장왈밀조(醬曰密祖)라 하였으며, ≪이두고 吏頭考≫에서는 말장며조, 즉 훈조(燻造)라 하였으며, ≪증보산림경제≫에도 말장이라 적고 며조라 부르고 있다. 이것으로 미순→밀조→미소의 계열이 성립된다.

만주 남부에서 개발한 배염유숙은 오늘날의 청국장의 무리로서 중국에 가서 시라 불리게 되었다. 한편 만주 남부에서는 시 아닌 또 하나의 장이 개발되었으니 이것이 미소(末醬)이다.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의 말장은 어떤 것인지 당시의 일본 문헌을 통해서 정체를 잡기가 매우 애매하다.

무가이(向井之升)가 1671년에 지은 ≪호쥬비요우와매이혼소 庖厨備用倭名本草≫에서는 일본 미소의 본래 모습을 잘 설명하고 있다.

곧 “요즘의 미소는 콩과 쌀누룩으로 만들지만 본래의 미소는 콩만을 써서 삶아 짓찧어 둥글거나 모난 떡같은 모양을 만들어 곰팡이가 핀 뒤에 건조한 장메주 이른바 병국(餠麴)을 만들고, 이것을 부셔서 소금과 함께 통에 채워서 숙성시킨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산촌에서는 콩으로 만든 메주덩이로 된장을 만들고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메주덩이나 된장처럼 고체상태의 것을 말장이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일본의 간무왕(桓武王) 호키(寶龜) 2년(771)의 ≪호샤잇사이교쇼코쿠사쿠카이 奉寫一切經所告朔解≫에서 “장 4말 2되는 콩 5말로 즙을 얻는다.”고 하였으니 당시의 장은 액체상태의 간장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일본에는 쌀이 풍부하므로 콩에다 쌀누룩을 섞은 된장을 만들어 미소라 하였고, 밀이 풍부한 중국에서 콩에다 밀을 섞어 간장을 만드니 감칠맛에 단맛이 더해진 것이다.

이와 같이 옛 고구려 땅에서 발상한 두 장은 중국과 일본에 전파되어 마침내 중국·한국·일본의 세 나라로 하여금 세계의 조미료 분포상으로 한계열의 두장권을 형성하게 한 것이다.

≪고려사≫ 식화지(食貨志)에는 1018년(현종 9)에 거란의 침입으로 추위와 굶주림에 떠는 백성들에게 소금과 장을 나누어 주었다는 기록과 1052년(문종 6)에 개경의 굶주린 백성 3만여 명에게 쌀·조·시(豉)를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고려시대의 장과 시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을까?

중국의 시에는 담시(淡豉)와 함시(醎豉)가 있다. 담시는 콩을 삶아 청국장을 만들 듯이 하여 건조한 것이고, 함시는 이에 소금·생강·천초·귤·차조기·회향·행인 등을 섞은 것이다.

우리 나라의 ≪임원경제지≫에서는 “담시는 그것이 무엇인지 정체를 잊어버리고 함시만이 간혹 약으로 쓰일 정도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시를 흔히 메주라고 풀이하게 되었다. 구황식품으로 시를 나누어주었다. 이것은 굶주린 사람들이 당장에 먹어야 하는 것이므로 시를 메주로 보기에는 조금 무리인 듯하다.”고 하였다.

이 때의 시는 된장이고 장은 간장인 것 같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메주에 의한 장이 주류를 이루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조선시대의 구체적인 장담그기를 ≪증보산림경제≫ 동국장법(東國醬法)을 통하여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장독을 엎어놓고 작은 구멍이 있는지 없는지를 연기를 내어서 조사한다. 장독은 여러 해 쓰던 것이 좋다. 둘째, 소금을 몇 달 저장하여 간수를 흘러 내리게 한 것을 쓴다. 셋째, 물은 감천(甘泉)이나 강심(江心)의 물을 큰솥에 받아 끓이고 여기에 소금을 녹여서 식으면 밭쳐서 장담그기에 쓴다.

넷째, 메주만들기는 높고 마른 땅에 말밥통같이 긴 구덩이를 파놓는다. 콩을 무르도록 삶다 절구에 넣고 잘 찧어서 손으로 중간 크기의 수박만한 덩이를 만들고 큰칼로 쪼개어 두께가 한치 정도인 반달모양으로 한다. 이것을 구덩이 속에 매단다.

구덩이는 가마니나 풀 따위로 덮어주고, 다시 비·바람을 막도록 해놓는다. 메주덩이가 스스로 열을 내고 옷을 입게 되기를 기다려 뚜껑을 열어서 한 차례 이것을 뒤집어 준다. 8∼9차례 이와 같이 하면 수십 일에 이르러 거의 다 마르니 꺼내어 다시 바짝 말린 뒤에 장을 법대로 담그면 맛이 좋다는 것이다.

다섯째, 장담을 담글 때는 메주 1말, 소금 6∼7되, 물 1통으로 한다. 겨울과 가을에는 소금이 적어도 좋으나 봄과 여름에는 많은 편이 좋다.

여섯째, 숙성한 뒤에 장독 속을 우물처럼 파서 그 안에 괸 청장을 날마다 떠내어 따로 작은 항아리에 받아 낸다. 이와 같이 콩만으로 만든 메주를 써서 된장·간장을 얻는 방법이 조선시대 장의 주류를 이루었다.

1800년경의 ≪북학의 北學議≫에서는 당시의 메주만들기의 실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장메주 만드는 자는 메주 만드는 시기가 되면 원근 여러 지방의 콩을 모아 삶게 되는데 양이 너무 많아서 모두를 정하게 하지 못한다. 주는 사람도 가려서 주지 아니하고 받는 사람도 씻지 않아서 모래나 좀벌레가 섞여 있다.

그래도 그들은 예사로 알고 괴이쩍게 여기지 않는다. 그 장을 먹으려고 하면서 그 메주를 더럽게 취급하니 이것은 먹는 우물물에 똥을 넣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또 콩을 삶아서 파선(破船)의 밑바닥에 쏟고는 옷을 걷어붙이고 맨발로 밟는다. 여러 사람이 오르내려서 더럽혀진 배의 바닥에서 밟는다. 그러나 그 뿐인가! 온몸에서 흐르는 땀이 다리를 타고 발 밑의 콩에까지 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흔히 된장 속에서 발톱이나 머리카락이 발견된다.

강계(江界)사람은 장메주 만들 때에 반드시 물에 걸러 일고 삶아서 익으면 망치로 쳐서 한 장씩 아주 반듯하게 만들어 낸다. 무릇 장메주는 이와 같이 만들어야 할 것이다.”고 하여 우리의 장이 매우 불결하다는 것이 지적되고 있다.

우리의 장맛은 집·지방마다 다르다. 이것은 삶은 콩덩이에 어떤 미생물의 포자가 떨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바람직한 곰팡이의 포자가 많이 떨어져야만 좋은 메주가 될 수 있으나 ‘봉사 돌 던지기’로는 품질이 균일해질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가 오히려 집집마다 독특한 장맛을 빚어내어 향수(鄕愁)의 맛을 낳게 해주기도 한다.

요즘은 삶은 콩에다 종국(種麴)을 섞어서 발효시키고 있다. 그러면 고린 냄새도 없고 며칠 만에 메주를 얻을 수 있다. 이것을 개량메주라 한다. 개량메주로 만든 장은 콩의 단백질이 잘 분해되어 감칠맛이 한결 높아진다. 그러나 여러 가지 미생물에 의하여 만들어진 본래의 메주로 만든 것보다 맛이 단순하다.

또 본래의 메주는 단백질이 완전 분해되지 않고 펩타이드의 형태로 많이 남아 있다. 따라서 이것을 뚝배기에 넣고 끓이는 된장찌개는 끓이면 끓일수록 펩타이드가 아미노산까지 분해되어 맛이 좋아진다.

그러나 개량메주로 끓인 된장찌개는 오랫동안 끓이면 아미노산이 채소·고기·두부 등에 스며들고 국물은 담백해진다.

그래서 본래의 메주에다 개량메주를 섞어서 된장찌개를 끓이는 일도 많아지고 있다. 그리고 요즘은 도시의 주택환경이 바뀌어 집에서 메주만들기가 어려워져 시골의 친척에 부탁하거나 공장제품의 메주를 사들이고 있다.

메주를 소금물에 담그는 일을 침장(沈醬)이라 한다. ≪동국세시기≫에서는 침장(沈醬)과 침장(沈藏 : 김장)의 두 가지 일을 인가일년(人家一年)의 2대행사라 하였다. 침장을 하고 40∼50일간 숙성시켜 액체를 퍼내어 달인 것이 간장이고 그 찌꺼기가 된장이 된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도 된장 전용과 간장 전용의 메주가 있었다.

이 때 각각의 메주가 다른 것이 아니고 소금물의 양이 다를 뿐이다. 메주에 겨우 잠길 정도의 소금물만을 넣어서 숙성시키면 맛 좋은 된장이 되고, 소금물을 많이 넣으면 간장을 많이 떠낼 수 있는 것이다.

간장을 해마다 달이면서 몇 년간이나 저장시키면 빛깔과 맛이 진한 간장을 얻을 수 있으니 이것을 진장(陳醬)이라 한다.

또 퍼낸 간장에 해마다 새로운 메주를 넣어 약주 만들 때의 덧술하듯이 숙성시켜 나가면 덧장이라 하여 매우 진하고 맛 좋은 간장을 얻을 수가 있다. 그런데 요즘의 이른바 왜간장이라는 것은 콩에다 밀을 섞어서 만든 간장메주를 소금물에 넣어 숙성시킨 것으로, 우리 나라에서도 공장생산물에 널리 쓰이고 있다.

1660년의 ≪구황보유방 救荒補遺方≫에 의하면 콩 한 말을 무르게 삶아내고 밀 5되를 볶아 가루 내어 콩과 잘 섞어 온돌에 펴서 띄운다. 황의(黃衣)가 전체적으로 피면 볕에 내어 말린다. 이와 같이 하여 얻은 메주는 소금 6되를 푼 따뜻한 물에 넣고 양지바른 곳에 두어 자주 휘저어 주면서 숙성시킨다. 이것은 왜간장과 비슷하다.

왜된장은 콩 삶은 것에 쌀메주·소금을 섞어서 숙성시킨 것이다. ≪구황보유방≫에서는 콩 1말을 충분히 삶고 누룩 3되, 소금 4되를 섞어서 찧고 항아리에 넣어 단단히 봉하여 양지바른 곳에 두면 맛이 좋다고 한다. 이것 역시 왜된장과 비슷하다.

이와 같은 간장이나 된장 만들기는 일본의 독자적인 개발이 아니고, 원대(元代) 초엽의 가정백과전서인 ≪거가필용 居家必用≫에도 나와 있고, 조선시대 중엽에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우리 나라에서는 언제부터인지 이러한 종류의 장은 모습을 감추게 되었고, 고추장·즙장(汁醬)·청국장 등 여러 가지 특수한 장을 개발하여 나름대로 즐겨왔다.

≪사시찬요 四時纂要≫나 ≪산림경제≫에서는 즙장 만들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콩 1말을 물에 충분히 불려서 밀기울 2말과 같이 곱게 찧어가지고, 삶아서 꼭꼭 뭉친 뒤 단자를 만들고 닥나무 잎으로 덮어서 옷을 입기를 기다려 햇볕에 말린다.

즙장을 담글 때는 메주가루 1말, 물 2되, 소금 3홉을 섞어서 항아리에 넣어 봉하여 말똥 속에 묻었다가 다시 7일 만에 겻불 속에 묻으면 14일 만에 먹을 수 있다.”고 하였다.

청국장은 일본에서는 발효된 것에 간장을 쳐서 그대로 먹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청국장에 소금·파·마늘·고추 등을 섞어 절구에 찧어서 된장찌개를 만든다.

우리 나라 특수장으로서 가장 이색적인 것은 역시 고추장이다. 잘 건조된 장메주를 가루내어 여기에 고춧가루와 소금물을 일정한 비율로 섞어서 3∼6주간 발효시켜서 만든다. 짠맛·매운맛·감칠맛이 조화되어 있다.

그러나 기호성의 변천에 따라 단맛마저 요구하게 되어 찹쌀가루를 떡으로 하여 장메줏가루와 함께 담그게 되었다. 고추장은 식욕을 돋우는 우리 나라의 가장 중요한 조미료의 하나이다.

≪증보산림경제≫에서는 장에 대하여, “장(醬)은 장(將)이다. 모든 맛의 으뜸이요 인가의 장맛이 좋지 않으면 비록 좋은 채소나 맛있는 고기가 있어도 좋은 요리가 될 수 없다. 촌야의 사람이 고기를 쉽게 얻지 못하여도 여러 가지 좋은 장이 있으면 반찬에 아무 걱정이 없다. 가장(家長)은 모름지기 장 담기에 뜻을 두어 오래 묵혀 좋은 장을 얻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실제로 장맛이 좋아야 음식 맛이 좋음은 당연한 일이다. 장독대는 어느 집이고 극진히 위하였다. 해가 뜨면 뚜껑을 열어놓고 해가 지기 전에 덮었다. 장을 담그려면 우선 택일(擇日)을 하고 고사(告祀)를 지내기도 하였다.

만일 장맛이 나빠지면 무언가 불길한 징조일 것이라고 보았으니 각 가정의 주부들은 장독대 관리에 정성을 다하였던 것이다.

장맛이 나빠지는 것은 귀신이 장을 먼저 먹기 때문이라 보고 이것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장독에 금줄을 치고 또 담근 장 위에 숯이나 고추를 띄웠다. 귀신이 숯의 구멍 속에 끼어 들어가 버린다고 보았던 것이며, 고추는 귀신이 싫어하는 붉은 빛깔이고 또 고추가 너무나 맵기 때문에 달아나버린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규합총서 閨閤叢書≫에서는 장담그기의 택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장 담그는 데에 좋은 날은 병인(丙寅)·정묘(丁卯)·제길신일(諸吉神日)·정일(正日)·우수일(雨水日)·입동일(立冬日)·황도일(黃道日)이고, 삼복(三伏日)에 장을 담그면 벌레가 안 꾀고 해돋기 전에 담그면 벌레가 없다는 것이다.

또 장담그기를 꺼리는 날인 수흔일(水痕日 : 대월의 초일·초칠·십 일, 소월의 초삼·초칠·십이·이십육 일을 말한다.)에 담그면 가시가 꾀고 육신일(六辛日)에 담그면 맛이 사납다는 것이다.

선조대 정유재란 때의 일이다. 어전회의에서 왕이 영변(寧邊)으로 피난갈 것으로 정하고, 백관(百官)이 몰려가려면 장을 미리 준비해야겠다고 했다. 남자안(南子安)이 “신공(申公)을 합장사(合醬使)로 삼아 영변 땅에 먼저 파견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한유천(韓柳川)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신공만은 안됩니다. 신이라는 성은 장담그기를 꺼리는 달인 신일(辛日)과 음이 같으니 신불합장(申不合醬)이라 좋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한다. 장의 중요성은 마침내 이러한 금기까지 낳게 한 것이다.

장의 재료는 콩이다. 콩에는 단백질이 38%나 있어서 곡물 가운데서 으뜸이다. 또, 콩속에 들어 있는 단백질의 질은 생물가(生物價) 78로서 동물성 단백질에 크게 손색이 없다. 한편, 콩에는 지방도 18%나 함유되어 있다.

특히, 콩속의 지방은 불포화지방산인 리놀산과 리놀렌산이 풍부하다. 이들 불포화지방산은 혈액 속의 콜레스테롤의 양이 늘어나는 것을 막는 동시에 동맥혈관의 벽에 달라붙은 콜레스테롤을 녹여내는 작용을 한다고 한다.

실제로 쇠고기만으로 사육한 개와 콩 단백질로 사육한 개에 대하여 서로 수영을 시켜본 결과, 콩 단백질로 사육된 개가 장거리 수영에서 이겼다고 한다.

대체로, 콩을 먹는 우리 나라 사람은 서양 사람에 비하여 단시간 동안에 힘을 내는 순발력은 모자라지만 내구력은 그들보다 크다. 이와 같이, 콩의 영양가로 미루어 장의 영양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메주는 ≪동의보감≫에 의하면 “두통한열(頭痛寒熱)을 다스리고 땀을 내게 한다. 따라서, 메주와 파를 섞어 먹거나 메주·형개(荊芥)·방풍(防風)·상엽(桑葉)을 함께 달여서 한 사발 마시고 이불을 덮고 있으면 온몸에서 땀이 흐르고 이열치열의 원리에 의하여 열이 내리게 된다.”고 하였다.

이 밖에 “메주는 식체를 지우고 천식에도 효과가 있다.”고 하였다. 장은 “모든 어육·채소·버섯의 독을 지우고 열상과 화독(火毒)을 다스린다. 또, 장은 흔히 콩과 밀로써도 만들지만, 그 약효가 두장에 미치지 못하며, 해(醢)라고 하는 육장과 어장은 약에 넣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참고문헌

『고려이전한국식생활사연구』(이성우, 향문사, 1978)
『한국식품문화사』(이성우, 교문사, 1984)
관련 미디어 (3)
집필자
이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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