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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수(張德秀)

정치인물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부사장, 조선임보전국단 이사 등을 역임한 언론인.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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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동아일보 부사장, 조선임보전국단 이사 등을 역임한 언론인.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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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황해도 재령군 출신. 본관은 결성(結城). 호는 설산(雪山). 아버지는 장붕도(張鵬道)이고, 어머니는 김현묘(金賢妙)이다. 1900년 서당에서 1년간 한문 교육을 받았고, 1901년부터 1906년까지 사립연의학교(私立演義學校)에서 수학하였다.
1912년 일본에 유학하여 와세다(早稻田)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하여 1916년에 졸업하였다. 1923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오레곤(Oregon)주립대학에 입학했으나 중도에 그만두고, 이듬해 컬럼비아(Columbia)대학에 입학하여 1936년에 “영국의 산업화 정책”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김성수(金性洙)·송진우(宋鎭禹)·김철수(金綴洙) 등과 교유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생애 및 활동사항
1907년부터 1912년까지 진남포이사청의 급사와 평양부청의 고원(雇員)을 지냈으며, 1911년 판임관 시험에 합격하였다. 1912년부터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재일본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在日本東京朝鮮留學生學友會)에 가입하고, 이 단체의 기관지 『학지광(學之光)』을 발간하는 편집부 부장과 평의원 등을 맡아 활동하였다. 1916년 김철수(金喆壽)를 비롯한 한인 유학생과 중국 학생들과 함께 일제의 타도와 새 아시아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신아동맹당(新亞同盟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17년 귀국했다가 이듬해에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여운형 등을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다. 1918년 여운형과 함께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결성에 참여하고 김규식(金奎植)을 파리강화회의의 한국대표로 파견하였다. 1919년 국내에 잠입하여 독립운동의 자금을 모금하는 활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주거제한 처분을 받았다.
1920년 『동아일보』 창간과 더불어 초대 주필과 부사장이 되었다. 1920년대 초반 조선교육회 평의원, 조선청년회연합회 집행위원, 조선노동공제회 의사부원을 비롯한 사회단체의 간부로 활동하였으며, 민립대학설립기성준비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22년 동아일보사가 발기한 재외동포위문순회강연단의 일원으로 여러 차례 강연하였으며, 사회주의 계열의 사회혁명당(社會革命黨)과 상해파 고려공산당에도 참여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부터 미국 유학을 하는 동안 미주지역 한인유학생의 단체인 북미한국유학생총회(北美韓國留學生總會)에 가입하여 부회장 등을 맡아 활동하였다. 특히 이승만의 지지 단체인 동지회(同志會)에 가입하고, 1927년부터 허정(許政) 등과 함께『삼일신보』의 창간 및 발간을 위해 노력하는 등 이승만을 지지, 지원하는활동을 벌였다. 이 무렵 그는 박은혜(朴恩惠 ; 훗날 경기여자고등학교 교장)과 결혼했다.
1936년 귀국하여 이듬해 김성수의 도움으로 보성전문학교의 강사를 거쳐 교수로서 활동하였으며, 『동아일보』의 취체역도 겸직하였다. 1938년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사건에 연루되었으며, 이후 일제가 사상전향 공작을 위해 조직한 친일단체인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時局對應全鮮思想報國聯盟)의 간부를 지내면서 기관지『사상보국(思想報國)』의 발간을 주도하였다.
1939년 일제 전시체제하에서 관변 통제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과 1940년 이 단체를 확대 개편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참사(參事) 등을 맡았고, 야마도쥬쿠(大和塾)에 참여하였다. 1941년 일제 침략전쟁의 협력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과 이사로 활동하였으며, 1945년 해방 직전에 결성된 국민의용대 조선총사령부 지도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친일단체의 활동과 더불어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지·지원하는 내용의 글을 신문과 잡지에 발표하고, 여러 차례 강연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송진우·김성수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의 창당을 주도하고, 외교부장과 정치국장 등을 지내며 당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승만이 주도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獨立促成中央協議會)와 대한독립촉성국민회·비상정치회의를 포함한 우파 세력의 정당과 주요 정치단체에 참여하여 대표적인 이론가로서 활동하였다. 1946년 10월에 실시된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선거에 서울에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으나, 선거 무효로 다시 실시된 선거에서 낙선하였다.
1947년 12월 2일 자신의 집에서 현직 경찰과 학생에게 암살당하였다.
장덕수의 일제시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제2조 제11·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15: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317~366)에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15: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친일반민족행위자진상규명위원회,현대문화사,2009)

  • 친일인명사전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편, 민족문제연구소, 2009)

  • 현대사를 베고 쓰러진 거인들  (박태균, 지성사, 1994)

  • 설산 장덕수  (이경남, 동아일보사, 1981)

  • 「장덕수,대한민국 건국의 논거와 방략을 마련하다」(김학준,『한국사 시민강좌』43,일조각,2008)

  • 「설산 장덕수(1894~1947)의 정치활동과 국가인식」(심재욱,동국대 사학과 박사학위논문,2007)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제재향
개정 (2012년)
허종(충남대학교 국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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