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출생했다. 필명은 장혁주(張赫宙)이다. 1913년 경주 계림보통학교에 입학해 1919년 졸업했으며, 1921년 결혼했다. 같은 해 관립 대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했고, 4학년 때 학생 파업에 가담해 무기정학을 당한 뒤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26년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립학교(安德面立學校) 교원을 지냈다. 당시 대구의 무정부주의 단체인 진우동맹(眞友同盟)에서 활동했고, 이후 청송·예천·대구 등지에서 사립학교 교원과 1929년 대구 희도소학교(喜道小學校) 훈도로 생활했다.
일본어로 쓴 「아귀도(餓鬼道)」가 1932년 4월 일본 잡지 『개조(改造)』의 현상 공모에 2등으로 입선해 문단에 등단했다. 일본인 이외의 작가가 처음으로 일본 잡지에서 실시한 현상문예에 입상해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한국어로 쓴 소설로는 1933년부터 1934년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장편 「무지개」와 1934년부터 1935년 「삼곡선(三曲線)」, 1936년 「여명기(黎明期)」 등이 있다. 1936년 여름 도쿄로 이주했고, 1938년 희곡 「춘향전」을 썼다. 이 작품은 3월부터 11월까지 일본과 조선의 7개 도시에서 순회 공연되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서울에서 열린 내선반도문화좌담회(內鮮半島文化座談會)에 참석했다.
1938년 10월 경성부민관에서 열린 좌담회 ‘조선 문화의 장래’에 참석했고, 1939년 2월 농촌갱생운동과 ‘내선일체’를 긍정한 「조선의 지식인에게 호소함[朝鮮の知識人に訴ふ]」을 발표했다. 같은 달 대륙개척문예간화회(大陸開拓文藝懇話會) 발족에 참가하고 만몽개척청소년의용군훈련소(滿蒙開拓靑少年義勇軍訓練所)를 방문했다. 1940년 1월 『매일신보』 도쿄지국이 주최한 동경재주반도명사좌담회(東京在住半島名士座談會)에 참석했다. 1941년에는 장편 3부작 「인간의 유대[人間の絆]」를 발표했다. 1942년 2월 황도조선연구회(皇道朝鮮硏究會)의 위원이 되었고, 녹기연맹에 연맹원으로 참여했고, 5∼6월 조선총독부 척무과(拓務課)의 위촉으로 만주 개척촌(開拓村)을 시찰했으며, 8월 도쿄에서 개최된 대동아문학자대회(大東亞文學者大會)에 참석했다. 1944년 1월 징병제 실시를 지지한 창작집 「이와모토지원병[岩本志願兵]」을 노구치 미노루[野口稔]라는 이름으로 출간했다. 같은 해 일본문학보국회의 황도조선연구회 위원으로 일본 내 탄광을 위문했고, 1945년 5월 만선문화사 초청으로 중국과 만주를 순회한 후 8월 도쿄에 돌아가 나가노현에 거주했다.
1945년 해방이 되었지만, 귀국하지 못했다. 조총련과 민단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았고 좌·우익 양 진영으로부터 친일파라는 비판을 받았다. 일본에 머물러 있다가 1950년 한국전쟁을 취재한 「아, 조선[嗚呼朝鮮]」을 1952년 5월 출간하고, 10월 일본에 영구 귀화했다. 1954년 자전적 장편인 「편력의 조서[遍歷の調書]」를 출간하고 9월 일본농민문학회의 발기인이 되었다. 일본과 조선의 관계를 다룬 1977년 「한과 왜-천손민족은 어디에서 왔는가[韓と倭ー天孫民族はどこから來たか]」, 1980년 「도자기와 검-히데요시의 조선출병과 도공의 대거도래[陶と儉-秀吉の朝鮮出兵と陶工大渡來]」 등의 논픽션을 출간했으며, 1998년 2월 1일 사이타마현[琦玉縣]의 병원에서 사망했다.
장은중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5: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519∼550)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