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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학교(專門學校)

교육제도

 근대 이후 신교육의 도입에 따라 발달된 대학교육 수준의 고등교육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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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브란스 연합의학전문학교
분야
교육
유형
제도
시대
근대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근대 이후 신교육의 도입에 따라 발달된 대학교육 수준의 고등교육기관.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1. 근대 및 일제강점기의 전문학교
1915년에 공포된 「전문학교규칙」 및 「개정 사립학교규칙」에 따라 처음으로 설립기준이 마련되었다.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을 입학대상으로 하였으며, 수업연한은 3∼4년으로 하였다.
1915년에 공포된 「전문학교규칙」과 「개정 사립학교규칙」에 따라, 1895년 법관양성소로 출발한 경성전수학교가 1916년에 경성법학전문학교로, 1899년 경성의학교로 설립된 의학강습소가 1916년에 경성의학전문학교로, 1906년에 설립된 공업전습소가 1916년에 경성공업전문학교로, 1904년 농상공학교로 설립된 수원농림학교가 1918년에 수원농림전문학교로 각각 개편되어 관립 전문학교 4개 교가 발족되었다.
반면 일제는 이들 규칙에 따라 사립 전문학교의 설립기준을 강화하여, 1905년에 설립된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를 비롯하여 당시 세브란스연합의학교, 경신학교(儆新學校) 대학부, 이화학당(梨花學堂) 대학과, 숭실대학(崇實大學) 등 고등교육을 실시한 사립학교를 각종학교로 격하하여 교명을 변경하게 하였다. 이와 함께 전문학교의 학과목도 성경·지리·역사 등을 과하여서는 안된다고 규정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의도는 한국인을 위한 사립 고등교육기관을 자연 소멸하게 하고, 관립 전문학교를 통하여 그들 자신이 훈련한 극소수의 한국인만을 일본통치기구의 하급관리로 봉사하게 하려는 교육방침에서 나온 것이다.
이에 경신학교 대학부는 미국 기독교 북장로교·남북감리교와 캐나다선교부 연합위원회의 공동노력으로 전문학교를 유지, 경영할 기독교연합재단법인을 설립하여 1917년 3월에 사립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로서 인가를 받았으며, 같은 해 5월 세브란스연합의학교도 재단을 설립하여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인가를 받았다.
이와 같이 기독교계 연합세력이 추진한 전문학교의 설립을 인가한 것은 그들의 재정능력에도 기인되는 것이지만, 「전문학교규칙」 및 「개정사립학교규칙」에 대한 내외기독교세력의 거센 반발을 무마해 보려는 일제의 정책적인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다.
따라서 제1차 「조선교육령」에 의한 전문학교는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1919년 현재 관립 4개 교, 사립 2개 교의 6개 교가 있었으나 재적학생 수는 총 585명에 불과하였으며, 교원도 총 92명 중 한국인 교원은 21명에 지나지 않았다.
1919년 3·1운동으로 일제는 이른바 문화정치를 표방하여 1922년 2월에 제2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하고, 종전의 차별교육을 완화하였다. 이에 따라 일제 중기에는 관공립 및 사립 전문학교가 점차 증설되었다. 먼저 관공립으로는 1922년에 경성고등상업학교, 1929년에 평양의학전문학교, 1933년에 대구의학전문학교가 발족되어 모두 7개 교로 되었다.
사립으로는 각종학교로 격하되었던 보성법률상업학교는 교장 고원훈(高元勳)이 총독부에 전문학교 승격에 관한 타진을 거듭하는 한편, 김병로(金炳魯) 등이 재단법인 기성회를 조직하여 사회독지가들에게 호소하면서, 각 지방의 민간독지가 58명의 공동명의로 1921년 11월에 재단법인의 설립과 함께 보성전문학교를 인가받아 교명을 되찾게 되었다. 이를 비롯하여, 보성과 같이 각종학교로 격하되었던 이화와 숭실도 1925년에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숭실전문학교로 각각 승격되어 인가받았다.
이 시기에 새로 설립되거나 개편된 사립 전문학교로는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1929)·경성약학전문학교(1930)·중앙불교전문학교(1930) 등이 있으며, 이로써 1930년대 중반까지 사립 전문학교는 총 8개 학교가 되었다.
1922년 제2차 「조선교육령」이 공포된 이후, 1935년까지 전문학교의 변천은 [표]와 같다.
[표] 일제강점기의 전문학교
연 도\구 분설립학교수교원수 학생수
구분한국인일본인한국인일본인
초 기1912관 립117893-93
사 립-------
1919관 립475966474-474
사 립2141226111-111
중 기1923관 립58169177--1,061
사 립3-----445
1927관 립5------
사 립5--88--768
1931관 립535181216-8361,202
사 립89941140-4191,623
1935관 립715113128366--
사 립8110531631,204--
후 기1937관 립7471782255721,2221,857
사 립8---2,150-2,390
1940관 립8641812452258292,350
사 립10-----2,871
1943관 립9842082922452,2813,033
사 립11-----4,025
자료 : 『한국교육사』(오천석, 1964)
한편, 이 시기에 있어서 두드러진 발전의 하나는 사립 전문학교들이 내실을 기하고 확충을 꾀하였다는 사실이다.
보성전문학교는 김성수(金性洙) 등이 1932년부터 교사와 강당·도서관 등을 신축하였으며, 이화여자전문학교는 1930년 신촌에 새 교지를 마련하고, 본관· 체육관·음악관 등을 신축하기 시작하여 1935년에 새 캠퍼스로 이전하였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와 숭실전문학교 등도 새로운 시설을 마련하였으며, 일제 초기에 정체와 후퇴를 강요당하였던 사립 전문학교들이 어느 정도 활기를 되찾기 시작하였다.
또한, 일제의 융화·회유 정책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각 고등교육기관을 중심으로 항일독립운동이 확산되었다. 1921∼1928년 사이에만 무려 445건의 항일학생운동이 있었는데, 이 중 상당 부분이 당시의 사립 전문학교와 관련되어 있었다.
일제 말기인 1937∼1945년까지의 기간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인한 전시체제에서, 일제에 의한 식민지교육정책의 강화로 각종 탄압과 시련이 가중되었다. 한국인의 일본인화정책에 박차를 가하기 위하여 1938년에 제3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한 데 이어, 1943년 4월에 제4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였다.
이에 따라 1941년에는 전시동원을 위하여 전문학교 및 대학의 수업연한을 단축하였으며, 제4차 「조선교육령」에서 전문학교의 교육목적을 “황국의 도(道)에 따라 고등의 학술·기예에 대한 교육을 하며, 국가유용의 인물을 연성”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는 관공립 2개 교, 사립 4개 교의 6개 전문대학이 발족되고 기존의 사립 1개 교가 폐교되었다. 신설되거나 새로 개편된 학교는 관공립으로 경성광산전문학교(1939)와 부산고등수산학교(1941), 사립으로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1938)·대동공업전문학교(1938)·숙명여자전문학교(1939)·명륜전문학교(1942) 등이며, 1939년에 평양의 숭실전문학교는 일제의 신사참배강요로 자진 폐교하여 1943년에는 20개의 전문학교가 있었다.
1943년 전쟁의 막바지에 이르러 다시 「교육에 관한 전시비상조치령」을 공포하여, 문과 계통의 사립전문학교는 이과 계통의 학교로 바꾸고, 이과 계통의 전문학교는 학생수를 증가할 것이며, 잔여 문과 계통의 전문학교는 이것을 통합하도록 하였다. 또한, 문과 계통의 여자전문학교는 여자실무자·여자지방보도원의 양성소로 전환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같은 해 12월 이화여자전문학교는 ‘이화여자전문학교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자양성과’로, 숙명여자전문학교는 ‘농업지도원양성소’로, 명륜전문학교는 ‘명륜연성소’로 개칭되었으며, 1944년에는 연희전문학교가 ‘공업경영전문학교’로, 보성전문학교는 ‘척식경제전문학교’로, 경성법학전문학교와 경성고등상업고등학교는 ‘경제전문학교’로 개칭되는 시련을 겪게 되었다.
이 때부터의 학교는 징용 및 학도지원병 등으로 학생을 빼앗기고, 한편으로는 갖가지 전시근로동원에 요청되어 학교라기보다는 노동동원처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또 한 가지 두드러진 사실은, 1944년에 경성사범학교와 대구사범학교를 각각 사범전문학교로 개편하여 교원양성보다는 전시에 유용한 전문교육을 실시하도록 하였다는 점이다.
2. 광복 이후의 전문학교
광복 후 교육제도를 개편하면서 대학과 전문학교로 되어 있던 종래의 고등교육기관을 4년제 대학으로 일원화하면서, 과도적으로 2년제 대학 예과 또는 3년제 전문부를 신제(新制)의 대학에 병설하여 4년제 중학교 졸업생이나 전문학교 재학생들이 이를 마치고 대학에 편입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광복 전의 사립 전문학교는 모두 종합대학교로 승격, 개편되었으며, 1946년 10월 국립서울대학교가 발족됨에 따라 경성법학전문학교·경성공업전문학교·경성광산전문학교·경성의학전문학교·수원농림전문학교·경성경제전문학교·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등은 각각 서울대학교의 법과대학·공과대학·의과대학·농과대학·상과대학·치과대학 등으로 개편 및 통합되었다.
1949년에는 「교육법」이 제정, 공포되어 2년제 초급대학이 설치되었으며, 1963년에는 중학교 또는 고등학교 졸업자를 대상으로 하는 5년제 실업고등전문학교가 발족되었다. 실업고등전문학교의 교육목적은 산업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과 이론을 교수, 연구하고 산업기술을 연마하여 중견산업 기술인을 양성함에 두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5년제 전문학교로 설치, 운영해야 한다는 이론적 근거가 미약한 데다가 5년이라는 장기간의 교육연한으로 중도 탈락자가 많았고, 취업과 진학이 어려웠기 때문에 교육적 효과를 올리지는 못하였다. 이에 따라 1970년에 2년제 초급대학에 준하는 전문학교로 개편되어, 1969년에 23개이던 실업고등전문학교가 1975년에는 87개, 1978년에는 112개의 전문학교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전문학교의 입학은 대학예비고사에 떨어진 자도 가능하였기 때문에 양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교육내용의 질적 향상은 미흡한 실정이었다. 이와 같은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단기고등교육기관의 일원화시책을 강구하여, 1977년 12월에 전문대학의 설립을 규정하였다. 이에 따라 기존의 초급대학과 전문학교를 2년제 전문대학으로 개편하여 입학자격을 강화하고 교육내용을 전문화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의의와 평가
전문학교는 근대 이후부터 광복 전까지 우리나라의 고등교육을 이끌어왔으며, 광복 이후에는 과도기적 변천을 거듭하면서 단기고등교육기관의 역할을 담당하여 왔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손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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