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장례원판결사, 첨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이칭
노천(老泉)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56년(세조 2)
사망 연도
1527년(중종 22)
본관
영일(迎日)
주요 관직
장례원판결사|첨지중추부사
정의
조선 전기에, 장례원판결사, 첨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노천(老泉). 정홍(鄭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병조판서 정연(鄭淵)이고, 아버지는 김제군수 정자숙(鄭自淑)이며, 어머니는 중추원부사 이대(李臺)의 딸이다.

부인은 판관 심원(沈湲)의 딸(초취)과 의정부사인 남윤종(南潤宗)의 딸(계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77년(성종 8) 진사시에 합격하고, 1482년 음직으로 중부참봉(中部參奉)에 보임되고, 그뒤 사헌부감찰, 장례원의 사평(司評)·사의(司議), 사헌부지평, 제용감첨정을 거쳐 1507년(중종 2) 고부군수로 나갔다.

군수 재임 중인 1510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1512년 상의원정(尙衣院正) 재직 중에 이조판서 송질(宋軼)의 천거로 승지에 주의(注擬)되었다. 그러나 고부군수로 있을 때 송질의 청을 들어주어 관둔전의 사취를 방조하고, 관곡으로 파종시켜 준 것과 관련되어 천거하였음이 드러나면서 파직되었다.

1515년 3월에 은계찰방으로 복직되었으나 대간의 반대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그 뒤 서용되어 사재감정(司宰監正)·사도시정(司䆃寺正)·통례원우통례·원주목사와 승문원의 참교(參校), 판교 겸 춘추관수찬관(判校兼春秋館修撰官) 등을 역임하였다.

1523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면서 광주목사(光州牧使)로 나갔고, 이듬해 장례원판결사로 입조, 곧 첨지중추부사에 개수(改授)되었다. 성품이 근검하고 관후하였으며, 교유를 삼가고 학문에 증진하여 자못 성취가 있었다.

참고문헌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중종실록(中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모재집(慕齋集)』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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