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함경남도에서 태어났다.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하고 일제 시기 화학공장 기사(技師)로 활동하였다. 광복 후 소련군 사령부에 의해 북조선행정10국이 창설되었을 때 산업국장으로 선임되었다. 1946년 8월 북조선노동당중앙위원회 상무위원이 되었다. 1943년 4월부터 광산을 경영한 경력 때문에 일부 간부에 의해 친일파로 몰려 지방공장으로 쫓겨나기도 했으나 김일성(金日成)은 그 사실을 전해듣자 곧바로 그를 복귀시켰다. 과거 경력에는 문제가 있으나 능력에 의해 임용된 대표적인 사례이다.
1946년 노동당에 입당했고, 1946년 12월 18일부터 1947년 2월 21일까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기획국 부국장을 맡았으며, 1947년 2월 22일 북조선인민위원회 기획국장이 되었다. 1947년 북조선인민회의 함경남도 대의원을 거쳐 1948년 3월 북조선노동당 제2차 전당대회에서 중앙위원 및 상무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48년 8월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48년 9월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최고과학기술평의회 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50년 6월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953년 9월 소련, 1953년 11월 중국을 방문하였다. 1954년 3월 화학건재공업상(化學建材工業相), 1955년 1월 화학공업상의 직책에 올랐으며, 1956년 2월 공동원자핵연구소 설립에 관한 국제회의에 조선대표단 단장으로 참가하였다. 1956년 4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제3회 대회)으로 선출되었으며, 1956년 5월 화학공업상에서 물러나 부수상(副首相)에 올랐다. 1957년 8월 제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57년 9월 제2차 김일성 내각 부수상을 역임하였다.
1958년 9월 건국 10주년을 맞아 국기훈장(國旗勳章) 제1급을 수여받았고 인민상수여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60년 4월 경공업위원회가 설치되자 위원장에 올랐으며 부수상직을 겸임하였다. 1961년 9월 노동당 제4회 대회 중앙위원, 1962년 10월 제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62년 10월 제3차 김일성 내각 부수상 겸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는 등 북한 정권 수립과 김일성 유일지도체제 완성의 공로자이다.
사망 후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북한 당국은 그를 추도하여 원산경제대학을 정준택경제대학으로 개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