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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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단체
1911년 만주에서 조직된 친일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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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11년 만주에서 조직된 친일단체.
내용

용정촌(龍井村)에서 최초로 조직된 이래, 1915년 백초구(百草溝), 1917년 두도구(頭道溝)와 혼춘(琿春), 1918년 국자가(局子街)에 차례로 조직되었다.

1921년에는 연길현(延吉縣)의 동불사(銅佛寺)·천보산(天寶山)·걸만동(傑滿洞), 화룡현(和龍縣)의 남양평(南陽坪)·부동(釜洞), 왕청현(汪淸縣)의 양수천자(凉水泉子), 혼춘현의 흑정자(黑頂子) 등 십수개 처에 한꺼번에 조직되었다.

이는 1921년 조선총독부가 만주 지방의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는 보조기관으로, 그리고 민족해방운동가들과 조선인들을 유리시킬 목적으로 만주에 친일조선인 조직을 대거 결성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실현하였기 때문이다.

이로써 간도에는 모두 18개 지역에 민회가 조직되었으며, 가입된 조선인 가구수는 5만 8,618호였다. 이 단체가 조직된 곳은 일본 경찰기관이 배치된 도시 지역이었으며, 입회는 반강제적이었던 듯하다.

각 지역별 민회는 일본 영사관령에 의해 임원으로 회장과 부회장 각 1인, 주사와 서기, 대의원 약간 명을 두었고, 마을마다 회무의 집행과 자문에 응하기 위해 참의원을 배치하였다.

이들 임원은 모두 일본 영사의 인가를 얻어 임면되고 일본 관헌의 감독 밑에서 사무를 집행하였는데, 대부분 부유한 조선인들이 맡았다. 민회장회의(民會長會議)가 있어 각 지역 민회간의 연락을 담당했으며, 1929년 민회연합회를 결성하였다.

이 단체는 일제의 민족해방운동 탄압을 지원하는 한편, 일본 관서의 명령, 기타 포달(布達)을 조선인에게 전달하고, 조선인들이 제출한 서류를 접수, 이를 해당 관서에 전달하는 등 총독부 행정의 말단기관 역할도 수행하였다.

또 부유한 조선인을 민회에 계속 묶어 두기 위한 방편으로 자체적으로 금융사업을 실시하였다. 이 단체에 대한 간도 조선인의 반응은 냉담했고, 때로는 단체 임원들이 민족해방운동가들의 친일분자 소탕전 때 응징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일제침략(日帝侵略)과 친일파(親日派)』(임종국, 靑史, 1982)
『일제(日帝)의 한국침략정책사(韓國侵略政策史)』(강동진, 한길사, 1980)
「日本帝國主義と間島問題」(井上學, 『朝鮮史硏究會論文集』10,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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