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원시를 거쳐 1401년(태종 1) 증광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였다. 1406년 병조정랑, 1409년 내섬시소윤(內贍寺少尹) 재직 중에 이웃과 불화한 사건으로 파면되고, 다시 태종의 민무구(閔無咎) 제거와 관련되어 서형(庶兄) 조희민(趙希敏)과 아버지 조호가 사사(賜死)될 때 연루되어 이후 30여년간 금고생활을 하였다.
세종대 후기에 그 재주를 아낀 세종에 의하여 성균관사예로 서용되고, 이후 집현전학사를 지도하였다. 학문에 정진하여 명성이 있었고, 특히 한유(韓愈)의 글에 정통하였다.
그는 “총명한 것이 많이 읽는 것만 못하다. 나는 모든 글에 있어서 반드시 백 번씩 읽었다. 이리하여 비록 늙었으나 잊혀지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후학에게 독서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등 당시의 학문진흥에 공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