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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우합작위원회(左右合作委員會)

    정치단체

     좌우 합작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1946년 여운형과 김규식을 중심으로 조직된 정치 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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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우 합작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1946년 여운형과 김규식을 중심으로 조직된 정치 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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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미국은 좌우합작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미국이 미소공동위원회에 소극적이었던 중요한 이유는 남한 지역에서 우익 진영의 정치적 영향력이 미약하다는 것이었다. 즉 임시정부 수립 시 미국 측의 이해를 대변해줄 정치세력이 주도권을 잡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미소공동위원회를 결렬시켜 시간을 번 다음 우익 정치세력을 강화하고 좌익 세력을 약화시킬 필요성이 절실했다.
    그 결과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직후부터 미군정은 대대적인 좌익 탄압에 들어갔다. 조선정판사 사건이 터진 것도 1946년 5월이었으며 박헌영을 비판하는 조봉암의 서신을 전격 공개한 것도 이무렵이었고 7월에는 3개 좌익계 신문에 정간조치를 내렸는가 하면 9월 초에는 박헌영과 이강국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졌다. 이러한 전방위적 탄압에 맞서 좌익진영에서는 이른바 ‘신전술’로 대응해 9월총파업과 10월항쟁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한편 1946년 5월경 국내 정치세력은 미군정의 분류 기준에 따르자면 이승만(李承晩)·김구(金九)를 중심으로 하는 극우세력, 김규식·원세훈 등의 중도 우파세력,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중도좌파세력, 박헌영(朴憲永)을 중심으로 하는 극좌세력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좌익 탄압과 함께 우익 세력 강화를 도모할 수 있는 유력한 방법으로 선택된 것이 좌우합작이었다. 즉 좌익진영을 극좌와 중도 좌파로 구분하여 조선공산당과 같은 극좌 세력을 고립시키고 여운형 중심의 중도 좌파 진영을 견인하여 우익 주도의 정국 구도를 짜려고 한 것이었다. 물론 좌우합작 추진과정에서 미 본국의 국무부와 미군정 간에는 일정한 시각차가 존재하였다. 미 국무부는 극좌와 함께 극우세력도 배제하고 중도 좌우 세력 중심으로 미국의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정치세력을 구성하고자 한 것인 반면 미군정은 극좌 세력 고립화와 중도 좌파 견인을 통한 좌익진영 약화를 더욱 중시하고 있었다.
    좌우합작 임무를 부여받은 인물은 미군정 고문 버치(Bertsch, L.) 중위였다. 버치 중위의 지원으로 좌우합작 운동이 시작되었는데, 1946년 5월 25일 버치 중위의 주선으로 우측의 김규식(金奎植)·원세훈(元世勳), 좌측의 여운형(呂運亨)과 보좌역인 황진남(黃鎭南)이 만나게 되었다. 이후 5월 30일에 2차, 6월 14일에 3차의 회합을 거듭하였고, 또 합작운동 개시에 관한 하지(Hodge, J. R.) 중장의 성명이 나오면서 7월 19일에 좌우 대표가 결정되었다.
    우측 대표는 주석 김규식, 대표 원세훈·김붕준(金朋濬)·안재홍(安在鴻)·최동오(崔東旿)이며, 좌측 대표는 주석 여운형, 대표 허헌(許憲)·정노식(鄭魯湜)·이강국(李康國)·성주식(成周寔)이고, 우측 비서는 영문 김진동(金鎭東), 국문 송남헌(宋南憲), 좌측비서는 영문 황진남(黃鎭南), 국문 김세용(金世鎔), 미국측 연락장교 버치 중위, 소련측 연락장교 미정(未定)이었다.
    양측 대표는 정례회의를 위한 두 차례 예비회담(7월 22일·25일)을 거치면서 같은 해 7월 25일 좌우합작위원회를 발족하였다. 7월 26일 제1차 정례회담을 가졌지만 합작 원칙을 둘러싸고 심각한 갈등을 빚게 되었다. 즉 좌익 진영의 합작원칙 5개 조항과 우익 진영의 좌우합작 8원칙이 대립되었는데, 5원칙은 ① 모스크바 삼국 외무장관 회의 결정 내용 지지와 미소공동위원회 속개 운동 전개, ②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 중요산업 국유화 및 민주주의 기본과업 완수, ③ 친일파 민족반역자 친‘파쇼’반동거두 배제와 ‘테러’ 박멸 그리고 검거 투옥된 민주주의 애국지사의 즉시 석방, ④ 인민위원회로의 정권 이양, ⑤ 군정 고문기관 및 입법기관 창설 반대 등이었다.
    우익의 좌우합작 8원칙은 ① 신탁문제는 임시정부 수립 이후 미소공동위원회와 자주독립정신에 기하여 해결할 것, ② 정치·경제·교육의 모든 제도법령은 균등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여 국민대표회의에서 결정할 것, ③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징치하되 임시정부 수립 이후 즉시 특별법정을 구성하여 처리할 것 등이었다.
    좌우합작 원칙 문제로 대립하던 중 10월 4일 1주일 동안의 북조선 방문에서 돌아온 여운형이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절충안인 7원칙을 결정하였다. 그 내용은 ① 삼상회의 결정에 의하여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 ② 미소공동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을 발할 것, ③ 토지개혁 실시, 중요산업 국유화, 사회노동법령 및 정치적 자유를 기본으로 지방자치제의 확립, ④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처리할 조례 추진, ⑤ 남북의 정치운동자 석방 및 남북 좌우의 ‘테러’적 행동 제지 노력, ⑥ 입법기구의 기능과 구성방법 운영 방안 모색, ⑦ 언론·집회·결사·출판·교통·투표 등 자유 절대 보장 등이었다.
    좌우합작 7원칙 작성 등으로 일정한 진전이 있기는 했지만 1946년 10월 항쟁이 본격화되는 정세 하에서 좌우합작 운동은 제대로 진행되기 힘들었다. 좌익 진영 최대의 세력이었던 조선공산당은 10월항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함과 동시에 인민당, 남조선신민당과의 3당합당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렇게 정국이 10월항쟁과 좌익 3당합당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면서 좌우합작 운동의 대중적 동력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이에 좌우합작위원회는 10월항쟁의 진상조사와 원인 규명 및 대책 마련을 위한 한미공동회의를 진행하고 그 결과를 하지 중장에게 제출하기도 하였다.
    또한 좌우합작 운동이 10월항쟁 와중에 표류하고 있을 무렵 좌우합작 제6항의 합의를 근거로 미군정은 10월 12일 군정법령으로 「조선과도입법의원의 창설에 관한 법령」을 발포하여 과도입법의원 설치에 집중하였다. 미군정은 좌우합작 운동의 성공보다 입법의원 설치를 위한 토대로 활용하고자 했고 여운형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입법의원 설치를 강행했다. 결국 하지와 미군정은 입법의원 설치가 완료되자 좌우합작 운동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좌우합작 운동에 대해 당시 대부분의 정치세력들은 관망 내지 부정적 입장이었다. 김구와 임정세력은 반탁을 강조하면서 관망하는 입장이었고 이승만 또한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좌익 진영의 박헌영도 여운형에게 미국의 음모에 놀아나지 말 것을 경고하는 등 부정적 입장이었다.
    이렇게 대부분의 정치세력이 좌우합작 운동에 우호적이지 않았기에 그 한계가 분명했다. 여운형과 김규식 중심으로 중간파 세력이 결집하는 데에는 어느정도 성과가 있었지만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1946년 말 10월항쟁의 여파 속에 좌익 3당합당이 이루어지고 미군정은 과도입법의원 설치에 집중하면서 좌우합작 운동의 동력은 급속히 소진되기 시작했다. 1947년 들어서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재개, 7월의 여운형 암살 등을 거치면서 좌우합작 운동은 실질적으로 종료되었고,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일부 중간파 세력은 1947년 12월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함으로써 그 명맥을 잇고자 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이정식
    개정 (2013년)
    황병주(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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