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나 지식을 터득할 수 있는 소질을 타고난다. 이 소질을 바탕으로 언어와 상징을 이용하여 집단생활을 하면서 필요한 지식을 보존하며, 후대에 전수하는 문명생활을 발전시켜왔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이 필요한 생활지식을 터득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식은 인간의 보편적 속성이라 할 수 있고, 따라서 모든 인간을 지식인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문명시대 이후 관습적인 생활지식의 범위를 넘어선 학리적 체계의 지식이 개발되면서 학리적 지식을 전담하는 신분층이 형성되어 지식인의 사회적 임무가 정립되어 왔다. 대체로 지식인의 중요한 임무는 통치를 위한 법전지식이나 내세의 원리와 현세의 인간을 합일하게 하는 종교지식에서 볼 수 있듯이 지식에 합치하는 현체제를 유지하는 일에 봉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 변동기에는 변혁을 촉진하는 부수적인 임무를 담당하여 왔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대 왕조국가가 수립되어 지배계급이 형성되고 한자가 사용된 1세기경에 학리적 지식을 전담하는 지식인층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지식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역사기록은 백제의 왕인(王仁)이 285년(고이왕 52)에 『천자문』과 『논어』를 일본에 전하였다는 것이다. 고구려는 372년(소수림왕 5)에 경학(經學)과 문학 · 무예를 가르치는 태학(太學)이라는 교육기관을 설치하였다는 기록과 함께, 같은 해 불교가 들어오면서 불경도 전해왔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상당히 일찍부터 지식인층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지식인이 변혁기에 결정적으로 참여하고 구실을 한 사례는 신라 삼국통일과 고려왕조 및 조선왕조의 개국에서 볼 수 있다. 신라 삼국통일에 주역을 맡았던 화랑도의 지도이념인 세속오계(世俗五戒)를 가르친 원광법사(圓光法師)는 승려이면서 당시 참여지식인의 표본으로 볼 수 있다. 통일신라가 쇠퇴하면서 고려의 개국이 임박하던 9세기에 신라의 골품제(骨品制) 신분체제에서 중앙과 지방의 지배 직위에 오를 수 없었던 육두품(六頭品) 이하 신분의 지식인이 신라를 이탈하여 고려 개국에 결정적인 활동을 하였다. 또한 고려 말기인 14세기에 주자학(朱子學)을 공부한 사대부층이 고려의 불교 지배를 배척하는 배불숭유(排佛崇儒)의 조선 개국이념을 제공하였다. 이 두 가지 사건은 우리나라 지식인층이 역사의 변혁기에 참여하였던 좋은 사례들인 것이다.
한편 조선 500년을 지식인사(知識人史)의 측면에서 볼 때 이 시대의 지식인을 대표하는 이른바 사류층(士類層)의 현실 참여와 그들 사이의 갈등으로 엮인 역사라고 할 정도로 지식인의 세력이 조야(朝野)에서 크게 성장하였다. 조선 사회는 지식인이 숭상되었고, 그들이 지배 지위에 있었던 사회였다. 더욱이 고려시대부터 보급된 서당(書堂)이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전국적으로 확대, 보급되어 서당 없는 마을이 없을 정도로 발전한 것도 주목할만한 일이다.
조선은 개국 초의 태조반정(太祖反正) 이래 잇따른 정란(政亂) 때마다 지식인 사류의 희생이 컸다. 이 때문에 사류들 중에는 조정에 나아가 벼슬하는 것을 꺼려 향리에 묻혀 도학(道學)과 시문(詩文)을 즐기는, ‘사림(士林)’이라는 지식인층이 형성되었다.
18세기 후 농업의 생산력이 급격히 발전하는 데 힘입어 양반신분이 아닌 평민층도 부의 축적이 가능해지면서 한학지식이 평민층에까지 높은 수준으로 보급되었다. 이로 인하여 조선의 체제가 급격히 무너진 19세기에는 몰락한 양반층과 평민층 지식인의 체제 도전과 현실 참여가 거세게 일어났던 일들은 한국의 지식인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들이다. 한편 18세기에는 실권세력에서 밀려난 남인계 지식인들이 경세(經世)의 학리론으로 탐구한 실학(實學)이 19세기 말 개화파 지식인의 개혁주의와 연계되어 시정개혁의 이론으로 등장한 것도 주목할만하다. 이처럼 왕조시대에 체제 유지와 개혁 양면에 걸쳐 지식인층의 기여와 참여가 현대와 마찬가지로 컸던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와 국권을 상실하는 비극을 겪으면서 한학지식이 현실적으로 쓸모없게 되는 추세에 따라 일본과 구미로 향하는 유학생이 급격히 늘어갔다. 동시에 서양의 인문주의지식이 한학지식에 대신하여 보편적 지식으로 받아들여졌다. 한편 한학지식의 유용성이 식민지 통치와 신문화가 지배하던 도시 중심의 비전통체제에서 감퇴했지만 전통문화가 지속적으로 지배했던 농촌사회에는 큰 마을마다 서당이 남아 있었다. 조선총독부 통계에 의하면, 1920년에 서당의 훈도 2만 5,602명에 취학생이 29만 2,625명에 달하고 있어서 신식학교 학생 수의 2배에 이르렀다.
해방 이후 1960년 4·19 학생의거 전후를 공론영역이 본격적으로 형성하기 시작한 것으로 간주하여, 이 시기를 근대적인 의미의 지식인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계기로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지식인의 위상은 5·16 군사쿠데타를 거치면서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에서 크게 보아 기능적 지식인과 비판적 지식인이라는 서로 대립되는 두 가지 전형적인 지성 내지 반지성 상으로 표현되어 왔다고 언급할 수 있다. 지식인의 역할에 있어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제공해주었던 계기는 1987년 민주화운동이었다. 이는 국가의 개방과 시민사회 영역으로부터의 후퇴에 따른 정치사회의 활성화와 시민사회의 성장 · 분화를 낳음으로써 지식인과 권력과의 관계는 단순한 대치 구도에서 다차원적인 대응관계로 성격이 복합적으로 변했음을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지식인의 분화 또한 필연적이었다.
1980년대의 진보적 지식인은 1987년 이후 여전히 ‘총체적 변혁’을 꿈꾸는 변혁적 지식인과 변화된 현실에 참여하는 개혁적 지식인으로 분화했다. 변혁적 지식인 집단이 사회운동 현장이나 학계에 남아 기존 체제에 대한 밑으로부터의 전복을 꿈꾸며 비판적 견제를 계속하는 동안, 개혁적 지식인 집단은 직접 정권에 참여하여 국정운영의 일익을 담당하거나 여야를 막론하고 정당에 들어가 열린 정치사회 공간에서 꿈을 실현하고자 했다. 직접 정치에 참여하지 않은 개혁적 지식인 집단은 대거 시민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시민운동을 통한 제도개혁을 추구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지식인의 위상은 사회 안의 민중과 권력 사이의 관계에 의해 매개된다. ‘언어의 조작자’로서 지식인은 권력이 강하면 민중 편에 서서 그에 저항하거나 아니면 아예 자포자기하는 것이 대체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민중이 힘을 얻으면 권력을 감시하기를 그치거나 혹은 그에 참여하는 경향이 있다. 지식인이란 하나의 계급이 되기에는 공통의 이해관계에 의해 결합하지 못하는 특징을 갖는 집단이다. 이는 지식인 구성원의 사회경제적 배경의 차이와 직업적 다양성에서 주원인을 찾을 수 있지만, 마르크스(Karl Marx)의 도식에 따르자면 지식 생산이 사회적 생산관계에서 차지하는 모호한 성격으로부터 기인한다. 유사한 이유로 만하임(Karl Manheim)은 지식인을 자유부동(自由浮動)하는 존재라고 보았다. 이는 현실초월적(現實超越的)인 유토피아를 담아내지만 다시금 현실구속적(現實拘束的)인 이데올로기로 되돌아가는 지식인의 부정을 통한 긍정화라는 자기모순적인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해방이후 한국사회에서 나타난 지식인상을 추출하기 위해 아래의 〈표〉는 이념형적 수준에서 두 가지 상위 형태와 여섯 가지 하위 형태의 유형화를 시도하고 있다. 첫째 기준은 현실대응(現實對應)의 여부이고, 두 번째 기준은 현실참여(現實參與)의 여부이고, 끝으로 세 번째의 기준은 참여방식(參與方式)의 차이를 가리킨다. 우리의 경우 대표적인 형태의 지식인은 기능적(機能的) 지식인과 비판적(批判的) 지식인이다. 전자는 현상유지나 기득권을 옹호하는 사제적 역할을 수행하는 부류이고, 후자는 현상타파나 신체제를 추구하는 예언자적 역할을 지향하는 부류이다. 이들의 역할에서 반드시 현실참여를 전제할 필요는 없다. 상아탑에 안주하여 학문을 위한 학문에 종사하지 않는 한 현상유지 혹은 현상타파를 위한 이론적 개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최근에 눈여겨 볼 수 있는 개혁적 지식인과 변혁적 지식인은 어디까지나 현실개입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II)의 우단에 위치시킬 수 있다. 또한 비판적 지식인들 중에 개혁이란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정치참여를 지양하고 체제 바깥에 위치하면서 지식활동을 통한 변화를 시도하는 성찰적 지식인과 적극적 행동을 통해 변혁을 갈구하는 활동적 지식인을 (III)의 하단처럼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기능적 지식인들 중에 현상유지를 위해 체제의 기득권 논리에 따라 실무적인 지식을 제공하는 전문적 지식인과 실용적 행동을 중시하는 신지식인을 (III)의 상단에 놓을 수 있다.
(I) | 유지 | 기능적 | 지식인 (개혁적) | (전문적) | (신) |
혁파 | 비판적 | 지식인 (변혁적) | (성찰적) | (활동적) | |
순수 | 개입 | 지식 | 행동 | ||
(II) | (III) | ||||
〈표〉 지식인의 유형화 |
민주화 이후에 목격할 수 있는 흥미로운 현상은 지식인의 활동이 학술과 운동의 차원에서 이념주의를 점차로 벗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극도의 이념주의는 이론의 순수성을 높여주는 대가로 실천의 융통성을 낮쳐줌으로써 현실문제의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위한 중간항을 배제하는 폐해를 안고 있다. 비록 절차 민주주의의 수준이지만 국민의 기본권이 신장되어오기 까지 지식인이 좌우 극단의 급진과 반동의 이념주의를 비켜갈 수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현대 한국의 지식인들은 현실에 침묵하거나 도피적 행각을 보인 부류도 많지만 권력과 타협한 일부의 지식인과는 달리 체제에 대한 저항과 비판과 도전에 주저하지 않은 집단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해방공간을 제외하고는 가장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주어 왔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비판적 지식인들의 경우 이들은 언어의 유희로부터 벗어나 행동으로 대중과 가까이 하면서 심신을 바쳐가며 자기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폭압적인 군부 권위주의정권 아래에서 반민족적, 반민중적, 반민주적인 작태와 의도를 밝혀내는 데 그들의 투쟁과 희생이 없었더라면 1987년 민주항쟁을 전기로 한 권위주의로부터 민주주의로의 이행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지식인은 민중과 권력 사이에서 도피, 비판, 저항, 야합, 아부, 협조 등 출렁이는 모습을 보여주어 왔다. 1987년 민주항쟁이후 민주주의로의 이행과 이에 따른 시민사회의 성장은 권위주의 시대의 악몽과 고통으로 부터의 탈주를 의미한다. 군부 권위주의정권아래에서 분단 · 냉전 · 안보 이데올로기에 의해 억눌린 언론 · 출판 · 결사 · 사상의 자유가 서서히 복원되는 지성의 개방이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걸쳐 지식인의 위상도 종래의 저항과 비판의 역할뿐만 아니라 참여와 개혁이라는 새로운 역할로 나아가는 변조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1990년대 이후 지식인의 현실비판과 사회개혁의 의지는 여러 형태의 광범한 학술 · 문화 · 시민운동의 확장을 통해 이루어져 왔다. 특히 이러한 지식인 중 일부는 정치권과 직간접인 관련을 맺음으로써 사회개혁을 위한 정책과제를 개발하거나 아니면 권력유지를 위한 논리정립에 주력하기도 하는 양태를 보이기도 한다. 한국사회 안팎의 여건을 볼 때 지식인의 비판적 책무는 여전히 중요하다. 민주화 이후에도 민주주의는 여전히 지향해야 하는 가치라는 데서 그 이유는 분명히 드러난다. 이는 우리의 고질적 병폐인 이념대결, 지역대립, 계층갈등, 세대격차 등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요소를 지혜롭게 극복하여 통일시대의 국민통합을 가능케 하는 지식인의 역사적 상상력을 요청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장기적인 안목에서 선취적인 여건을 가진 지식인의 창의성과 비판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크게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