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2월 16일에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진주시내를 가로질러 곡류하는 남강 북안에 2개의 소구릉이 합쳐져 하나의 독립구릉을 이룬 능선 정상부를 따라 7기의 봉토분이 나란히 분포하는데 이를 수정봉·옥봉 고분군이라고 부른다. 이 고분군은 이미 1910년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바 있으나 정식보고서는 나오지 않고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고분에 대한 간단한 실측도와 함께 유적·유물의 사진 및 소략한 설명이 실려 있을 뿐이다.
구릉 정상부를 따라 분포하는 7∼8기의 고분 중에서 비교적 규모가 큰 수정봉(2개의 구릉 중 북서쪽 구릉) 2호분과 3호분, 옥봉 7호분 등 3개의 봉토분이 1910년 발굴 당시에 조사되었고 유물도 많이 수습되었다. 현재는 2호분과 3호분만 남아 있다. 발굴조사자의 간단한 기록과 실측도면에 의하면 수정봉 2·3호분은 중앙에 널길(羨道)이 나 있는 굴식돌방(橫穴式石室)이다. 이 두 고분의 매장시설은 깬돌을 이용하여 견고하게 축조된 중앙널길식(中央羨道式)으로 규모상으로도 서로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수정봉 3호분의 경우 널방(玄室)은 길이 5.3m, 너비 1.8m정도의 장방형(長方形) 평면에 높이는 2.3m 가량 된다. 긴 벽을 위로 갈수록 안으로 경사지게 쌓아 널방 상부의 폭을 좁힌 후 판석을 가로질러 천장을 한 터널형에 가깝다. 널길의 전체 길이는 알 수 없지만 널방 남벽 가운데에 폭 1.0m 정도로 축조되었다. 이에 비해 옥봉 7호분의 경우 실측도와 사진, 혹은 서술내용 등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서 그 구조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세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여러 점의 토기류, 발걸이(鐙子) 및 사행상철기(蛇行狀鐵器) 등의 마구류, 널못(棺釘)과 널고리, 기타 농공구와 무기를 포함한 철기류 등이 있다. 토기류는 ‘대가야식(大伽耶式)’이라고 할 만큼 고령지역의 토기와 닮아 있지만, 일부 토기에는 백제지역의 영향도 보일 만큼 특이한 면을 보이며, 그 중 그릇받침은 장식성이 강한 특징적인 유물이다. 토기양식의 특징으로 보는 한 이들 3기의 고분은 6세기 전반에서 중엽에 걸치는 시기로 연대가 추정된다. 사행상철기는 최근 가야지역에서 출토 예가 늘어나는 편으로, 말꼬리부분을 장식하는 일종의 마구류에 해당되고, 출토 철기류 중에는 ‘U’자형 삽날이 포함되어 있다. 용기류 중에 특이한 것은 보주형(寶珠形) 손잡이가 달린 금동제뚜껑바리인데 탁잔형 토기와 함께 백제적인 요소로 주목되고 있다. 수정봉·옥봉 고분군의 양상에는 터널형의 굴식돌방의 구조 자체와 함께 백제적인 요소들이 비교적 많이 보인다. 이 고분들에 보이는 백제적인 요소는 그 연대가 가야 멸망기인 6세기 전중엽에 해당됨을 고려해 볼 때, 당시 이 지역으로 백제의 세력이 진출해 왔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어느 정도 반영하지 않는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