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군 ()

대동여지도 중 경상북도 대구, 청도 부분
대동여지도 중 경상북도 대구, 청도 부분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경상북도 최남단에 위치한 군.
정의
경상북도 최남단에 위치한 군.
개관

동쪽은 경주시, 서쪽은 경상남도 창녕군, 남쪽은 경상남도 밀양시, 북쪽은 대구광역시 달성군·경산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8°31′∼129°22′, 북위 35°32′∼36°40′에 위치한다. 면적은 693.90㎢이고, 인구는 4만 4751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2개 읍, 7개 면, 212개 행정리(127개 법정리)가 있다. 군청은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범곡리에 있다.

자연환경

한반도를 남북으로 뻗어있는 태백산맥의 남단(南端)에 자리잡고 있으며, 중앙의 곰티재와 용각산(龍角山, 697m) 및 그 지맥을 중심으로 동서(東西)로 구분되어 있다. 산동이 산악지대(山岳地帶)라면 산서는 비교적 넓은 들이 펼쳐져 있으나 작은 분지(盆地)에 불과하다.

동쪽에는 태백산맥의 지맥인 운문산(雲門山, 1,188m)·가지산(加智山, 1,240m)·문복산(文福山, 1,014m)·응강산(832m)·사룡산(四龍山, 685m)·구룡산(九龍山, 675m) 등이 솟아 있다. 이들 산지 사이를 밀양강(密陽江)의 상류인 동창천(東倉川)이 남류한다. 서쪽에는 비슬산(琵瑟山, 1,084m)·수봉산(秀峰山, 593m)·묘봉산(妙峰山, 513m)·천왕산(天王山, 619m)이 솟아 있다.

천왕산(天王山)은 각남면과 풍각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성현산맥(省峴山脈) 중의 하나이다. 이 산 동쪽에는 화악산, 서쪽에는 묘봉산·수봉산 등이 솟아 있다. 이 산록에서 청도천이 발원한다.

남쪽에는 억산(億山, 944m)·구만산(九萬山, 785m)·철마산(鐵馬山, 630m)·화악산(華嶽山, 932m) 등이 솟아 있다. 북쪽에는 삼성산(三聖山, 663m)·상원산(上院山, 700m)·선의산(仙義山, 759m) 등은 금호강(琴湖江)유역과 밀양강유역의 분수계를 이루고 있다.

하천을 보면 풍각면 일대의 산지에서 발원한 청도천(淸道川: 일명 요길천·송읍천)이 남쪽의 천왕산·묘봉산·수봉산·비슬산 등에서 발원하는 풍각천(豊角川)·봉기천(鳳岐川)·각북천(角北川) 등과 합류한 뒤 군의 중앙부를 관류하여 화양읍과 청도읍을 지나 남류한다.

동창천(東倉川)은 운문면의 북부를 서남류하여 금천면 중앙을 흘러 매전면 북지리에서 북부산지서 발원한 춘천(春川)과 합류하여 남류한다. 청도읍 내호리에서 이 양하천이 만나 밀양강으로 흘러든다.

하천 연안에 발달된 소규모의 충적지는 농경지로 이용되며, 청도천유역은 비교적 비옥한 평야를 이루고, 하천부지의 개간으로 과수원이 개발되어 새로운 사과단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기후는 내륙에 위치하며 한서의 차가 크며, 연평균기온 13.2℃, 1월 평균기온 -1.6℃, 8월 평균기온 25.1℃이며, 연강수량은 1,243㎜이다.

역사

이 지역에서는 신석기시대부터 인간이 거주했던 것으로 보이며, 청동기시대에 해당하는 유물·유적은 군내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즉, 화양읍 범곡리의 지석묘, 각남면 화리의 지석묘와 석관묘 등은 이 시기의 대표적인 유물·유적으로서 당시 사회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주는 것들이다.

이러한 사회분화과정을 통해 일찍부터 소국(小國)이 형성되었다. 변진 24개국의 하나인 우유국(優由國)이 이곳에 비정되기도 한다. 우유국의 실체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42년(유리왕 19) 이곳에 위치한 이서국(伊西國)이 신라에 항복하였다는 것을 보면, 이 두 소국 사이에는 어떤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이 때 이서국은 신라 지배체제 내에 완전히 흡수되지는 않았는데, 이는 297년(유례왕 14) 그들이 신라를 공격하여 금성(金城: 지금의 경주)을 포위하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시기를 전후하여 이서국은 신라에 편입되었고, 부근에 있는 구도성(仇刀城)내의 솔이산성(率伊山城) 등과 함께 병합되어 이서군(伊西郡)으로 되었다.

757년(경덕왕 16) 지방제도 개편시 이서군은 분리, 독립되었으며, 그 예하의 구도성은 오악현(烏嶽縣), 경산성은 형산현(荊山縣), 솔이산성은 소산현(蘇山縣)으로 각각 개편되어 밀성군(密城郡: 지금의 밀양)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후삼국의 쟁패기에는 군현들이 과거의 산성의 이름으로 돌아가 호족들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주로 견훤(甄萱)의 세력권에 흡수되어 신라를 공략하는 전진기지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고려 통일 이후 940년(태조 23)경주대도독부가 성립되면서 대성군과 오악·형산·소산 등 3개 현이 통합되어 새로이 청도군을 형성하게 되었다.

1010년(현종 1)도주(道州)로 되었다가 1109년(예종 4) 감무(監務)가 설치되었으며, 1342년(충혜왕 복위 3) 이곳 출신 김선장(金善莊)의 공로에 의해 지군사(知郡事)로 승격되었으나 다음해에 강등되었다. 1366년(공민왕 15)김한귀(金漢貴)의 청원에 의해 다시 지군사로 승격되었다.

고려 후기의 읍격(邑格)을 그대로 유지한 채 지역적인 변동은 없었다. 군사의 동원체제인 진관은 대구도(大丘道)에 귀속되어 청도군수가 경상좌도의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를 겸임하였다. 『경상도지리지』에 의하면, 당시의 호구수는 640호 6,718인이었으며, 토지는 절반만이 비옥했고 풍속은 검솔했으며 양잠에 힘썼다고 한다.

이 지역은 고려 후기 이래로 대성(大姓)이 많아 다스리기 어렵기로 이름이 나 있었다. 조선 초기 이래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는데 그 중 김일손(金馹孫)·김대유(金大有) 등은 사림파로 이름을 크게 떨쳤고, 임진왜란 때에는 이운룡(李雲龍)이 왜적의 소탕에 크게 기여한 바 있다.

1895년 갑오개혁으로 소지역주의가 채택되어 전국이 23부로 나누어지자 대구부에 속하게 되었다. 다음해의 지방제도 개편으로 인한 13도제하에서는 3등군으로서 경상북도에 속하게 되었다. 1906년대구군으로부터 풍각면·각남면·각북면 지역을 할양 받았고, 1912년밀양군과의 부분적인 지역조정을 끝으로 현재의 영역이 고정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지역인사들은 숙명(肅明)·문명(文明) 등의 학교를 건립하여 신교육보급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항일의식도 높아, 1919년 3·1운동 때에는 군민들을 이끌고 만세시위운동과 일본인에 대한 습격을 병행함으로써 독립회복에 노력하였다.

1949년 8월 14일청도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74년청도읍의 유호(楡湖), 화양면의 남성현(南省峴) 2개 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79년 5월 1일화양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9년 5월 1일이서면 고면리가 흥선리로, 청도읍 구미리(九尾里)가 구미리(龜尾里)로 개칭되었으며, 1992년 1월 1일금천면 방지리 일부가 운문면에 편입되어 운문면 방지리가 신설되었다.

유물·유적

화양읍의 청도 범곡리 지석묘군(경상북도 기념물, 1994년 지정) 등 선사시대 유적과 삼국시대의 고분이 산재해 있으며, 각남면 옥산리에는 청도 옥산동 토기요지(경상북도 기념물, 1986년 지정)가 있다.

산성으로는 화양읍 교촌리의 청도읍성(경상북도 기념물, 1995년 지정)·폐성(吠城, 일명 伊西山城)·백곡토성(栢谷土城), 청도읍의 오례산성(烏禮山城)·철마산성(鐵馬山城), 운문면의 호거산성(虎踞山城) 등이 있다. 또한 이서면의 팔조령봉수대(八助嶺烽燧臺), 각남면의 남산봉수대 등이 있다.

주요 사찰로는 운문사(雲門寺)를 비롯하여, 적천사(磧川寺), 대적사(大寂寺), 소라리의 덕사(德寺), 동천리의 신둔사(薪芚寺), 신봉리의 죽림사(竹林寺), 대비사(大悲寺), 용천사(湧泉寺), 각남면 옥산리의 대산사(臺山寺) 등이 있다.

불교문화재로는 금천면 박곡리의 대비사대웅전(보물, 1985년 지정), 운문면 신원리의 운문사대웅보전(보물, 1985년 지정)·운문사 경내에 운문사삼층석탑(보물, 1980년 지정)·운문사금당 앞 석등(보물, 1963년 지정)·운문사석조사천왕상(보물, 1963년 지정)·운문사석조여래좌상(보물, 1963년 지정)·운문사원응국사비(보물, 1963년 지정)·운문사동호(보물, 1963년 지정)가 있다.

석탑으로는 풍각면 봉기리의 청도봉기리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덕양리의 청도덕양동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79년 지정), 매전면 장연리의 장연사지삼층석탑(보물, 1980년 지정), 용산리의 불령자전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013년 지정)이 있다.

각북면 오산리의 용천사에는 용천사대웅전(경상북도 유형문화재자료, 1996년 지정), 청도읍 원전리의 적천사대웅전(경상북도 문화재자료, 2013년 지정)·적천사목조사천왕의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82년 지정)·적천사괘불탱및지주(보물, 2005년 지정), 화양읍의 합천리석조아미타여래입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94년 지정), 송금리에 대적사극락전(보물, 1985년 지정), 금천면 박곡리에 청도박곡리석가여래좌상(보물, 1963년 지정) 등이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화양읍 교촌리의 청도향교(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85년 지정), 금천면 신지리의 선암서원(경상북도 유형문화재,1975년 지정), 금전리의 황강서원(皇岡書院), 이서면 서원리의 자계서원(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75년 지정)이 있다.

또한 학산리의 용강서당(龍岡書堂), 금촌리의 금호서원(琴湖書院), 각북면 남산리의 남강서원(南岡書院), 각남면 신당리 의 화산서당(華山書堂), 풍각면 봉기리의 봉양서원(鳳陽書院), 차산리의 차산서원(車山書院)·오졸재박한주여표비 및 비각(경상북도 기념물, 1995년 지정) 등이 있다.

운문면 순지리에 원모재(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990년 지정)·운곡정사(경상북도 민속문화재, 1990년 지정), 청도읍 사촌리에 선월정(先月亭), 화양읍 유등리에 군자정(君子亭), 범곡리에 화산정(華山亭), 금전리에 학산정(鶴山亭) 등의 정자가 있다.

고건축물로는 전국의 석빙고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규모도 큰 화양읍 동천리의 청도석빙고(보물, 1963년 지정), 금천면 신지리의 청도운강고택과 만화정(국가민속문화재, 1979년 지정)·섬암고택(경상북도 민속문화재, 2013년 지정)이 있다.

또한 명중고택(경상북도 민속문화재, 2013년 지정)·운남고택(경상북도 민속문화재, 2013년 지정)·도일고택(경상북도 민속문화재, 2013년 지정), 임당리의 청도임당리김씨고택(1988년 9월 23일 경상북도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2005년 1월 31일 문화재청이 국가지정문화재인 국가민속문화재로 정함), 화양읍 서상리의 도주관(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85년 지정), 화양읍 동상리의 청도 동헌(경상북도 문화재자료, 2001년 지정) 등이 있다.

이 밖에 금천면 신지리에 배자예부운략목판(보물, 1987년 지정)·해동속소학판목(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85년 지정)·십사의사록판목(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이서면 금촌리에 이운룡 선무공신교서 및 관련 고문서(보물, 1994년 지정)와 청도읍 원정리에 거영일기 및 계본등록(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95년 지정)이 보관되어 있다.

또한 청도읍 원정리에 이운룡장군영정(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75년 지정), 각남면 일곡리에 최치원의 고운영정(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83년 지정)이 있다. 그리고 화양읍 서상리의 청도척화비(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를 비롯하여 매전면 금곡리에 청도삼족대(경상북도 민속문화재, 2013년 지정) 가 있다.

그 밖에 운문사의 처진소나무(천연기념물, 1966년 지정)와 적천사은행나무(천연기념물, 1998년 지정), 매전면 동산리의 청도매전면의 처진소나무(천연기념물, 1982년 지정)와 청도하평리의 은행나무(경상북도 기념물, 1995년 지정), 각북면 덕촌리의 청도각북면의 털왕버들(천연기념물, 1982년 지정), 청도명대리뚝향나무(경상북도 기념물, 1994년 지정), 청도명대리사철나무(1994년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나 고사로 인해 2008년 지정 해제), 이서면 대전리의 청도이서면의 은행나무(천연기념물, 1982년 지정) 등의 보호수들이 있다.

또한 풍각면 차산리에는 신라 때부터 전해오는 민속놀이인 청도차산농악(경상북도 무형문화재, 1980년 지정)과 운문면 정상리에는 청도삼베짜기(경상북도 무형문화재, 1995년 지정)가 전승되고 있다.

교육·문화

교육기관으로는 2015년 현재 초등학교 11개교, 중학교 6개교, 고등학교가 5개교가 있다.

문화시설로는 4개의 사회복지회관, 군민회관, 청도문화원과 전수회관인 차산농악전수관, 청도읍 고수리의 경상북도립 청도공공도서관 등이 있다.

특히 34년의 역사를 가진 청도문화원은 문화사랑방, 향토사연구실, 자료실 등을 갖추고 문화학교운영, 향토사 조사 등을 통해 향토문화창달에 힘쓰고 있다. 그리고 차산농악전수관은 경상북도 무형문화재인 차산농악을 전수, 교육하기 위해 세워졌으며 기능보유자 김오동선생이 지도하고 있다.

또한 문화행사로는 청도천 일원에서 격년제로 10월경에 도주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초·중·고 학예경연대회는 매년 10월 중순에 청도천 둔치에서 개최되며, 1,500명의 학생들이 참여하고 있다.

민속

이 고장의 대표적 민속놀이로는 풍각면 차산리에서 행해지는 천왕기놀이와 차산농악을 들 수 있다.

예로부터 정초가 되면 풍각면내의 여러 마을에서는 마을 앞 들판에 나가 천왕기놀이를 하였다. 이 놀이는 길이가 8m 정도 되는 천왕기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색깔의 기를 가지고 서로 기싸움을 펼치는 것이다. 이 때 기운을 북돋우기 위해 농악이 따르는데 차산농악은 이 천왕기놀이를 발판으로 더욱 발전하였다.

오늘날의 차산농악은 1933년에 복원된 것으로 음력 정월 보름이 되면 집집마다 돌면서 지신밟기를 해주며 풍년과 무사태평을 기원해준다. 차산농악의 가락은 12가락 36마치로 이루어져 있고 장단은 굿거리장단이 주가 되며 덧뵈기춤이 이어져 경상도 특유의 악무를 보여준다. 이 농악은 1980년 경상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바 있다.

이 밖에도 도작농업을 주로 하는 지역에서는 대규모의 줄다리기가 많이 행하여지며 그 승패로써 그 해의 풍흉 여부를 점치기도 한다.

화양읍 교촌리의 남산 중턱에 유래가 깊은 서낭당이 있어서 성대한 동제가 거행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당이 불에 타버린 이 후로는 동제가 중단되었다 한다. 기록에 의하면 이 곳 서낭신은 마을과 주민들의 부귀와 안위를 수호하는 신이라 믿어 이 곳을 지나가는 사람은 누구나 재난을 없애고 소원성취를 빌기 위해 돌이나 자기가 가지고 있던 물건을 하나씩 놓고 갔다 한다.

설화·민요

이 고장의 대표적 설화로는 기우제의 유래담으로 전승되고 있는 「용이 되려다 꽝철이가 된 상좌중」을 들 수 있다. 옛날 금천면 박곡리의 대비사라는 절에 주지와 열서너 살 먹은 상좌중이 살고 있었다. 어느 해 가뭄이 들어 인근 농부들은 아우성을 치고 있었지만 상좌중이 일구는 채소밭은 이상하게도 채소가 파릇파릇하고 흙도 촉촉이 젖어 있었다.

이를 수상히 여긴 주지가 상좌중을 유심히 살펴보니 상좌중은 매일 자정이 되면 몰래 방을 빠져나갔다 오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좌중의 행동을 캐내기 위해 하루는 주지가 밤중에 나가는 상좌중의 뒤를 따라가보니 과연 그는 사람이 아닌 꽝철이(이무기)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날은 꽝철이가 용이 되어 승천하는 날이었는데, 한창 용으로 변하는 도중 주지가 그만 기침을 하는 통에 상좌중은 용이 되지 못하고 꽝철이로 남아 있어야 하였다. 원통하고 분한 마음을 가누지 못한 꽝철이는 날아가며 큰 바위를 꼬리로 쳐서 두 조각으로 깨뜨렸다.

그 때 꼬리의 일부가 떨어져나가 큰 거미가 되어 부서진 바위틈에 끼여 살면서 일 년에 한 번씩 나와서 사람을 해치고는 하였다 한다. 그 뒤 용이 되지 못한 꽝철이는 실이호박소라는 곳에 가서 자리잡았다. 그 곳은 강물이 휘어 도는 곳으로 깊이가 수십 길이 되었다. 꽝철이가 움직이면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하여 그런 소문이 퍼지면 사람들은 꽝철이를 쫓기 위해 산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이것이 기우제의 시작이라고 한다.

이 밖에도 「호랑이를 잡은 효자」·「지룡(호거)산성과 견훤」·「샛별장터와 영남물고개」·「장육산과 육장굴」·「무당바위」 등 많은 인물·지명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이 고장에는 풍각면의 농요가 유명하다. 이 풍각농요는 농업노동요로 「가래질소리」·「모찌기소리」·「모심기소리」·「김매기소리」·「보리타작소리」·「논매기소리」등으로 되어 있다.

「가래질소리」는 군에서도 다른 동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노래로 흥겨운 가락으로 부른다. 내용을 살펴보면 “조금만 나린줄기 골골마다 보생겼네/이가래저가래 보가래에 보만치면 물나온다/이때저때 어느때고 춘삼월 호시절에/잎은피어 청산되고 꽃은피어 화초로다……”라고 부른다.

「김매기소리」 중 「김매기조짐소리」는 “옹해야/옹해야//적자는 학을타고/옹해야//맹호는 소를타고/옹해야//이태백은 고래타고/옹해야//대국천자 코끼리타고/옹해야//일본대장 말을타고/옹해야//직극직극 나올적에/옹해야//이도령은 탈것없어……”라고 춤을 추면서 흥겹게 부른다.

「보리타작소리」는 “애화/애화//이보리가/애화//무슨보린가/애화//양반보린가/애화//수염도길다/애화//이보리가……”라고 부른다. 「방아타령」은 논매기할 때 부르기도 하고, 마을에 따라서는 디딜방아 찧을 때 부르기도 한다.

내용을 살펴보면 “아호호 방아야/아호호 방아야//방아방아 방아로다/아호호 방아야//척척봉산 나무베어/아호호 방아야//방아를 둥실만들었네/아호호 방아야//혼자찧는 도꾸방아/아호호 방아야//둘이찧는 디딜방아/아호호 방아야//빙빙도는 돌방아/아호호 방아야//만첩청산 물방아……”라고 부른다.

「망깨소리」는 주춧돌을 놓기 위해 집터를 다지거나 못터를 다질 때 하는 소리로, 운문면에서는 여자들이 앞소리를 메기고 남자들은 흙짐을 져 날랐다고 한다. 내용을 살펴보면 “망깨천깨 공중에 놀고/어이여 차하//석자말목 물밑에 놀고/어이여조차하//요내몸은 못둑에 놀고/어이여조차하//심통꾼이 거동보소/어이여조차하//망깨자리 유명하다/어이여조차하//심통꾼이 저걸보소/어이여조차하//콩죽겉은 땀을흘려……”라고 부른다.

산업·교통

2008년 현재 청도군의 토지이용은 총면적 696.88㎢ 중에 경지가 106.72㎢로 15.31%를, 임야가 506.90㎢로 72.7%를, 기타가 83.26㎢로 11.99%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면적이 협소함에도 불구하고 토지가 비옥하고 수원(水源)이 풍부하다. 이것을 잘 이용한 저수지로는 유등지·삼신지(三新池)·옥산지(玉山池)·함박지(咸博池) 등이 있어 관개용으로 이용된다.

총경지면적 106.72㎢ 중 논이 40.90㎢로 38.3%를, 밭이 65.82㎢로 61.7%를 차지하고 있다. 미곡 이외에 겉보리·옥수수·메밀·밤·대두(大豆)·소두(小豆)·녹두(綠豆)·고구마·감자가 생산된다. 딸기·무·배추·고추·당근·양파·파와 같은 소채류(蔬菜類)와 참깨·땅콩 등의 특용작물 그리고 작약·당귀·천궁 등의 약용작물의 생산도 많다.

2008년 현재 총인구에 대한 농업인구의 비율은 41.4%이며, 산서지방이 산동지방보다 경지율이 높다. 논은 동창천과 청도천 연안에 주로 분포한다.

그리고 하천부지 및 야간지를 개간한 곳에 사과·복숭아·감 등의 과수가 재배되어 농가소득이 증대되고 있다. 이 고장의 특산물인 청도반시(淸道盤枾)는 씨가 없는 것으로 유명하며 비타민C가 풍부하여 고혈압과 당뇨병에 좋으며, 서울·부산·대구 등의 대도시로 출하된다.

그 밖에 특산물로는 니코틴해독과 미용에 좋고 당도가 뛰어난 청도복숭아, 운문사 입구 상인들 중 소수에 의해 직접 제작되고 있는 목공예품, 운문면 봉화리에서 전통방식 그대로 수공으로 길쌈하여 주문생산되는 삼베, 해발 932m의 화악산오산계곡의 맑은 물로 재배되는 무공해식품으로 암예방·간기능강화 등에 특히 좋은 청정미나리가 있다.

또한 각종 아미노산과 비타민이 풍부하고 항균 및 혈압조정작용에 효과가 있는 이서면 팔조리의 팽이버섯 등이 있다. 한편, 운문면에는 재래식 용선로(鎔銑爐)인 토둑에서 재래식 쇠솥을 만들던 곳이 있었다. 이 쇠솥도 특산물 중의 하나였다.

임야면적은 총면적의 약 72.7%를 점유하고 있다. 2008년 현재 임목축적량은 약 341만 6,401㎥으로 산림자원이 풍부하지만 양과 질에서 보잘 것이 없다. 임산물생산량은 124만 4,164㎏이다. 목재생산은 운문·풍각·이서·각남의 순으로 많다.

농공단지는 청도·풍각에 2단지가 소재하며 총면적은 39만 1,456㎡로 40개 업체가 입주해 있다. 공업은 도내에서도 가장 낙후된 곳이다. 일제강점기에도 공업제품이 다소 다양해진 면은 있었으나 역시 영세성을 벗어나지 못한 수제품(手製品)으로써 지방적인 수요(需要)에 따라 생산되었다. 광복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일하게 전국에서 청도군만이 생산하고 있는 것으로는 국수 뽑는 틀기계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대기업의 물량(物量) 앞에 무너지고 말았다.

일제강점기부터 군내 상권(商權)의 중심지였던 화양읍이 청도읍으로 옮겨졌고 해방과 더불어 상권이 3분화되었다. 즉 중앙부(청도·화양)의 경우 청도장이 4·9일, 산서부(풍각·각북·각남 일부와 이서 일부)의 경우 풍각장이 1·6일, 산동부(금천·운문·매전 일부)의 경우 동곡장이 3·8일에 열린다. 이들 시장은 각기 특색 있는 상권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교통이 편리해지자 3대 시장 중 풍각시장이 쇠퇴일로에 있고 가축시장이 활기를 잃은 지가 오래 되었으며 대구상권에 흡수되는 경향이 매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청도읍을 비롯하여 농협연쇄점·슈퍼마켓·백화점 등 박리다매(薄利多賣) 및 상품의 고급화로 인해 시장상권이 축소되고 있다. 시장의 주거래(主去來)는 농산물(소채, 산채)과 특산물 일부에 불과하다.

지방물품이 도시물품보다 질이 좋지 않아 고급품은 대구·부산 등지에서 주로 구입되는 관계로 지방상권이 날로 사양(斜陽)길에 들고 있다. 2008년 현재 청도장(고수리의 4·9일장)·화양장(동산리의 5·10일장)·풍각장(송서리의 1·6일장)·이서(학산리의 3·8일장)·동곡장(동곡리의 1·6일장) 등 정기시장 6개가 있다.

교통은 경부선 철도가 통과하고, 대구·부산간 고속도로와 국도 20호선 및 25호선이 동서,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으며, 지방도 5개 노선, 군도 11개 노선이 지난다.

관광

웅장한 산악과 많은 경승지를 비롯하여 사찰·유적지가 있는 내륙·산악·사찰관광지이다. 동쪽에 운문산·가지산·문복산, 서쪽에 천왕산·비슬산, 남쪽에 화악산 등 웅장한 고봉이 있어서 자연적 관광자원은 풍부하다.

유명한 관광지로는 운문면 신원리의 운문사와 신원리· 대천리 일대의 삼계리계곡 그리고 대천리 일대의 운문댐, 화양읍 교촌리와 범곡리 일대의 청도남산, 이서면 서원리의 자계서원과 투우대회가 있다.

태백산맥의 최남단에 있는 운문산은 등산하기에 적합할 뿐 아니라 명찰인 운문사를 비롯한 대소의 사찰과 암자가 있다. 또 이 산에서 발원하는 동창천의 운문계곡은 절승지로 알려져 있다. 운문면 신원리에 있는 운문사는 신라 진흥왕 18년(557년)에 한 수도승이 깨달음을 얻은 후 지었다는 오갑사 중 대작갑사이다.

적지 않은 관광객이 늘 운문사를 다녀가지만 200명이 넘는 비구니 학승이 수도하고 있는 탓인지 고즈넉한 분위기가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깨끗한 기숙사시설과 장서를 구비한 도서실을 갖추고 있으며, 신라·고려시대의 귀중한 문화재들이 보존되어 있다. 절 입구에는 수령 400년이 넘는 버섯 모양의 처진 소나무가 있는데, 봄·가을로 막걸리 열두 말을 먹는 것으로 유명하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그 외에도 많은 보물이 있다. 운문사와 10여 분 거리의 삼계리계곡은 울창한 숲과 맑고 찬 물로 유명하다. 가슬갑사지는 원광법사가 세속5계를 전했다는 화랑의 발상지이다. 운문댐의 호반 정경은 아름답고 운치가 있다. 청도남산은 청도읍·화양읍·각남면의 3개 읍·면에 걸쳐 뻗어 있으며 청도의 중심지였으므로 문화유적도 많다.

남산은 사계절 모두 절경을 보여주지만, 특히 봄에는 상여듬에서 봉수대사이에 진달래꽃이 만개하고 산중턱까지 개간한 복숭아밭에 도화가 만발한다. 대구에서 팔조령을 넘어 읍내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자계서원은, 절효김극일·탁영김일손·삼족당김대유를 향사하는 사액서원이다. 자계서원 앞 넓은 청도천변에는 해마다 3월이면 삼일절을 기념하여 전국적인 규모의 투우대회가 열린다.

그 외 군자정이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유등지, 병풍을 두른 듯이 기묘하게 반월형을 이루며 서있는 운문면 공암리 길옆의 절벽인 공암풍벽(孔巖風壁), 화악산중턱에 있는 높이 36m의 비폭(飛瀑)으로 약수이기도 한 화악산약수폭포, 가지산 중턱에 있는 높이 40m의 학소대폭포(鶴巢臺瀑布)가 있다.

그리고 운문사의 부속암자인 내원암(內院庵)의 약수탕, 옛 이서국의 궁성지(宮城址), 화양읍내의 석빙고, 임진왜란 때 의병이 왜병과 싸운 청도읍의 철마산성(鐵馬山城)과 청도향교가 있으며, 운문면의 호거산성(虎踞山城)/, 금천면의 선암서원 등이 있다. 또한, 청도온천은 느릅나무숲과 맑고 풍부한 하천으로 경상북도에서 내륙피서지로 이름난 곳이다.

또한 청도소싸움축제는 1998년 9회 대회 때까지는 전국민속투우대회로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소싸움대회로 자리매김하여, 1999년에는 문화관광부 지정 '한국의 10대 지역 문화관광축제'로 선정되는 등 4년 연속 문화관광부 지정축제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온 결과 국제적인 대회로 성장하게 되었다. 매년 봄에 열리고 있으며, 소싸움 대회 이외에도 다양한 문화프로그램을 추가해 볼거리 풍성한 축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또한 음력 정월대보름날에는 청도천 둔치에서 전국최대규모의 웅장한 달집이 매년 만들어져 달집태우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송액영복과 풍년을 기원하는 민속연날리기 대회, 제기차기, 투호, 널뛰기, 윷놀이, 세시음식 나누어먹기 등 다채로운 행사가 열린다.

읍·면
  1. 청도읍(淸道邑)

군의 중앙에 위치한 읍. 면적 86.86㎢, 인구 1만 2986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고수리이다. 이서국(伊西國)에 속했으나 신라시대에는 이서군(伊西郡)·경산현(驚山縣)·형산현(荊山縣)으로 불리다가 고려시대에는 청도현(淸道縣)으로 개칭되었다.

조선시대로 접어들어 하남면(下南面)과 내종도면(內終道面)으로 나뉘어졌으며, 1832년내종도면이 용산면(龍山面)으로 개칭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하남면과 용산면이 병합되어 대성면(大城面)으로 개편되었다. 1940년 다시 청도면으로 개칭되었다가 1949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북쪽에 용각산(龍角山, 693m), 서쪽에 화악산(華嶽山, 932m), 남쪽에 철마산(鐵馬山, 630m) 등이 솟아 있으며, 중앙부를 청도천이 남류하여 내호리에서 동창천과 합류, 밀양강으로 유입된다. 청도천 연안에는 좁은 충적지가 형성되어 경지로 활용된다.

총경지면적은 14.32㎢로 15.9%, 임야면적은 62.31㎢로 69.2%, 기타는 14.9%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 중 밭이 4.95㎢로 34.6%를 차지하고 논이 9.36㎢로 65.4%를 차지하여 논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하천 연안의 배수가 양호한 충적지에서 사과·배추·무 등의 작물재배가 증가하고 있고 야산개간으로 포도·복숭아 등의 생산도 증가하고 있다. 특히 청도반시 생산의 중심지이다. 양돈·양계·양봉이 군내 1위를 차지하며 그 외에 한우·개 등의 사육이 행해지고 있다.

상업활동은 4·9일에 고수리에 서는 청도장과 백화점·농협연쇄점과 고수리 일대의 상가 등을 통해 이루어진다.

교통은 국도와 경부선철도가 남북으로 지나며 지방도가 동서로 뻗어 있어 편리하다. 읍의 중심지인 고수리는 군내 가장 큰 취락으로 경찰서·우체국 및 각급 학교 등 행정기관과 백화점·시장·청도역 등 유통시설이 집결되어 있다. 문화유적은 사촌리에 선월정, 원정리의 적천사에는 적천사괘불탱화·적천사목조사천왕상이 있고 약 800년 된 은행나무 2그루가 있다. 그 외 이운룡장군영정·거영일기 및 계본등록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개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 교가 있다. 고수(高樹)·송읍(松邑)·무등(舞等)·덕암(德巖)·내(內)·안인(安仁)·운산(雲山)·부야(釜也)·원정(元井)·구미(龜尾)·월곡(月谷)·원(院)·거연(巨淵)·유호(楡湖)·신도(新道)·상(上)·평양(平陽)·내호(內湖)·음지(陰地)·초현(初峴)·사촌(沙村) 등 21개 리가 있다.

  1. 화양읍(華陽邑)

군의 중앙부에 위치한 읍. 면적 43.18㎢, 인구 8,064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동상리이다. 신라 이전에 이서국의 소재지였으나 신라시대에는 이서군(伊西郡)·경산현(驚山縣)·형산현(荊山縣)으로 불리다가 고려시대에는 청도현(淸道縣)으로 개칭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상읍면(上邑面)과 차읍면(次邑面)으로 나뉘어져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상읍면과 차읍면이 합해져 화양면이 되었고, 1961년청도군청이 범곡리로 이전되었고, 1979년화양읍으로 승격되었다.

남쪽은 남산(南山, 860m)을 정점으로 북쪽으로 경사지며, 북쪽은 성현(省峴)을 정점으로 남쪽으로 경사진다. 중앙부에는 청도천이 동쪽으로 흐른다. 총경지면적은 13.08㎢로 30.3%, 임야면적는 23.59㎢로 52.3%, 기타는 17.4%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 중 밭이 4.57㎢로 34.9%를 차지하고 논이 8.51㎢로 65.1%를 차지하여 논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군내에서 경지율이 가장 높으며, 논은 청도천 연안의 충적지에 주로 분포한다. 용수부족으로 유등지·삼신지(三新池)등 10여 개의 관개용저수지가 건설되었다. 청도천 연안의 하천부지와 야산지의 개간으로 사과·복숭아 등 과실생산이 증가되었다. 축산은 젖소·한우·개 등의 가축사육과 양봉이 활발하다. 상업활동은 5·10일에 서는 화양장을 통해 이루어진다.

교통은 경부선철도가 북부의 중앙을 남북으로 지나며 이와 나란히 국도가 뻗어 있고, 지방도가 동서로 뻗어 있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송금리에 대적사, 소라리에 덕사, 동천리에 신둔사와 석빙고 그리고 청도읍성, 신봉리에 죽림사가 있다. 교촌리의 청도향교에는 대성전·서무·동무·명륜당·동재·서재·사락루 등이 있으며, 서상리에 도주관 등이 있다. 그리고 범곡리에 지석묘군·화산정, 유등리에 군자정, 금전리에 학산정이 있고, 삼신리에는 용암온천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개 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 교가 있다. 동상(東上)·서상(西上)·신봉(新奉)·교촌(校村)·동천(東川)·고평(古坪)·소라(所羅)·합천(合川)·범곡(凡谷)·송북(松北)·눌미(訥彌)·유등(柳等)·토평(土坪)·다로(茶路)·진라(陳羅)·삼신(三新)·송금(松金) 등 17개 리가 있다.

  1. 각남면(角南面)

군의 남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46.84㎢, 인구 2,260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예리리이다. 본래 이서국에 속해 있었다. 신라시대에는 이서군(伊西郡)·경산현(驚山縣)·형산현(荊山縣)으로 불렸다가 고려시대에는 청도현(淸道縣)으로 개칭되었으며 풍각현(豊角縣)으로 이관되었다가 다시 청도현으로 복귀하였다.

조선 숙종 때 대구부(大丘府) 소관으로 초동면(初同面)이라 하여 10개 리를 관할하였고, 1906년대구부에서 청도군으로 편입될 때 각초동면(角初同面)과 내서면(內西面)으로 개칭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내서면(內西面)과 각초동면의 일부가 다시 병합되었다. 위치상으로 풍각면의 남쪽지역이라 하여 각남면이라 불리면서 10개 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남쪽으로 경상남도 밀양군과의 경계에 천왕산(天王山, 619m)·화악산(華嶽山, 932m)이 솟아 있고, 동쪽에 남산(南山, 860m)이 있으며, 면의 대부분이 그 사면으로 되어 있다. 북쪽에는 청도천이 이서면과의 경계를 이루며 흐르고 그 연안에 충적평야가 전개된다.

총경지면적은 8.55㎢로 18.3%, 임야면적은 33.31㎢로 71.1%, 기타는 10.6%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 중 밭이 2.66㎢로 31.1%를 차지하고 논이 5.89㎢로 68.9%를 차지하여 논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경지율이 낮은 편이나 옥산지(玉山池)·함박지(咸博池)·소말리못·가말못·가리못·신남못·구곡못 등 수리시설이 확충되어 경지의 수리율이 높다. 주곡중심의 농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나 최근 교통조건의 개선으로 청도천 연안에서 무·배추 등의 채소재배가 활발히 행해진다. 축산은 양봉·양돈과 한우사육이 활발하다.

교통은 면계를 따라 시천∼경주간 국도가 지나며, 남부의 일부지역에만 옥산∼확산간 군도가 지난다. 문화유적은 옥산리에 토기요지·대산사, 신당리에 화산서당, 일곡리에 고운영정 등이 있다. 남산은 경상남도 다대포를 기점으로 하는 2기준의 팔조령봉수대(八助嶺烽燧臺)와 더불어 군내에 있었던 옛 통신의 중요유적지이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가 있다. 예리(禮里)·칠성(七星)·화(華)·일곡(日谷)·구곡(九谷)·옥산(玉山)·함박(咸博)·사(沙)·신당(新堂)·녹명(鹿鳴) 등 10개 리가 있다.

  1. 각북면(角北面)

군의 북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50.94㎢, 인구 2,293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삼평리이다. 본래 이서국에 속해 있다가 신라시대에는 경산현(驚山縣)·상화촌현(上火村縣)·풍각현(豊角縣)으로 불렸다. 고려995년에는 풍각현에서 밀양군(密陽君) 풍산현(豊山縣)으로 이관되었다가 1018년청도군 유산현(幽山縣)으로 개칭되었다.

1413년밀양군 풍각현으로 개편되었고, 1709년대구부에 편입되어 각북면으로 개명되어 19개 이를 관할하다가 1906년청도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상북면(上北面)의 미대동(美大洞)이 병합되면서 8개 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면의 대부분이 산지로 되어 있으며, 서북 경계에 비슬산(琵瑟山, 1,084m), 동쪽 경계에 우미산(牛尾山, 636m)·홍두깨산(609m) 등이 솟아 있다. 면의 중앙을 청도천의 지류인 각북천(角北川)이 흐르며 상류부에 산간분지가, 하류부에 좁고 긴 충적평야가 전개된다. 하천 연안의 충적지는 논으로 이용되어 쌀이 많이 생산된다.

총경지면적은 8.18㎢로 16.1%, 임야면적은 37.22㎢로 73.1%, 기타는 10.8%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 중 밭이 1.92㎢로 23.5%를 차지하고 논이 6.26㎢로 76.5%를 차지하며 논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산지와 하천부지의 개간되어 사과·복숭아·포도 등 과실을 생산하고 있다. 축산으로는 한우·산양 등의 가축사육도 활발하다.

교통은 풍각∼가창간의 국도가 중앙부를 남북으로 지나 북쪽으로는 헐티재를 넘어 대구에, 남쪽으로는 청도읍에 이른다. 문화유적은 오산리에 용천사(湧泉寺), 남산리에 남강서원, 덕촌리에 198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털왕버들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 중학교 분교 1개 교가 있다. 삼평(三坪)·명대(明大)·우산(牛山)·남산(南山)·덕촌(德村)·지슬(芝瑟)·금천(金川)·오산(梧山) 등 8개 리가 있다.

  1. 금천면(錦川面)

군의 동부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71.78㎢, 인구 3,514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동곡리이다. 본래 이서국에 속했으며 신라시대에는 이서군·솔이산현(率伊山縣)·소산현(蘇山縣)에 속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청도군으로 개칭되었다. 1720년에 동일위면(東一位面)과 중동면(中東面)으로 나뉘어졌다가, 1832년동일위면이 일위면으로, 1840년일위면이 외종도면(外終道面)으로, 1906년에는 종도면으로 개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중동면과 종도면의 일부가 병합되어 금천면(錦川面)이라 불렸고 6개 리로 개편되었다. 1934년종도면(終道面)의 사전·금전·갈지·소천 등 4개 리가 편입되어 10개 리로 되었다. 금천이라는 명칭은 본래 솜내, 즉 면천(綿川)으로 불렸던 것이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 때 ‘綿’자를 ‘錦’자로 오기하여 금천으로 개명되어 금천면으로 되었다.

북부는 300m 전후의 구릉지로 되어 있고, 남쪽에는 경상남도 밀양시 경계에 억산(億山, 944m)이 솟아 있다. 중앙부를 밀양강의 지류인 동창천이 흘러 그 유역에 좁은 충적평야가 전개된다.

총경지면적은 11.09㎢로 15.4%, 임야면적은 53.66㎢로 74.6%, 기타 10.0%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 중 밭이 4.86㎢로 43.8%를 차지하고 논이 6.23㎢로 56.2%를 차지하며 논농사가 우세한 편이다. 1960년대 이후 야산지와 하천부지의 개간으로 사과·복숭아의 생산이 증가되어감과 더불어 주요한 농가소득원이 되고 있다.

최근 교통조건의 개선으로 과실·채소의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한우사육은 군내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외 개·토끼 등이 사육된다. 신지리에는 기와·항아리 등 오랜 전통의 요업공장이 있다.

교통은 시천∼경주간의 국도가 중앙을 지나며, 지방도가 북부를 지난다. 문화유적은 신지리에 선암서원·만화정·운강고택·염암고택·도일고택·명중고택·운남고택, 박곡리에 대비사와 석조석가여래좌상, 금전리에 황강서원·학산정이 있다. 사전리에 청도온천이 있다. 신지리는 밀양박씨의 동족마을이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개 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 교가 있다. 동곡(東谷)·사전(四田)·금전(金田)·갈지(葛旨)·소천(小川)·방지(芳旨)·임당(林塘)·신지(新旨)·박곡(珀谷)·오봉(梧鳳) 등 10개 리가 있다.

  1. 매전면(梅田面)

군의 동부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130.07㎢, 인구 3,948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동산리이다. 본래 이서국에 속했으며 신라시대에는 이서군·솔이산현(率伊山縣)·소산현(蘇山縣)에 속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청도군으로 개칭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상남면(上南面)과 외종도면·적암면(赤巖面)으로 나뉘어져 있다가 1896년외종도면이 동상면(東上面)으로, 적암면이 중남면(中南面)으로, 1906년동상면이 종도면으로 개칭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상남면과 종도면 6개 리, 중남면이 통합되어 매전면이 되었다. 1931년종도면(終道面)의 하평·관하·상평·금천·덕산·두곡 등 6개 리가 병합되었다.

북부에 선의산(仙義山, 750m)·용각산(龍角山, 693m)·학일산(鶴日山, 697m) 등의 고산이 솟아 있다. 동창천이 면의 동남부를 곡류하여 그 연안에 곡저평야가 전개된다. 북부의 산지에서 발원한 춘천이 북지리에서 동창천과 합류한다. 총경지면적은 18.40㎢로 14.2%, 임야면적은 100.56㎢로 77.4%, 기타는 8.4%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 중 밭이 8.08㎢로 43.9%를 차지하고 논이 10.32㎢로 56.1%를 차지하며 논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동창천 연안에 집결되어 있는 경지에서 주곡농업이 행해지며, 사과재배도 활발하다. 한우사육은 군내 2위이며 그 외 산양·토끼 등이 사육된다.

교통은 동산리를 중심으로 하여 시천∼경주간의 국도와 밀양∼경산간의 지방도가 면을 가로지르고 뻗어 있어 대구·청도·밀양 등으로 연결된다. 문화유적은 용산리에 불령사(佛靈寺), 장연리에 장연사지삼층석탑, 동산리에 처진소나무, 하평리에 은행나무가 있다. 온막리에는 고성이씨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동산(東山)·남양(南陽)·당호(堂湖)·금곡(金谷)·북지(北旨)·금천(錦川)·용산(龍山)·온막(溫幕)·호화(好化)·장연(長淵)·예전(禮田)·내(內)·지전(紙田)·송원(松元)·구촌(龜村)·하평(下坪)·상평(上坪)·관하(館下)·덕산(德山)·두곡(杜谷) 등 20개 리가 있다.

  1. 운문면(雲門面)

군의 동단에 위치한 면. 면적 147.30㎢, 인구 2,243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대천리이다. 본래 이서국에 속했으며 신라시대에는 이서군·솔이산현(率伊山縣)·소산현(蘇山縣)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청도군으로 개칭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동이위면(東二位面)·이위면(二位面)으로 12동 이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고미면(古彌面)의 6개 리와 경주군의 산내면(山內面)일부가 병합되어 운문산의 이름을 따서 운문면이 되었다.

운문산(雲門山, 1,188m)·가지산(加智山, 1,240m)·문복산(文福山, 1,014m)·사룡산(四龍山, 685m)·구룡산(九龍山, 675m) 등이 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지면이다. 면의 북부를 동창천이 서남류하여 밀양강에 합류하며 동창천 연안에 좁은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총경지면적은 8.77㎢로 6.0%, 임야면적은 124.48㎢로 84.8%, 기타는 9.2%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 중 밭이 5.14㎢로 58.6%를 차지하고 논이 3.62㎢로 41.3%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가 협소하여 농업생산이 부진하나 주곡중심의 농업이 행해진다. 하천부지와 야간지의 개간으로 사과 등 과수재배가 늘고 있으며, 사슴·한우 등의 가축이 사육된다.

교통은 시천∼경주간의 국도가 북부를 동서로 지나며, 언양∼우보간의 지방도가 남부를, 언양∼영천간의 지방도가 북부를 지난다. 경승지로는 공암풍벽이 예로부터 청도팔경의 하나로 손꼽힌다. 문화유적은 신원리의 운문사 경내에 대웅보전·삼층석탑·석등·사천왕석주·원응국사비·석조여래좌상 등이 있다. 운문산정에는 호거산성이 있다. 운문면 댐하류에 유원지가 조성되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분교 1개 교가 있다.

대천(大川)·순지(蓴池)·방음(芳音)·오진(梧津)·신원(新院)·서지(西芝)·공암(孔巖)·지촌(芝村)·봉하(鳳下)·정상(亭上)·마일(馬日) 등 11개 리가 있다.

  1. 이서면(伊西面)

군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55.31㎢, 인구 4,955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학산리이다. 본래 이서국에 속했으며 신라시대에는 이서군(伊西郡)·경산현(驚山縣)·형산현(荊山縣)으로 불렸다. 고려시대에는 청도현(淸道縣)으로 개칭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상북면(上北面)과 차북면(次北面)으로 나뉘어져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2개 면이 폐합되어 이서면으로 되었다.

북쪽에 상원산(上院山, 700m)·봉화산·삼성산(三聖山, 663m)·홍두깨산(609m) 등이 경계를 이루며 솟아 있어 지형은 전체적으로 남쪽으로 경사진다. 각남면과의 경계를 이루는 청도천 및 그 지류의 연안에 상당히 넓은 충적평야가 전개된다.

총경지면적은 13.68㎢로 24.7%, 임야면적은 34.59㎢로 62.5%, 기타는 12.8%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 중 밭이 3.24㎢로 23.7%를 차지하고 논이 10.44㎢로 76.3%를 차지하며 논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면내에는 팔조지·자양지·대곡지·칠곡지·수야지 등 약 18개의 저수지가 있어 농업용수의 부족을 보충하여 경지의 수리율이 높다. 따라서 쌀이 많이 생산되며, 하천부지가 개간된 곳에서 사과가 재배되고, 야산지에서는 복숭아가 생산된다. 양봉·양계·양돈과 한우·젖소·산양 등의 가축사육이 활발하다.

교통은 청도∼대구간의 지방도가 남북으로 지나며, 옥산∼학산간의 군도가 남부를 지난다. 문화유적은 팔조령봉수대를 비롯하여 학산리에 용강서원, 서원리에 자계서원, 금촌리에 금호서원, 대전리에 198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은행나무가 있다. 수야리에 밀양박씨, 대전리에 의흥예씨(義興芮氏)의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 교가 있다. 학산(鶴山)·칠엽(七葉)·대전(大田)·가금(佳琴)·구라(九羅)·서원(書院)·각계(角溪)·수야(水也)·금촌(琴村)·흥선(興善)·문수(文岫)·고철(古哲)·양원(陽院)·신촌(新村)·칠곡(七谷)·대곡(大谷)·팔조(八助) 등 17개 리가 있다.

  1. 풍각면(豊角面)

군의 남서단에 위치한 면. 면적 61.46㎢, 인구 4,488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송서리이다. 본래 이서국이었으나, 신라시대에는 경산현·상화촌현·풍각현이었다. 고려시대는 풍각현·풍산현·유산현으로 개칭되었다. 조선 숙종 때 풍각현이 대구부에 편입되었고, 1895년청도군에 편입되어 각현내면(角縣內面)과 각이동면(角二同面)으로 나누어졌다.

1910년 동리개편으로 현내면(縣內面)이라 하여 7개 리와 이동면(二同面)이라 하여 15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이동면의 13개 리, 초동면의 2개 리, 각북면의 율정동 일부가 병합되어 풍각면이 되었다. 풍각이라는 명칭은 소뿔 사이의 넓은 곳이라는 뜻이다.

면의 서쪽 경계에 수봉산(秀峰山, 593m), 남쪽 경계에 묘봉산(妙峰山, 513m)·천왕산(天王山, 619m) 등의 높은 산이 있어 지형은 전체적으로 동쪽으로 경사져 있다. 서부 산지에서 청도천이 발원하여 동부의 봉기천(鳳岐川)과의 합류점 부근에 충적평야가 전개된다. 덕암지(德巖池)·내곡지(內谷池) 등의 수리시설이 확충되어 경지의 수리율이 높다.

총경지면적은 12.10㎢로 19.7%, 임야면적은 42.46㎢로 69.1%, 기타는 11.2%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 중 밭이 3.39㎢로 28.0%를 차지하고 논이 8.71㎢로 72.0%를 차지하며 논농사가 훨씬 주류를 이루고 있다. 미곡 이외에 채소류 재배와 한우사육이 행하여진다.

교통은 면의 중앙부를 시천∼경주간의 국도가 동서로 지나 이 면을 창녕지방 및 청도읍과 연결시킨다. 문화유적은 봉기리에 삼층석탑·봉양서원, 덕양리에 삼층석탑과 차산리에 차산서원이 있다. 이 곳의 차산농악은 1980년 경상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금곡리에 평택임씨(平澤林氏)의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 교가 있다. 송서(松西)·봉기(鳳岐)·현(縣)·성곡(聖谷)·수월(水月)·화산(花山)·금곡(金谷)·안산(安山)·월봉(月峰)·차산(車山)·덕양(德陽)·흑석(黑石) 등 12개 리가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청도군통계연보』(청송군, 2008)
『경북통계연보』(경상북도, 2005)
『지방행정구역요람』(행정자치부, 2003)
『한국관광자원총람』(한국관광공사, 1985)
『경상북도사』(경상북도사편찬위원회, 1983)
『한국지명요람』(건설부국립지리원, 1982)
『내고장전통문화』(청도군, 1981)
『한국지명총람』(한글학회, 1979)
『경북향토지』(경상북도교육위원회, 1972)
『도주문화(道州文化)』(청도문화원)
청도군(www.cheongdo.go.kr)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