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이 대대로 문학으로 알려진 명문출신으로 성품이 근후하고 말이 적었다. 젊어서 학문을 즐기어 동지 10인과 함께 10년간 독서하기로 약속하였는데, 몇 년이 못 되어 다른 사람은 모두 포기하고 갔으나 최옹은 홀로 힘써 배워서 읽지 않은 책이 없어, 당시 박학으로 일컬어졌다.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하고 대관승(大官丞)을 거쳐 전리좌랑(典理佐郎)이 되었으며, 충렬왕은 태손(太孫) 때부터 맞이하여 사부(師傅)로 삼았는데 즉위함에 따라 국자사업(國子司業)을 지내며 『통감(通鑑)』을 강론하였다.
이어 국학전주(國學典酒)·세자궁령(世子宮令)을 거쳐 1292년(충렬왕 18) 부지밀직사사 문한학사(副知密直司事文翰學士)에 올라 치사(致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