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 (televi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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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파를 매개로하여 영상을 통해 전달하는 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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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전파를 매개로하여 영상을 통해 전달하는 도구.
내용

텔레비전수상기가 우리나라에서 일반에게 처음으로 선보인 것은 1954년 7월 30일이었다. 이날 서울의 보신각 앞에 자리한 미국RCA사 한국대리점(KORCAD)에는 20인치 화면의 폐쇄회로(유선방식)텔레비전수상기(CCTV)가 일반의 커다란 관심 속에 공개되었다. 이 텔레비전수상기의 값은 1,500달러가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라디오수신기의 보급률이 낮아 서민들에게는 라디오도 귀중품으로 생각되던 때라 이 텔레비전수상기는 한동안 장안의 화제거리가 되었다.

미국RCA 한국대리점을 경영하던 황태영(黃泰永)은 우리나라에서의 텔레비전수상기 보급의 타당성을 알아보기 위해 미국RCA 본사의 전문가들을 데려와서 텔레비전방송국의 설립을 위한 기술상의 여러 문제를 검토시켰던 것으로 알려졌다.

텔레비전수상기가 첫선을 보인 지 2년이 채 못되는 1956년 5월 12일 우리나라 최초의 텔레비전방송국이 설립되었다. 당시 RCA사 한국대리점은 RCA와 합작하여 텔레비전방송기재를 도입하여 한국RCA배급회사를 설립하면서 텔레비전방송국도 개설하였다.

호출부호 ‘HLKZ-TV’, 영상주파수 186∼192㎒, 출력 0.1㎾로 미국의 ‘NTSC(National Television System Committee)’방식을 채택한 이 텔레비전방송국은 시험방송을 거친 뒤 1956년 11월 1일부터 정규방송에 들어갔다.

HLKZ-TV는 상업방송으로서 주요한 수입원을 광고사업으로 잡고 있었으나 당시 우리나라에서 매체의 효용가치를 인식하는 광고주를 얻지 못했고, 또한 경제여건도 좋지 않을 뿐 아니라 텔레비전수상기의 보급률도 보잘것없었다.

방송국의 운영난으로 운영권은 1957년 5월 6일 한국일보사장 장기영(張基榮)에게 넘어갔다. 장기영은 이 회사를 대한방송주식회사로 바꾸었으나 여전히 운영에 적자를 면하기 어려웠다.

이 무렵 국내의 텔레비전수상기 보급대수는 처음 개국할 때의 10배를 웃도는 3,000대 수준이었으나 상업방송매체로 자립하기에는 앞날이 불투명한 형편이었다.

1957년 1월부터 적용된 수입품 텔레비전에 대한 관세의 인상(186%)으로 텔레비전 보급은 더욱 위축되었다. 당시 대당 통관가격은 37만 5000환이나 되었다.

한편, 1957년 9월에는 주한미군방송(AFKN)도 텔레비전방송을 개시하게 됨에 따라 미군 PX에서 텔레비전을 취급하게 되자 일부는 종전 가격의 거의 반값으로 국내시장으로 흘러들어와 1958년 10월에는 국내 텔레비전 보급대수가 7,000대로 늘어났다.

어려운 여건에서 텔레비전방송의 선구자 구실을 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으나 1959년 2월 2일 원인 모를 화재로 HLKZ-TV방송국의 시설은 모두 불에 타 없어져 1961년 10월 15일 문을 닫게 되었다. 이어 1961년 12월 31일 국영텔레비전방송국(한국방송공사: KBS-TV)이 탄생되어 다시 텔레비전시대에 접어들었다.

한국방송공사 개국 이후 공보부가 1차로 텔레비전수상기 2만 대를 도입하여 월부로 보급하고 2차 보급품부터는 금성사 등에 국산화를 권고했던 만큼 국내기업에서 텔레비전수상기 생산준비를 하는 데 주력하게 하였다.

1964년 12월 7일과 12일에 동양방송(TBC-TV)은 서울과 부산에서 각각 개국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텔레비전방송이 본격화되고, 또한 시청가능지역이 거의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됨에 따라 텔레비전수상기의 수요도 급증하였다.

이와 같이 텔레비전방송이 본격화되고 활발해짐에 따라 당시 수입에만 의존하던 텔레비전수상기의 완제품을 생산하려는 움직임이 국내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금성사는 일본의 히타치[日立]와 텔레비전수상기 제작에 기술제휴를 하고 1966년 7월 1차 부품도입분인 500대의 수상기 생산에 박차를 가하여 이 해 8월 1일 국내 최초의 텔레비전수상기(모델 VD-191탁상형)를 내놓게 되었다.

라디오수신기를 개발한 지 7년 만의 쾌거였다. 한편, 이듬해인 1967년에는 동남전기공업주식회사가 일본회사와 기술제휴하여 텔레비전수상기를 생산하고, 한국마벨주식회사는 미국RCA와 기술제휴하여 RCA텔레비전수상기를 생산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소비자들로부터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이 당시 각사제품의 특징은 금성사와 동남전기가 가정용에 주력하여 중류층 이상을 목표로 보급한 데 반하여 한국마벨은 많은 사람이 함께 시청할 수 있는 23인치 정도의 대형 텔레비전수상기를 제작, 농촌과 교육기관 등을 대상으로 하였다. 수상기의 국산화율은 65%였는데, 1966년 1만 500대를 생산하였고, 1969년에는 7만 430대를 생산하여 급속한 신장을 보였다. 이어 생산업체도 7개 업체로 늘었다.

수상기 크기는 당초 19인치에서 점차적으로 16인치·23인치 등으로 다양화되었으며, 1969년부터는 금성사를 비롯한 각 업체들이 진공관식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트랜지스터식수상기를 제작하게 되었다.

1974년에는 생산업체수도 13개사가 되어 연생산규모도 100만 대를 넘어서게 되었다. 1974년 아남산업과 일본내셔널전기가 합작하여 처음으로 컬러텔레비전수상기를 생산하게 되었고, 이어 금성사를 비롯하여 각 사들도 생산을 하게 되었다.

1974년에는 IC가 개발되어 IC텔레비전수상기시대로 접어들게 되었고, 1972년부터는 20인치·14인치·12인치 등 다양한 모델들이 개발되었으며, 1979년부터는 소형(9인치)전지용도 개발되었다.

이제 텔레비전음성다중방식시대에 접어들어 각 생산업체는 이에 대비하여 이 방식에 맞는 새로운 수상기의 개발 및 생산단계로 들어가 1984년부터 음성다중컬러텔레비전이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생산되었다.

1984년부터 컴퓨터로 제어되는 디지털기술을 이용한 디지털 컬러 텔레비전이 개발되었다. 1985년 1월에는 음성신호에 또 다른 음성신호를 추가하여 송신하는 것을 수신할 수 있는 음성다중컬러 텔레비전이 시판됨에 따라 쇼나 음악 프로그램을 현지에서 직접 관람하는 것과 같은 생생한 현장감을 더해주는 스테레오 음질을 즐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외화 및 오페라, 뉴스 등을 우리말과 외국어로 동시에 듣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여 들을 수 있도록 되었다.

1986년에는 여가를 즐기는 시청자들이 늘어 휴대용 액정 텔레비전의 등장과 동시에 텔레비전과 비디오기능을 일체형으로 만든 비디오TV가 생산되었다.

1988년에는 문자다중방송이 이루어지고 1989년에는 인공지능 컴퓨터생산에 따라 TV프로그램이 외부 환경에 따라 화질과 음량을 자동적으로 설정하게 되었다. 1993년부터 고화질디지털TV(HDTV)의 기반이 되는 36인치 와이드 스크린TV가 개발되어 2000년부터는 실용화되고 있다.

참고문헌

『금성사 35년사』(주식회사 금성사, 1993)
『문화방송사』(문화방송주식회사, 1982)
『전자공업20년사』(한국전자공업진흥회, 1981)
『한국방송사』(한국방송공사,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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