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목 ()

경주 불국사 청운교 및 백운교 좌측면
경주 불국사 청운교 및 백운교 좌측면
과학기술
개념
목재 · 철재 · 토석 등을 써서 도로 · 교량 · 항만 · 제방 · 댐 · 철도 · 건물 · 상하수도 등을 건설하는 공사.
정의
목재 · 철재 · 토석 등을 써서 도로 · 교량 · 항만 · 제방 · 댐 · 철도 · 건물 · 상하수도 등을 건설하는 공사.
개설

우리 나라에서는 3세기에 벼농사를 시작한 이후 관개수리시설을 위한 농업토목기술이 발달하였는데, 이것은 모든 나라의 토목기술이 농경과 관계가 있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물론 이 밖에도 인마내왕을 위한 도로 및 조가기술(造家技術) 등의 발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토목기술은 원래 농사와 종교적인 건축물의 건립을 위하여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문화의 발전에 따라 정치·경제·군사 등 여러 부문에 걸쳐 국토개발이라는 실용적인 면과 민족적 상징이 될만한 대규모 역사(役事)의 단행으로 계승되었다.

이러한 실용적·상징적 필요성에 의하여 발전된 토목시술과 그로 인하여 나타난 각종 역사의 결과물 등은 오늘날 농림·수산업이나 광공업은 물론 교통·운수·정보서비스 등 인간의 생산활동 및 생활의 전반에 걸친 기반구축을 위하여 활용되고 있으며, 나아가 국토경영의 기초시설로서 큰 구실을 담당하고 있다.

이러한 토목기술은 한 나라의 민족문화사적 측면에서 관찰되고 기술될 성질의 것으로, 우리는 이를 대규모 역사를 기록한 많은 공사지(工事誌)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우리 나라의 토목문화는 인접한 중국대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민족문화를 접촉하는 과정에서 이를 단순히 섭취,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채장보단(採長補短)·환골탈태(換骨脫胎)하여 독특한 기술영역을 개척하고 진보와 고양을 이룩하였을 뿐 아니라 이를 일본에까지 전파시켰다.

그러나 한말에 이르러 일제의 강압하에서 서구의 근대화된 토목기술을 타율적이고 파행적으로 도입한 바도 있었다. 문화사적 측면에서 우리 민족은 수많은 외세의 침입과 자연의 도전을 극복하면서 하나의 일관된 태도를 견지하여왔다.

토목기술을 문화의 한 부문으로 볼 때 우리의 토목기술도 하나의 일관된 흐름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으나, 각 시대의 유적들을 관찰할 때, 예컨대 고분·성곽·저수지·제언·방수제 등 토목구조물의 기념비적 사업들은 시대에 따라 어느 정도 상이한 것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를 고려하여 시대사조를 통하여 각 시대 토목기술상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시대구분을 한다. 물론 시대구분에 있어서 선사 및 삼국시대는 연대가 명확하지 않은 점이 있다.

고려시대·조선시대·일제강점기·광복 이후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뚜렷한 상징적인 토목기술상의 사건은 없다 하더라도, 각 시대의 연대가 명확하고 각 시대마다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측면이 격변하여 토목기술도 역시 이에 맞추어 변화하였다는 의미에서 이 시대구분을 하였다.

시대사조의 변화가 토목기술의 내용과 진보에 영향을 주고, 또 토목사업의 진보 그 자체가 시대사조에 영향을 주는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으면 토목기술의 변화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선사시대의 토목

선사시대의 인간생활은 그 자체가 자연이었을 뿐이다. 의·식·주 해결에 급급한, 보잘것없는 원시시대에 주거지라는 개념의 토목기술을 구사하였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당시 원시인들은 추위와 더위를 피하고 눈비와 맹수로부터 보호받기 위하여 자연의 지형지물이나 동굴 같은 것을 이용하려 한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생각하는 동물인 인간은 언제까지나 주어진 환경에 얽매어 살려고만 하지 않고, 기거하는 동굴이 비좁아지면 공간을 더 확장하려 하였을 것이다.

또한, 안주조건이 좋지 않으면 보다 안락한 곳을 찾아서 부족이동을 행하여 도로나 교량가설을 계획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인간생활의 편익을 위한 기술로서 토목기술이 자연히 발생되었으리라고 본다.

더구나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한정된 자연에서는 이용물의 부족상태를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거기서부터 자연을 극복하려는 인위적인 창조행위가 나타났고, 그것이 원시인들의 주거지였던 움막이나 토굴 따위의 빈약한 시설물들이다. 우리 민족의 선사생활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우리 나라에는 세기전 300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신석기시대의 문화유적이 남아 있다. 그 중 주거지로는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 평안북도 온천군 운하리, 함경북도 웅기군 굴포리, 평안북도 중강군 토성리, 서울 강동구 암사동, 강원도 춘천시 교동 등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이것은 반혈거식(半穴居式) 초야(草野) 모옥(茅屋) 단계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그 다음으로 선사사회에서 중요한 토목유물로 살펴볼 것은 묘제(墓制)이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고인돌[支石墓]이나 석관묘(石棺墓)·적석총(積石塚) 등은 선사시대의 인간들이 남긴 뚜렷한 토목 자취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삼국시대의 토목

고대국가인 고구려·백제·신라는 그 초기에는 도시국가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고대국가에서 “왕도는 곧 국가이다.”라는 말처럼 토목다운 시설이 있었을 것 같지 않고, 이들 성읍의 규모에 대한 역사적 기록도 없어 그 내용을 고찰할 길이 없다.

다만 고구려의 국내성을 중국 연왕(燕王)이 5만의 군사로 함락하여 5만 여의 남녀를 잡아갔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대의 성읍치고는 상당한 규모였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① 고구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고구려는 국내성에 도읍을 정하고 425년이 지난 뒤에 평양성으로 국도를 옮겼고, 다시 156년 뒤에 장안성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주서 周書≫ 이역전(異域傳)에 나오는 “治平壤城其城東西大里南臨浿水(大同江)……”는 지금의 평양 북쪽의 대성산성(大城山城)을 가리킨다. 이 산성은 비상시에 대비한 축성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규모는 알 수 없으나 왕궁으로 안학궁지(安鶴宮趾)가 있었다. 이 같은 평양성 건설은 당시에 ≪주례 周禮≫ 고공기(考工記)에 의한 도시설계법에 따른 대규모 도시건설이 행하여졌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도로나 제방축조 등이 있었을 것이나 사료상 전하는 바가 없어 상고할 길이 없다.

② 백제: 기원전 18년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하였던 백제는 475년 도읍을 웅진(熊津:지금의 공주)으로 옮겼고, 63년 뒤에 다시 사비(泗沘:지금의 부여)로 옮겼다. 위례성은 그 위치마저 정설이 없어 윤곽조차 살필 길이 없으나, 웅진성은 백마강을 끼고 사방 4㎞의 도성을 조영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산성과 도성형식이 고구려와 같다.

또, 사비성은 백마강의 만곡부(彎曲部)를 이용하여 분지를 이룬 둘레에 토성을 쌓았고, 그 서북쪽의 부소산에 축조한 산성과 연결지었는데 분지에 당식(唐式) 도성 흔적이 인정되고 있다.

그 밖에 510년 1월에 왕이 제방을 튼튼히 쌓도록 명하고, 내외 유식자(遊食者)들을 모아 농사에 종사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특히, 현재 남아 있는 벽골제(碧骨堤)는 ≪삼국사기≫에 신라가 축조한 것으로 기록되었으나, 이는 330년에 백제가 축조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지배적인 견해이다. 백제의 도성계획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아스카경(飛鳥京:奈良)에 크게 영향을 미치기까지 하였다.

③ 신라: 신라의 천년고도인 경주는 가장 번창하였던 성읍이었음을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보면 왕도의 길이가 3,075보(步), 넓이가 3,018보에 35리 6부라고 하였다. 처음 세기전 37년에 궁성을 쌓았고, 서기 10년에 월성을 쌓았는데 그 주위가 1,023보였다.

또다시 그 북쪽에 주위 1,838보의 만월성, 동쪽에 주위 1,906보인 명활성(明活城), 남쪽에 주위 2,804보인 남산성을 쌓았다고 한다. 이들 성들은 조선시대 중엽까지도 그 형적이 남아 있었다.

신라의 국력이 점점 신장되자 중국의 영향을 받아 도시정비가 행하여졌다. 469년에 이미 시가지는 중국의 고제(古制)에 따라 직사각형의 가로가 이루어졌다.

≪삼국사기≫에 신라왕경을 묘사한 것을 보면, 경도씨가(京都氏家)는 서로 이어 꽉 찼는데 지붕은 전부 기와였고, 밥을 짓는 데 장작이 아닌 숯을 썼다고 한다. 또, 왕릉과 사찰의 위치가 일정한 법칙성을 가지고 배치될 만큼 발달하였다.

신라식 도성계획은 670년대부터 일본으로 전달되어 일본 최초의 도성인 후지와라경(藤原京)은 물론 나니와궁(難波宮)·헤이조궁(平城宮)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신라는 삼국통일 이후 구주(九州)와 오소경(五小京)을 지방에 설치하였는데 소경 중 중원(中原) 소경은 둘레가 2,592보였고, 왕도를 모방하였다고 한다.

수리시설로는 시제(矢堤)·의림지(義林池)·대제지(大提池)·수산제(守山堤)·공검지(恭儉池) 등이 유명하며, 신라의 수리사업은 역사상 많은 문헌에 기록될 만큼 활발하였다.

최초의 교량공사 기록은 413년에 완성한 평양주(平壤州)의 대교로, 그 위치는 미상이다. 불국사의 청운교(靑雲橋)와 백운교(白雲橋)는 45°의 경사를 가지고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 밖에 중앙집권제를 펴나가는 데 무엇보다 필요한 도로망 정비에는 156년 계립령(鷄立嶺:聞慶鳥嶺), 157년 장령진(長嶺鎭), 158년 죽령(竹嶺)을 개척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삼국 모두 우역제(郵驛制)를 실시한 것으로 보아 도로건설도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끝으로 해상교통과 포구건설을 빼놓을 수 없다. 중국대륙과 바다 건너 일본과의 통교는 주로 해로를 많이 이용하였다. 신라의 주요 포구로는 가야진(伽倻津:지금의 낙동강하구)·당은포(唐恩浦:지금의 南陽)·영암(靈岩)·사비·남해(南海)·염포(鹽浦)·청해진(淸海津:지금의 莞島)·흑산도(黑山島) 등이 있다.

특히, 828년 장보고(張保皐)가 완도에 청해진 포구를 수축하여 이곳을 거점으로 극동해역을 주름잡는 대해상왕국을 이룩하고, 사무역(私貿易)의 패권을 잡았던 유적지가 아직도 남아 있다.

고려시대의 토목

신라 말의 토목기술은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계승, 발전되었다. 태조 왕건(王建)은 궁예(弓裔)의 태봉(泰封)을 이어 건국하면서 수도를 철원에서 개성으로 옮겼다. 태조는 본래 송악군(松岳郡) 출신으로 자신의 세력기반이 있는 연고지로 옮기려는 의도였으나 여기에는 지리도참설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 무렵 우리 나라에는 신라 말부터 신비하게 여기던 도참설이 유행하고 있었다. 개성의 송악산 지역은 성자(聖子)가 나올 것이라든가 진마(辰馬)의 주(主:都)가 되리라는 예언참설이 있었다.

더욱이 신라 말의 대학자 최치원(崔致遠)은 왕건이 흥기할 때 그가 비상인(非常人)이라는 것과 반드시 수명개국(受命開國)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鷄林黃葉 鴶嶺(松岳의 一名) 靑松”의 참구(讖句)를 남길 정도였다.

이렇듯, 고려의 도유지인 송악산은 그 지형이 마치 웅장한 병풍을 두른 것 같아서 풍수지리설에서 보아도 산수의 회포취합(回抱聚合)이 좋고, 풍기(風氣)의 산류(散流)가 제지되고 국내(局內)의 생기를 다량으로 받는다는 명당자리였다.

일종의 상지학(相地學)이었던 도참설은 고려시대 전반은 물론 조선 말기까지도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그러므로 고려시대의 도읍·궁택·성곽·능묘 등 토목공사 전반에 걸쳐서 불가결한 상관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개경의 축성

개성은 송나라의 호순신(胡舜申)이 저술한 ≪지리신법 地理新法≫에 설명한 이론에 적용하여 보아도 대체로 온당한 도성축조였다.

그 위치는 한반도의 중심인 교통의 요충지였고, 멀지 않은 곳에 수도의 관문격인 벽란도(碧瀾渡)가 있다. 벽란도는 예성강 하구에 자리잡은 항구로서 대륙과 일본열도를 연결하는 절대적인 해상교통의 요지였다.

태조의 <훈요십조 訓要十條> 중 지리도참설과 관계가 깊은 1·2·5·8조 등에서 보이듯이, 초기 만월대와 같은 명당자리에 궁궐이 조영된 뒤 몽고의 침략을 받고 강화로 옮겨갔던 40년간을 뺀 430여 년간의 왕도였다.

≪고려사≫ 지리지에 보면 황성은 2,600칸에 문루가 20개였고, 왕성 안은 크고 작은 사찰 100여 개가 들어차 있었다고 전한다.

성곽은 내성과 외성(外城:羅城)이 있었는데, 특히 외성은 현종 때 21년간에 걸친 축조로 부역의 연인원은 34만 4400인이고, 성 주위는 2만 9700보 60리에 이르렀으며, 나각(羅閣)은 1만 3000칸으로 높이는 27척이고 두께는 12척이라고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상서성(尙書省) 아래 6부가 있었는데 그 중 공부(工部)에서 토목·건축·도량형·개간 등을 맡고 있었고, 교육제도에도 국자감내에 잡학이라 하여 기술교육을 6년간씩 시켰으며, 그 직임은 8픔 이하로 국한시켰다. 이와 같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에 기술인이 포함된 것은 우리 나라 초유의 사실이다.

고려시대는 개경 외에도 경주에 동경을 설치하였고, 특히 태조 이래 중요시 하였던 평양은 서경으로 왕경에 준하는 도성축조가 있었다. 당시의 건축은 계급적인 제약이 컸기 때문에 주로 왕궁·사원에 치중되었고, 송나라 문화의 영향이 커서 이를 받아들여 독자적인 기술을 개발시킨 결과 오늘날 남은 유물에서 그 독특한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경상북도 영주의 무량수전(無量壽殿)·조사당(祖師堂), 충청남도 예산의 수덕사(修德寺) 본당, 경상북도 안동의 봉정사(鳳停寺) 극락전, 강원도 강릉의 객사문(客舍門) 등이 있고, 석탑으로는 경천사(敬天寺)의 10층탑이 남아 있다.

또, 영산강 지류에서 조수가 넘나드는 샛강에 눔애진함평독다리는 1274년에 가설되었다는 기록이 전하는 특이한 시설물이었다고 한다.

치수와 역로

고려시대에는 치수와 수리사용으로 자연을 극복해보려던 의지가 도처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도참사상에 입각하여 자연의 섭리에 순종하는 사조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자연개조라는 국토개발은 활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973년 토지개간이 있었고, 1053년 나성(羅城)의 보수작업과 동시에 홍수로 유실된 제방보수에 역부(役夫) 3,000∼4,000명이 징발되었다고 한다.

특히, 1198년 당시의 집정관이던 최충헌(崔忠獻)은 산천을 보전하기 위한 산천비보도감(山川裨補都監)을 두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1256년에는 당시 몽고병과의 전란을 겪고 군량미를 확보하고자 강화도의 제포(梯浦)·와포(瓦浦)·초포(草浦) 및 이포(狸浦)의 제언(堤堰)을 축조하였는데, 기록상 해서간척(海西干拓)은 이것이 처음인 것 같다.

고려의 역로개척은 태조 1년인 918년부터 기록이 나오며, 중앙집권제가 확립되고 지방제도가 본격적인 정비를 보던 981∼999년에 확립을 본 것 같다. 개경을 중심으로 22역도(驛道)에 525역이라는 방대한 역로조직이 기록에 남아 있다. 그러나 당시의 도로상태를 고찰하여볼 자료는 별로 없다.

다만, 1045년 임진강의 과교원(課橋院)에 선교(船橋)를 놓았다는 사실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도로 유지관리상태를 나타낸 기록으로는 1178년 “길 곁에 옥택(屋宅)·난원(欄垣)·지촌(只寸)이라도 관로(官路)를 침범한 것이 있으면 모두 복구하도록 명령하소서.”라는 중방(重房)의 건의가 있었다.

조운과 포구

고려시대의 조운은 상당한 수준에 있었던 것 같다. 당시 각 지역의 조세와 공물은 주로 선박에 의하여 강이나 해안을 따라서 개경으로 운반되었는데 11세기 초 전국에 13개 조창을 설치하였고, 1035∼1046년 사이에 조선(漕船)에 관한 율령이 자주 공포된 기록이 보인다.

당시의 조운선은 1개 창에 1,000석을 실을 수 있는 초마선(哨馬船) 6척씩을 배치하였고, 수로를 이용하는 3개 창에는 200석을 실을 수 있는 평저선(平底船) 20, 21척씩을 배당하였다. 1134년에는 소대현(蘇大縣)에 운하를 파고자 시도하였으나 암석구간 7리를 파지 못하여 중단한 일이 있었다.

고려 초의 포구조영은 육상교통로가 발달하지 못하였던 관계로 비교적 힘을 기울인 편이다. 주로 송나라와의 통교 때 해상을 이용하였는데, 대개 고려의 벽란도―고군산도(古群山島)―흑산도―명주(明州)와 영암―흑산도―명주의 2개 노선이 있었다.

그러나 송나라와의 초기 내왕은 대동강 하구에 있는 초도(椒豊:島川) 또는 공진 등지가 주요 포구였다. 그리고 제주도의 명월포(明月浦), 태안반도의 안흥포구(安興浦口)가 유명하였다. 그 중에서도 벽란도의 예성항은 국제항의 성격마저 띨 만큼 번창하여 <예성강곡 禮成江曲>이라는 노래까지 생겨났을 정도였다.

조선시대의 토목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산업혁명 이후 서구의 근대화된 토목기술이 들어오기 전에 벌써 대단위 토목사업이 우리 손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치기구 안에도 의정부 육조(六曹) 중에 공조가 있었고, 과거제도에도 음양과라 하여 천문·지리를 전공으로 하는 과학기술관을 뽑았다.

더욱이 세종 때에는 간의(簡儀)·혼천의(渾天儀) 등의 과학기구가 발명되고, 과학기술서인 ≪칠정산내편·칠정산외편≫ 등의 편찬까지 보았다.

특히, 장영실(蔣英實)이 발명한 측우기는 이탈리아의 카스텔리(Castelli)보다 200년이나 앞섰다. 이런 것은 실학의 전래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컸는데 수문학(水文學)을 위한 토목기술 면에서도 눈부신 발전이 있었다.

한양천도와 신수도건설

조선이 건국되자 필연적으로 천도문제가 대두되었다. 태조는 왕위에 오른 지 불과 한 달 만에 한양천도를 지시하여, 1394년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고 곧 착수하였다.

시가지계획에서도 풍수지리설이 등장하여 한양의 진산인 백악(白岳)을 중심으로 좌청룡·우백호를 따라서 성을 축조하였다. 그리고 안산인 목멱산(木覓山:南山)까지 약 18㎞에 이르는 성곽이 완성되었다.

그 다음 왕궁은 주궁인 경복궁을 백악을 배경으로 앉히고, 좌묘우사(左廟右社) 원칙에 따라서 종묘와 사직을 건설하였다. 이 같은 도시형태는 약 31년간에 걸친 역사 끝에 겨우 정비될 수 있었다.

그 뒤 태종 때에는 간선도로를 정비하고 청계천을 굴착하여 기본배수로를 뚫었다. 한양은 원래 중심부의 일부에 격자형(格子形)의 주요 가로망이 설계되었으나, 자연지세를 활용한 우회로와 막다른 골목이 많은 불규칙한 것이었다.

산성과 읍성

국방상 요충지에는 산성을 쌓아 외침에 대비하였고, 행정상 유리한 곳에는 읍성을 쌓았다. 대표적인 산성으로 북한산성·남한산성·대흥산성(大興山城) 등이 있으며, 읍성은 주로 시가지를 두르고 뒤쪽의 산정까지 에워싸는 것이 특색이다.

그 형태는 평양·개성 등과 같이 내외성으로 된 것과 전주처럼 방형(方形)의 평면형이 있는가 하면, 청주처럼 불규칙한 것 등 다양하다.

그 규모는 평양이 3만 900호, 충주·상주목이 2만 3900호, 나주목이 2만 2300호 등으로 별로 크지는 않았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경험과 실학사상을 신기축으로 하여 세워진 수원성곽은 동양에서 가장 발달한 성곽으로 알려져 있다.

서구식 축성법이 참고된 시공에서 생산력의 확대와 경제를 도모하여 거중기(擧重器:起重機)와 녹로(轆轤:滑車) 등 여러 가지 토목시공기기가 활용되었다.

또, 건설재료의 개량과 규격화가 이루어졌고, 계획성 있는 시공이 시도되었다. 이는 우리 나라의 근세적인 건설공사 실태를 잘 나타낸 가장 좋은 실례라고 생각된다. 특히, 수원성 축성공사는 사전에 주도면밀한 연구조사와 계획에 의한 시공이었다.

이에 대한 기록으로 ≪화성성역의궤 華城城役儀軌≫(1796)가 있는데, 축성배치계획과 주요 성곽 건축물의 입면도, 건축 주요부의 분상도(分詳圖) 등이 수록되어 있어 토목사료 중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수리사업과 운하

태조 이래 제방수축에 관한 사료는 수없이 나타난다. 조선시대에는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일컬어 건국 초부터 치수와 수리사업에 진력하여 농업이 크게 발전하였다.

이것은 우리 나라가 ‘수력사회(水力社會)’라고 할 만큼 물이 없으면 농업을 경영할 수 없었고, 물을 다스리는 치수는 결국 국가권력에 의한 조정과 통제를 받게 되어 국가정책 중 가장 중요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토목기술과 공사가 활발하게 전개되었음에도 토목기술에 관한 체계적인 자료가 없고, 다만 단편적인 자료가 남아 있을 뿐이다. 1395년 ≪태조실록≫에는 정분(鄭芬)이 설론(設論)한 혈주연통공법(穴柱連桶工法)이 실려 있다. 이는 상세한 구조는 알 수 없으나 오늘날의 취수탑(取水塔) 같은 것이다.

1662년에 공포한 <제언사목 堤堰事目>에는 천방공법(川防工法)이 나오는데, 이 공법은 가장 흔히 이용하던 것이다. 1798년 ≪정조실록≫에는 설통인수법(設筒引水法)이 나오는데 오늘날의 도수용잠관(導水用潛管)을 말한다. 이 공법은 당시로는 상당한 수준의 수리기술을 요하는 것이었다.

조선시대의 조운항로는 고려시대와 별다른 변동이 없는 육지근접의 연안항로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빈번한 해난사고가 발생하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책에 부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태안반도의 안흥량, 강화도의 손돌항(孫乭項), 한강하류의 염창항(鹽倉項)은 3대 험로로 손꼽혔다.

안흥량의 운하굴착은 1134년 고려시대에 처음 착수되었던 것으로 기록되었다. 개국 이후 조선시대 274년간 실록에 나타난 굴착횟수만 하여도 10여 회에 달한다. 그러나 암석제거가 어려워 수없는 도전도 허사로 끝나고 말았다.

역제와 치도

우리 나라는 역대 왕조를 통하여 수운우선에 정책기조를 두었기 때문에 육상교통로는 보잘것 없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길은 군사 및 행정통신수단에서 개설되었지 국민경제적인 관점에서의 치도(治道)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수레의 통행이 가능한 수준의 도로는 서울∼의주 간과 서울∼동래 간의 사신로(使臣路)가 고작이었다. 그만큼 역대 왕조는 도로건설에 소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육상교통로의 국민경제적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치도를 소홀히 하였던 것은 아니다. 그 문제는 국토방위라는 관점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특히, 조선시대의 국방전략은 공격보다 방어에 중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대륙과 해양 사이에 위치한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이 산성중심의 방어전략에 입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잘 정비된 도로가 외침 때 적의 수송기능을 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전국의 도로망을 인마가 겨우 지나다닐 만큼으로 그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토목기술을 가름하여 볼 수 있는 것은 교량들이라고 하겠다.

대표적인 것은 살곶이다리·수표교(水標橋) 등을 들 수 있는데, 1483년에 완성한 살곶이다리는 거대한 돌기둥을 강에 세우고 그 위에 받침돌을 올린 다음 대청마루를 깔듯이 긴 시렁돌을 깔아서 통로를 만들었다.

이 다리는 그 구조역학적인 안정을 꾀한 과학적인 토목기술이었다. 수표교는 다리로서의 기능과 함께 수량(水量)과 수위(水位)를 재는 기능도 지니는 독특한 교량이었다.

개항과 일제강점기의 토목

근대 토목기술의 도입

1876년(고종 13)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으로 문호를 개방하여 서구의 근대화된 토목기술도입과 그 시설물을 구축하는 요람기를 맞이하였다. 대원군 때부터 국방에 한한 서구의 군사기술도입과 청·일의 군사·교육·산업시찰 등은 서구의 과학기술을 제도적으로 받아들이는 배경을 조성하였다.

갑신정변 이후 산업기술 분야에서 유학생파견·고문관초빙, 특히 토목기술자를 비롯한 각 공업기술자를 양성하기 위한 공업전수소의 설치는 근대적 토목기술교육의 효시이다.

당시 계속되는 대한발·대폭우의 피해 등 과제는 남아 있었지만, 원산·인천·제주의 개항과 함께 동서 양해안의 수로 측량이 완료되고, 궁중에 발전기가 건설되어 우리 나라 최초의 전등사용(1884) 및 근대식 기상관측이 시작되었다.

이어서 철도토목의 전제조건으로 한성∼평양 간, 한성∼인천 간, 한성∼부산 간 전선가설공사가 추진되어 1897년 최초의 전화기가 도입되었다.

토목 분야로는 1898년 두 미국인 콜브란(Collbran,H.)과 보스트윅(Bostwick,H.R.)이 전기회사를 설립하여 수도의 전차·전화·상수도 부설권의 허가와 함께 같은 해 서대문∼청량리 간 단선전차궤도공사를 착공하여서 1899년 완공하였다.

1898년 일본에도 경부선철도부설권을 허가하고, 이어서 1899년 경의선부설권을 허가하였다. 1899년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인천∼노량진 간 33㎞의 철도가 개통되어 일본인의 경인철도합자회사에 의하여 영업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1901년 경부선, 1902년 경의선 철도공사의 기공식을 거행하여 대륙전진정책을 위한 남북종관철도건설을 강행하였다.

청일전쟁 후 일본은 우리 나라의 철도부설권을 강점하려 하였으나, 미국인이 1896년 먼저 철도부설권을 얻어 철도의 효시인 경인선을 1897년 착공하였다. 1년 뒤 미국은 이를 일본회사에 양도하였다.

이리하여 1910년까지 철도망이 부산―서울―신의주까지 남북 주요 도시와 인천·원산·진남포 등의 개항장이 연결되어 철도와 해운을 연계화하여, 이후 1950년대까지 우리 나라 교통수단의 대종이 될 철도토목기술도입의 요람기를 형성하게 되었다.

한편, 우리 정부는 1900년 철도원(鐵道院)의 직제를 설정하여 황실철도를 관장하게 하였지만 일본인의 경영에 압도되어 유명무실하게 되고 말았다.

1910년까지 일본인에 의한 철도 경영연혁은 다음과 같다. 1899년 9월 노량진∼제물포(인천) 간 개통, 1900년 7월 노량진∼서대문 간 준공(경인선 전통), 1901년 6월 경부철도주식회사 설립, 1901년 8월 서울∼부산 간 기공, 1904년 3월 서울∼신의주 간이 착공되었다.

1905년 1월 서울∼초량 간 개통, 1905년 10월 마산선 개통, 1906년 4월 경의선 전통, 1908년 4월 초량∼부산 간 개통, 1909년 9월 평남선(평양∼진남포 간) 준공, 1911년 11월 압록강교량공사 완공(滿鐵과 연결운행) 등이다.

1900년 한성전기회사가 서울 종로에 최초로 가로등 3개를 설치하고 한성철도교가 준공되었다. 또한, 각 개항장에는 1906년 축항공사가 시작되었고, 1908년 수도시설이 시작되어 1910년 인천에 상수도가 완공되기도 하고, 서울에 처음으로 1904년 공중변소가 세워졌다.

이와 같이, 개항함으로써 근대토목의 여명기를 맞았으나 일본 등에 의하여 타율적으로 서구의 토목기술이 도입되고, 결국 일본식민지가 되어 식민지개척을 위한 일본의 일변도적인 토목사업이 진행되었다.

타율적 토목기술의 근대화

1910년 이후 8·15광복까지는 3·1운동을 전후로 하여 2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식민 초기 10여 년간은 토목기술이 철도·항만 및 도로건설 등 미미한 실정이었다.

일제의 철도경영은 이전의 체제와 시설을 총독부 철도국 관리로 통합하였다. 이 철도토목사업에서 일본은 자기 나라의 1.067m 협궤(狹軌)와는 달리 우리 나라에는 세계표준인 1.435m의 광궤(廣軌)로 설치하였다.

이것은 대륙진출을 위한 병참기지로서 대량수송과 고속화를 위한 식민지정책에 의한 것이었다. 그 동안 진행된 주요 철도 건설은 1911년 압록강교량을 완성하여 만철의 안봉선(安奉線)의 개통과 함께 한만간의 직통연결한 것을 비롯하여, 지방개방을 위하여 건설을 시작한 지방철도 등이다.

도로건설에 있어서는 철도에 비하여 관심이 적어 서울 등 도시의 가로를 개수하는 정도였다. 항만사업으로는 총독 또는 도지사의 허가로 부산항·인천항·원산항 등에서 매립·토사채취·방파제·도크·물양장(物揚場)·잔교(棧橋) 등의 항만토목공사가 시행되었다.

상수도시설은 도시선정 및 급수지역결정을 엄격히 하면서 인천·부산·평양에 토목국의 출장소를 두어 수도시설을 하였다. 1910년 인천에 먼저 상수도가 개통되었다. 다음 식민 후기에서도 열강의 중국시장 침략이 시작되자 일제의 한반도정책이 대륙전진기지화되면서 우리 나라에는 공업화의 기반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군수산업의 발흥을 위한 에너지원인 전력의 필요성에서 압록강에 수풍댐을 건설하였다. 이 수력발전은 1926년 조선수전주식회사를 창립하면서 부전강(1929)·장진강(1935)·수풍댐(1931)을 건설하는 등 1945년까지 20년간 발전토목사업에 주력하였다.

이 에너지원의 개발과 병행하여 병참기지정책에 의하여 군수수송의 강화와 중요 자원개발촉진을 위하여 철도망의 보급 및 한만국경지방의 개발에 중점을 두어 신설·사철매수(私鐵買收)·기설선의 개량이 실시되었다.

즉, 부산∼삼랑진간, 대전∼서울간 등에 복선을 설치하였고, 중량레일로 개량하면서 주요 교량과 터널개축·곡선완화·정거장·차고·조차장·수륙연결설비개량 등이 시행되었다.

한편, 홍수재해가 산업발달에 큰 장해가 되어 총독부는 국토보전 및 산업개발은 물론, 특히 민심안정면에서 치수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범람지역의 홍수방어에 주목적을 두고 하천개수공사를 실시하였다. 일제는 산미증식계획을 세워 식량공급기지로서 그 기반이 되는 간척에 대하여 일본 본토에 비하여 크게 진전시켰다.

다음 도시 및 지방계획을 보면, 도시계획은 30년 후의 인구를 추정하고, 필요구역을 결정하여 가로·공원·녹지·구획정리지구 등의 종합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의 실행은 구획정리를 주안으로 하였고, 인구증가를 감안하여 필요지적(必要地積)을 법으로 정하였다.

1934년 나주지역의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우리 나라에서 최초의 사업이었다. 또한, 자원개발로 대규모 중공업이 각지에 기획되자 공업입지조건을 구비한 지방에 신도시계획이 이루어졌다. 도로포장은 서울·평양·부산·함흥과 경기도·경상남도에 총 50㎞가 이루어졌다.

수도보급은 1940년까지 21부(100%) 49읍(55%) 13면의 83개 소에 보급되고, 이 밖에 마을 또는 개인경영의 간이상수도가 10개 소 있었다. 하수시설은 오수에 의한 위생 및 우수처리 등을 위하여 우수·오수배제에 중점을 두어 구획정리·간선도로개수와 함께 실시되었다.

서울·평양·신의주와 일부 배수곤란지역에는 배수펌프장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끝으로, 우리 나라에 대한 측량과 지도작성은 지조(地租) 및 기타 행정방면의 필요성에 의하여 경술국치 이후 그 동안 진행하여오던 것을 급속히 추진시켰다.

기본측량은 1913년부터 시작하여 1915년에 완료하였고, 지적측량은 1916년까지, 지형측량은 1914년부터 1918년까지 현지작업으로 완결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25만분의 1 지세도를 65면, 5만분의 1 지도 약 10면도 편집, 출판하였다.

광복 후의 토목

광복 전후와 1960년대

우리는 의타적인 터전에서 8·15광복을 맞이하였으나, 6·25전쟁으로 남북분단이 심화되어 남한에서는 전재(戰災)와 북한에 편재된 전원 등 사회자본시설 및 인구증가에 의한 식량의 절대부족 등이 시급히 해결하여야 할 당면과제였다. 이렇게 1950년대는 전재복구와 국내자원개발이 국토개발의 우선적 과제가 되었다.

미군정 때 토목부가 설립되고, 정부수립 후 내무부 토목국을 비롯하여 농림부·교통부·철도국·해무청 등 관개수리 및 철도, 항만건설에 대한 정부의 토목행정기구가 확정되었다. 그런 중에 미공병에 의한 토목중기계의 토공 및 콘크리트공을 비롯한 기계화 토목시공의 훈련은 후에 건설업의 기계화시공의 선구가 되었다.

이로써 공기의 단축과 난공사 지점의 시공가능 및 비능률적 토목인력에 대치됨으로써 1960년대의 대규모·대용량 건설의 바탕을 닦았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이 기간은 대체로 전후복구기로 발전을 위한 시도 및 모색과정이었다.

먼저, 당시의 도로사정을 보면 광복 전의 도로는 협소하고 굴곡이 심한 데다 전란으로 극심한 파괴상태였으며, 홍수가 나면 도처에서 교통이 두절되는 사례가 빈번하였다.

이 때문에 당시의 도로토목사업은 중요 간선의 중점적 개수와 산업 및 관광도로의 개발에 주력하면서 유사시 군작전에 기여하도록 하였다. 또한 국도와 지방도의 전재복구 및 주요 도로상의 교량건설로 홍수 때 육로상의 교통난을 방지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국도 중에서 서울∼부산간, 서울∼인천간, 서울∼대구간, 전주∼군산간 등 주요 도로를 포장하였고, 지방도로개수로 태백산지구의 산업도로를 장기적인 개발과 더불어 기존도로의 수명보장을 위한 유지보수에 주력하였다.

이와 같은 실적은 광복 이후부터 1968년까지 도로 1만 4828㎞, 교량 125.4㎞, 포장 1,008㎞의 도로사업을 시행하였다. 도시계획사업은 1951년 김천·포항의 도시계획결정을 시초로 1962년까지 25개 도시에 도시계획이 수립된 바 있으나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전혀 착수되지 않은 도시가 많았고, 그 내용도 기본계획에만 그치고 배치계획은 소홀히 취급되었다.

한편, 상수도사업은 전재의 영향이 있었지만 1961년까지 수도수는 62개, 생산능력은 52만 3650MTD, 급수인구는 광복 당시 300만 명에서 720만 명으로 2배 이상 증가되었다. 이 기간에 구의리(九宜里) 제1정수장공사, 노량진 제2정수장 신설공사, 회동(回東)수원지 등이 여과지축조 위주로 설계, 시공되었다.

하천·치수 사업은 광복 이후 남강방수로공사와 주요 하천의 보수·개수를 착수하였으나, 6·25전쟁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1954년 유엔한국부흥단(UNKRA) 및 미국국제원조처(ICA)의 경제원조와 일반국고에 의한 치수사업장기계획이 수립되어 홍수피해가 크고 경제적 가치가 큰 주요 하천 63개를 선정하여 개수하였다.

지방 중소하천까지 포함하여 1954년에서 1960년까지 치수사업실적은 개수연장 465.5㎞, 보수연장 165.8㎞, 복구연장 116.9㎞였다. 철도사업은 광복 이후에도 계속 신규노선이 건설되었으며, 6·25전쟁에 의한 전재복구와 함께 미국국제원조처 원조로 적극화하고, 특히 경제개발을 위한 산업철도가 신설되었다.

항만사업은 휴전과 더불어 유엔한국부흥단 및 미국대외활동본부(FOA) 원조로 1953년을 기점으로 전재복구를 위한 지방항만시설 5개년계획 및 항만준설 5개년계획이 수립되어 1962년까지 11개 주요 항의 하역능력은 1억 290만 톤으로 복구, 확장되었다.

전력부문에서도 전파상태의 송변전시설을 복구하는 한편, 화천수력발전소의 복구공사가 전개되었지만 수요에 비하여 발전량이 매우 부족하였다.

더구나 산업설비의 복구·확장 등 활발한 재건사업은 전력수요를 가속화하였다. 그래서 상공부는 전력개발위원회를 설치, 7개년 전원개발계획을 수립하였으나 자금난으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전후복구도 거의 완료되었던 1958년 이후 새로운 국토건설 방향이 기대된 이 시기는 대체로 국토개발을 위한 준비단계라 할 수 있다.

자주토목기술확립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건설부가 창설되어 국토건설로서 장기경제개발계획을 지원하고, 토목 건축사업의 강력한 종합개발과 보전·관리를 집약하였다.

정부는 경제개발을 지원하기 위하여 초기 목표를 수자원개발·자연지하자원개발에 중점을 두고, 인구증가에 대비한 식량자급자족을 위한 수리·간척 및 공업화의 동력자원확보를 위한 수력댐과 산업철도건설에 치중하였다.

또한 항례적인 수해·한해를 방지하기 위한 하천종합개발도 적극 추진하였다. 이러한 방향에서 제1차 경제개발계획(1962∼1966)은 수자원개발로 대변할 수 있고, 대표적 국토개발사업으로는 섬진강다목적댐과 동진강수리간척 및 남강다목적댐 건설이다.

한편, 석탄·석회석 등의 지하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태백산특정지역의 효과적인 개발을 위하여 산업철도와 도로에 중점적으로 투자한 것은 1960년대 초기 국토개발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 특히, 울산공업기지건설을 위한 도시토목(가로·교량)·공업단지조성·공업용수시설·항만건설 등은 자원개발과 연관된 공업입국의 기반구축인 토목사업이었다.

제2차 경제개발계획(1967∼1971)은 경제성장위주의 국토건설로 집약되었다. 1965년부터 수송 및 에너지 수요의 증대로 인하여, 종래의 수송대종인 철도의 한계점도달과 항만의 체화현상이 심화되자 타개책으로 고속도로가 건설되었다. 이는 또한 지역간의 불균형을 시정하고 전국을 1일생활권화하는 근대화의 꿈이 서려 있다.

서울∼인천간의 고속도로 건설에 이어 1970년 서울∼부산간 고속도로가 완공되었다. 이 공사는 우리 나라 최초의 거국적인 대토목 역사였다.

또한, 소양강다목적댐(1973년 10월 완공) 공사는 서울·인천 등 대도시와 공업도시에 생활 및 공업용수를 완전 해결하고, 홍수조절량 5억㎥로 가뭄과 수해를 줄이면서 20만㎾의 수력설비용량을 갖춘 최대의 다목적댐 건설이었다.

게다가 1만1385㎡의 종합제철기지건설 및 대형항만공사가 1972년까지 완공되기도 하였다.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72∼1976)에서도 안동다목적댐·팔당수력댐·영산강유역개발·여천공업기지·창원기계공업기지를 지원하기 위한 공업용수용의 수어(水魚)댐 등 대형도수로건설과 삼일항·북평공업항 등이 건설되었다.

이러한 국내 대형화 토목사업과 함께 일어난 중동건설붐이 1976년에 본격화하여 건설수출비중이 제고되었다. 국민경제의 고도성장을 위한 기반조성으로서 사회간접자본의 균형 있는 확충으로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 이상과 중공업 분야의 고도수준을 지향하는 제4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77∼1981)에서도 대형화·대규모화·대용량화·종합화된 토목사업이 큰 부류를 이루었다.

한편, 1960년대부터의 경제개발정책에 따른 공업화·도시화로 대도시의 인구과밀과 지역간의 불균형 및 환경악화 등을 타개하기 위한 반월인공공업도시 건설이 추진되었다.

이러한 면에서 1980년대는 국토 및 산업입지는 국토의 효율적·종합적 이용을 위한 권역별 개발과 지역기능특성화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다. 이에 따라 대형토목시설물이 건설되게 되었다.

1980년대의 국토정책은 1970년대의 국토개발형이 국토이용형으로, 국토수용면에서는 공업용지치중형이 주택단지중시형으로, 생활면에서는 도시개발이 대도시집중형에서 집단화 및 신규인공도시건설형으로, 교통체계는 고속도로형에서 도로포장형으로, 수자원개발은 다목적댐에서 광역이수형으로, 공업입지는 노동집약형에서 설비집약형으로, 서울 등 대도시 교통은 노선 버스에서 지하철로 발전되어 갔다.

이리하여 광역화·대형화·대규모화 된 토목공사가 구상화되었고, 한편 1968년부터 본격화 된 중동을 비롯한 해외건설진출의 국제경쟁력이 강화되었다. 정부는 능률적인 지도 지원과 함께 토목인의 질적 향상과 예산절약을 위한 토목기술진흥정책으로 국토개발연구원 등의 설립과 국립건설연구소 및 국립지리원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토목기술은 토목조사·계획·설계·시공·관리의 각 방면에서 선진수준의 기술도입과 발전이 있었고, 한편 국제수준급의 대건설회사의 설립을 가져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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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사대계』 Ⅲ―과학기술사―(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78)
『한국토목사』(최영박, 대한토목학회, 1980)
『한국국토개발사연구』(김의원, 대학도서,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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