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군 ()

대동여지도 중 강원도 평창 부분
대동여지도 중 강원도 평창 부분
인문지리
지명
강원특별자치도 중남부에 위치한 군.
정의
강원특별자치도 중남부에 위치한 군.
개관

동쪽은 강릉시 · 정선군, 서쪽은 횡성군, 남쪽은 영월군, 북쪽은 홍천군 · 강릉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8°46'∼128°14', 북위 37°16'∼37°49'에 위치한다. 면적은 1,464.16㎢이고, 인구는 4만 3500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7개 면, 191개 행정리(89개 법정리)가 있다. 군청은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평창읍 하리에 있다.

자연환경

태백산맥 중에 위치하기 때문에 평균 해발고도가 600m 이상에 이르고, 특히 북 · 서 · 동 3면은 높은 산지로 둘러싸여 있으며, 남쪽으로 경사진 지형을 나타낸다.

한편, 평창읍 중리, 대화면 대화리와 안미리, 방림면 방림리 및 미탄면의 고마루마을 일대에는 석회암 용식지형인 카르스트 지형이 발달되어 있다. 또한 대관령면 횡계리 주변의 이른바 대관령면이라고 일컫는 평탄면과 하진부 부근의 진부면 및 봉평면 북부 일대에 분포하는 평탄면들은 옛 침식면이 융기한 것으로 우리나라 중부지방의 지형 발달을 설명하는 데 학술적으로 중요시되고 있다.

북쪽과 서쪽에는 오대산(五臺山, 1,563m)에서 분기한 차령산맥(車嶺山脈)이 뻗어 있어 계방산(桂芳山, 1,577m) · 흥정산(興亭山, 1,277m) · 태기산(太岐山, 1,261m) · 청태산(靑太山, 1,200m) · 백덕산(白德山, 1,350m) 등이 솟아 있고, 동쪽에는 황병산(黃柄山, 1,407m) · 매봉(1,173m) · 고루포기산(1,238m) · 발왕산(發旺山, 1,458m) · 박지산(博芝山, 1,394m) · 백석산(白石山, 1,365m) · 청옥산(靑玉山, 1,256m) · 가리왕산(加里旺山, 1,561m) 등 높고 험한 산들이 연봉을 이룬다.

계방산에서 발원한 평창강(平昌江)은 속사천(束沙川) · 도사천(都事川)을 합하여 남서류하면서 덕거천(德巨川) · 흥정천(興亭川)과 합류하여 남류하다가 대화천(大和川) · 안미천(安味川) 등을 만나 방림면 방림리에서 계촌천(桂村川)을 합쳐 평창읍에서 심하게 곡류하면서 영월군으로 흘러들며, 오대산에서 발원한 오대천은 진부를 지난 뒤 심하게 곡류하면서 정선군으로 흘러간다. 황병산에서 발원한 송천은 대기천(大基川)을 합류하여 역시 심하게 곡류하면서 정선군으로 흘러든다. 이들 남한강의 지류들은 그 유역에 약간의 평지와 하성단구를 발달시켰다.

내륙고원지대에 위치하기 때문에 기온의 교차가 심한 대륙성기후를 나타내어 같은 위도의 어느 지역보다도 기온이 낮고 여름이 짧다. 평창읍을 중심으로 한 지역은 연평균 기온 10.4℃, 1월 평균기온 -5.6℃, 8월 평균기온 23.3℃이며, 연 강수량은 1,343.8㎜이다. 한편, 대관령은 연평균 기온 7.8℃, 1월 평균기온 -6.9℃, 8월 평균기온 20.5℃이고, 연 강수량은 1,815.5㎜로서 1월과 8월의 기온은 평창읍보다 낮으나 강수량은 훨씬 많고 일조지수가 적어 식물의 생육기간이 짧은 고랭지 기후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역사

구석기시대 및 신석기시대의 유물 · 유적이 발견된 적은 없으나 인접한 횡성과 홍천지역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 · 유적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에서도 오래 전부터 인류가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 청동기시대의 유물로는 고인돌이 다수 발견되었으며, 부족국가시대에 예맥국(濊貊國)의 태기왕(泰岐王)이 이곳에서 잠시 국가를 이루었다는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5세기경 고구려의 영역에 속하여 욱오현(郁烏縣) 또는 우오현(于烏縣)이라 하였다가 뒤에 신라에 편입되었으며, 삼국통일 이후 757년(경덕왕 16) 백오현(白烏縣)으로 고치고 나성군(奈城郡: 지금의 영월)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940년(태조 23) 평창현(平昌縣)으로 개칭하여 원주의 속현(屬縣)으로 삼았다가 1299년(충렬왕 25)에 비로소 현령을 파견하여 원주에서 독립시켰다. 1387년(우왕 13)에는 왕의 총애를 받던 환관 이신(李信)의 고향이라 하여 평창군으로 승격시켰으나 곧 다시 평창현으로 고쳤다. 이 때 별칭을 노산(魯山)이라 하였다.

조선 건국 직후인 1392년(태조 1)에 목조(穆祖)의 비 효공왕후(孝恭王后)의 고향이었다는 이유로 다시 평창군으로 승격시켰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수 권두문(權斗文)을 중심으로 군민들이 천연의 요새인 응암굴에서 왜군에 항전하였다. 이 때 병사들은 장렬히 전사하고 권두문은 사로잡히게 되었다. 뒤에 권두문은 탈출에 성공해 당시의 일을 일기로 남김으로써 임진왜란의 증인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 5월에 충주관찰사 소속의 군이 되어 5개 면을 관할하였으며, 다음 해 다시 강원도에 편입되었다. 1906년 10월 1일에는 강릉군의 대화(大和) · 봉평(蓬坪) · 진부(珍富) 등 3개 면이 편입되고, 신동면(新東面)은 정선군으로 이관되었다.

1907년 10월에는 고종 퇴위에 반대한 의병이 봉기하여 하대화(下大和)와 하일리에서 운집한 뒤 상대화로 진격하였으나, 남산으로 쫓겨 가던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평창의병 40여 명이 붙잡혀 총살당하였다. 같은 해 천도교도들이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계획하다가 탄로되어 실패하였다.

1919년 3 · 1운동이 발발하자 천도교인과 유학자들이 대화장날과 평창장날인 4월 4일과 5일에 거사할 것을 계획하던 중 하일리에서 탄로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1931년 4월 1일정선군 도암면(道巖面)이 편입되었고, 1934년 7월 1일 대화면 일부가 분리되어 방림면(芳林面)이 되었다.

1950년 6 · 25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 선발대가 침투하여 이때부터 90일 동안 적 치하에 들게 되었다. 9월 28일 백골부대 선발대에 의해 잠시 수복되었으나 곧 전선이 남하함으로써 주민들은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다. 유엔군의 반격으로 적군의 남하가 37°선에서 저지됨으로써 주민들은 귀향할 수 있었다.

1968년 10월 울진 · 삼척 지방에 침투한 무장공비가 11월 말 태백산을 넘어 이 지역에 들어왔으며, 군 · 경과 예비군에 쫓겨 북쪽으로 도주하던 공비 잔당들이 이승복 소년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973년 진부면 장평리가 봉평면으로, 도암면 호명리 일부와 봉산리가 진부면으로 편입되었으며, 1979년 5월 1일평창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 2월 15일에는 봉평면의 백옥포리 · 장평리, 진부면의 속사리 · 노동리 · 용전리 · 이목정리 · 도사리, 대화면의 신리 일부를 통합하여 용평면(龍坪面)을 신설했으며, 1989년도암면 호명리가 진부면에 편입되었다. 1990년 1월 1일평창읍 하6리와 도암면 횡계7 · 8 · 9 · 10 · 11 · 12개 리를 증설하였다. 1991년 1월 17일 지번 합병에 따라 군청사를 하리 215번지에서 하리 210-2번지로 변경하였다. 1996년 3월 29일진부면 송정3 · 4리를 증설하였고, 1998년 9월 25일 면온 · 수항 · 유천출장소를 폐지하였다. 2000년 10월 21일 백옥포3리와 횡계13리를 증설하였으며, 2003년 10월 4일 송정5리를 증설하였다.

유물 · 유적

국가 지정문화재는 국보 4개, 보물 3개, 사적 1개, 천연기념물 2개, 중요민속자료 1개로 모두 11개이고, 강원도지정문화재로는 유형문화재 20개, 기념물 3개, 무형문화재 3개, 문화재자료 6개가 있다.

선사시대의 유적으로 구석기시대 및 신석기시대의 것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나, 청동기시대에 사람이 살았음을 알려 주는 고인돌과 주거지는 다수 발견되었다. 고인돌은 평창읍 계장리 · 대하리 · 상리 · 유동리 · 임하리 · 종부리 · 주진리 · 후평리와 용평면 장평리, 진부면 수항리 등에 분포하고, 평창읍 임하리에서는 선돌로 보이는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 밖에도 돌도끼 · 홈자귀 · 바퀴날도끼 · 간돌칼 · 반달칼 · 돌화살촉 · 돌창 · 가락바퀴 · 갈돌 · 민무늬토기 등이 출토되었으며, 평창읍 여만리와 응암리에서는 초기철기시대의 적석총이 발견되어 삼국시대 이전의 연맹왕국 단계에도 이 지역에 사회구조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분으로 평창읍 하리에 통일신라시대 석실고분과 종부리고분이 있다.

성지로는 평창읍 중리의 노산성지(魯山城址)를 비롯하여 봉평면 흥정리의 태기산성지, 대화면 대화리의 대화산성 등이 있다. 노산성은 조선 선조 때 김광복(金光福)이 축조하였으며, 높이 1.32m, 둘레 414m의 규모였다 한다.

평창은 진부면 동산리의 월정사(月精寺)와 상원사(上元寺)를 비롯하여 대덕사(大德寺) · 법장사(法藏寺) · 극락사 · 천왕사(天王寺) 등 유서 깊은 사찰과 평창읍의 원당리사지, 진부면의 평창수항리사지(강원도 기념물, 1982년 지정) 등 귀중한 문화재가 많이 보존되어 있는 지역이다.

월정사팔각구층석탑(국보, 1962년 지정) · 월정사석조보살좌상(국보, 2017년 지정) · 평창 오대산 중대 적멸보궁(보물, 2018년 지정 ) · 월정사부도군(강원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 상원사동종(국보, 1962년 지정) ·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국보, 1997년 지정) ·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 1984년 지정) ·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복장유물(보물, 1984년 지정) · 상원사 목조문수보살좌상 및 복장유물(보물, 2014년 지정) 등이 있다.

이 밖에 월정사육수관음상(강원도 유형문화재, 1976년 지정) · 대세지보살상(大勢至菩薩像) · 동진보살상, 평창읍의 중리오층석탑 · 상리오층석탑 · 하리석탑 · 유동리오층석탑(강원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 방림리석조여래좌상, 진부면의 탑동삼층석탑(강원도 유형문화재, 1971년 지정) 등도 평창군의 중요한 불교문화재로 꼽힌다.

목조건물로는 평창읍 하리의 평창향교(강원도 유형문화재, 1985년 지정), 천동리의 평창지동봉가옥(강원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도암면 횡계리의 대관령성황사 및 산신각(강원도 기념물, 1984년 지정), 봉평면 평촌리의 봉산서원(蓬山書院) 등이 있다.

봉산서원은 조선 중종 때 이이(李珥)의 아버지 이원수(李元秀)가 수운판관(水運判官)으로 재직하면서 이곳에서 이이를 배태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후세 사람들이 창건한 것으로, 이이의 존영을 모셔 놓고 봄 · 가을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정자로는 봉평면 평촌리에 팔석정(八石亭), 진부면 마평리에 청심대(淸心臺), 평창읍 종부리에 남산정(南山亭), 응암리에 아양정(娥洋亭), 미탄면 창리에 장수정(長壽亭), 방림면 방림리에 삼산정(三山亭) 등이 있다.

사적으로는 진부면 동산리에 오대산사고(사적, 1963년 지정)가 있고, 한말 의병장 이강년(李康秊)이 왜군과 격전을 벌였던 곳이 대화면에 있다.

비석은 대화면 대화리의 위흥연효자비(魏興淵孝子碑)와 최한성효자비(崔漢成孝子碑), 하안미리의 정씨효열비, 평창읍 유동리 및 대화면 상안미리의 선정비 등이 있다.

천연기념물로는 미탄면 마하리의 평창의 백룡동굴(천연기념물, 1979년 지정)이 있다. 방림면 운교리 36 · 2에는 2008년 11월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평창운교리밤나무가 있다.

복식 유물로는 월정사 경내에 세조대의 회장저고리(국가민속문화재, 1987년 지정)가 보관되어 있다.

교육 · 문화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는 1658년(효종 9)에 군수 최창민(崔昌敏)과 나만정(羅萬程)이 유림회를 조직해 창읍 하리에 창건한 평창향교가 최초였다. 그 뒤 이원수가 봉평에 거주할 때 이이를 잉태하였다 하여 후세 사람들이 이를 기려 봉산서재를 설립하였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912년 평창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으며, 이후 1면 1교의 교육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1945년 평창중학교가 설립되어 현재의 평창중학교와 평창고등학교로 이어져오고 있다. 1967년 진부고등학교, 1968년 대화고등학교에 이어 1974년 축산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교육기관으로는 2015년 현재 초등학교 20개교, 중학교 8개교, 고등학교 5개교가 있다.

1964년 평창문화원이 설립되어 노성제(魯城祭), 효석(孝石) 추모의 밤, 민요 · 농악 경연 등 각종 문화예술 행사를 통해 향토문화 계승과 군민 단합을 기하고 있으며, 공공도서관은 평창교육청도서관, 진부군립도서관, 대화군립도서관 등이 있으며, 문화공간으로는 공공공연장, 복지회관이 있다. 체육시설로는 실내체육관, 종합운동장 등이 있다. 청소년수련시설로는 수련원, 야영장, 유스호스텔이 있다.

민속

대표적인 민속놀이로는 농악 · 탑돌이 · 대방놀이 등을 들 수 있다. 농악은 농경과 관계되는 놀이로, 이전에는 동리마다 두레패가 있어 농사철이나 걸립(乞粒)을 돌 때 농악이 성행하였으나, 지금은 용평면 백옥포리의 농악 등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탑돌이는 원래 종교의식의 하나였다가 이후 민속놀이화한 것이다. 4월초파일이나 추석날, 염불과 불사가 끝나면 승려를 선두로 모든 신도들이 합장한 채 월정사 팔각구층탑을 돌면서 각자의 소원을 비는데, 이 때 범종 · 북 · 운판 · 목어 등 4개의 법악기가 연주된다.

대방놀이는 선행이 있는 머슴을 대방(大方)으로 선출한 뒤 지게로 가마를 꾸며 그를 태우고 온 마을을 돌면서 즐기는 놀이이다.

이 밖에도 전승되지는 않지만 예전에는 횃불싸움이 성행하였다. 정월대보름날 저녁 홰를 든 젊은이들이 망월을 하다가 동리 대항으로 횃불싸움을 벌였는데 서로 밀고 밀리다가 상대 동리의 근거지를 탈취하면 승리하게 되며, 이 싸움에서 이기면 그 해에는 풍년이 든다는 속신이 있었다.

이 고장에는 산신제 · 서낭제 · 당고사제(堂告祀祭) · 고청제(告請祭) 등 다양한 명칭의 동제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대관령의 국사서낭당제를 들 수 있다. 시향일은 음력 4월 15일로, 강릉의 단오제와 관계를 맺고 있다. 국사서낭당은 행정구역상 평창군에 속하나 제향은 평창군에서 하지 않고 강릉에서 시향하고 있다. 또한 이 곳에는 산신각과 서낭당이 병존하고 있는데, 산신제를 먼저 지내고 서낭제를 지낸다.

이 밖에도 자연마을 단위로 동제를 지내는 곳이 많다. 그 중에서도 대화면이 대표적으로, 대화3리에 3개소, 대화4리 · 8리, 상안미1리 · 4리 · 5리, 신리3리, 개수1리 · 2리 등에서 아직도 동제가 성행하고 있다.

신위는 대개 ‘성황지신위(城隍之神位)’ · ‘산신지신위(山神之神位)’가 많고 간혹 ‘토지지신위(土地之神位)’ · ‘질역지신위(疾疫之神位)’가 함께 봉안되기도 한다. 제향은 보통 연 1회 행하지만 봄 · 가을로 2회를 지내는 곳도 있다.

설화 · 민요

이 고장에 있는 오대산은 널리 알려진 명산이고 월정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되어 그 연대가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본산사찰의 하나였기 때문에 이에 얽힌 지명 전설과 불교 설화가 다수 전해 오고 있다.

월정사의 창건주는 자장율사로 그가 당나라에서 수학할 때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친견하였는데, 문수보살이 이르기를 “그대의 본국에는 오대산이 있고 여기에 일만 문수가 상주하고 있으니 돌아가거든 그 곳에 절을 짓고 일만 문수를 예배하고 봉안하라.”고 하기에 돌아와서 월정사를 세웠다 한다.

또한 신라의 정신(淨神) · 효명(孝明) 두 왕자가 대관령을 넘어 오대산에 각기 암자를 짓고 수도하고 있을 때 경주에서 난이 일어나 왕위 계승자가 없게 되었는데, 이 때 오대산에서 경주까지 오색 구름이 뻗쳐 사람들이 이를 알고 찾아와 효명왕자를 모셔다 신라의 왕통을 잇게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상원사 아래의 관대거리에는 조선 세조에 얽힌 유래담이 전한다. 세조가 만년에 오대산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몸에 종기가 나 이 곳에 관대를 벗어 놓고 계곡에서 목욕을 하는데, 동자가 나타나 등을 밀어 주기에 세조가 “너 이놈 어디 가서 임금의 등을 밀어 주었다는 말을 하지 마라.”하니, 동자가 “대왕은 어디 가서 문수동자가 등을 밀어 주더란 말을 마시오.”하며 사라진 뒤에 세조의 종기가 나았다 한다.

「허균과 임세적」설화는 강릉 대화땅에 임세적이라고 하는 113세 노인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113세의 노인의 모습은 흡사 50세쯤으로 보이고 시력이나 청력이 조금도 나빠지지 아니 하였다. 1603년(선조 36) 허균(許筠)이 이 분을 만나보기 위하여 젊은 사람의 예로서 절하고 문안을 드리자 노인의 말이, 젊어서는 갑사(甲士)에 예속되어 있다가 회갑이 되어 국적에서 떨어진 뒤 줄곧 이곳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허균이 “노인께서는 특별히 다른 비방을 갖고 계십니까? 어떻게 이렇듯 근력이 정정하십니까?” 하니 노인의 말이 “시골 늙은이가 무슨 비방을 가지고 있겠소.” 했다. 허균이 다시 “그러면 무슨 약을 잡수시는지요?” 하니 노인은 “일찍이 약이라곤 먹어 본 일이 없소” 했다.

허균이 이상하여 다시 묻기를 “세상에 수양을 아니하고 장수를 누리시는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니 노인의 대답이 “나는 어렸을 때에는 병이 많고 허약해서 조금만 과식해도 꼭 탈이 나곤 했는데 하루에 묵은 쌀5합을 먹되 날 음식, 차가운 음식을 먹지 아니하고 이렇게 10여년을 계속하는 동안에 병이 차츰 줄어들었고, 나이 40에 처가 죽었으나 아들 둘이 장성하여 족히 봉양해 줄만 하기에 다시 여자를 얻지 않고 농토와 가산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고 윤번으로 공양하게 했더니 겨울과 여름이면 번갈아 옷을 지어 주고 아늑한 방을 가리어 거처하게 하여 풍우를 모르오. 내 두 아들이 능히 잘 받들어 주어 화 낼 일도 없고 속을 태울 일도 없으니 살아가는 것이 무사하고 조용히 앉아서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잠자고 하는 지가 60여년이 되었소. 그리고 집이 깊은 산골에 있으니 낮이면 나무죽대의 뿌리를 캐어서 이것을 다려 먹기를 오래 하다 보니 차츰 눈도 밝아지고 귀도 밝아지며, 빠진 이도 다시 나고 다리 힘도 더욱 나게 되었습니다. 두 아들이 죽었어도 손자 5명이 있어 매양 변치 않고 돌보아 주니 내 별로 할 일도 없이 이렇게 오래 살 뿐이지 내게 무슨 별다른 방법이 있겠소.” 했다.

허균이 말하기를 “제가 노인의 말씀을 듣고 양생하는 방법을 터득하였습니다. 신선 되는 이는 반드시 정력과 기력과 신기(神氣)의 세 가지 기운을 잘 보전해야 한답니다. 다시 재취하지 않으니 정력을 보전하였고 음식을 가리어 과식하지 않으니 기력을 보전하였으며 화내는 일 없이 살았으니 신기를 보전한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굳으면 의당 그 장수하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항차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참된 자기를 지켜 오직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눈 붙여 조용히 진정해 있으니 그 첫째 방법이요, 더욱이 대황정은 또한 약으로도 으뜸가는 것이라 노인께서 이를 행하고 이를 복용하니 어떠하겠습니까? 내 노인을 본받을까 합니다.” 했다.

「세조와 고양이」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세조가 절에 와서 불공 드렸다. 그때 그를 죽이려는 자가 부처 뒤에 있었다. 그런데 그 절에서 키우던 고양이가 암살자의 옷자락을 물고 땡겨 암살을 모면했다고 한다. 세조는 이에 강릉지역 땅을 고양이 앞으로 분배 해줬다고 하며, 지금 상원사 앞에 돌로 된 것이 해태가 아니고 고양이란 것이다.

「봉산서재와 판관대」설화는 봉평면 평촌리 봉산서재와 관련 있다. 율곡 이이와 화서 이항로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율곡의 신주를 이곳에 모시게 된 유래는 바로 봉평이 율곡의 잉태지가 되기 때문이다. 일찍이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가 수운판관으로 재직하고 있을 당시에 산수가 아름다운 봉평에 4년간을 살았었다. 이원수가 여가를 틈타 처가로 오던 중 평창군 대화면 반정에 이르렀을 때 날이 저물고 피로에 지쳐 하루 밤을 쉬어 가려고 길가의 주막집에 여장을 풀었다.

그날 밤 일찍이 혼자 몸이 되어 홀로 주막을 경영하던 주모의 꿈에 용이 가슴 가득히 안겨 오므로 이상히 여겨 홀연 꿈을 깨고 일어나 앉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주모는 이것이 틀림없이 잉태할 꿈이며 비범한 인물을 하늘이 점지해 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식을 얻을 기회가 왔구나 하였다. 주모는 자신의 처지를 돌이켜보니 혼자 몸이요, 그날 밤 대상이 될 사람은 주막에 묵고 있는 원수공 뿐이라 여러 모로 살핀 끝에 그 분이 예사 사람이 아니므로 여자의 수치심도 잊어버리고 방으로 뛰어 들어가 “손님 저를 물리치지 마십시오.” 하니 놀란 원수공이 “이 무슨 해괴한 짓이요, 내 그대를 행실 바른 여인으로 알고 묵으려 했는데 이러면 되겠오.” 하고 달래니 “손님 아무 말씀 마시고 하루밤만 정을 맺게 해 주십시오.” 하고 애걸하였으나 원수공이 완강히 뿌리치고 말아 주모는 소원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튿날 아침 부끄럽고도 서운한 마음으로 작별을 하는데 원수공의 얼굴에는 범할 수 없는 상서로운 기운이 어려 있는 것을 보고 이는 도저히 내 운수가 아니구나 하며 체념하였다. 그 무렵 율곡의 어머니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는 강릉 오죽헌 친정에 머물러 있었다. 역시 하룻밤 꿈에 용이 가슴 가득히 안겨 오는 꿈을 꾸고 나서 즉시 귀가하려고 하였다. 언니는 며칠 더 머무르기를 간곡히 권하였으나 사임당 신씨는 이를 뿌리치고 그날로 140리 길을 걸어서 집에 돌아와 있던 중 마침 원수공이 도착했다.

신씨는 오랜만에 만난 남편을 대하여 반기기는 고사하고 말도 않고 표정에 변화도 없이 묵묵히 남편을 대하였다. 부인의 성품이 남다름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원수공 역시 아무 말 없이 그날 밤 잠자리를 같이 하였는데 율곡을 잉태하게 되었고, 그 후 9개월 만에 강릉 오죽헌에서 율곡을 낳았다 한다. 한편 원수공은 며칠을 이곳에서 머물다 임지로 돌아가던 길에 또 다시 반정 주막에 들게 되었다. 지난 일을 생각해 보니 사나이 대장부로서 아녀자의 청을 못 들어 준 것이 마음에 걸려 “여보시오 주모, 내 전날에는 대단히 미안하게 되었소. 오늘 밤 당신과 정을 맺을까 하오.” 하니 “어르신네의 말씀은 대단히 고마우나 지난번 하루 밤 모시고자 한 것은 홀로 사는 아낙네에게 하늘이 점시하신 비범한 영재를 얻고자 함이었는데 오늘 어르신네의 얼굴에는 전날의 상서로운 기운이 없어졌으므로 뜻을 받들 수 없습니다.” 하며 말을 이어 “이번 길에 댁에서는 귀한 아들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기를 틀림없이 인시에 낳을 것이니 다섯 살을 넘기지 못하고 호랑이한테 해를 입을 것입니다.” 하니 공이 당황하여 “그 무슨 말이요, 만약 참으로 그러하다면 앞일을 예견하는 당신께서는 그 화를 막을 수 있는 방법도 알 것이니 제발 묘법을 가르쳐 주시오.” 했다. 그러자 주모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그러면 돌아가 사람을 천 명 살리는 셈치고 밤나무 천 그루를 심으십시오. 그랬다가 아이가 다섯 살 되는 해 아무 날에 금강산에서 어떤 늙은 중이 와서 아기를 데려가겠다고 하면, 아기는 절대로 보이시지 말고 나도 덕을 쌓은 사람이니 아기를 함부로 데리고 갈 수는 없다고 버티시고 덕을 쌓은 것을 보자고 하거든 밤나무 천 그루를 보여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아닌게아니라 그 해 12월 26일 인시에 사임당이 아들을 낳으니 원수공은 주모의 말이 맞았구나 싶어 강릉에서 남쪽으로 백리 쯤 되는 노추산에 밤나무 천 그루를 심었다.

그 후 율곡이 다섯 살이 되는 해 주막 여인이 말한 바로 그날 늙은 중 한 사람이 나타나 “금강산에서 살고 있는 중인데 이 댁 아드님을 데려가려고 왔습니다.” 하니 원수공이 “나도 덕을 쌓은 사람이니 우리 아들을 데려가지는 못합니다.” 하자 중이 “무슨 덕을 쌓았다는 것입니까?” 하고 반문했다. 이원수공이 “노추산에 밤나무 천 그루를 심었습니다.” 하니 중이 “그렇다면 그것을 보여 주십시오.” 했다. 이원수공이 중을 데리고 산으로 가 밤나무를 하나하나 세는데 아무리 헤아려도 천 그루에서 한 그루가 모자랐다. 원수공의 얼굴이 사색이 되자 늙은 중이 “한 그루가 모자라니 기어코 아드님을 데려가야겠습니다.” 했다. 그러자 등 뒤에서 갑자기 나무 한 그루가 “나도 밤나무” 하고 소리치자 늙은 중이 혼비백산하여 큰 호랑이로 둔갑하여 달아나 버렸다고 한다.

방림면 〈여우재〉는 옛날 서울에 과거를 보러 가는 과객이나 장사치들이 방림면을 동서로 갈라놓은 태기산의 지맥인 한 재를 넘노라면 백발노인이 난데없이 나타나서 길가는 행인을 괴롭히곤 하였다는 이야기다. 이러던 어느 겨울날에 기골이 장대한 젊은 장정 한 사람이 이 고갯길을 넘는데 고갯마루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흰 두루마기를 입은 백발노인이 나타나서 젊은이의 앞길을 가로 막고 나섰다. 젊은이의 눈에는 두루마기 속에 감춰진 여우의 꼬리가 보였고 이에 젊은이가 단숨에 주먹으로 노인을 때려눕히고 나니 죽은 시체는 머리로부터 서서히 여우의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꼬리까지 완전히 여우의 모습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이후부터 이 재를 여우재라 불러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밖에「신효거사(信孝居士) 이야기」 · 「문수사(文殊寺) 석탑 이야기」 · 「적멸보궁」 등 불교 설화와 태기산 · 방아다리약수 · 신선바위 · 구룡소(九龍沼) · 성마령(星摩嶺) 등에 얽힌 지명 전설 · 「팔석정」 · 「청심 이야기」등의 인물 전설이 있다.

이 고장에 구전되고 있는 민요는 「아리랑」이 중심을 이룬다. 「정선 아리랑」의 본고장인 정선군과 인접하여 거의 비슷한 가락으로 불리고 사설도 서로 넘나든다. “한치 뒷산의 곤드레 딱죽이/나지미〔愛人〕 마음만 같다면/병자년 흉년에도 봄살이 나네.”에서 ‘한치’는 미탄면 평안2리에 있는 지명이고, ‘곤드레 딱죽’은 특산 나물로, 이 사설은 「정선 아리랑」의 보편적인 사설이 될 정도로 널리 불린다.

특유의 사설로는 “월정 오대산 박달남근/죽자 왕자로 다나간다/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서 노다 가세.”와 같이 오대산의 박달나무를 노래한 것도 있고, “영월읍에는 덮개(德浦里를 덕개라 한 데서 유래한 지명)가 있어도 춥기만 하고요/평창 땅에는 약수(藥水里)가 있어도 사람만 죽는다.”나 “영평정(寧越 · 平昌 · 旌善) 삼읍(三邑)에 딸 주지 마라/삼베 치다가 잔더위 먹는다.”와 같이 인근 지방의 특색을 함께 노래한 것도 있다.

또 “청옥산 줄기가 무너져서 육지평지가 되어도/임자하고 나하고는 맘 변치 않는다.”나 “극락암 뒷절에 도는 안개는 눈비나 줄려고 돌지만/소녀집 문전에 도는 청년은 누구를 바라고 도느냐.”와 같이 주변의 산 · 경치 등과 남녀 관계를 대구(對句)로 하여 흥겹게 부르기도 한다.

이 밖에도 특산물인 감자 · 옥수수 · 삼 · 목기(木器) 등을 소재로 한 특유의 사설들이 풍부하다. 여성들이 일을 하거나 여흥으로 부르는 「시집살이 노래」도 있다. “성님오네 성님오네/분고개로 성님오네/……성님밥은 멀(뭘)로짓나/앵도같은 팥을놓고/외씨같은 전이밥을/복지개로 오복소복…….”이 노래도 이 고장에 귀한 쌀로 밥을 짓고 특산물인 팥을 놓는다고 하여, 각 사설이 모두 이 고장의 특색을 담고 있다. 이 밖에 「자장가」나 「잠자리」 · 「다리빼기 노래」 등의 동요가 불린다.

산업 · 교통

산간지대가 많아 총 경지면적 1만 1008㏊ 중 논이 923㏊, 밭이 1만 85㏊로 밭이 훨씬 많다. 농가 수는 5,018가구, 농가 인구는 1만 4,134명이다. 화전정리 사업이 완료되면서 밭이 많이 증가하였다. 전체경지의 약 80%가 고랭지로, 무 · 배추 등의 재배가 활발하다. 채소류 외에 옥수수 · 감자 · 홉 · 약초 등의 생산도 활발하다.

대관령면은 대표적 씨감자 생산지역으로, 감자 원종장, 고령지시험장 등이 있어 과학적인 영농의 연구가 행해지고 있다. 최근 고랭지채소류 재배지역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화훼류 등의 새로운 고소득 작물을 개발하고 있다.

산지의 넓은 초지를 이용한 한우 · 젖소 · 육우 · 돼지 · 닭 등의 사육이 활발하다. 한우는 평창읍, 젖소와 육우는 대관령면, 닭은 진부면 · 대관령면 등지에서 많이 사육된다. 최근 산양과 오리 사육이 증가 추세에 있다.

영동고속국도의 개통 이후 축산단지 조성 사업에 힘입어 낙농목장이 늘어났다. 국립종축장을 비롯하여, 특히 대관령면에는 삼양축산 · 한일목장 · 명지목장 등 대단위 목장이 조성되어 있다.

전체 임야면적은 11만 9859㏊로 국유림 6만 8281㏊, 공유림 1만 3,162㏊, 사유림 3만 8416㏊이다. 전체 임야 중 입목지는 11만 8031㏊로 98.47%를 차지한다. 임상별로는 침엽수 4만 6302㏊, 활엽수 4만 4711㏊, 혼요림 2만 7018㏊이고, 무입목지는 1,828㏊이다. 주요 임산물은 대추 · 잣 · 버섯 · 약초 · 산나물 등이다.

대관령면 횡계리를 중심으로 겨울철에 송천의 맑은 물과 고랭지 기후를 이용하여 동해안의 명태를 이곳으로 옮겨와 명태덕장에서 황태를 생산하고 있다. 광물은 석회석 · 규사 · 금 · 는 등이 약간 생산되고, 평창읍에는 1989년 4월 19일 평창농공단지가 조성되었다.

지형 상 산악이 많은 고지대로서 예로부터 교통이 매우 불편하여 상업활동이 부진했으나 영동고속국도가 개통되면서 상업적 기능이 점차 활기를 띠고 있다. 정기시장은 5일장으로, 1770년대에 읍내장이 5 · 10일, 미탄장과 진부장이 3 · 8일, 통면장과 대화장이 4 · 9일, 봉평장이 2 · 7일에 개설되는 등 6개가 있었으나, 1883년대에는 평창읍의 군내장(郡內場)과 노일장(魯一場)이 5 · 10일, 동면장과 대화장이 4 · 9일에 개설되는 등 4개로 감소되었다.

1912년대에는 읍내장(천변리)과 진부장(하진부리)이 5 · 10일, 대화장과 미탄장(창리)이 4 · 9일, 봉평장(창동리)이 2 · 7일에 개장되는 등 5개로 증설되었다가, 1923년대에는 읍내장이 5 · 10일, 대화장이 4 · 9일, 진부장이 3 · 8일, 미판장이 1 · 6일에 개설되는 등 4개로 감소되었다.

1926년대에는 앞의 4개장 외에 봉평장이 2 · 7일에 개장되는 등 부활되어 다시 5개장으로 늘어났고, 1938년대에도 앞의 5개장 외에 방림장(방림리)이 3 · 8일에 개설되는 등 6개장으로 증설되었다. 1963년대에는 방림장 대신 6개장이 유지되었고, 1976년대에는 도암장 대신 계촌장(방림면 계촌리)이 2 · 7일에 개장되었는데, 이는 1994년대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나 이동하는 상인의 수가 점차 감소하는 추세에 있다. 2008년 현재에는 읍내장 · 대화장 · 봉평장 · 진부장이 열리고 있다.

영동고속국도가 군의 중북부를 지나므로 고속국도의 인터체인지를 통한 국도나 지방도의 연결이 편리하다. 6번 국도가 횡성 · 봉평 · 진부를 지나 소금강계곡을 잇고, 31번 국도가 운두령 · 속사 · 장평 · 평창 · 영월 지역을 연결하며, 42번 국도가 안흥 · (문치 터널)방림 · 평창 · 미탄 · 정선으로 연결되고 있다. 지방도는 405번이 하진부∼나전선이 숙암계곡을 따라 개설되어 있고, 446번이 인제 신남 · 오대산 · 병내(진부), 456번이 진부∼강릉 등을 연결하는 등 3개 노선이 있다.

시 · 군도는 16개 노선이 있어 각 읍 · 면 지역과의 교통이 이루어지는데, 이들 노선을 보면 1번 노론∼하안미, 2번 운교∼방림, 3번 주진∼방림, 4번 계촌∼대화, 5번 한탄∼마하, 6번 신리∼마평, 7번 계촌∼둔내, 8번 무이∼상진부, 9번 하안미∼백옥포, 10번 유포∼생곡, 11번 봉평∼자운, 12번 유천∼수하, 13번 용산∼횡계, 14번 화의∼북평, 15번 횡계∼수하, 16번 하진부∼봉산 등이 있다.

2017년 12월 22일 운행을 시작한 경강선 KTX이 지난다. 경강선 KTX은 평창군 내 평창역과 진부(오대산)역을 지난다.

관광

주요 관광지는 오대산국립공원 · 대관령 일대 · 용평스키장 · 휘닉스파크 등이다. 특히 오대산국립공원은 소금강 · 경포대 · 오죽헌 · 설악산과 연계된 최적의 관광지이다. 공원 내에는 1,300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월정사, 선승들의 본거지인 상원사를 비롯하여 불교문화재와 사적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이외 진부면의 방아다리 약수터와 안개자니계곡이 있는데, 방아다리약수는 속병에 특효가 있고, 안개자니계곡은 진고개 노인봉과 황변산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계곡은 소금강을 방불케 하는 기암괴석이 가을철의 단풍과 어우러져 자연경관의 극치를 이루고, 희귀 수목이 자생하고 있다. 반석 위를 흐르는 맑고 찬 계곡물은 바위 굽이마다 부딪치고 부서져 흐르다가 크고 작은 소(沼)를 만든다.

대관령면 횡계리 대관령 일대는 동해 바다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고원 관광지로 횡계팔경(橫溪八景)이 있다. 제1경은 칼산에 휘몰아치는 바람(刀山狂風), 제2경은 황병산 위에 높이 뜬 흰 구름(黃柄白雲), 제3경은 대관령 아흔 아홉 굽이 돌아 오가는 행인(嶺路行人), 제4경은 횡계리 삼정평(三井坪)의 낚시(橫溪垂釣), 제5경은 고루산의 맑은 안개(高褸淸煙), 제6경은 효성산의 밝은 달(曉星霽月), 제7경은 상봉령에 해가 지는 광경(祥鳳落照), 제8경은 능정산의 해 돋는 광경(能政出日)이다.

대관령면 용산리 발왕산 기슭에는 용평스키장이 있는데, 부대시설로 체력단련시설, 사격장 · 양궁장 · 수영장 · 테니스장과 각종 오락시설 등이 있어, 스키를 타려는 사람들 외에 휴양과 피서를 목적으로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다. 봉평면 면온리의 해발 700m에 자리잡은 산악 휴양지 휘닉스파크는 부근의 문화 유적과 태기산 · 흥정천 · 평창강의 수려한 경승지와 잘 어울려 있다.

평창군은 우리나라 최초로 2018년에 동계올림픽을 개최하였다. 동계올림픽 개최를 통해 평창군은 대관령면 횡계 시가지 일원의 3.788㎢를 동계스포츠의 메카이면서 국제적인 4계절 고원 관광휴양도시로 개발하였다.

평창군에는 여름에 평창산꽃약풀축제, 메밀꽃오페라문화체험축제, 무이아트페스티발, 강원감자큰잔치가 펼쳐지고, 가을에는 노성제, 오대산불교문화축제, 효석문화제가 개최된다. 스키의 계절인 겨울에는 대관령눈꽃축제와 정월대보름축제가 개최된다. 특히 효석문화제와 오대산불교문화축제, 대관령눈꽃 축제는 지역 특성에 알맞은 행사로 각광을 받고 있다.

효석문화제는 이효석의 고향 봉평에서 매년 9월 중순경에 개최된다. 이 지역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실제 무대이기도 하다.

오대산불교문화축제는 오대산 국립공원이 위치하고 있는 진부에서는 매년 9월 개최된다. 2006년에는 일본에 반출되엇던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이 환수되는 것을 계기로 환수고유제를 비롯한 다양한 학술행사가 진행되었다.

대관령 눈꽃축제는 대관령 일대에서 매년 열린다. 대관령 지역은 고도가 높고 기온차가 심해 최대의 황태덕장이 형성된 지역으로 겨울철 많은 관광객들을 모으고 있다. 인근의 선자령에서는 눈꽃트래킹을 즐길 수 있으며 발왕산에서는 겨울 등산을 할 수 있다. 축제에서는 황병산 사냥놀이, 소발구퍼레이드, 앉은뱅이썰매타기, 설상축구대회 등 다양한 이벤트가 펼쳐지며 그 외 특별 이벤트인 눈조각경연대회, 스노우카레이스대회, 감자구워먹기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읍 · 면
  1. 평창읍(平昌邑)

군의 남부에 위치한 읍. 면적 161.40㎢, 3,692세대, 인구 9,470명으로 남자 4,738명, 여자 4,732명이다(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중리이다. 본래 평창군 소재지라 하여 군내면(郡內面)이라고 칭하였으며, 상 · 중 · 하 · 천변 · 종부 · 노론 · 이곡 등 10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면의 약수 · 조둔 · 천동 · 도돈 · 마지 등 10개 리와 북면의 후평 · 행동 · 여만 · 주진 · 용항 · 다수 등 11개 리를 병합하여 평창면으로 개칭되었으며, 1979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북쪽에 백덕산 · 남병산(南屛山, 1,150m) · 청옥산, 동남쪽에 삼방산(三芳山, 980m) 등의 험한 산이 솟아 있다. 계방산에서 발원한 평창강이 읍내를 종관하며 심하게 곡류하면서 유역에 기름진 평지를 이루어, 주진 · 후평 · 약수리 등지에서 벼농사 중심의 농업이 이루어진다.

주요 농산물은 쌀 · 마늘 등이며, 마늘 생산량은 군내 1위를 차지한다. 한우 사육과 양돈이 활발하며, 상리에 국립송어양식장과 박달나무묘포장이 있다. 한편, 평창농공단지가 조성되어 앞으로의 발전이 기대된다.

교통은 지형적인 조건 때문에 매우 불편하였으나, 읍의 중심지에서 31번 국도와 42번 국도가 분기하여 북쪽으로는 영동고속국도, 남쪽으로는 영월, 동쪽으로는 정선과 연결된다. 한편 597번 지방도가 월군 주천면과 연결되고, 1번 군도가 노론∼하안미, 3번 군도가 주진∼방림과 연결되어 종전보다 훨씬 편리해졌다.

문화유적은 하리에 평창향교 · 석실고분 · 삼층석탑, 유동리에 오층석탑, 천동리에 지동봉가옥, 중리에 오층석탑 · 노성산성(魯城山城), 상리에 오층석탑, 종부리에 남산정 · 고분, 응암리에 아양정 · 응암굴, 계장리에 선사유적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개 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 교가 있다.

중(中) · 상(上) · 하(下) · 천변(川邊) · 종부(鍾阜) · 노론(老論) · 이곡(耳谷) · 조동(鳥洞) · 고길(古吉) · 지동(池洞) · 유동(柳洞) · 약수(藥水) · 조둔(鳥屯) · 응암(鷹巖) · 마지(馬池) · 천동(泉洞) · 도돈(道敦) · 대상(大上) · 대하(大下) · 입탄(入彈) · 행동(杏洞) · 여만(餘萬) · 후평(後坪) · 주진(舟津) · 용항(龍項) · 임하(林下) · 계장(溪長) · 다수(多水) · 하일(河一) · 원당(元堂) · 뇌운(雷雲) 등 31개 리가 있다.

  1. 대화면(大和面)

군의 중부에 위치한 면. 면적 166.65㎢, 2,425세대, 인구 5,865명으로 남자 2,916명, 여자 2,949명이다(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대화리이다.

본래 교주강릉도(交州 江陵道)에 속하였으며 태화면(泰和面)이라 부르다가 조선 중기에 이르러 대화면이라 개칭하였다.

1906년강릉군으로부터 평창군으로 이관되어 방림(芳林) · 상안미 · 하안미 · 대화 · 신 · 개수 · 운교(雲橋) 등 8개 이를 관할하다가, 1934년방림 · 운고 · 계촌 등의 3개 이를 분할하여 방림면을 신설함으로써 관할구역이 축소되었다. 1983년신리 일부가 새로 설치된 용평면에 편입되었다.

동쪽에 백석산, 서쪽에 금당산(錦塘山, 1,173m) · 거문산(巨文山, 1,175m) · 덕수산(德修山, 1,000m), 남쪽에 남병산, 북쪽에 백적산(白積山, 1,141m) 등의 험한 산이 솟아 있으며, 금당산과 거문산 동쪽 기슭에는 대규모 산록완사면이 형성되어 농업의 중심지를 이루고 있다.

대화천(大和川)이 면의 중앙을 남류하여 하안미리에서 평창강과 합류하면서 일대에 비교적 규모가 큰 충적평야를 형성하여 벼농사의 중심지를 이룬다. 주요 농산물은 쌀 · 찰옥수수 등이고, 특산물로는 옥수수엿 · 적송 등이 있다. 이 밖에 홉 · 잎담배의 재배도 성하며, 돼지와 젖소 사육도 성하다.

면의 중앙을 31번 국도가 남북으로 달려 평창∼장평과 연결되고, 1번 군도가 하안미∼노론, 4번 군도가 대화∼계촌, 9번 군도가 하안미∼백옥포를 연결하는 등 주변의 면지역과의 연결이 용이해 교통은 편리한 편이다. 대화리는 교통 중심지로 발달된 가촌(街村)인데, 영동고속국도의 개통으로 차량의 통행이 감소되어 그 기능이 점차 쇠퇴해가고 있다.

문화유적은 대화리에 광천굴(廣川窟)과 대화산성 · 이장근가옥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4개 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 교가 있다.

대화(大和) · 신(新) · 개수(介水) · 상안미(上安味) · 하안미(下安味) 등 5개 리가 있다.

  1. 대관령면(大關嶺面)

군의 북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221.62㎢, 2,738세대, 인구 6,714명으로 남자 3,359명, 여자 2,815명이다(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횡계리이다.

본래 강릉군 지역으로 교주 강릉도에 속해 있었는데, 1906년정선군(旌善郡)에 이관되어 호명(虎鳴) · 유천 · 병내 · 차항 · 횡계 · 수하 등 8개 리를 관할하다가, 1931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평창군에 편입되었다. 1973년호명리 일부와 봉산리가, 1989년호명리가 진부면으로 이속되었다. 2000년 10월 21일횡계5리를 13개 리로 분할함으로써 6개 법정리, 22개 행정리 91개 반으로 행정구역이 편성되어 있다. 2007년 9월 면 이름을 대관령면으로 개칭하였다.

태백산맥 동쪽의 분수령을 이루는 곳으로, 동쪽에 매봉 · 선자령(仙子嶺, 1,157m) · 고루포기산, 서쪽에 동대산(東臺山, 1,434m), 남쪽에 발왕산, 북쪽에 황병산 등의 높고 험한 산이 솟아 있고, 해발고도 700m 이상의 평탄면(平坦面)과 침식에 의한 구릉성 산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옛 지질시대에 저평했던 곳이 융기(隆起)한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황병산에서 발원한 송천(松川)이 면의 동부지역을 심한 곡류를 하면서 남류하다가 강릉시 왕산면을 지나 정선군 북면으로 흘러든다. 기후와 지형 조건에 의해 고랭지농업과 목축업이 활발하며, 주요 농산물은 씨감자 · 고랭지채소 · 화훼 등이다.

1972년부터 대단위 초지 조성을 시작하면서 목축 중심지로 등장하여 젖소 · 비육우 · 닭 등의 사육이 성하다. 특히, 우리나라 최대의 대단위 목장인 삼양축산 대관령목장을 비롯하여 한일목장 · 명지목장 등 대규모 목장이 있다. 그러나 한강 최상류의 하나인 송천의 상류유역에 위치하기 때문에 목장의 오수를 처리하는 위생처리 시설에 완벽을 요한다.

용산리에는 최신시설을 갖춘 용평리조트와 대관령스키장이 있고, 영동∼영서간 교통의 요지인 대관령에는 휴게소가 있다. 겨울에는 명태를 건조하는 황태덕이 설치되어 주민 소득에 크게 이바지한다. 수하리에는 도암댐이 있는데, 이곳의 물을 터널을 통하여 동쪽의 강릉시로 끌어들여 유역 변경 발전의 수원으로 삼고 있다.

영동고속국도가 면의 중앙을 동서로 횡단하고, 횡계리와 대관령에 인터체인지가 있으며, 6번 국도가 면의 북부를 지나간다. 456번 지방도가 영동고속국도와 나란히 달리고, 12번 군도가 유천∼수하, 13번 군도가 차항∼횡계, 15번 군도가 횡계∼수하를 연결하여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주민 생활은 강릉 생활권에 들어, 강릉과의 유대가 깊다.

문화유적은 횡계리에 대관령성황사 및 산신각이 있다. 이 밖에 고령지시험장(高嶺地試驗場) · 국립종축장 · 강원도감자원종장 · 대관령측후소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개 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 교가 있다.

횡계(橫溪) · 차항(車項) · 수하(水下) · 용산(龍山) · 유천(楡川) · 병내(屛內) 등 6개 리가 있다.

  1. 미탄면(美灘面)

군의 동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109.74㎢, 863세대, 인구 1,948명으로 남자 1,016명, 여자 932명이다(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창리이다.

본래 고려 때 미탄이라 하였는데, 조선 말기에 한때 미창(米倉)이라 불리다가 다시 미탄면이 되어 회동 · 용전(龍田) · 천천(泉川) · 취치(鷲峙) · 두만(斗滿) · 석희(夕希) 등 14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9개 리로 개편되었다. 1928년 조선총복부령에 의거 창1 · 2리, 회동1 · 2리, 평안1 · 2리로 분할되었으며, 1974년 7월 1일 행정구역 조정으로 창3리가 신설되었다. 1988년 창1 · 2 · 3리를 비롯하여 율치리, 회동1 · 2리, 평안 1 · 2리, 백운리, 한탄리, 기화리, 마하리, 수청리 등 13개 행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동쪽에 백운산(白雲山, 883m), 서쪽에 삿갓봉(1,055m), 남쪽에 재치산(財峙山, 751m), 북쪽에 청옥산 등의 험한 산이 솟아 있다. 재치산 남쪽 한탄리의 고마루마을은 학술적 가치가 높은 대규모 카르스트 오목지 안에 형성되어 있다.

청옥산과 삿갓봉에서 발원한 소규모의 하천들이 창리 일대에서 합류하여 남류하다가 영월군과의 경계에서 동강(동강, 남한강 상류)으로 흘러든다. 하천 연안에는 약간의 평야가 발달하여 벼농사의 중심지를 이루고 있으며, 주변 산지의 고위평탄면과 산록완사면 지대에서는 고랭지농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 · 잎담배 · 고랭지채소 등이고, 특산물로는 천연 슬레이트가 있다.

42번 국도가 면의 중앙을 동서로 횡단하여 평창∼정선 등지와 연결되며, 특히 정선과는 험하던 비행기재(麻田峙)와 멧둔재에 터널이 뚫려 정선 및 평창과의 연결이 용이해졌다. 또한 413번 지방도가 창리∼문곡을 연결하고, 5번 군도가 한탄∼마하를 연결하여 종전보다 교통이 편리해졌다.

문화유적은 창리에 장수정, 마하리에 백령동굴이 있다. 마하계곡의 경치는 유명하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 중학교 1개교가 있다. 창(倉) · 율치(栗峙) · 회동(檜洞) · 평안(平安) · 백운(白雲) · 한탄(寒灘) · 기화(琪花) · 마하(馬河) · 수청(水靑) 등 9개 리가 있다.

  1. 방림면(芳林面)

군의 서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120.82㎢, 1,126세대, 인구 2,458명으로 남자 1,248명, 여자 1,210명이다(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방림리이다.

본래 강릉군 대화면 지역으로, 1906년 평창군에 편입되었다. 1934년방림 · 운교 · 계촌의 3개 이를 분할하여 이 중 방림리의 이름을 따 방림면을 설치하였다.

동쪽에 덕수산 · 장미산(長美山, 980m) · 중갈대봉(1,013m), 서쪽에 솟대봉(884m), 남쪽에 사자산(獅子山, 1,167m) · 백덕산, 북쪽에 청태산 · 대미산(大美山, 1,232m) 등의 험한 산이 솟아 있다. 방림리 뒷산에는 카르스트 지형이 형성되어 있다. 면의 동쪽에서 평창강이 남류하다가 방림리에서 계촌천과 합류한다.

농산물은 옥수수가 대표적이고, 특산물로는 표고버섯 · 꿀 등이 있다. 강원도 옥수수의 원종장(原種場)이 있어 전국의 옥수수 종자 보급에 기여하고 있으며, 모범양묘장에서 잣나무 · 오리나무 · 아카시아 등의 묘목이 생산, 공급되고 있다.

42번 국도가 면의 남쪽을 동서로 달리는데, 특히 횡성군 안흥면 상안리와 운교리 사이의 험한 문치(門峙)에 터널이 완공되어 횡성지역과의 교통이 더욱 편리해졌다. 방림리의 상방림은 42번 국도와 31번 국도가 만나는 삼거리가 있어 횡성 · 평창 · 강릉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이며, 주민들은 대화(大和) 생활권에 속하여 있다.

한편 2번 군도가 운교∼방림을 연결하며 계촌을 통하고, 4번 군도가 계촌∼대화, 7번 군도가 계촌∼둔내를 연결하며 영동고속국도와 이어지는 등 전체적으로 교통이 비교적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방림리에 삼산정과 석조여래좌상이 있고, 관광지로는 계촌천의 수동계곡(水洞溪谷)이 널리 알려져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분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방림(芳林) · 계촌(桂村) · 운교(雲橋) 등 3개 리가 있다.

  1. 봉평면(蓬坪面)

군의 북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217.49㎢, 2,327세대, 인구 5,363명으로 남자 2,776명, 여자 2,587명이다(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창동리이다.

본래 교주 강릉도에 속해 있었으며, 현재의 진부(珍富) · 대화(大和) 지역을 포함한 대관령 일대의 중심지였다. 본래 기풍면(岐豊面)이라 부르다가 1757년(영조 33) 봉평서재의 이름을 따서 봉평면으로 개칭하였다.

1857년(철종 8)에 다시 기풍면으로 개칭했다가 1877년(고종 14)에는 또다시 봉평면으로 고쳤으며, 1906년강릉군에서 평창군으로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평촌 · 백옥포(白玉浦) · 창동 · 원길 · 덕거 · 흥정 등 10개 리를 관할하였다. 1973년진부면 장평리가 편입되었고, 1983년 백옥포리와 장평리가 신설된 용평면으로 이속되었다.

서쪽에 태기산, 북쪽에 흥정산(興亭山, 1,277m) · 회령봉(會靈峰, 1,039m) 등 높은 산이 솟아 있다. 회령봉 동쪽 기슭에서 발원한 덕거천(德巨川)과 흥정산과 회령봉 사이에서 발원한 흥정천이 면의 동부와 서부를 남류하다가 원길리에서 합류하여 창동리를 지나 백옥포리에서 평창강으로 흘러들면서 유역에 약간의 평지를 형성하여 벼농사의 중심지를 이루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 · 옥수수 · 감자 · 고랭지채소 · 메밀 등이다. 특산물로는 싸리꿀 · 약초 · 잣 · 굴피 · 홉 등이 있고, 한우 사육도 성하다.

영동고속국도가 면의 남부를 동서로 통과하고, 6번 국도가 중앙을 지나 횡성 · 장평 등지와 연결된다. 한편, 8번 군도가 무이∼상진부, 10번이 유포∼생곡, 11번이 봉평(창동)∼자운 등과 연결되어 교통이 편리해졌다.

문화유적은 흥정리에 태기산성지, 평촌리에 봉산서재(蓬山書齋) · 팔석정(八石亭)이 있고, 창동리남안동에는 이효석(李孝石)의 생가터와 문학비가 있다. 흥정천계곡과 면온리 · 무이리 일대에 조성된 종합 리조트타운은 새로운 관광휴양지로 유명하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 교가 있다.

창동(蒼洞) · 평촌(坪村) · 무이(武夷) · 흥정(興亭) · 덕거(德巨) · 원길(元吉) · 면온(綿溫) · 유포(柳浦) · 진조(眞鳥) 등 9개 리가 있다.

  1. 용평면(龍坪面)

군의 중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135.38㎢, 1,275세대, 인구 3,003명으로 남자 1,518명, 여자 1,485명이다(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용전리이다.

본래 진부면 관할 하에 있었으나, 1983년 행정구역 조정으로 진부면 용전출장소에서 관할하던 속사 · 노동 · 용전 · 이목정 · 도사 등 5개 리와 봉평면의 백옥포 · 장평 등 2개 리, 대화면의 신리(新里) 일부를 통합하여 용평면이 되었다. 1987년 12월 1일 면사무소를 용전리 135 · 6번지로 이전하였고, 2000년 10월 21일백옥포1리를 분할하여 백옥포3리를 신설하였다.

동쪽에 백적산, 남쪽에 금당산, 북쪽에 계방산 등의 높고 험한 산이 솟아 있다. 계방산 남쪽에서 발원한 속사천이 속사리 · 이목정리 · 용전리 등을 지나 백옥포리에 이르러 봉평면에서 흘러온 흥정천과 합류하여 평창강이 된다. 평야는 거의 없으며, 산간지대이므로 밭농사가 활발하다. 주요 농산물은 감자 · 옥수수 등이며, 특산물로는 꿀 · 홉 등이 있고, 한우 사육도 성하다.

영동고속국도가 면의 남부를 통과하고, 고속국도와 나란히 6번 국도가 지나며, 속사천계곡을 따라 31번 국도가 남북으로 달려 홍천 · 인제 · 평창 등지와도 연결된다. 또한, 8번 군도가 무이∼상진부, 9번이 하안미∼백옥포를 연결하는 등 교통은 편리한 편이다. 노동리에 이승복반공기념관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용전(龍田) · 이목정(梨木亭) · 속사(束沙) · 노동(路洞) · 도사(都事) · 백옥포(白玉浦) · 장평(長坪) · 재산(才山) 등 8개 리가 있다.

  1. 진부면(珍富面)

군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331.15㎢, 4,053세대, 인구 1만 22명으로 남자 5,094명, 여자 4,928명이다(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하진부리이다.

본래 교주 강릉도에 속해 있었으며, 진부역(珍富驛)의 이름을 따서 진부면이라 하여 동구(洞口) · 상(上) · 하(下) · 거문(巨文) · 속사 등 5개 리를 관할하다가, 1906년평창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상진부 · 하진부 · 화의 · 장전 · 신기 · 수항 등 21개 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1973년장평리가 봉평면으로 이속되었고, 도암면 호명리 일부와 봉산리가 편입되었다. 1983년 행정구역 조정으로 진부면 용전출장소에서 관할하던 속사 · 노동 · 용전 · 이목정 · 도사 등 5개 리가 용평면으로 이속되었다. 1989년 1월 1일도암면 호명리가 진부면에 이관되었다. 2005년 현재 18개 법정리 36개 행정리 156개 반으로 행정구역이 편성되어 있다.

동쪽에 발왕산, 서쪽에 백석산 · 백적산, 남쪽에 중왕산(中旺山, 1,376m) · 박지산 · 가리왕산, 북쪽에 오대산 · 동대산 등의 높은 산이 솟아 있다. 오대산에서 발원한 오대천은 남류하면서 간평리를 지나 상진부리에 이르러 탑동리 일대에서 발원한 계류와 합류하고 면의 중앙을 남류하여 정선군으로 흘러든다.

오대천은 간평 · 하진부 일대에 넓은 평지와 구릉지를 이루는데, 이들 평탄면은 옛 지질시대에 형성된 저평지가 융기된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주요 농산물은 감자 · 옥수수이며, 그 밖에 고랭지채소와 약초 · 홉 · 표고버섯 재배도 성하다. 또 한우 사육과 양봉 · 양돈도 활발하며 목재 생산도 많다.

면의 중부를 영동고속국도가 동서로 통과하고, 6번 국도가 고속국도와 거의 나란히 달리다가 진고개를 지나 도암면의 북서부를 통과하며 강릉시로 연결된다. 405번 지방도가 하진부에서 오대천의 숙암계곡을 통과하며 정선군 북면으로 연결되어 정선지역과 영동고속국도를 연결시켜 줌으로써 정선 일대의 교통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446번 지방도는 진부에서 오대산을 넘어 홍천군 내면∼인제군 상남면으로 연결되고, 456번 지방도는 진부 · 횡계 · 강릉을 이어준다.

한편 6번 군도가 마평∼대화면 신리를, 8번 군도가 상진부∼봉평면 무이리를, 16번 군도가 하진부∼봉산을 연결하여 교통이 편리한 편이며, 하진부리는 예로부터 강릉가도(江陵街道)의 교통 요지로 발달한 곳이다.

문화유적은 동산리에 상원사동종 · 월정사팔각구층석탑 · 상원사목각문수동자좌상 · 월정사석조보살좌상 · 오대산상원사중창권선문 · 상원사목각문수동자좌상복장유물 · 오대산사고지 · 세조대의 백초회장저고리 · 월정사적멸보궁 · 상원사목조보살좌상 · 월정사육수관음상 · 월정사팔만대장경 · 월정사부도, 탑동리에 삼층석탑, 수항리에 사지, 마평리에 청심대 등이 있다. 면의 북부는 오대산국립공원에 포함되고 척천리의 방아다리 약수는 위장병 등에 효과가 있어 찾는 사람이 많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4개 교(분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 교가 있다.

하진부(下珍富) · 상진부(上珍富) · 송정(松亭) · 두일(杜日) · 척천(尺川) · 탑동(塔洞) · 동산(東山) · 간평(間坪) · 상월오개(上月午介) · 거문(巨文) · 신기(新基) · 봉산(鳳山) · 호명(虎鳴) · 수항(水項) · 마평(馬坪) · 화의(和義) · 장전(長田) · 막동(幕洞) 등 18개 리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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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도서』(국사편찬위원회, 1979)
『태백의 읍면』(강원일보사, 1975)
『평창군지』(평창군, 1968)
『강원도지』(강원도지편찬위원회, 1959)
평창군(www.happy700.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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