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흥시 ()

관북지도
관북지도
인문지리
지명
함경남도 중남부에 위치한 시.
정의
함경남도 중남부에 위치한 시.
개관

함주군에 둘러싸여 있으며, 남쪽은 흥남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7°30′∼127°39′, 북위 39°52′∼39°58′에 위치하며, 면적 274.14㎢, 인구 12만 2760명(1943년 현재)이다.

소화 1가(昭和一街)·소화 2가·중앙 1가(中央一街)·중앙 2가·중앙 3가·서 1가(曙一街)·서 2가·산수 1가(山手一街)·산수 2가·산수 3가·금 1가(錦一街)·금 2가·군영 1가(軍營一街)·군영 2가·대화 1가(大和一街)·대화 2가·대화 3가·대화 4가·성천 1가(城川一街)·성천 2가·성천 3가·성천 4가·황금 1가(黃金一街)·황금 2가·황금 3가·황금 4가·본 1가(本一街)·본 2가·본 3가·본 4가·본 5가·복부 1가(福富一街)·복부 2가·복부 3가·사포 1가(沙浦一街)·사포 2가·사포 3가·일출 1가(日出一街)·춘일 1가(春日一街)·춘일 2가·치마(馳馬)·동운(東雲)·조일(朝日)·반룡대(盤龍臺)·지락(知樂)·주길(住吉)·낙민(樂民)·유락(有樂)·만세(萬歲)·신흥(新興)·낙(樂)·용흥(龍興)·회상(會上)·출운(出雲)·하신흥(下新興)·서흥(西興)·당북(塘北)·당흥(塘興)·상보(上保)·연봉(蓮峰)·대흥(大興)·중흥(中興)·자흥(自興)·풍동(豐東)·인흥(仁興)·남신흥(南新興)·운곡(雲谷)·초흥(草興)·동흥(東興)·보고(保古)·서상(西上)·신상(新上)·풍호(豐湖)·흥도(興島)·십이(十二)·구억(九億)·회양(會陽)·중보(中保)·상수(上水)·하수(下水)·부평(富坪)·경흥(慶興)·심흥(深興)·신보(新保) 등 84개 동으로 되어 있으며, 시청 소재지는 소화 1가 동이다.

자연환경

북서쪽에 반룡산(盤龍山, 319m)이 솟아 있으며, 그 밖에 대부분의 지역은 평야 지대를 이룬다. 즉, 하천의 퇴적작용으로 토사가 운반되어 형성된 충적평야로서, 해발 21m 정도인 저평한 지역이며, 대규모의 함흥평야가 펼쳐져 있다.

성천강(城川江)이 함주군 상기천면·주북면 등을 지나 이 시의 서쪽을 남류하며, 덕산면·동천면 등을 지나 이 시의 중서부를 남류하는 호련천(瑚璉川)과 합류한다.

특히, 성천강은 망상유로(網狀流路)를 이루어 홍수 때 범람이 잦았지만 1929년 제방 공사 및 유역 변경에 의하여 장진강(長津江)·부전강(赴戰江)의 낙하된 물을 합류하여 유로가 정비되었으며, 그 피해도 감소되었다.

지질은 화강편마암이며, 지표는 충적층으로 피복되어 있다. 기후는 추운 지역에 속하지만 함경산맥과 동해의 영향을 받아 같은 위도 상의 다른 지역에 비해 온난한 편이다.

연평균 기온 9.8℃, 1월 평균 기온 -6.1℃, 8월 평균 기온 22℃, 연 강수량 890.3㎜이다. 대개 첫서리는 10월 중순경에, 마지막 서리는 3월 하순경까지 내린다.

역사

[고 대]

삼국 시대에는 고구려의 영토였으며, 6세기 후반에는 신라 진흥왕의 북진정책에 따라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그 뒤 발해가 건국되면서 발해의 5경 가운데 하나인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가 설치되었으나, 926년 발해가 멸망한 뒤에는 여진족의 거주지가 되어 오랫동안 우리 영토에서 벗어나 있었다.

[고 려]

1107년(예종 2) 윤관(尹瓘)이 이 지역의 여진을 정벌함으로써 비로소 우리 영토로 수복되었으며, 다음해에는 9성 가운데 하나로서 함주대도독부(咸州大都督府)가 설치되었으나 1109년 여진에 환부되었다.

그 뒤 다시 수복되어 함주라 하고 북계에 속하였으며, 1258년(고종 45)에는 조휘(趙暉)·탁청(卓靑) 등이 화주(和州:지금의 永興) 이북의 땅을 들어 몽고에 항복하고 몽고가 화주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하자 쌍성총관부에 속하여 합란부(哈蘭府)라 하였다.

1356년(공민왕 5)에 무력으로 쌍성총관부를 수복함에 따라 다시 고려의 영토가 되었으며, 이때 함주라 하고 지주사(知州事)를 두었다가 곧 만호부(萬戶府)로 고쳤다. 1369년에 함주목으로 승격되었다.

[조 선]

1416년(태종 16) 9월함주목을 다시 함흥부로 승격하여 함길도(咸吉道)의 관찰사영으로 삼고 토관(土官)을 설치하였다. 이때 함흥 지방을 중요시하여 영흥에서 관찰사영을 옮긴 것은 8년 전에 태조가 죽고 태종의 통치 체제가 확고해짐에 따라 출생지의 격을 높이기 위한 조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1432년(세종 14) 현재 호수 3,538호, 인구 8,913인, 간전(墾田) 2만7774결(수전은 150결)이고, 군사 체제는 소윤(少尹)이 함흥도중익병마단련부사(咸興道中翼兵馬團練副使)를 겸하며 군정(軍丁)은 익속군(翼屬軍) 660인, 강군(剛軍) 150인, 수성군 76인이 있었다.

1467년(세조 13) 5월 길주에서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 삽시간에 길주 이북을 점령하였고, 함흥에서도 같은 달에 이중화(李仲和)가 유향소를 동원하여 관찰사 신면(申㴐)을 죽이고 반란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이 반란은 같은 해 8월에 구성군 준(龜城君浚)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 토벌되었고, 이 때문에 1470년(성종 1)함흥부가 군으로 강등되고 관찰사영과 토관이 영흥으로부터 옮겨지면서 함길도를 영안도(永安道)로 고치게 되었다.

1509년(중종 4)에 다시 함흥부로 승격되고 관찰사영과 토관이 영흥으로 옮겨왔으며, 도명을 함경도로 고쳤다. 관원으로는 관찰사 1인, 윤(尹) 1인(관찰사가 겸함), 소윤 1인, 병마절도사 1인(관찰사가 겸함), 수군절도사 1인(관찰사가 겸함), 판관(判官) 1인, 교수 1인이 있었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 가토(加藤淸正)가 이끄는 왜군이 이해 6월 관북 땅으로 밀고 들어오자 병마사 한극함(韓克諴)이 마천령에서 이를 막으려다 패함으로써 단천·명천·길주·경성·회령 등이 삽시간에 함락되고 관북 지방이 모두 적군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다.

그러자 관북 지방의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는데, 정문부(鄭文孚)는 길주에서 크게 세력을 떨치고, 함흥에서는 유응수(柳應秀) 등 12인이 왜병과 싸워 큰 전과를 올렸으므로 난 후에 창의공신(彰義功臣)으로 표창하고 창의사에 봉사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에는 청군의 일부인 몽고병이 함경도를 거쳐 돌아갔기 때문에 함흥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1759년(영조 35) 방리는 주남(州南)·주동(州東)·동명(東溟)·퇴조(退潮)·보청(甫靑)·덕천(德川)·덕산(德山)·천원(川原)·주서(州西)·천서(川西)·조양(朝陽)·하조양(下朝陽)·기천(岐川)·운전(雲田)·삼평(三坪)·연포(連浦)·주지(朱地)·선덕(宣德)·주북(州北)·기곡(岐谷)·가평(加平)·원평(元平)·동원평(東元平)·고천(高遷)·동고천(東高遷)·영천(永川)·원천(元川) 등 27개 사(社)로 이루어졌으며, 호구 수는 1만 1708호 5만 9159인(남자 3만 3956인, 여자 2만 5203인), 전결은 한전(旱田) 5,913결 50부 8속, 수전(水田) 1,295결 95부 2속이었다(1666년 현재).

[근 대]

1895년(고종 32) 5월 지방관제를 개혁하여 종래의 도·목·부·군·현제를 폐지하고 부군제 즉 23부 337군을 설치하여 부에는 관찰사, 군에는 군수를 둘 때 함흥은 부로서 함흥·정평·영흥·고원·문천·덕원·안변·홍원·북청·이원·단천의 11개 군을 관할하였다.

그러나 부·군제는 곧 불합리한 점이 많이 발견되어 다음해 8월에 다시 전국을 13도 18부 1목 331군으로 개편할 때 함흥부는 함경남도에 속하여 관찰사청으로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와 1910년 10월 1일에 공포된 총독부 지방관제에 의하여 함흥부는 군으로 개편되었지만 계속 도청 소재지로서 함경남도의 행정 중심지가 되었다.

1914년 4월 1일 지방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함흥·홍원·장진군의 일부분이 신흥군(新興郡)으로 독립되었고, 홍원군의 서퇴조면이 함흥군에 편입됨으로써 20개 면으로 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월 2일 최순탁(崔淳鐸) 등이 주동이 되어 만세시위를 벌였는데,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하면 집회 횟수 7회, 집회 인원 1만 200명, 부상 52명, 피체자 5,385명이었다.

1931년 4월 1일 함흥부제 실시로 행정구역이 변경되어 북주동면(北州東面)의 일부를 함흥면에 편입하여 함흥부라 하고, 함흥군의 대부분이 함주군으로 되었다.

1937년 4월 1일 함흥부의 행정구역을 확장하여 함주군운남면의 풍호리와 사포리, 동천면의 용흥리·회상리·신흥리, 그리고 주북면의 서상리·풍호리가 각각 편입되었다.

인구는 1934년 4만 4612명(남자 2만 2090명, 여자 2만 2522명)이던 것이 1943년에는 12만2760명으로 급증하였다. 이것은 당시 조선이 일제의 대륙 전진기지 내지 병참 기지로 각광을 받게 되면서 함경남도에 대규모의 공장이 곳곳에 세워지고, 특히 흥남에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가 설립되어 동양 굴지의 공업도시로 발달하면서 인접지인 함흥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또 함흥에도 제사·주물·유리·고무·피혁·양주·장유 등 많은 공장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함흥은 관북의 행정 중심지였으나 교통이 불편하여 도시로서의 발달이 더디었다. 그러나 1914년경원선 개통에 이어 1928년에 함경선, 1936년에 평원선이 완공됨에 따라 원산·서울·평양 및 함경북도까지의 교통이 편리하게 되고 1933년에 함흥에서 장풍에 이르는 함남선이 개통되어 장진·신흥군 고지대와의 물자 반출입이 활발해졌다.

1929년에 부전강수력발전소가 완공되어 함남공업 지대의 원동력이 되었고, 1931년에는 성천강 제방의 개수 공사가 완공됨으로써 함흥평야의 홍수 범람을 막게 되었을 뿐 아니라 시가지의 방수 시설이 완비되어 시가지 건설도 계획적으로 실시할 수 있게 되어 근대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유물·유적

관북 지방 방위의 요충인 함흥성을 비롯하여 문소루(聞韶樓)가 있고, 시의 동쪽 설봉산(雪峰山)에는 31본사의 하나인 귀주사(歸州寺)가 경흥동에 있다.

또한, 조선 왕조의 발상지여서 경흥동에 정화릉(定和陵)·덕안릉(德安陵) 등 왕릉이 있고, 귀루동에는 조선 태조이성계(李成桂)가 태어난 곳이라 하여 경기전(慶基殿)이 유존하여 오고 있으며, 경흥동에는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살던 집 가운데 하나인 경흥전(慶興殿)이 있다.

그리고 행정상으로는 현재 흥남시에 속하여 있는 함흥본궁(咸興本宮)이 있다. 함흥본궁은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살던 곳으로 임진왜란 때 전소된 것을 1610년에 개수하였으며, 그 안에는 북한 측이 역사 박물관을 만들어 놓았다.

만세동에는 조선시대의 지방 행정 청사인 선화당(宣化堂)이 있으며 반룡동에는 함흥향교(咸興鄕校)와 부속 건물로 2층 다락집인 제월루(霽月樓)가 있다. 이 건물은 1600년(선조 33)에 창건되었고, 1832년(순조 32)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 지어졌다. 또한, 만세동선화당에 있던 창의사비(彰義祠碑)는 현재 함흥역사박물관 본궁 본관으로 이전, 전시되어 있다.

교육·문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반룡동에 함흥향교가 설립되어 많은 유생들의 교육을 담당하였으며, 지방에는 서당이 설립되어 한문을 전수하였다.

조선 중기 이후 향교의 교육 기능이 약화되고 서원이 설립되었는데, 1563년(명종 18) 공자 등을 배향한 문회서원(文會書院), 1667년(현종 8) 정몽주(鄭夢周)·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李珥) 등을 배향한 운전서원(雲田書院) 등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897년 함흥향교 내에 사립학교가 설립되어 이곳에 모인 학생을 외상생(外庠生)이라 부르다가, 1905년 사립풍흥학교라 하였다.

1909년 사립일신학교와 병합되었으며, 1918년 함흥고등보통학교라 하여 남자중학교의 효시가 되었고, 뒤에 함남중학교로 개칭되었다. 캐나다 장로교계통의 학교로 1903년 영생여학교가 설립되어 1923년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로 되었고, 1907년 영생고등보통학교가 세워졌다.

그 뒤 1910년 함흥농업학교, 1920년 함흥상업학교, 1922년 함남고등여학교, 1937년 함흥사범학교·함남상업학교, 1944년 함흥의학전문학교 등이 계속 설립되었다. 194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8개교, 중등학교 10개교, 전문학교 1개교가 있다.

종교 상황은 1894년부터 포교된 천주교가 가장 활발하여 1895년 운흥리에 성당이 건립되고, 1940년 함흥교구가 창설되었다. 개신교는 1898년 캐나다 장로교파에 의하여 전파되고,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사업에 힘썼다. 1945년 현재 불교 사찰 2개, 천주교 성당 1개, 개신교 교회 4개가 있다.

이 지역은 1925년 함흥체육회가 조직되면서 체육 활동이 더욱 활기를 띠었으며, 특히 축구와 씨름이 우세하였다. 이 고장의 설화로는 이성계에 관한 것이 많은데, 반룡산은 장차 임금이 될 이성계가 도사리고 앉았던 산이라고 해서 갖가지 전설과 설화가 얽혀 있다. 가운데 「치마대설화」와 「정화릉 연기설화」 등이 전한다.

「치마대설화」는 다음과 같다.

이 산의 중턱에 치마대라는 비석이 있는데, 이성계는 항상 여기에서 말타기와 활쏘기 등의 무술을 닦았다. 이곳에서 남쪽인 본궁 방면으로 활을 당기고는 말을 타고 달리는데 치마대에서 본궁까지 약 20리가 되는 거리를 말이 화살보다 먼저 달리면 말을 쓰다듬어 주고 화살보다 늦게 닿으면 말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

「정화릉 연기설화」는 다음과 같다. 이성계가 임금이 되기 전에 선친인 환조(桓祖)의 장지를 구하느라 고심할 때 두 선사가 지나가면서 하는 말이 “아랫자리는 장상(將相)이 나올 자리요, 윗자리는 왕후(王侯)가 날 터로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성계는 그들을 10여 리나 쫓아가서 붙잡고 애걸하여 지금의 정화릉의 자리를 잡았다. 그때의 두 선사는 나옹(懶翁)과 무학(無學)이었다고 한다.

민요로는 「애원성」이 대표적인데 다음과 같다. “우수 경칩에 대동강이 풀리고/정든 님 말씀에 요내 속이 풀린다/예 에 예 에/해는요 오늘도 보면 내일도 볼 것/임자는 오늘 보면 언제나 볼까/예 에 예 에/태산에 붙는 불은 만백성이 끄고/요내 속에 붙는 불은 어느 누가 끌까/예 에 예 에.”

또한 「함흥아리랑」은 다음과 같다. “문전옥답은 다 팔아 먹고/거러지 생활이 웬일이냐/양양의 길 같은 이내 몸도/내 짝 잃고서 이 꼴이라/십 리 길 멀다고 우는 임아/이 날이 지면은 어찌하리.” 그리고 목동들이 부르는 동요로는 「다람쥐요」가 있는데, “다람 다람 손 비벼라/참가람 물에 잇밥 주마/다람 다람 손 비벼라/참가람 물에 잇밥 주마.”와 같이 부른다.

버들피리를 꺾어 불며 부르는 「피리요」는 “피리야 피리야 늴늴 울어라/너의 아버지는 나무하러 갔다가/범의 앞에 물려서 죽어 버렸다/피리야 피리야 늴늴 울어라/너의 어머니는 소금밭에 갔다가/소금물에 빠져서 죽어 버렸다.”와 같다. 이 밖에도 「각씨요」·「널뛰기요」와 어린이들이 부르는 「집짓기」·「어깨동무」·「멱감는 노래」·「몸 말리는 노래」 등이 전한다.

민속놀이로는 예로부터 정월이 되면 횃불싸움·다리밟기·널뛰기 등의 놀이를 하였으며, 5월 단오에는 남자들은 씨름을 하고 여자는 그네뛰기를 한다.

정월 대보름에는 밝은 달에 큰절을 하고 동네 소년들은 모두 횃불을 켜들고 횃불놀이를 한다. 다리밟기는 예로부터 유명한데, 만세교에서 정월 보름날에 엿을 깨물며 자기의 나이만큼 다리를 왕복하면 장수한다고 해서 남녀노소 모두 밤을 새우며 밟는다. 이렇게 하면 일년 내내 다리도 아프지 않고 이도 튼튼해진다고 믿었다.

동제로는 토지제가 있는데 그 땅의 무사무궁함을 감사드리며 그 은혜에 보답하는 제이다. 밤에 마을 중앙에 임시로 제단을 만들어 지방을 써 붙이고 고축하는데, 제물은 생육을 마을 공동으로 준비하고 그 밖에 생선·나물·술·과일·밥·떡 등을 각 가정에서 준비한다.

제관은 마을에서 가장 연장자로 정하는데 연장자는 며칠 전부터 제관과 집사를 정하고, 제관과 집사는 3일 전부터 목욕재계하여 부정을 타지 않게 근신한다. 제가 끝나면 제사 음식은 각각 집에 가져가서 가족과 함께 먹는다.

산업·교통

성천강 유역을 중심으로 비옥한 함흥평야가 발달하여 논농사 위주의 농업이 이루어진다. 경지면적이 넓지 못하여 생산량은 적지만 단위 면적당 쌀의 생산량은 비교적 많은 편이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콩류·잡곡·채소 등이 있다. 또한, 과수 재배가 활발하여 사과를 비롯한 배·포도·복숭아 등이 생산된다. 공업은 식품·피혁·제사·주물·유리·고무·양조공업 등이 발달하였다.

한편, 이 시는 예로부터 물자의 집산지로 번영하여 우리 나라 3대 정기시로 유명하였다. 상설 시장으로는 영동의 함흥동방어채시장, 본동의 함흥서방어채시장, 황금동시장, 유락동시장 등이 열리며, 정기 시장으로는 성천동의 가축 시장, 복부동의 신탄 시장, 일출동의 신탄 시장 등이 모두 2·7일에 개시된다. 특히, 신탄 시장은 함주군 상기천면 오로리와 덕산면 일대에서 집산되는 땔감으로 성시를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이 상공업이 발달하게 된 주요인은 교통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는데, 이곳은 1922년 함남선, 1928년 함경선, 1933년 함흥∼흥남 간 산업 철도 등의 개통으로 교통의 요지를 이루고 있다.

이와 더불어 부전강·장진강 수력발전소와 연결되는 교통의 기점이며, 외항인 서호진과 부근의 흥남질소비료공장의 건설로 더욱 발전한 관북 제1의 문화도시이다.

교통은 함경선이 면의 서남부를 통과하며, 흥남선·신흥선·장진선 등과 연결되어 있다. 도로는 원산∼회령 간의 1등도로, 함흥∼황수원 간, 함흥∼서호진 간, 함흥∼자성 간의 2등도로, 함흥∼신상 간의 3등도로가 사방으로 뻗어 있으며, 함주군·흥남시·정평군 등과 연결되어 있어 편리한 편이다. 유물·유적으로는 함흥성지·귀주사·정화릉 등이 있으며, 주요 관광지로는 반룡산·만세교 등이 있다.

광복 후 변천

1954년 10월 함주군의 일부가 편입되었다. 1960년 10월 흥남시, 퇴조군(지금의 낙원군), 함주군의 일부 오로군(지금의 영광군)이 편입되면서 함흥직할시로 승격되었으며, 성천·반룡·회상·덕산·사포·본궁·용성·흥남·퇴조구역 등 9개 구역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동·리의 분할과 통폐합을 거쳐 시 행정구역을 조정하였다.

1970년 7월 다시 일반 시로 격하되면서 함경남도로 귀속되고, 덕산구역이 덕산군으로, 퇴조구역이 퇴조군으로 변경되었다. 1974년 1월 함주군의 일부와 덕산군이 회상구역에 편입되었으며, 본궁구역북」이 사포구역에 편입, 통합되었다. 1974년 8월 반룡구역을 동흥산구역으로 개칭하였다.

함경남도 중부 동해안에 있으며, 군의 북동쪽은 홍원군·낙원군, 북서쪽은 영광군, 남서쪽은 함주군, 북쪽은 신흥군과 접하여 있으며, 남쪽은 동해에 면하여 있다. 동경 127°29′∼127°47′, 북위 39°49′∼40°08′에 위치하며, 면적 360㎢, 인구 79만 6700여명이다.

행정구역은 6개 구역 103개 동 25개 이로 아래와 같다. 동흥산구역(東興山區域): 만세(萬歲)·운흥(雲興)1·운흥2·지장(至長)·반룡(盤龍)·해방(解放)·서운(瑞雲)1·서운2·서흥(西興)·새별·송흥(松興)·신상(新上)1·신상2·여위(余謂)·덕성(德城)·용마(龍馬)·서상(西上)·구흥(九興) 등 18개 동과 부민(富民)·풍호(豊湖)·유정(柳亭) 등 3개 이가 있다.

성천구역(城川區域); 서문(西門)·동문(東門)·중앙(中央)·금사(錦沙)·성천(城川)·통남(通南)1·통남2·삼일(三一)·남문(南門)1·남문2·광화(光華)·상신흥(上新興)·신흥(新興)1·신흥2·하신흥(下新興)·용흥(龍興)1·용흥2·연지(蓮池) 등 18개 동이 있다.

회상구역(會上區域): 이화(梨花)·치마(馳馬)1·치마2·치마3·회상(會上)1·회상2·회상3·회상4·평수(坪水)·경흥(慶興)·덕산(德山)·송흥(松興)·세거리·금실(金實)·정성·회양(會陽) 등 16개 동과 금사(金沙)·영봉(嶺峰)·풍흥(豊興)·풍경(豊京)·쌍봉(雙峰)·동흥(東興)·수동(水東)·중호(中湖)·대흥(大興)·광덕(光德)·성원(城元)·하덕(下德) 등 12개 이가 있다.

사포구역(沙浦區域) 사포1·사포2·사포3·당보(塘保)1·당보2·궁서(宮西)·상수(上水)·수변(水邊)·영호(營湖)·보전(保全)·흥덕(興德)1·흥덕2·흥덕3·흥덕4·영광·연못·은덕·소나무·용신(龍新)·본궁(本宮)1·본궁2·본궁3·흥서(興西)·용연(龍淵)·흥북(興北)·용흥(龍興) 등 26개 동과 초운(草雲)·연흥(蓮興)·창흥(昌興) 등 3개 이가 있다.

해안구역: 운중(雲中)1·운중2·운성(雲城)1·운성2·금빛·은빛·용성(龍城)1·용성2·용암(龍巖)·송흥(松興) 등 10개 동과 수도(水道)·풍동(豊東)·덕풍(德豊) 등 3개 이가 있다.

흥남구역(興南區域): 호남(湖南)·천기(天機)·응봉(鷹峰)1·응봉2·내호(內湖)·서호(西湖)1·서호2·후농(厚農)·작도(鵲島)·덕(德)·유정(柳亭)1·유정2·유정3·풍흥(豊興)·송상(松上) 등 15개 동과 하덕·마전(麻田)·새마을·능동(陵洞) 등 4개 이가 있다.

북부 및 동부 지역이 비교적 높으나 대부분의 지역은 평야와 낮은 구릉 지대로 되어 있다. 북쪽에는 박달봉(905m), 동쪽에는 함관령(463m), 장재부덕산(730m) 등이 솟아 있다.

시 중심부를 성천강과 그 지류인 호련천·수동천 등이 흐르며, 이들 하천의 퇴적작용과 해안의 융기작용으로 함흥시·함주군·정평군으로 이어지는 함흥평야가 이루어졌다.

해안선은 비교적 굴곡이 심하여 남쪽에는 함흥만과 감각이 형성되어 있으며, 앞바다에는 대진도·소진도 등의 섬돌이 산재해 있다. 기반암은 화강암이고, 토양은 갈색산림토가 대부분이며, 하천 일대는 충적토양으로 되어 있다.

기후는 연평균 기온 9.5℃, 1월 평균 기온 -5.1℃, 8월 평균 기온 22.8℃이며, 첫서리는 10월 하순경, 마감서리는 4월 중순에 내린다. 산림은 시 넓이의 65%이며, 주로 소나무와 참나무가 생장하고 있다.

이 시의 주산업은 부식물을 기본으로 하는 농산업과 과수업, 축산업 등으로 협동농장에 의한 교외농업이 발달하였다. 농경지 비율이 19.3%, 그중 논은 35.8%, 밭 41.9%, 과수 및 뽕밭이 19.4%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옥수수이며, 채소는 배추·무·가두배추 등이 주로 재배되고 있다. 과일은 약 80%가 사과이고, 다음이 복숭아·배이다.

축산은 주로 회상·흥남구역과 동부주요 에서 소·돼지·닭·오리 등이 사육되고 있으며, 대규모 닭공장에서는 육류와 알을 생산, 공급하고 있다.

서호항은 동해안의 중요한 어업 기지로서 서호수산사업소·은덕연안어업소와 여러 수산협동조합들이 있으며, 주로 명태·가자미·정어리·낙지·꽁치 등을 어획, 가공 처리하고 미역·다시마·섭조개를 양식한다.

한편, 북한 최대의 화학공업지구로서 시설용량 15㎾의 화력발전소가 건설되어 있으며, 풍부한 전력과 무연탄·석회석 등을 비롯하여 성천강의 용수를 공급받고 있다.

북한 제1의 비료 공장인 흥남비료연합기업소를 비롯하여 2.8비날론공장·본궁화학종합공장·흥서비료종합공장·성천강화학공장·동흥산화학일용품공장·회상화학일용품공장·함흥제약공장 등이 건설되어 있다.

또한, 이 지역은 비철금속 공업을 중심으로 공작 기계·일반기계·방직·섬유공업이 발달하였으며, 주요 공장으로는 흥남제련소·함흥강철공장·용성기계공장·함흥기계공장·함흥모방직공장·함흥제봉기공장·함흥씨리카트벽돌공장 등이 있다. 특히, 용성기계공장은 대단위 대상 설비 공장의 하나로서 산소 발생기·발전기·프레스·시추기 등 각종 설비 및 기계를 생산, 공급하고 있다. 그 밖에 육류·곡산·도자기·악기·신발·각종 일용품 공장이 있으며, 금융기관으로 중앙은행 함경남도 총지점이 있다.

교통망으로는 철도로 평라선(평양∼나진)이 지나고, 신흥선(함흥∼부전호)의 분기점이 된다. 도로망은 함경북도·평안남도·자강도·양강도·강원도 등의 도 소재지 및 중요 도시와 연결되고 있으며, 흥남항은 원산항·청진항과 함께 동해안 해상 교통의 중심지로 되어 있다.

명승지로는 동흥산구역에 동흥산과 본궁반송(북한 천연기념물 제252호)이 있으며, 해안가에는 마전유원지 관북십경의 하나인 구경대가 있다.

유물·유적으로는 1953년 호상동에서 청동기 시대의 유적이 발굴되었고, 1960년에 송해동에서 청동기 시대의 유적, 1964년 반룡산 치마동에서 역시 청동기 시대 유적, 1966년과 1967년에 이화동에서 청동기 시대의 주거지와 초기 철기 시대의 토광묘가 발굴되었다.

진흥왕순수비인 황초령비·마운령비가 함흥역사박물관과 함흥본궁에 보존되어 있다. 1416년(태종 16) 함경도관찰사가 세운 선화당과 태조이성계의 4대 조상의 제사를 지냈던 함흥본궁이 있다. 그 밖에 1600년(선조 33)에 건축한 제일루와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만세교(1930년 개축)·적구대·치마대 등이 있다.

주요 교육기관으로는 화학공업대학·수리동력대학·금야농업대학·고려약학대학·정성의학대학·최희숙교원대학·동흥교원대학·새날사범대학·김형권사범대학·기술사범대학·함흥공업대학·함흥전자계산기대학·함흥자동화대학·본궁공업대학 등의 대학이 있으며, 과학원 함흥분원·의약과학원·함흥결핵연구소·경공업과학원·함흥섬유연구소·산림과학원·함흥산림시험장·농업과학원 함흥분원 등의 연구기관이 있다

그 밖에 함흥대극장·함흥시립도서관·함흥역사박물관·함흥중앙공업 및 농업전람관·함흥동물원·함흥방송국·함흥경기장·흥남경기장 등의 문화시설들이 갖추어져 있다. → 낙원군

참고문헌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증보문헌비고』
『함경남도지』(함경남도지편찬위원회, 1968)
『이북5도30년사』(이북5도위원회, 1981)
『북한문화재실태와 현황』(문화공보부문화재관리국, 1981)
『인물의 고향』-북한편(중앙일보사, 1991)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93)
집필자
조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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