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문화재 ()

관경서품변상도
관경서품변상도
회화
개념
원산지를 떠나 다른 나라의 공공 기관 및 개인이 수장한 문화재.
내용 요약

해외문화재는 원산지를 떠나 다른 나라의 공공 기관 및 개인이 수장한 문화재이다. 주로 유럽·미국·일본·중국 등의 나라에 있으며,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민족학적 관점에서 수집해간 의류·생활용품·민속품류,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이후 한국에 체류한 외교관·군인 등 외국인들이 수집·반출해간 미술품류로 크게 나뉜다. 해외문화재는 본국의 문화를 외국에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과, 정상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약육강식의 국제정세 속에서 약탈되었다는 부정적인 측면이 동시에 존재한다.

정의
원산지를 떠나 다른 나라의 공공 기관 및 개인이 수장한 문화재.
내용

그 과정이 어떠했던 간에 자국(自國)을 떠나 이국(異國)에 있게 된 문화재에 관하여 사람들은 대체로 두 가지 견해를 갖고 있다.

그 하나는 외국 소재 문화재들이 본국의 문화를 외국에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들은 과거의 국제 정세 속에서 약육강식(弱肉强食)에 의해 약탈된 것들이므로 반드시 본국으로 돌아오도록 해야 한다는 부정적 견해이다.

일률적으로 모든 해외 소장품들을 후자(後者)와 같은 견해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러나 그 소장품을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 소장하게 되었는가를 면밀히 검토하여 정당하지 않을 경우 이에 대한 조치를 강구하는 것 역시 필요하다 할 것이다.

한국국제교류재단에서는 1986년부터 과거 여러 경로를 통하여 해외로 유출된 우리 나라의 문화재들이 어디에, 얼마나, 어떤 상태로 보관되어 있나 하는 현황을 파악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오고 있다.

그 결과 유럽, 미국, 일본 등지의 공공 박물관, 미술관, 대학박물관, 개인미술관, 또는 개인소장으로 되어 있는 무수한 문화재들의 소재가 파악되었고, 1999년 1월 현재 총 8권의 ≪해외소장 한국문화재 海外所藏韓國文化財≫라는 도록(圖錄)이 출간되었다.

유럽의 한국 문화재]

유럽인들의 동양문화·미술에 대한 관심은 일찍이 18세기 때 시노와즈리(Chinoiserie)라는 중국 바람이 불어 실내장식, 복식유행에까지 중국식으로 되어 있었고, 1878년 파리에서 열렸던 국제박람회 때에는 각양각색의 일본미술, 공예품 전시로 인해 유럽인들이 일본풍(日本風)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양의 세 나라 가운데 우리 나라는 대원군의 폐쇄정책으로 인하여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한반도를 여행한 소수의 유럽인들과 기독교 전도사들을 통하여 ‘은자의 나라(Hermit Kingdom)’로 일컬어질 정도로 유럽인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더욱이 1910년 한일합방으로 한국역사, 문화, 미술에 대한 유럽인들의 지식은 거의 전무(全無)하다 할 정도였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감안해 볼 때, 현재 유럽 여러 나라들의 박물관, 미술관의 한국소장품의 모체는 조선반도를 다녀간 여행자들, 잠깐 공무로 체류했던 관리들, 우리 나라에 파견되었던 성직자들이 모았던 유물들의 기증품이 대부분이며, 한일합방 이후에는 1930년대 동경의 이름난 골동상이었던 야마나카(山中)를 통해 사들인 고미술품이라고 하겠다.

유럽인들의 한국미술 인식의 전환점은 1961년 영국문화원 주체로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박물관(Victoria & Albert Museum)에서 열렸던 국보전이었다. 1984년 거의 25년 만에, 런던, 함부르크, 쾰른에서 열렸던 국보전은 독일과 영국인들의 한국미술에 대한 재인식을 심어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독일은 일찍부터 동양미술 전문가를 양성하기 시작하였는데, 서양대학에서는 제일 먼저 동양미술사를 미술사학과에서 강설한 나라로서 박물관의 가장 중요한 직책인 전문학예관을 미술사학과 함께 동양 3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나라로 부각하였다.

매년 어느 특정된 문화, 작가를 중심으로 특별전을 개최하는 잉겔하임(Ingelheim)에서는 1984년 ‘한국문화의 해’로 결정되어 여러 유럽미술관, 개인소장품 가운데 100점을 선정하여 유럽소장 한국미술품의 첫 공개전시회를 열었다.

1990년에 들어와 한국 정부지원으로 여러 박물관이 한국실을 이미 열었거나, 2000년에 개관될 예정으로 되어 있는 박물관은 파리의 기메박물관(Musee Guimet)과 런던의 대영박물관(British Museum)이며, 이 외에도 스톡홀름, 베를린 등에서도 열 계획이다.

또한 개인기업의 힘으로 개관된 한국실은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의 삼성갤러리와 캐임브리지대학의 휘쯔윌리암박물관( Fitzwilliam Museum)의 한국실은 현대기업의 기금으로 열린 것이다.

유럽 각 나라의 동양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한국고미술품의 연혁과 현재 상황을 중요 소장품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대영박물관

이 박물관에 들어온 첫번째 한국미술품은 1883년 영국 총영사로 조선에 부임했던 에슈톤(W.G.Ashton)이 1888년 증정한 신라토기로 시작되었다.

그는 일본 역사학자로 부임기간 동안 일본 조선을 왕래하여 상당수의 고서를 수집하였는데 그 후 일본서적은 캐임브리지대학에 팔고 한국고서는 1910∼1911년 성 페테스부르그(St. Petersburg)의 동양미술관으로 보냈다고 한다.

1888년에는 중국에서 영국영사로 일했던 토마스 와터즈(Thomas Watters) 씨가 조선백자투각연적을 기증하였는데 그의 기록으로 보아 조선시대 도자기는 매우 값싸게 구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19세기 말 오사카 일본 조폐국에서 일했던 윌리암 고우랜드(William Gowland)는 아마추어 발굴자로 조선을 자주 방문하고 부산 지방에서 재색토기가 많이 출토되었음을 알고 있었고 대영박물관의 오리형토기는 그가 증정한 것이다.

대영박물관의 한국고미술품 기증자들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이사벨라 버드(Isabella Bird:Mrs. Bishop)같은 여행자, 우리 나라에 와 있던 성공회 전도사였던 제임스 게일(James Gale) 등으로 조선왕조 말에 조선에 와서 살면서 한민족에 대한 관찰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하였다.

1911년에는 당대에 유명했던 골동상이며 동양미술품 소장가로 유명했던 조지 유모호포로스(George Eumorfopoulos)로부터 고려청자 33점을 기증받았다. 그는 1911년과 1930년 사이에 상당량의 한국유물을 대영박물관과 빅토리아 앤 앨버트박물관에 기증도 하고 팔기도 하였는데 조선불화, 불교금속공예품(정병), 신라금귀거리가 그의 손을 거쳐 갔으며 진사채당초문청자대접과 유학자 반신상(1922년에 구입)은 유모호포로스한테 구입한 것이다.

대영박물관의 진사채당초문청자대접과 유사한 또 하나의 진사채대접이 글라스코의 버렐박물관에 있다. 1950년대에 구입한 나전국당초문경함(螺鈿菊唐草文經函)(12세기 말)으로 국내에는 남아 있지 않은 중요한 고려시대의 유물이다.

1984년에 구입한 은자금니변상불설아미타경(銀字金泥變相佛說阿彌陀經)은 1341년 간지가 있고 유럽에서는 유일한 고려사경이다.

캐임브리지대학 휘쯔윌리엄박물관

옥스포드대학 박물관인 애쉬모리안(Ashmolean)박물관 다음으로 세번째 개관한 공립박물관으로 기증품이 늘어날수록 박물관도 확장되었다. 한국미술품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한국을 방문했던 것으로 알려진 변호사이자 사업가였던 윌리암 몬로 타프(William Monro Tapp, 1859∼1936)가 1920년에 한국도자기를 기증한 것이 시초이다. 그가 수집했던 한국민속품은 캐임브리지대학의 고고민속박물관에 기증되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기증자는 오스카 라파엘(Oscar Raphael, 1874∼1940)로 철화청자고려매병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중국 명나라 14세기 매병이라 생각하였다. 1953년에는 성공회 선교사로 한국에서 활약하던 스미스(StanleyT.Smith)의 한국도자기 기증이다.

그러나 휘쯔윌리엄박물관의 한국실을 가능하게 만든 기증자는 곰페르쯔(G.st.G.M.Gompertz)이다. 그는 신라토기 3점, 고려도자 95점, 조선도자 32점을 포함한 한국미술품 서적 등 152점을 1984년에 기증하였다. 곰페르쯔는 1927년 한국을 방문했던 것이 계기가 되어 여생을 한국미술 연구에 바치기로 결정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일본에 있으면서 후지오 고야마와 친분을 맺고 한국도자기를 모으기 시작 1951년 영국 귀국 때에는 약 40여 점의 고려청자를 모으고 있었고 귀국 후 동양도자회에 고려청자를 처음 공개했을 때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중국도자기에 많은 관심과 정열을 쏟고 있던 회원들에게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을 처음으로 경험하게 한 것이였다.

그의 연구는 ≪Korean celadon and other Wares of the Koryo Period(1963)≫, ≪Korean Pottery and Porcelain of the yi-period(1968)≫가 페버 앤드 페버(Faber and Faber) 출판사에서 출판됨으로 집대성되었다.

그는 한국어를 몰랐으나 일인학자들이 쓴 논문들을 정확히 번역시켜 자신의 연구에 지침이 되게 하였으며 정확한 것이 그의 학문의 장점이였다.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박물관

이 박물관은 명실공히 공예박물관으로써 조선가구, 조선나전함, 나전상자 등의 공예품과 더불어 한국도자기가 그 주류를 이루고 있다. 가장 주목되는 고대유물로써는 고려시대 석관으로 불행히도 뚜껑은 잃었지만, 내부에는 연화문이 외부에는 사면에 사신(四神)이 음각되어 있는 고려유물이다.

옥스포드대학의 애쉬몰리안박물관의 한국유물은 역시 도자기가 중심이고 뛰어난 조선도자기로서는 18세기 광주 본원산으로 추정되는 청화, 철화, 포도문백자항아리이다. 이 항아리는 말콤(K.R.Malcolm) 내외가 그들의 죽은 아들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1978년 애쉬몰리안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베를린 동양박물관

베를린시립박물관은 여러 개의 박물관이 종합되어 지구(地區)에 모여 있는데, 동양박물관은 이 종합박물관의 하나로 현재 건물은 1970년에 신축한 것이다. 동양미술 소장품의 95%가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멸한 것으로 보면 독일인들도 영국, 프랑스인들 못지 않게 동양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모았던 것이다.

삼국시대 고분출토 금귀걸리, 목걸이 한 벌이 모두 한꺼번에 왔으며, 제일 중요한 유물로는 고려지장시왕도이다. 일본 동경 세이카도(諍嘉堂)에 있는 지장시왕도와 대단히 유사한 도상이다.

쾰른 동양미술관

1913년 독일에서는 첫번째로 개관된 동양미술관으로 초대 관장으로 아돌프 휫셔(Adolf Fisher, 1857∼1914)가 취임하였다. 그는 부인과 함께 중국, 일본을 자주 여행하면서, 또한 북경 주재 독일대사관에 주재하면서 상당한 동양미술품을 모았다.

이들은 또한 1905년 한반도를 여행하며(그의 기록을 보면 경주까지는 가지를 못하고 금강산, 개성을 주로 여행했던 것 같음) 고려청자 60여 점과 청자편들을 모아 왔다.

순청자음각연화문매병, 운학무늬상감매병, 철화청자매병(3점), 음각참외무늬순청자주전자 등 뛰어난 고려청자들은 한반도에서 직접, 발굴되던 당시에 사 온 것이다.

비로자나삼존불과 아미타여래삼존불, 수월관음도는 모두 고려시대불화로서 모두 휫셔 부부가 동양을 여행할 때 사 온 것이라 생각한다. 이밖에도 봉황꽃무늬나전대모 복채흑칠함은 고려 말 조선 초의 화려하게 장식한 드문 칠기상자이다.

함부르크 미술공예박물관

1877년 ‘각국의 미술공예품을 감상하면서 독일인의 취향, 기호를 도모하며 공예품 발전에 이바지하는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동·서양의 고대부터 현대까지 미술, 공예품을 총망라하여 진열되어 있는데, 한국미술품은 고구려 옛 지역에서 출토했다는 금동안장구(金銅鞍裝具)와 신라고분출토 금귀거리 한쌍, 청자진사채(철화가 아님)연잎무늬표주박형주전자가 중요한 유물이다.

특히 진사채표주박형주전자는 뚜껑을 잃은 것이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대단히 비슷한 것이 워신턴의 프리어 갤러리 오브 아트(Freer Gallery of Art)에 있고(역시 뚜껑이 없음), 거의 똑같은 완전한 청자 동화연화문 표주박모양 주전자(국보, 1970년 지정)가 호암박물관에 있다. 동일한 청자가마에서 제작되었음이 분명하며 고려시대 도공들의 뛰어난 진사채 기술을 연구할 수 있는 귀한 작품이다.

앞에 설명한 대영박물관 진사채대접과 글라스코 버렐미술관의 비슷한 진사채 대접들은 국내에는 현존하지 않는 작품들로 고려청자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박물관 목록번호로 보아 금동안장구와 진사채청자주전자는 1910년 구입한 것이다.

함부르크 민속박물관

독일에는 브레멘과 함브르크에 유명한 민속박물관이 있는데, 특히 함부르크민속박물관에는 앞을 내다보는 프르너(Pruner) 관장이 1960년대 한국방문 때 무속관계 일체를 사 가지고 와서 한국무속신앙의 일면을 연구할 수 있는 좋은 자료로 남아 있다. 또한 유럽 여러 박물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19세기 말 <기산풍속도첩 箕山風俗圖帖>이 있다.

암스텔담 국립박물관

네덜란드는 17세기 때 이미 중국도자기를 사들였을 뿐만 아니라 동인도회사를 통하여 일찍부터 동양문물과 접할 수 있었다. 1932년 왕립박물관 내에 동양박물관이 개관되었는데 당시 동양미술담당자는 비세르(H.F.E.Visser, 1890∼1965)로 일본, 한국, 중국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다.

이때(1931년) 수집해 온 미술품은 70점이었는데 중국, 일본 것이 대부분이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1930년 10월∼12월에 일본 체류시에 상당한 양의 미술품을 싸게 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려시대 흑칠나전당초문경함(박물관등록번호 MAK178)은 아마 이때 일본에서 구한 것이라고 추측한다.

대영박물관 경함(經函)과 같은 제작소에서 동시대에 만든 것으로 보스톤 뮤지엄 오브 파인아트(Boston Museum of Fine Arts)에 있는 경함, 일본 소장품 가운데의 몇 점과 함께 국내에는 한 점도 없는 고려미술의 대단히 중요한 유물이다.

경함 밑부분을 연장시키고 상자보다 더 넓은 받침을 부쳐 놓았는데 밀봉(육각형) 무늬, 거미줄 무늬의 나전양식은 16∼17세기 일본식으로 임진왜란 때 가져간 것을 고친 것 같다.

또한 이 때 개조한 것으로 보이는 것은 경사진 뚜껑을 몸체에 붙이고 앞판을 잘라 여닫을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이 박에 청자상감국화문병 등 몇 점의 조선도자, 조선칠기상자 등은 네덜란드 동양미술소장의 개척자라 할 정도의 베스텐도르프(Westendorf) 씨가 1968년에 기증한 물건들이고 조선불화 아미타여래입상과 합장하고 있는 보살입상(박물관등록번호 MAK1300)은 혼디우스 크로네(Hondius Crone) 여사의 기증품이다.

덴마크 국립박물관

1650년경에 왕실소장품이 구성되었으나 이미 17, 18세기에는 세계 각국에서 들여온 진귀한 물건들이 많았는데 19세기 중엽 민속박물관이 되었으나 20세기 초에 덴마크국립박물관으로 발전하였다.

이 박물관에 처음으로 기증된 한국유물은 1850년에 네덜란드사람 모흐니케(Otto G.H.Mohnike, 1814∼1877)가 가지고 온 손잡이 부채였다. 아마 1848∼1854년 사이 일본에서 의사로 근무할 때 구입했던 물품인 모양이다.

1905년에는 함부르크의 골동상을 통하여 19세기 조선시대 풍속도 병풍을 구입하였다. 덴마크인들이 처음 조선왕국에 들어온 것은 1870년경이었으며 기술자들이 부산∼서울∼원산 간의 전신(電信)시설을 설치했을 때였다.

1889년 조선에서 세관일을 맡았던 오이센(Janus F. Oiesen, 1857∼1928) 씨는 한국어에 능숙했을 뿐만 아니라 고종황제로부터 훈장까지 받은 사람인데, 그가 1923년 덴마크 국립박물관에 기증한 기산풍속화첩(약 100여 장)은 한말에 서울에서 가져간 것이다.

극동주식회사의 하얼빈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야콥센(HenrikV.Jacobsen, 1887∼1955)으로부터 1918년 경성(서울)에서 샀다는 조선시대 고관 반신 초상화를 기증받았다.

1962년에 서울 스웨덴 병원에서 덴마크 의사로 일하고 있었던 카이 칼바크(Kai Kalbak)는 도자기, 금속공예, 가구, 의류, 악기, 종교 용구, 지도, 석불, 회화, 민화 등 무려 500여 점을 모아 가지고 왔는데 그림 80여 점은 스웨덴 스톡홀름의 동양미술관에 기증하고 그 나머지 모든 소장품은 덴마크국립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코펜하겐대학 한국학 교수였던 신휘동 박사(1935∼1985)는 덴마크국립박물관의 위촉을 받아 1970∼1980년 사이 상당수의 무속관계 물건들을 한국에서 수집해 왔다. 현재 박물관 안의 사랑방 건물은 한국의 건축기사가 와서 지은 것으로 1966년 한국정부의 선물이다.

스톡홀름 동양박물관

유럽의 여러 나라들처럼 스웨덴이 극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중국자기를 통해서였고 20세기 초기에는 중앙아시아 탐험가이며, 고고학자 헤딘(SVen Hedin, 1865∼1952), 고대중국어의 대학자였던 베른하르드 칼그렌(Bernhard Karlgren, 1889∼1978), 중국 미술사학자 오스발드 시렌(Osvald Siren, 1879∼1966) 등 동양학의 선구자들이며 대학자들을 배출하고 그 전통을 세운 나라이다.

특히 구스타브 아돌프왕(King Gustar Adolf. 1882∼1973)은 젊은 태자시절부터 중국문화에 심취하여 중국 고고학 전공자가 되었는데 1926년 중국, 한국, 일본을 방문하며 고대유적지를 답사하였다.

이 때 우리 나라 경주에 와서 서봉총발굴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여 이 고분의 첫 이름인 서(瑞)는 서전(瑞田, 스웨덴)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그의 소장품을 모두 동양박물관에 기증했는데 신라토기(잔, 고배, 작은병, 골호 등), 통일신라 소금동불들은 그 때 모은 것이라 한다.

1987∼1988년 사이에 앞서 말한 덴마크 의사인 칼바크의 회화, 민화 소장품이 동양박물관에 기증되었는데 소나무와 호랑이, 표범과 까치 등 격조 높은 도화서 화공의 그림들과 겸재 정선의 산수도, 채용신의 초상화 등 유럽 한국 소장품 가운데에서 회화로서는 가장 주목해 볼 만한 박물관이다.

프라하 나프스테크박물관

이 박물관은 국립박물관에 속해 있는 동양, 아프리카, 미국박물관으로 1932년 발족되었다. 근대 중국 회화, 일본 미술, 한국 도자기, 가구를 포함한 동양실은 1952년에 개관되었다.

4만여 점의 동양 유물 중에 일본 것만 따져도 1만8천여 점인데, 한복, 칠기, 금속공예, 고려청자, 탈(가면), 악기, 현대수묵화를 합친 한국 미술 민속품은 불과 500여 점에 다다르지 못한 실정이다.

그래도 이 유물 가운데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작품은 대모로 장식을 밝고 화려하게 나전으로 장식한 붉은칠이층장인데 한말 귀부인용으로 만들었던 것이며, “禮賓朹田(예빈구전)”이란 명문이 박혀 있는 인화분청대접, 고려시대 금동금강저, 요령 등이 있다.

미국의 한국 문화재]

1999년에 출판된 ≪해외소장 한국문화재 海外所藏韓國文化財≫라는 도록(圖錄) 중 제1권과 제5권이 미국편이며, 이 두 권에 총 21군데의 한국 문화재 소장 실태가 보고되었다.

제1권에는 ① 뉴아크미술관(Newark Museum, Newark, N.J.), ② 메트로폴리탄미술관(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N.Y.), ③ 미네소타미술관(Minnesota Museum of Art) ④ 미네소타주립대부속미술관(University of Minnesota Museum, St.Paul, Minn.).

⑤ 버밍햄미술관(Birmingham Museum of Art, Birmingham, Alabama), ⑥ 보스톤미술관(Museum of Fine Arts, Boston Boston, Mass.), ⑦ 부르클린박물관(Brooklyn Museum, Brooklyn, N.Y.), ⑧ 샌프란시스코아세아미술관(Asian Art Museum of San Francisco, San Francisco, Calif.).

⑨ 피바디에섹스박물관(Peabody Essex Museum, Salem, Mass.), ⑩ 스미소니언소속 국립자연사박물관(National Museum of Natural History, Smithsonian Institution, Washington, D.C.).

⑪ 인디애나폴리스미술관(Indianapolis Museum of Art, Indianapolis, Indiana), ⑫ 하바드대학 부속동양미술관인 쌔클러미술관[Sackler Museum of Art ( 전의 Fogg Art Museum of Harvard University로부터 분리되었음 ) Cambridge Mass.].

⑬ 호놀룰루미술관 (Honolulu Academy of Arts, Honolulu, Hawaii), ⑭ 스미소니언의 후리어갤러리(Freer Gallery of the Smithsonian Institution, Washington, D.C.), ⑮ 데이톤미술관(Dayton Art Institute, Dayton, Ohio).

⑯ 비숍박물관(Bishop Museum, Honolulu, Hawaii), ⑰ 월터즈미술관(Walters Art Gallery, Baltimore, Maryland), ⑱ 로드아일랜드 디자인학교 부속미술관(Museum of Art, Rhode Island School of Design, Providence, Rhode Island), ⑲ 개인 수장가 로버트 무어(Robert Moore Collection, Los Angeles, Calif.)의 소장품을 도판과 함께 수록하였다.

제5권에는 호놀룰루 미술관의 속편과 ⑳ 클리브랜드미술관(Cleveland Museum of Art, Cleveland, Ohio), ㉑ 시카고미술관(Art Institute of Chicago, Chicago, Illinois), 그리고 ㉒ 시애틀동양미술관(Seattle Asian Art Museum, Seattle, Washington) 등의 한국 문화재들을 수록하였다.

위에 열거한 여러 박물관이나 미술관 중 영구적으로 한국 미술품만을 전시하도록 마련된 전시실이 있는 곳은 현재 뉴아크박물관, 부르클린박물관,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보스톤미술관, 샌프란시스코아세아미술관, 시애틀아세아미술관, 피바디에섹스박물관, 데이톤미술관, 후리어미술관 등이다. 위에 열거되지 않은 미술관 중 한국 소장품이 얼마간이라도 있는 곳이 여러 군데 더 있어 앞으로 좀 더 광범위한 조사가 요망된다.

최근에 한국 전시실을 새로 마련한 포틀랜드미술관(Portland Art Museum, Portland, Oregon), 로스앤젤레스미술관(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 Los Angeles, Calif.)과 미니애아폴리스미술관(Minneapolis Institute of Art, Minneapolis, Minnesota) 등이 있다. 또한 뉴욕의 아세아협회미술관(Asia Society Gallery)에는 한국 미술품을 상설로 전시하지 않으나 록펠러(J.D.,Rockefeller) 소장의 상당히 수준 높은 작품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이들 이외에도 중국, 일본 등 동양미술품이 조금이라도 수장되어 있는 박물관에는 대개한국 미술품들이 섞여 있어, 앞으로 이들을 모두 조사한다면 미국 내에 흩어져 있는 우리 문화재의 양이 상당히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들 문화재를 우선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 보면 첫째, 민족학적(ethnological)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의류나 기타 생활용품과 민속품, 둘째, 미술사의 대상이 되는 회화(繪畵), 조각(彫刻), 도자기(陶磁器), 기타 공예품(工藝品) 등의 미술품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목기(木器), 칠기(漆器), 직물(織物) 등 기타 공예품이나 도자기 중 이 두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것도 있다.

수량으로 보면 도자기가 전체 문화재의 반 이상을 차지하여 단일 항목으로는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다. 제일 적은 수의 물품은 불교 조각품이고 그 다음으로는 회화작품이다. 회화작품들을 다시 일반 회화, 불화(佛畵), 민화(民畵)로 구분하여 본다면 아마 민화가 가장 많을 것이다.

공예품 중에는 각종 민속품들이 모두 포함되어 그 숫자는 많으나 좁은 의미의 문화재로서의 가치는 그리 높지는 않다.

미국 내의 우리 문화재 유입 시기는 대개 19세기 말기부터 20세기 전반기, 특히 6·25전쟁(1950∼1953) 직후라고 생각된다.

1960년대에 제정되어 필요에 따라 여러 번 개정된 현행 문화재보호법에 의하면 국보나 시, 도 지정 문화재가 아니라도 동산(動産) 문화재의 국외 반출에는 반드시 당국의 허가를 받도록 되어있으므로 근래에는 대규모 문화재의 해외 유출은 없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그 밖에는 일본으로 유출되었던 문화재들이 미술상들을 통해 미국 등 외부의 수장가들에게 팔려간 경우를 생각할 수 있으며 이 경우 원래 한국으로부터의 유출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다.

6·25전쟁 당시 종군했던 사람들이나 외교사절로 한국에 근무했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한국 미술품을 수집하여 본국으로 가져간 것도 현재 미국에 있는 우리 문화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이들 중 그 후손들이 근래에 세계 유수 도시들에 매장을 가지고 있는 소더비(Sotheby’s)나 크리스티(Christie’s) 경매장을 통하여 물품을 처분하는 예가 많아 그 중 일부는 국내로 다시 들어오기도 하였다.

시기별, 소장처별로 그 특징을 보면, 19세기 말기부터 20세기 초기에 유출된 것들은 주로 의상이나 기타 생활용품들로 민족학적 가치가 높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현상은 당시의 서구(西歐) 학자들의 미술사 내지 문화사에 대한 일반적 태도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즉, 그들은 유럽의 미술품들만을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미술사의 연구 대상으로 간주하였으며, 고대 이집트와 중동(中東)지역의 미술은 이미 사문화(死文化)인 고고학적 연구대상으로, 그리고 한국을 포함한 기타 다른 민족의 ‘문화재’는 단지 민족학(ethnology)의 연구대상으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유럽의 유명한 민족학박물관(ethnological museum)들이나 미국의 피바디에섹스박물관과 스미소니언의 자연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다수의 문화재들이 이런 관점에서 수집된 유물들로 크게는 민속품의 범주에 속한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이후에는 ‘미술품’이라고 구분할 수 있는 문화재들은 한국에 체류했던 외교관, 군인 등 외국인들에 의해 수집, 반출된 경향을 볼 수 있다.

피바디에섹스 박물관의 경우 1882년부터 1924년까지 그 박물관의 관장으로 재직했던 에드와드 모스(Edward Morse)라는 인물의 집중적인 노력에 의해 약 5,000점의 유물들이 수집되었다.

19세기 말기의 우리 나라는 쇄국정책으로 인하여 문화나 생활상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문호개방과 더불어 외국인들의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 박물관의 소장품은 특히 1883년 미국을 방문한 우리 나라 최초의 외교사절단인 보빙사(報聘使) 일행 중 한 사람이자 우리 나라 최초의 국비(國費) 미국유학생 유길준(兪吉濬)의 유품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 의의가 깊다.

이 박물관에는 또한 당시 조선 사절단을 동행했고, ≪Chosun:The Land of Morning Calm≫(1886) 이란 책을 써서 우리 나라를 미국에 소개한 로웰(Percival Lowel)이 수집한 악기류, 고종시대의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通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협력관 겸 총세무사(總稅務士)였던 독일인 묄렌도르프(Möllendorff) 백작이 수집한 225점, 최초의 주한 미국대사였던 에드와드 모르간(EdwardV.Morgan)의 자손이 기증한 50점 등 그 유입 경로가 확실한 물품들이 많이 있다.

스미소니언의 자연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약 2,000여 점의 유품들은 1884년 해병 대위 버나도(Ensign J.B. Bernadou)가 미국 정부의 지시를 받고 우리 나라에 와서 수집해 간 당시의 의상 및 공예품 등 일상 생활용품들이 대부분을 이룬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주한 미국대사관의 문정관을 지냈던 헨더슨(Gregory Henderson)은 삼국시대 토기, 고려 청자 등 다수의 수준 높은 도자기들을 수집했는데 그의 사후(死後) 그의 부인이 이들을 하버드대학 부속 동양미술관인 새클러미술관(Sackler Museum)에 일괄 매각하였다.

미국의 개인 미술상 겸 수장가인 무어씨의 소장품은 최근에 로스앤젤레스미술관(L.A. County Museum)으로 일괄 매각되었다. 이 소장품은 회화, 불교조각, 도자기, 목기, 금속 공예품, 민화, 기타 민속품 등 다양하며 그 중에는 상당히 수준 높은 미술품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한국미술 소장품은 약 400여 점에 지나지 않으나 그 중에는 국내에도 드문 고려시대 불화가 4점이 있고 고려시대의 나전칠기(螺鈿漆器) 등 몇 점의 귀중한 문화재가 포함되어 있다.

후리어갤러리, 보스톤미술관, 시카고미술관 등의 소장품은 도자기가 그 주류를 이루어 전시도 대개 도자기를 중심으로 되어 있다. 시카고미술관에는 또한 조선시대 후기의 대형 불화가 몇 점 소장되어 있는 것이 볼 만하다.

클리브랜드미술관은 금동 불상, 불화, 일반회화, 도자기 등을 비교적 균형있게 소장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오랜 동안 이 미술관에 재직했던 셔먼 리(Sherman Lee) 박사의 독특한 동양미술 비교론적 관점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 미술관의 전시 특징은 동일 시대 여러 지역의 미술 양식을 비교 고찰 할 수 있도록, 예를 들어 인도, 중국, 한국의 어느 특정 시대의 불교 조각을 같은 장소에 진열하여 상호 관련성을 그 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해외 소장 우리 문화재를 통하여 우리 문화의 이해를 증진시키고, 나아가서는 국가적 이미지를 제고(提高)시키기 위해 이들을 적절히 활용하는 방법도 신중하고 다각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각 미술관에 한국 미술을 제대로 연구하고 교육, 전시를 담당할 전문 인력을 확보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이다. 국제적 수준의 한국미술사 전문 연구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 시점에서는 이 부분에도 장기적인 안목으로 국가적 차원의 지원이 절실히 요구된다.

또한 미국 내의 주요 미술관 소장품의 양적 팽창보다는 질적 향상을 도모하도록 유도하는 것도 필수적인 일이다. 미국의 모든 미술관에서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크게 부족한 것은 일반 회화와 불교 조각품이다.

현재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샌프란시스코아세아미술관, 로스앤젤레스미술관 등 여러 미술관들에서는 국립박물관이나 호암미술관 같이 큰 규모의 사립박물관으로부터 장기(長期) 대여 형식으로 그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고 있다.

결국 이들 미술관이 단계적으로 이 부분을 보충해 나갈 것이지만 현재 세계 미술시장에서 일반적으로 한국미술품의 가격이 지나치게 높게 책정되어 있는 경향이므로 단시일 내에 해결될 문제는 아닐 것이다.

우리 문화의 국제적 전파를 위해서는 국내의 개인 수장가들이 국제적인 경매에서 서로 경쟁하여 가격 상승을 부추기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하다. 또한 우리 문화유산은 반드시 우리 나라에 돌아와야 된다는 폐쇄적인 사고방식도 지양해야 할 것이다.

어느 나라의 문화재를 막론하고 이들이 인류 공동의 문화 유산이라는 기본 개념에 입각하여 미국 도처에 흩어져 있는 개인 소장 문화재들이 되도록 공공 기관에 모여 더 많은 사람들이 그 혜택을 볼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일본의 한국 문화재]

현대적 의미의 유형문화재가 일본에 전해진 최초의 기록은 관견(管見)에 의하면 ≪일본서기 日本書紀≫에 보이는 372년 백제가 보낸 칠지도(七支刀)이고, 종교미술품으로는 538년 역시 백제가 긴메이(鈂明) 천황에게 보낸 불상일 것이다.

그 후 한국과 일본은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것만으로도 서로 원하던 그렇지 않던 상호간에 적지 않은 역사적 사건들을 공유할 수밖에 없었으며, 우리의 의식 속에 강하게 각인된 왜구, 임진왜란, 그리고 식민지라는 단어 역시 그 가운데 일부인 것이다.

우리의 문화재는 그러한 역사의 소용돌이 과정에서 이 땅을 떠나게 된 것이 대부분으로 짐작되며, 그 수량 또한 헤아리기 어려울 것으로 짐작된다. 실체가 완벽하게 조사된 것은 아니겠지만 문화재청이 파악한 해외유출 한국문화재는 1999년 8월 현재 7만여 점인데 그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3만3,000여 점이 일본에 있다고 한다.

이는 곧, 해외소장 문화재라 하면 질과 양에서 압도적으로 앞서 있는 일본이 연상되며, 곧 일본의 현황을 파악하지 않고서는 해외에서의 한국문화재 소장 상황을 이야기할 수조차 없는 형편이다.

우리 나라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기관으로 잘 알려진 곳은 현재 동경국립미술관에 있는 오구라(小倉)컬렉션, 그리고 아타카(安宅)컬렉션의 오사카동양도자박물관을 비롯하여 동경의 일본민예관, 나라(奈良)의 네이라쿠(寧樂)미술관, 교토의 고려미술관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밖에 동경의 네즈(根津)미술관, 오오쿠라 집고관(集古館), 이데미쯔(出光)미술관, 나라의 야마토(大華)문화관 등 고미술품을 다루고 있는 박물관, 미술관 가운데 한국미술품을 어느 점도 가지고 있지 않은 곳은 거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일본의 한국문화재는 이들 공공의 박물관, 미술관보다는 개인, 또는 사원 등에 수장되어 있는 것이 훨씬 많을 것으로 보이며, 이는 또한 공개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실제 그 실체의 파악조차 되고 있지 않은 형편이다.

예를 들자면 일본에 있는 고려불화는 1980년대 초반까지도 불과 60여 점 정도밖에 알려져 있지 않았었다. 그러나 불과 10여 년이 지난 현재는 100여 점의 존재가 확인되었으며, 불교조각의 경우는 더욱 심하여, 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고려시대 불상은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이 없는 반면에 서일본 지역의 사원과 개인 등이 가지고 있는 것은 어림잡아도 30여 점에 이르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굳이 불교미술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며, 일반회화, 특히 도자기류를 비롯한 공예품의 경우는 이보다 더욱 심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공식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일본의 한국문화재 수량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비교적 많은 한국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대표적 기관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그 실상을 짐작하는 단서로 삼고자 한다.

오구라컬렉션

동경국립박물관 입구를 들어서면 정면에 본관이 있고 오른쪽에는 동양관, 왼쪽에는 표경관(表慶館)이 있으며, 본관과 표경관의 뒷쪽으로 최근 새로 지은 평성관(平成館)과 법륭사 보물관이 깨끗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동양관의 중국실, 서아시아실을 지나 3층에 해당하는 곳에 이르면, 한국미술을 전시하고 있는 조선고고·미술실이 있다. 이 전시실을 채우고 있는 고고·미술품이 곧 오구라컬렉션이다.

오구라컬렉션은 오구라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 씨가 오랜 세월에 걸쳐 모은 고고·미술품을 총칭하는 말이다. 오구라씨는 식민지였던 한국에서 상당 규모의 전기회사를 운영하면서 1921년부터 본격적으로 한국문화재를 수집하기 시작하여, 이후 30여 년간 계속하였다 한다.

오구라 씨는 처음에는 그저 취미 삼아 모았으나 특히 일본 고고품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한 후로는 상당히 체계적으로 수집하였다고 한다.

이는 현재 1,100여 점의 문화재 가운데 고고품이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중요문화재가 8점이나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이를 입증하여 주고 있다.

그 밖에도 회화, 조각, 공예 등 다양한데 그 가운데에서도 백제작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반가사유상은 한국조각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며, 국내에서도 보기 힘든 신장상도 수 점 수장되어 있다.

오구라 씨는 미술품이 모아지는 대로 일본으로 가져갔으나 일부는 한국에 둔 채 해방을 맞이하여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한다.

그 이후에도 오구라 씨는 한국관련 문화재의 수집을 계속하면서 그것의 보존을 위하여 재단을 설립(1958년)하기도 하였으나, 우여곡절을 겪은 뒤에 국가에 기증하기에 이르렀다.

오구라 씨는 한국의 풍토와 역사에 관심이 많았고 한국문화에 대하여 높게 평가하였으며, 많은 문화재들이 한국 땅을 떠나는 것을 보고 어떻게든지 유출을 막아보자는 의도로 수집을 시작하였다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결과적으로는 한국문화재를 가장 많이 유출시킨 장본인이 되었으며, 또한 이 컬렉션은 1960년대 일본에 있는 한국문화재 귀환운동이 있었을 때 제일 먼저 거론이 되기도 하였다.

동양도자미술관

오사카의 나카야마에 위치한 동양도자미술관은 아타카에이이찌(安宅英一) 씨의 수집품이 모체를 이룬 아타카컬렉션을 위하여 오사카 시가 세운 도자 전문 미술관이다.

이미 메이지, 다이쇼우(大正) 때부터 아타카 씨는 철저하게 미적, 정신적 기준을 설정하여 주로 한국도자기를 집중적으로 수집하였다 한다.

현재 이 미술관이 수장하고 있는 작품 수는 약 1,000점 정도이나 그 가운데 우리 나라 도자기가 800점 정도에 이르고 있으며, “차그릇 이 외의 작품을 거의 집대성하였다.”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어느 만큼, 우리 도자기 수집에 심혈을 기울였을까가 짐작이 된다.

아타카콜렉션의 관리 주체였던 구아타가산업주식회사(舊安宅産業株式會社)는 1975년 경영위기에 빠지자 컬렉션의 일부를 매각하였고, 이를 계기로 컬렉션의 중심을 이루는 도자기류의 행방에 관하여 사회적 관심이 쏠리게 되었다.

국회에서까지 문제가 되었으며, 마침내 담당기관인 문화청으로부터 컬렉션을 분산, 또는 해외에 유출시키지 말라는 이례적인 지시가 내려지기도 하였다.

결국, 1980년 3월 채권단은 아타카컬렉션을 수장, 전시할 미술관을 건설한다는 조건으로 오사카 시에 기증하였고, 1982년 11월 미술관이 완성, 오늘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앞서 언급하였지만, 미술관 수장품은 ‘동양’이라기 보다는 ‘한국’이 어울릴 만큼 거의 대부분이 한국도자기인데, 통일신라시대 4건, 고려시대가 304건, 조선왕조시대가 485건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기형과 기법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최상의 질로 평가되는 우수한 작품들이며, 국내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한 것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한편 일본의 개인 컬렉션 가운데 도자기에 관한 한 최고의 질과 양을 자랑하던 재일동포 이병창 씨는 1999년 수집품 모두를 이 미술관에 기증하여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어찌되었든 그로 인하여 동양도자미술관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 유수의 한국 도자 전문 미술관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굳힌 것으로 보인다.

일본민예관

동경에 있는 일본민예관은 1936년 10월 개관된 유수의 민예전문 박물관이다. 이 민예관은 다양한 미(美)의 형태 가운데 건강한 생명력을 지닌 것이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이라는 의식 아래, 그러한 아름다움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 바로 민간 생활 속에 사용되는 각종의 공예품들이라고 확신했던 야나기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를 중심으로 한 민예가들이 기획하고 실업가인 오오하라(大原孫三郞) 씨의 경제적 뒷받침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야나기무네요시는 ≪조선과 그 예술≫을 비롯한 많은 한국미술에 관한 글들을 발표한 민예운동의 창안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이 민예관은 지금도 야나기의 민예이론인, 실제 사용되는 공예품은 그 자체가 건강한 무기교(無技巧)의 미를 지니고 있으며, 비록 실사용품이 아닌 미술품이라 하여도 그러한 요소를 지닌 것이라면 같은 종류의 범주에 넣는다는 방침아래 수집, 전시하고 있다.

민예관의 총 수장품은 약 1만여 점 정도이며, 그 가운데 한국유물이 약 1,500점 정도이며, 한국의 공예품만을 상설 전시하는 특별 전시실을 마련하고 있을 만큼, 민예관에서 차지하는 한국미술품의 비중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500여 점의 한국문화재는 회화류가 210여 점, 도자기류가 650여 점, 공예품이 510여 점이며 기타가 100여 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회화는 민화류(民畵類)가 중심을 이루는데, 한결같이 대담함과 자유분방함이 엿보이는 민예적 성격이 강한 것들이다. 물론 강세항, 김수철, 이암 등과 같은 조선시대 대표적 화가들의 작품도 포함되어 있다.

도자기류는 고려도자(90여 점)를 제외하고는 조선시대 후기의 것들이 대부분인데, 15세기 후반의 분청사기, 18세기의 청백색 백자항아리와 제기(祭器)들, 그리고 다양한 기형과 용도의 18세기 청화백자 등 주목을 끄는 작품들이 적지 않으며, 이들은 조선시대 도자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될 수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목공예는 모두 320여 점인데, 이들은 종류도 다양할 뿐 아니라 지역적으로도 전국을 망라한 것으로 거의 완벽하게 구색을 갖추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네이라쿠미술관

네이라쿠미술관은 1975년 명승으로 지정된 의수원(依水園)이라는 정원 안에 자리잡고 있다. 의수원의 동쪽은 동대사(東大寺)와 맞닿아 있으며, 남쪽에는 도로를 끼고 나라국립박물관이 있는 나라에서도 역사, 문화, 자연환경에서 최고로 꼽히는 지역이다.

이 미술관은 1940년 나카무라준사쿠(中村準策)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현재는 그의 손자인 나카무라준스케(中村準佑)씨가 관장을 맡고 있다.

나카무라준사쿠 씨는 식민지시대 부산 항만 준설 사업을 맡았던 토목회사를 운영했으며, 주로 한국과 중국의 유물들을 수집하였다 한다.

태평양전쟁중 공습 등으로 일부 소장품을 잃기는 하였으나 중국미술품은 은대(殷代)에서 한대(漢代)에 이르는 기간의 고대 청도기류 200여 점을 포함하여 2,000여 점에 이르고 있으며, 우리 나라 미술품은 고려도자를 중심으로 300여 점이 소장되어 있다. 이들 고려도자들은 말할 것도 없이 한점 한점이 명품이며, 시기적으로나 기형이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다.

현재의 아담한 단층의 미술관 건물은 1969년 세워졌는데, 나카무라준사쿠 씨가 자국민에게 이웃나라의 문화를 소개하고 싶었다는 수집 동기에 상당히 부응하고 있는 듯, 관람객이 적지 않으며, 전시기획도 상당히 짜임새가 있는 미술관이다.

고려미술관

교토의 북구, 조용한 주택가에 자리잡고 있는 고려미술관은 지하 1층, 지상 3층의 연면적 137평의 자그마한 규모로, 1988년 10월 25일 개관하였다. 이 미술관은 국내외의 어느 미술관, 박물관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의미와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이 미술관을 설립한 정조문(鄭詔文, 1918∼1989) 씨는 6세 때인 1924년 부모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온 후 온갖 고생 끝에 사업가로 성공,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고국의 미술품 수집을 시작하였다 한다.

정조문씨는 그후 수없는 어려움을 극복하여 가며 수집활동을 계속하여 30여 년간 1,680점 정도를 모았고, 마침내 그 결실로 미술관을 계획, 개관하였던 것이다.

고려미술관은 첫째, 일본은 물론 국외에 건립된 해외동포에 의한 최초이자 유일한 미술관이며, 둘째는 일본의 박물관, 미술관의 한국미술 수장품들이 식민지시대와 그 전후에 한국에서 취득한 것이 대부분인데 비하여, 이곳의 수장품은 모두 일본 내에서 수집한 것뿐이다. 세째는, 한국미술품만을 수집, 전시하는 일본 내 유일한 한국미술 전문기관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리고이치(森浩一), 하야시야다츠사부로(林屋辰三郞), 이노우에미츠사타(井上光貞) 그리고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 등 일본의 각 분야의 최고 권위자들이 수집은 물론 미술관 건립에도 적극 후원을 하였다는 것으로, 지금도 일본 역사학계의 태두인 아리미츠고이치(有光敎一) 박사가 부설 연구소 소장을 맡아 줄 만큼 학계와 관련이 깊다.

고려미술관은 역경을 딛고 세워졌다는 극적인 성립과정만큼이나 소장 유물들도 각종의 회화, 조각, 공예와 민속품 등 주목을 끌 만큼 중요한 것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특히 도자기류는 질적으로 매우 뛰어나다고 정평이 나 있다.

망향의 염(念)으로 한국문화재수집을 시작한 정조문 씨는 일본 속에 잠들고 있는 우리 문화를 찾고 널리 알리고 한민족의 문화적 자긍심을 펼쳐 보이기 위하여 미술관의 이름을 ‘高麗(고려)’라 지었다 한다.

그는 개관을 위하여 온 힘을 다하였고 그 때문이었는지 애석하게도 더 이상 뜻을 펴지 못하고, 개관 후 6개월 여 남짓에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우리 모두 그의 뜻을 높이 사고, 마음으로나마 미술관의 설립취지대로 발전할 수 있도록 기원해야 할 것이다.

이 밖에도 앞서 언급하였듯이 한국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곳은 적지 않은데 그 가운데에서도 주목되는 미술관은 나라(奈良)의 야마토(大和)문화관이다.

야마토문화관은 도자기류, 회화류, 특히 고려불화를 세 점이나 소장하고 있는 유수의 사립미술관인데, 특히 한국미술 관련 전시회가 자주 열리는 곳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高麗佛畵(고려불화)’라는 주제의 국내외 최초의 전시회(1978년)를 열기도 하였고, 그 이후로도 근년의 이조회화특별전(1996년 8월)에 이르기까지 회화, 조각, 공예 등 각 분야에 걸쳐 십여 차례의 한국미술관련 전시회를 열어 왔다.

이를 통하여 한국미술의 이해증진과 관심을 높이는데 상당한 공헌을 하였을 뿐 아니라 일본은 물론 한국의 연구자들에게 소장품을 적극 공개함으로써 한국미술사 연구의 발전에도 기여한 바가 매우 큰 미술관이다.

국외에 있는 자국의 문화재를 현지에서 만나게 되면 반갑다는 마음과, 고향을 떠나 있다는 애석함이 교차할 것이다. 그 문화재들이 현지에서 한국문화에 대한 인식을 좋게 하는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긍정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그리고 유물의 현지성을 잘만 이용할 수 있다면 좋은 효과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한국문화재들의 적극 공개를 유도하고 발굴되어야 할 것이며, 이를 위하여 기존 문화재에 대한 연구와 정확한 가치부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일본 속의 한국문화재 발굴 및 공개에 관한 방법으로는, 개인 수장품의 공공기관 기탁, 기증을 유도하는 방안이 있다. 이우치히사시(井內功)는 1990년 국립중앙박물관에 1,000여 점의 와전류(瓦塼類)를 기증하였으며, 최근에 역시 일본인이 고려시대 범종을 기증하는 등, 빈번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노력에 따라서는 상당한 귀환성과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재일 한국인의 수집품들은 동기부여가 될 수 있다면 고국으로의 귀향가능성이 높은 것들이다. 예를 들자면, 1994년 국립중앙박물관은 30여 년간 고국의 문화재를 수집한 김용두(金龍斗) 씨의 소장품 귀향 특별전을 개최하였고, 그 후 1996년 그 일부를 기증 받아, 현재 그의 출신지인 진주의 국립박물관에 특별실을 마련하여 전시하고 있다.

물론 일본에 있는 한국문화재가 무조건 국내로 환수되어야만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개인 또는 사원 등에서 잠들고 있어 현지에서 한국 미술문화의 연구 및 이해에 크게 기여하지 못하는 경우라면, 그리고 원산지에 있어야 그 가치가 올바로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귀환 또는 환수에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어찌되었든, 이들 해외에 있는 문화재들에 대하여 행정당국은 관리차원에서의 소재파악 및 이동상황을, 연구자들은 끊임없는 가치부여와 자료의 발굴을, 일반인들은 자국문화에 대한 이해를 위한 노력과 관심을 보여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유럽):Seladon-Keramikder Koryo-Dynastie 918∼1392(Soontaek choi-Bae, Bestandskatalog des Museums fur Ostasiatische kunst der stadt koln. Koln 1984)
Korean art in Western Conections ll. Korean Art in the United Kingdom. Part 1: The couections of London and Oxford(Sir John Figgess, Korean Culture(Los Angeles), Vol.6, No.2, Junce 1985:4-16)
The Gomperz Gibt the Fitzwiniam Museum, Cambridge-Korean Art in Western Collection 14-(R.A.Crighton, Korean Culture(LA), vol.7, No.4, December 1986:5-11)
Korean art in western collections 15:Korean art in Czechoslovakia(Libuse Bohackova, Korean Cutture vol. No. 3. Fall 1987:4∼12.)
Meisterwerke aus China aus china, Korea and Japan.(Roger Goepper, Munchen:Prestel 1995)
The Korean Couection at the National Muserum of Denmark(Joan Hornby, Korean Cnlture Vol.9, No.4. Winter 1988:14∼22)
(미국):海外所藏한국문화재 1, 5권-미국 1, 2(한국국제교류재단, 1989, 1996)
Korean Ceramics:An Art's Variety(Gregory Henderson, Ohio State University, 1969)
Korean Art from the Brooklyn Museum(Robert Moes, Brooklyn Museum, 1987)
유길준과 개화의 꿈-Korean Collection from the Peabody Essex Museum(국립중앙박물관, 1994)
Arts of Korea(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1998)
Azaleas and Golden Bells:Korean Art in the Collection of the Portland Art Museum and in Portland Private Collections(Junghee Lee, Portland Art Museum, 1998)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