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공암(孔巖: 지금의 서울 양천구). 1361년(공민왕 10) 성균관대사성으로 승보시(升補試)를 주관하였으며, 1365년 전법판서(典法判書)가 되었다. 이후 황상(黃裳)의 애첩과 사통하여 풍기를 문란하게 하여 이수산(李壽山)을 비롯한 당대의 제신들에게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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