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아버지는 남양군(南陽君) 홍서(洪恕)이다.
1406년(태종 6)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로서 화통시사(火㷁試射)를 주관하면서 소를 잡아 잔치를 벌이는 것을 엄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구례에 따라 연음한 일로 파직되었다.
그러나 곧 양주부사에 복직되고, 이듬해 내직에 제수되었다. 1416년 호조참의로서 지신사(知申事) 유사눌(柳思訥)의 소합유(蘇合油: 약용·향료로 쓰는 나문에서 짜낸 기름) 매매사에 연루되어 의금부에 수금되었다가 곧 방면되어 이듬해 동지총제(同知摠制)에 승진되었다.
1418년(세종 즉위년) 태종이 양위하면서 군직을 개편함에 따라 내시위 1번절제사(內侍衛一番節制使)가 되고 이어 상왕(上王)과 세종이 모화루(慕華樓)에서 명나라 사신들을 송별할 때에 별운검총제(別雲劒摠制)로 직책상 검(劒)을 차고 곁에서 보위한 일로 세종의 질책을 받고 파직되었다.
1419년 상왕의 배려로 중군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에 다시 복직된 뒤 좌군총제에 제수되고, 1422년 경상우도수군도안무처치사(慶尙右道水軍都安撫處置使)로 파견되었다가 임지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