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운경(雲卿), 호는 매천(梅泉). 전라남도 광양 출신. 황시묵(黃時默)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청년시절에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에 와서 문명이 높던 강위(姜瑋)·이건창(李建昌)·김택영(金澤榮) 등과 깊이 교유하였다.
1883년(고종 20) 보거과(保擧科)에 응시했을 때 그가 초시 초장에서 첫째로 뽑혔으나 시험관이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둘째로 내려 놓았다. 조정의 부패를 절감한 그는 회시(會試)·전시(殿試)에 응시하지 않고 관계에 뜻을 잃고 귀향하였다.
1888년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못해 생원회시(生員會試)에 응시해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당시 나라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겪은 뒤 청국의 적극적인 간섭정책 아래에서 수구파 정권의 부정부패가 극심했으므로 부패한 관료계와 결별을 선언, 다시 귀향하였다.
구례에서 작은 서재를 마련해 3,000여 권의 서책을 쌓아 놓고 독서와 함께 시문(詩文) 짓기와 역사 연구·경세학 공부에 열중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갑오경장, 청일전쟁이 연이어 일어나자 급박한 위기감을 느끼고, 후손들에게 남겨주기 위해 경험하거나 견문한 바를 기록하여 『매천야록(梅泉野錄)』·『오하기문(梧下記聞)』을 저술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체결하자 통분을 금하지 못하고, 당시 중국에 있는 김택영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을 하기 위해 망명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였다.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강제로 나라를 빼앗기자 통분해 절명시 4수를 남기고 다량의 아편을 먹고 자결하였다. 저서로는 『매천집』·『매천시집』·『매천야록』·『오하기문』·『동비기략(東匪紀略)』 등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