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성군 ()

대동여지도 중 강원도 원주, 횡성 부분
대동여지도 중 강원도 원주, 횡성 부분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강원도특별자치도 서남부 즉 영서지방에 위치한 군.
정의
강원도특별자치도 서남부 즉 영서지방에 위치한 군.
개관

군의 경계는 동쪽은 평창군, 서쪽은 양평군, 남쪽은 원주시와 영월군, 북쪽은 홍천군과 각각 접하고 있다. 동경 127°46'∼128°20', 북위 37°32∼37°41'에 위치한다. 면적은 997.66㎢이고, 인구는 4만 5777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8개 면, 175개 행정리(110개 법정리)가 있다. 군청은 강원도특별자치도 횡성군 횡성읍 읍하리에 있다.

자연환경

지형은 태백산맥의 오대산에서 분기한 차령산맥(車嶺山脈)이 군의 동부를 남서방향으로 뻗어 동 · 남 · 북부가 높은 산지로 둘러싸여 있고, 서쪽은 완경사를 이룬다.

북쪽에 수리봉(960m) · 발교산(髮校山, 998m) · 태의산(台議山, 675m) · 오음산(五音山, 930m), 동쪽은 운무산(雲霧山, 980m) · 봉복산(鳳腹山, 1,022m) · 태기산(泰岐山, 1,261m) · 청태산(靑太山, 1,180m) · 사자산(獅子山, 1,120m)이 있다. 남쪽에는 매화산(梅花山, 1,084m) · 치악산(雉岳山, 1,288m) · 향로봉(香爐峰, 1,043m), 남태봉(南台峰, 1,182m) · 배향산(拜向山, 808m) · 삿갓봉(1,030m), 서쪽에는 성지봉(聖地峰, 791m)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 군내 산지의 특색은 봉복산을 제외한 모든 산이 군계와 접하고 있어 군역을 둥글게 감싸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고도는 낮은 곳이 횡성읍의 해발 110m이고, 둔내면은 평야지가 해발 500m의 고대지로 되어 있어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지형적 특색을 나타낸다. 모든 수계는 남한강계(南漢江系)에 속하고, 크게 섬강(蟾江) 수계와 주천강(酒泉江) 수계로 나뉜다.

평야로는 횡성읍 화성들(앞들), 우천면 문암들이 있으며 비교적 평야가 적은 강원도에서의 횡성 앞들은 ‘횡성인의 앞들 자랑’이란 속담이 전해질 정도로 비옥하고 넓은 들로 손꼽혀 왔으나, 개발로 인해 그 면적이 축소되고 있다.

갑천(甲川)은 태기산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 청일면 감천리 · 유평리를 지나 초현리와 갑천면과의 경계에서 계천(桂川)과 합류한다. 수리봉에서 발원한 계천은 남쪽으로 흘러 갑천과 합류되기 전까지는 유동천(柳洞川)으로 불린다. 계속 서류하다가 태의산에서 발원하여 남류하여 온 대관대천(大官垈川)과 합쳐져 섬강이 되어 남류하여 금계천(錦溪川)과 합류한다.

죽림산에서 발원한 전천(前川)는 서류하여 횡성읍에서 섬강과 합류하고, 섬강은 남서류하여 원주시로 흘러든다. 태기산에서 발원한 주천강은 둔내면의 자포곡리, 둔방내리를 지나 남류하여 안흥면 안흥리를 지나 강림면 강림리에서 동남쪽으로 꺾여 월현리에서 영월군 수주면으로 흘러든다.

기후는 내륙산간에 위치하여 해양의 영향을 전혀 받지 못하기 때문에 기온의 교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또한 여름철에는 푄(Fohn)의 바람받이 지대로서 한발이 심한 편이다.

연평균기온 12.6°C, 1월 평균기온 -3.2°C, 8월 평균기온 25.3°C로 기온의 교차가 심하고, 연강수량은 1,425.3㎜이다. 그러나 둔내면, 청일면 등지의 산간은 평탄한 토지가 넓게 분포하고 해발고도가 높아서 평균기온이 낮아 식물생육기간이 짧은 고랭지기후를 나타낸다.

역사

한민족(韓民族)이 동북아시아 일대에서 독특하고 독자적인 한문화(韓文化)를 형성하면서 살기 시작한 시기는 1940년대까지만 하여도 5,000년을 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 뒤 한반도에서 구 · 중 · 신석기시대의 유물 · 유적이 발견됨으로써 한민족의 기원문제를 수십 만 년 전의 구석기시대를 배경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강원도 내에서는 이 군의 둔내면 현천리 구석기유적에서 발견된 석기가 그 형태나 제작수법에서 시베리아 알단강(Aldan江)유역의 후기 구석기시대 유물과 같은 종류의 것으로서, 한반도의 후기 구석기문화가 시베리아지역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보여준 동시에, 이 지역에 구석기시대부터 이미 인류가 생존했음을 입증해준다.

또한, 인접한 홍천군 북방면 하화계리의 홍천강유역에서 5만∼10만 년 전의 중기 구석기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횡성지역에서도 중기 구석기시대에 인류가 살았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시대는 횡천현(橫川縣) 또는 어사매(於斯買)라 하였고, 통일신라 경덕왕 때에 황천현(潢川縣)이라 개칭되었고 삭주(朔州)의 영현(領縣)으로 되었다.

고려시대에 다시 횡천현으로 개칭되어 춘주(春州)의 속현(屬縣)으로 되었다가 뒤에 원주(原州)의 속현으로 바뀌었다. 1389년(공양왕 1)에 비로소 감무(監務)가 파견되었다. 횡천이라는 명칭은 군의 젖줄인 섬강이 남북으로 흐르지 않고 동서로 가로질러 흐르기 때문에 가로의 뜻인 ‘橫’자를 쓰게 된 데서 유래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감무가 현감(縣監)으로 개칭된 예에 따라 현감이 파견되었다. 다음해에는 홍천(洪川)과 발음이 비슷하다고 하여 횡성현(橫城縣)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1895년(고종 32) 관례에 따라 횡성군으로 개칭되어 춘천부(春川府)의 관할이 되었다. 이듬해에 다시 강원도에 소속되었다. 이 지역에는 한말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여 의병으로 활약한 인물이 많다.

항일운동을 하다가 순국한 의병들의 묘소가 강림면 월현리에 있다. 또한, 천주교의 수용과정에서 신유박해와 병인박해를 피해 천주교인들이 이곳에 찾아들어 마을을 이루고 교회를 세우기도 하였다.

1910년 9월 1일원주군 서원면(書院面)이 횡성군으로 편입되었다. 1919년 3 · 1운동이 발발하자 이 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76년 8월 15일에 3 · 1운동기념비협찬회와 동아일보사가 공동으로 횡성읍 읍하리 3 · 1공원에 3 · 1운동기념비를 건립하였다.

1950년 6 · 25전쟁 때에는 북한군과의 치열한 전투장이 되었다. 이 때 희생된 이 고장의 영령들을 추모하고 국군 및 유엔군의 넋을 기리기 위한 충혼탑과 기념비가 곳곳에 건립되어 있다. 1963년 1월 1일영월군 수주면의 강림리 · 부곡리 · 월현리가 안흥면에 편입되었다.

1973년 7월 1일에는 홍천군 및 횡성군내의 면간(面間) 경계가 조정되어, 홍천군 남면 상창봉리가 공근면에 편입되었고, 우천면 조곡리 · 생운리 · 남산리와 공근면 학곡리 일부가 횡성면에, 안흥면 하궁리 · 정금리 · 산전리 · 용둔리 · 상하가리 · 하대리 · 상대리가 우천면에, 둔내면 영랑리 일부가 안흥면에, 안흥면 궁종리와 갑천면 신대리 일부가 둔내면에 편입되는 등 대대적인 행정구역 조정이 있었다.

1979년 5월 1일횡성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83년 2월 15일서원면 산현리 · 매호리와 압곡리 일부가 원성군 호저면으로 편입되었고, 우천면 추동리 · 정암리가 횡성읍에 편입되었다. 1989년 1월 1일우천면 오원리 일부가 안흥면에 편입되었으며, 4월 1일안흥면의 강림출장소가 면으로 승격되었다. 2000년 1월 12일갑천면 부동리를 갑천면 삼거리에 통합하였으며, 2002년 1월 10일횡성읍 마산리 일부를 횡성읍 읍상리에 편입하여 1읍, 8면 174행정리, 110법정리, 761개 반을 관할하고 있다.

유물 · 유적

국가지정문화재는 천연기념물 1건이 있고, 지방지정문화재는 유형문화재 10건, 기념물 1건, 무형문화재 2건, 문화재자료 3건이 있다.

선사시대의 유적으로 둔내면 현천리에서 후기 구석기시대의 주먹도끼 · 긁개 등 뗀석기가 발견되어 2만∼3만 년 전에 이미 주천강가에 사람이 살고 있었음이 입증되었다.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 · 고인돌이 둔내면 현천리와 둔방내리에서 발견되었고, 갑천면 중금리에서 간돌칼 · 간돌화살촉이, 횡성읍 묵계리에서는 간돌창이 출토되어 이 시기에도 사람이 거주했음이 입증되었다.

또한, 둔내면 둔방내리에서 초기 철기시대, 즉 연맹왕국이 성립되었던 2,000년 전경에 집단부락이 형성되었음을 알려주는 유적이 1983년 발굴에 의해 확인되었다.

불교문화재로는 횡성읍의 읍하리석불좌상(강원도 유형문화재, 1971년 지정) · 읍하리삼층석탑(강원도 유형문화재, 1971년 지정)과 갑천면의 중금리삼층석탑(강원도 유형문화재, 1971년 지정), 청일면의 횡성신대리삼층석탑(강원도 유형문화재, 1979년 지정), 공근면의 상동리석불좌상(강원도 유형문화재, 1971년 지정) · 상동리삼층석탑(강원도 유형문화재, 1971년 지정) 등이 있다.

횡성읍 교항리 삼층석탑이 있는 절터에서는 1964년에 고려시대의 범종과 자기가 출토되었다. 그 밖의 절터로는 횡성읍 남산리의 법흥사지(法興寺址)와 정암리사지(正庵里寺址)가 있다. 현존 사찰로는 봉복사 · 백운암(白雲庵) · 보광사(寶光寺) · 송덕사(松德寺) 등이 있다.

산성은 삼한시대에 축성되었다는 태기산 덕고산성(德高山城)이 있고, 봉화대는 둔내면 영랑리에 위치한다.

고건축물로는 횡성읍 읍상리의 횡성향교(강원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읍하리의 운암정(강원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 태풍루지(泰豊樓址), 서원면 압곡리의 취석정지(醉石亭址), 공근면 상동리의 세덕사(世德祠), 부창리의 청원각(淸遠閣), 둔내면 현천리의 효부비각, 화동리의 효자정문, 횡성읍 정암리의 효부 이미문(二美門) 등이 있다.

이 밖에 공근면 매곡리의 육절려(강원도 유형문화재, 1981년 지정), 강림면 강림리의 태종대(강원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등이 있다. 서원면 유현리의 횡성풍수원천주교회(강원도 유형문화재, 1982년 지정)는 1888년에 건립된 천주교성당이다.

사적은 강림면 부곡리의 한말 의병장 민긍호(閔肯鎬) 전사지, 월현리의 의병묘소, 우천면 문암리의 의병장 한상열 출생지 등이 있고, 횡성읍 읍상리 3 · 1공원에는 3 · 1운동기념비가 있다.

비석으로는 횡성읍 정암리의 문정공조충지석(文正公趙冲誌石,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0호)과 마산리의 신현필불망비 · 구일관개기념비(具鎰灌漑紀念碑)가 있다.

한편, 6 · 25전쟁의 전적기념물로 횡성군 읍하리 3 · 1공원에 충혼탑과 현충비가 있으며, 갑천면 매일리에 충혼탑이, 우천면 우항리에는 네덜란드참전기념비가 건립되었다.

천연기념물로는 서원면에 횡성압곡리의 백로 및 왜가리번식지(천연기념물, 1973년 지정)가 있다.

무형문화재로는 갑천면 중금리의 양중하(梁仲夏)가 보유하고 있는 횡성회다지소리(강원도무형문화재, 1984년 지정)가 있다.

교육 · 문화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은 횡성읍 읍상리의 횡성향교이다. 또, 1612년(광해군 4)서원면 산현리에 칠봉서원이 세워져 근대 이전 이 지역의 교육을 담당하여 많은 유생을 배출시켰다. 칠봉서원이 있다고 하여 서원면의 명칭이 유래되었다. 서원의 소재지인 산현리가 1982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원성군으로 편입되었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횡성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된 이래 중등 교육기관으로 횡성중학교와 횡성종합고등학교가 1945년 설립되었다. 사립학교로는 대동여자중학교(大東女子中學校)가 설립되어 유일한 사학으로서 지역교육에 이바지하고 있다.

특히 서원면은 천주교 교세가 강한데, 이는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시 서원면 유현리 일대가 신도들의 피난처였기 때문이다. 1888년 프랑스인 르 메르(Le Merre, L.B.J.) 신부가 이곳에 풍수원천주교회를 세워 국내 어느 본당보다도 많은 신부를 배출하였다. 또 광동초등학교(光東初等學校)의 전신인 성심학원(聖心學院)을 세워 한글 · 한문 · 수학을 가르쳐 지방교육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교육기관으로는 2015년 현재 초등학교 16개교, 중학교 10개교, 고등학교 6개교, 그리고 송호대학이 있다.

횡성문화원은 태풍문화제 등 각종 문화예술행사를 주관하고, 자료의 정리 및 연구결과를 출판하여 향토문화의 계승과 개발에 공헌하고 있다. 기타 문화시설로는 횡성도서관, 문화관, 복지회관 8개, 여성회관 등이 있다. 체육시설로는 실내체육관, 종합경기장이 있고, 민간체육시설로는 스키장, 수영장 등이 있다.

민속

이 고장의 대표적 민속놀이로는 용줄다리기 · 편싸움(石戰) · 꽃놀이(花煎)를 들 수 있다.

용줄다리기는 기줄다리라고도 불리는데, 날씨를 좌우한다는 용을 대상으로 하여 풍농을 기원하는 농경사회의 신앙적 요소가 깃들여 있다. 용줄은 암수 두 줄이 각기 길이 300여 m에 이른다. 몸통은 아름이 넘으며 비늘을 달고 암수 머리를 서로 연결하여 편을 갈라 당긴다.

이 놀이는 용에게 풍년을 비는 것뿐 아니라 영농에 필요한 힘과 인내심을 기르게 하는 실용적 목적도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사라졌다가 1982년에 재현되었다. 편싸움은 정월 대보름날 달맞이를 하다가 이웃마을의 청년들끼리 강을 끼고 서로 돌팔매질을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멀리 떨어져 돌만 던지지만 나중에는 육모곤봉으로 백병전까지 전개하여 부상자가 속출하는 등 매우 위험한 놀이이므로 일찍이 전승이 중단되었다.

꽃놀이는 삼월 삼짇날 진달래꽃을 따다가 채두(菜豆) · 찹쌀가루 · 참기름 등으로 화전 · 화면(花麵) · 수면(水麵)을 만들어 먹으면서 하루를 즐기는 놀이이다.

이 밖에도 그네뛰기 · 널뛰기 · 연날리기 · 더위팔기 · 다리밟기 · 좀생이점보기〔占昻〕 · 제용〔處容〕 등이 있다. 이 중 제용은 그 해 나후성(羅喉星) 운에 해당하는 자는 액이 든다고 하여, 그 당사자가 짚으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자신의 옷을 입히고 수일간 머리맡에 두었다가 보름 전날 밤 노상에 내다버림으로써 액을 막는 것이다.

이 고장에서는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집안 단위로 안택(安宅)을 지내고, 마을 단위로 대동굿 · 동구제(洞口祭)를 지냈으나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 밖에도 예전에는 2월 상정일(上丁日)에 춘계문묘석전제, 4월 초파일에는 관등제, 10월에는 백신제(百神祭)가 성대히 거행되었다고 한다.

설화 · 민요

이 고장에 전해오는 설화로는 「횡성깍쟁이」 · 「정평구(鄭平九)의 비천(飛天)」 · 「태기성전설(泰岐城傳說)」 · 「울산바위전설」 · 「삽다리전설」 · 「소은리전설(所恩里傳說)」 등의 인물 · 지명 전설이 있다.

「횡성깍쟁이」는 깍쟁이로 소문난 횡성사람과 개성사람이 누가 더 깍쟁이인가 내기를 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내기에서 횡성인은 창호지를, 개성인은 초를 선택하여 외딴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횡성인은 문에다 창호지를 발라 바람을 막고, 개성인은 촛불을 켜 방안을 밝히면서 서로 자기가 이겼다고 생각하였다. 날이 밝자 횡성인은 문에 바른 창호지에 물을 묻혀 떼어 가지고 가고, 개성인은 초가 다 타 가지고 갈 것이 없게 되어 횡성깍쟁이가 이겼다는 것이다.

「정평구의 비천」은 횡성인 정평구가 임진왜란 때 비차(飛車)를 만들어 성 안팎을 날아다니며 왜구를 혼비백산하게 했다는 전설이다. 태기성은 진한의 태기왕이 신라의 박혁거세에게 쫓겨 이곳에 와 성을 쌓고 와신상담했다는 이야기이다.

「울산바위전설」은 삼척기생이 횡성으로 부임하여 오는 전 삼척군수를 다시 모시기 위해 안흥에 있는 이곳까지 몰래 따라왔으나, 결국 모실 수 없게 됨을 알자 이 바위 밑에 있는 소에 빠져 죽음으로써 자신의 순정을 바쳤다는 애틋한 사연이다.

또한, 「삽다리전설」은 조선 선조 때의 학자요 장수인 안삽교(安霅橋)가 권모술수와 아첨을 하는 무리들이 싫어 이곳으로 와 농사를 지으며 호환(虎患)을 물리치고 마을을 편안하게 했다는 이야기이다.

「소은리전설」은 선정을 베푼 현감을 기리기 위해 애민선정비를 세우고 대오지(臺五地)로 불리던 마을명도 소은비리(所恩碑里)로 바꾸었는데, 일제강점기에 비(碑)자를 빼버리는 통에 소은리가 되었다는 유래담이다.

「우항(牛項)의 전설」은 횡성읍 소재지에서 남동쪽으로 약 10㎞ 국도를 따라 가다보면 우천면 소재지에 이르게 되고, 면 소재지에서 다시 동쪽으로 약 300m 지점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자그마한 성황당이 보이고, 성황당 밑에 꽤 큰 바위가 자리 잡고 있는데, 이 바위에 얽힌 전설이다. 옛날 이곳에는 이씨 성을 가진 낙향한 선비가 한 사람 살고 있었다. 가세도 부유하고 또한 주인인 이씨가 워낙 인심이 후하고 사람 오는 것을 반기는 터라 이 일대를 지나는 길손은 너나없이 이 집을 드나들었다. 이러다 보니 가세도 흔들리고 그 집의 안식구들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안식구들은 자나 깨나 소원이 손님 안 치르고 하루라도 편히 살아 보는 것이었다. 어느 날 심산의 한 무명 스님이 이 집에 시주 차 들렸다. 며느리는 입버릇처럼 손님 때문에 겪는 고충을 스님께 하소연했다. 한참을 생각하던 스님은 정 그렇다면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라며 건너편 성황당 밑 바위 안쪽을 깨버리면 된다고 비방을 일러주었다. 며느리는 밑져야 본전이다 싶어 그 길로 하인을 시켜 스님이 시키는 대로 바위의 안쪽을 깨버렸다. 그런데 바위를 내리치니 바위가 갈라지면서 시뻘건 피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었다. 정말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다음 날부터 그 많던 손님 수가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가세도 기울어지고 이 댁 가솔들은 원인 모를 병으로 하나 둘 쓰러졌다. 마침내는 이씨 집은 손이 끊기고 집은 피폐해져 흉가로 변해 버렸다. 풍수를 볼 줄 아는 사람들 얘기로는 이 집을 중심으로 한 산의 형세가 흡사 황소의 목이 굽어져 있는 형상이고 깨어진 성황당 바위는 소의 혀 부분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 소의 혀를 잘랐으니 그 집이 잘 될 턱이 있겠느냐는 얘기다. 그 때 흐른 피로 지금도 그 바위는 붉은 색을 띠며 이런 연유로 이 동리의 지명이 ‘쇠목’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소의 ‘牛’ 자와 목 ‘項’ 자를 써서 ‘우항’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집에 손이 들어야 그 집안이 흥한다’ 라는 옛말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안흥리의「말무덤전설」은 안흥4리 주천강 상류 왼편 마을을 ‘말무덤’ 이라는 곳에서 유래된 것이다. 옛날 이 마을에는 ‘이춘생’ 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웬일로 춘생은 자식을 두지 못해 그게 항상 큰 걱정거리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자식을 두지 못한다는 것은 그 가문의 끝을 의미하기 때문에 춘생은 불심으로 자식을 얻을 수 있을까 하여 열심히 절을 찾아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백일기도를 드려도 자식은 생겨나질 않았다. 특히 춘생의 아내의 고민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자식을 두지 못하는 건 오로지 여자 때문이라고 여기던 때라 춘생의 아내는 생각 다 못해 큰 결심을 했다. 춘생의 아내는 백일기도를 마치고 돌아 온 남편의 방에 자기가 데리고 있던 ‘복실’이를 들여보냈다. 그렇게 해서라도 후사를 이어야 하겠다는게 춘생 아내의 간절한 바람이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복실에게서는 태기가 보이고 드디어 기다리던 아들이 열 달 만에 태어났다. 그러나 이게 웬 변고란 말인가! 삼칠일이 지나자 분명히 아랫목에 누워 있던 아기는 밖에 나갔다 돌아 와 보면 천정에 올라가 붙어서 깔깔거리는 것이었다. 이런 괴이한 소문은 삽시간에 온 마을에 퍼졌다. ‘이춘생의 집에는 장사가 났다더라’, ‘아니 그 아기는 장사가 아니라 귀신이라더라’, ‘장차 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인물이다’ 등등의 해괴한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아기가 백일이 되던 날 이 집에는 낯선 스님이 찾아 와 아기를 보더니 혀를 ‘쯧쯧’ 차는 것이었다. “스님, 왜 그러시는지요?”, “이 댁에 큰 인물이 났으니 그 아기 때문에 잘못하면 집안이 멸족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스님의 말에 춘생은 겁이 덜컥 나 스님에게 다그쳐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왜 우리 아기가 역적이라도 된다는 겁니까?” 스님은 눈을 지그시 감고 한참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고 장차 용상에 앉을 인물이 나타났는데 잘못하면 역적의 누명을 쓸까 그게 걱정이지요.” 그리고는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졌다. 스님의 얘기를 듣고 난 춘생은 걱정과 번민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떻게 얻은 아들인데 … ‘미천한 소생의 아들이 임금이 된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 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 아이가 갈 길은 뻔하지 않은가?…’ 마침내 춘생은 큰 결심을 했다. 집안을 살리기 위해서는 아기를 포기해야겠다고. 그래서 춘생은 자는 아기 얼굴에 팥 3말을 담은 자루를 눌러 놓고는 밖에서 문을 잠궈 버렸다. 한참 후에 방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아기는 숨이 끊어져 있었다. 춘생은 아기를 용소 건너편 양지 바른 산에 묻어 주었다. 그런데 이 아기가 태어나던 날 용이 산다는 용소에서 용마 한 마리가 나타나 매일 산을 달리곤 했었는데, 아기가 죽던 날 이 용마는 하늘을 향해 구슬피 울부짖더니 아기가 묻힌 무덤 옆에서 죽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이 용마가 장차 아기가 타고 다닐 말이었음을 알고 측은히 여겨 아기무덤과 옆에 나란히 묻어 주었다. 그 후부터 이 마을을 사람들은 ‘말무덤’ 이라고 부르고 있다.

조선 명종 때 진오기(陳五紀)가 기녀 화선(花仙)과 꿈속에서 사랑을 나누었다는「화몽정전설」은 횡성읍 입석리에 있는 화몽정이라는 정자와 관련된 애틋한 사랑 이야기이다. 조선 명종 때 좌승지를 지낸 ‘진오기’는 지조가 대쪽같았으며 학문을 일으키고 문화를 장려하는 등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벼슬를 그만두고 횡성읍 입석리에 내려와 있을 때였다. 그는 며칠째 똑같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언제나 같은 장소에서 꽃 같은 미녀와 만나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시를 읊곤 하였다. 그녀는 말하기를 대감을 사모했던 화선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나 진오기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여자와 사귄 적도 만난 적도 없는 처지라 여간 난감한 게 아니었다. 벼슬에서 물러 난 자기를 이렇게 밤마다 찾아와 꿈속에서나마 돌봐주는 화선은 어쩌면 하늘이 맺어준 연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꿈속에서 화선이는 진오기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천기는 한양 화방골에 사는 화선이라고 하오며 평소 저는 대감을 짝사랑하고 있었는데, 대감께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낙향하셨다는 소리를 듣고 마음으로나마 위로를 드리기 위해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진오기는 이러한 화선이의 간절한 마음을 고맙게 여기고 한양 화방골에 화선이라는 기생이 정말 있는지 한번 찾아가 보고 싶어서 벼르고 있었는데 꿈속에서조차 며칠간 보이질 않아 이상히 생각하고 한양으로 떠났다. 한양 화방골에 당도해 화선이라는 기생을 찾으니 그는 1년 전에 죽은 유명한 기생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정말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 그렇다면 화선이의 혼이 꿈속에 나를 찾아 와 준 것이구나… ’ 그는 허전하고 쓸쓸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다시 꿈속에서나마 화선이를 만나길 고대했으나 다시는 화선이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는 화선이와의 인연을 생각해 화선이의 화(花) 자와 꿈 몽(夢) 자를 넣어 ‘화몽정’ 이라는 정자를 짓고 그곳에서 남은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지금 화몽정의 흔적은 없고 정자가 있던 자리는 원주 · 횡성간 4차선 포장도로가 시원하게 뚫려있다.

마산리의「용마총전설」은 다음과 같다. 옛날 이곳 마산리에는 황장사라고 불리 우는 장사가 한 사람 살고 있었다. 그는 얼마나 힘이 세었던지 황소 한 마리쯤은 맨손으로 때려잡는 일기당천의 위세를 겸비하고 있었고, 그의 곁에는 항상 용마 한 필이 그의 무술연마에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때가 와서 나라의 부름을 받으면 즉시 달려가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무술 연마에 온 힘을 다 쏟았다. 활쏘기, 칼쓰기를 달리는 말 위에서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경지에 다다랐고 말 위에서 활시위를 당기면 평지의 과녁 맞추듯 정확히 명중시키는 경지에까지 다다랐다. 그는 뜻한바 만큼 자신의 무술이 향상 된 것을 알고 이번에는 용마에 대한 집중 훈련을 시작하였다. 좋은 말이란 뭐니뭐니 해도 빠르기가 생명이었다. 황장사의 용마는 황장사를 태우고는 바람처럼 들판과 산을 내달렸다. 홀로 사는 누이에게 아침밥을 짓게 하고는 멀리 서낭당 고개까지 갔다 오게 하여 만약 아침밥이 되기 전에 도착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아침먹이를 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용마는 한번도 아침을 거르는 일이 없었다. 아침밥이 끓기도 전에 용마는 “히힝” 소리를 내며 집에 도착하곤 했다. 드디어 황장사는 마지막 시험을 용마에게 주문했다. 즉 용마를 탄 후 화살을 쏴서 그 화살이 목표물에 명중하기 전에 말이 먼저 그 지점에 도착해야 하며 그렇지 못할 때는 황장사가 의도하는 말이 못되기 때문에 말의 목을 칠 수밖에 없다는 실로 엄청난 주문이 아닐 수 없었다. 용마에게 있어서는 이 한 번의 시합이 자신의 생과 사를 결정짓는 운명의 한판이 아닐 수 없었다. 드디어 황장사는 남산에 올라 심호흡을 한 후 말을 탄 채 마산리를 향해 힘껏 활시위를 당겼다. “윙” 소리를 내며 화살이 무서운 속도로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용마도 황장사를 등에 태우고는 쏜살같이 마산리를 향해 내달았다. 화살과 용마의 대결은 이렇게 시작됐다. 순식간에 용마는 들판을 가로질러 목표 지점인 마산리 고개 마루턱에 다다랐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화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지를 않는 거였다. 이에 황장사는 필시 화살이 먼저 땅에 떨어 졌으리라 생각하고 안타깝지만 장부의 약속인지라 칼을 뽑아 용마의 목을 내리쳤다. 시뻘건 피가 하늘위로 분수처럼 뿜어져 올랐다. 용마는 비명 한 번 못 지르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 숨을 거두고 말았다. 바로 그 때였다. 바람을 가르는 화살 소리가 들리더니 방금 전 자신이 쏜 화살이 날아와 땅에 꽂히는 것이었다. ‘아! 용마가 이긴 시합이었구나’ 황장사는 자신의 경솔을 뉘우치며 나뒹구는 용마를 부등켜 앉고 통곡을 했지만 용마는 다시는 일어서질 않았다. 그 후 황장사는 속죄의 마음으로 용마를 위해 훌륭한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자신의 경솔과 우둔함으로 용마를 죽인 죄책감에 스스로 활과 칼을 꺽어버리고 온갖 정성을 다해 말무덤을 돌보다가 어느 날 상제 차림으로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지금도 말의 묘는 횡성읍에서 2㎞ 쯤 떨어진 마산리 마을 뒷산에 남아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마을 이름도 말무덤에서 유래한 ‘말미(묘)’로 부르다 행정 구역 개편시 말마(馬)자 뫼산(山)자를 써 마산리로 개칭돼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이 밖에도 인삼과 꿩으로 열탕공진하여 아버지의 병을 쾌유시켰다는 「심지영의 효」, 수절과부 홍천댁이 죽음으로써 개가를 거부하였다는「열녀소전설」, 등이 전해온다.

이 고장에 구전되고 있는 민요는 종류가 다양하고 양도 풍부하다. 특히 농업노동요와 장례의식요가 전 지역에 잘 전승된다.

“(앞) 천하지대본은 농사라고/농사한철 지어보세/(뒤) 뒤뜰논은 천석지기/앞뜰논은 만석지기.”라는 「모심기노래」는 사설에 따른 자유리듬으로 부르나 논매기노래가 우세하여 그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논매기노래에는 세 번의 논매기에 모두 다른 노래가 불리는데, 초 벌에는 「단호리」, 두 벌에는 「상사디야」, 세 벌에는 「미나리」가 불린다. “(앞) 단호리 바람에 논매어 보세/(뒤)어화 얼사 단호리야//(앞) 단호리 바람에 흙넘어 간다/(뒤)어화 얼사 단호리야.”라고 선후창으로 부르는 「단호리」는 느린 중중모리장단에 맞으며 약간 처량한 느낌을 준다.

두 벌 논매기에는 “(앞) 이논짜리 마주(마저)매고/(뒤) 얼널널 상사디야//(앞) 저논짜리 옮겨가세/(뒤) 얼널널 상사디야. ”라고 선후창으로 부르는데 「단호리」보다는 힘차고 씩씩한 「상사디야」를 주로 부르나, “에헤이야라 방애요.”라는 뒷소리를 사용하는 「짜를방아」를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앞소리꾼이 “상사디야를 그만두고/단호리로 매어볼까.”라고 하여 앞소리꾼이 지시하면 곡조를 바꾸기도 한다.

세 벌 논매기 노래인 「미나리」는 자유리듬으로 길게 빼는 음에 장식음을 붙여 혼자 부르는 것으로 인근지방과 비슷하다. 논매기를 끝내는 쌈싸기에서는 「긴방아」를 부르는데 “아 어이 휘이요.” 등 뜻 없는 구음을 자유리듬으로 부른다.

밭을 갈거나 논을 고를 때 소를 몰면서 부르는 노래로는 한 마리의 소를 몰면서 부르는 「홀리소리」(호리소리)가 있고, 두 마리의 소를 몰면서 부르는 「쌍겨리소리」(저리소리)가 있다.

이 소모는 노래는 모두 기능과 잘 밀착되어 있어, “올라서 어기마마 마/일어서라 어러러러 소야……이러이러 워 우하러러.”와 같이 사설이 일정하지 않고 상황에 따른 의성어가 많으며 쉬는 부분도 많다. 두 마리 소를 모는 「쌍겨리소리」가 「홀리소리」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하게 불린다.

여성들이 주로 부르는「밭매는 노래」는 “밭매러∼가세/우리야∼/친구들아/밭매러 가세……”와 같은 사설을「정선아리랑」조로 부르며, 시집살이나 신세를 한탄하는 음영조의 서사민요는 거의 불리지 않는다.

산에서 나뭇짐을 지고 내려오면서 혼자 부르는「횡성어러리」가 있는데, 사설이나 가락이 「정선아리랑」과 비슷하며 신세를 한탄하는 다른 지방의「어사용」과는 다르다.

「안흥면 아리랑 타령」은 나무할 때 부르는 노동요인데, 가사는 다음과 같다.

"에헤야 노오야 · 보리나 찧지 조그만 여자 소견 난 기쁠소냐 놀아 · 놀아 · 저젊어 놀아 · 늙어서 병이 들며는 못노나니 살림살이를 못하고서는 가라면 가도 술담배 아니 먹고서 나는 못살겠네 삼천리 강산에다가 전화줄을 늘이고 뚱단지 조화로다가 님소식을 듣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 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정구름이 막모여드네 강건너 저쪽에는 모시베나 풍년 강건너 이쪽에는 색시풍년 들어라 저건너 뱃사공 배나 건너주오 저건너 검은에 동박이 다떨어지네 십원짜리가 없으면 오원에 두장도 좋구요 술집에 식모두 없으면 술집에 따님도 좋더라 어랑어랑 어허야 어야 어허야 뒤야 내사랑아 공산 삼십에 비온는 삼채는 끝수나 높으니 좋구 삼육십팔에 열여덟살에는 나이나 적으니 좋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 장마 질라나 하늘 공중에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예수나 믿었더라면 천당에나 갈걸 이웃처녀 믿었다가는 장가를 못가요 술잘먹구야 돈잘쓸적엔 금수강산이더니 술못먹고 돈못쓰니 적막강산이로다 사람이 살며는 몇백년 사나 있는대로 툭툭 털어서 술추렴하세 부지공산에 참매미 소리는 나듣기나 좋고 청춘과부야 한숨의 소리는 나 듣기나 싫어"

장례의식요는 각 지역에서 널리 불리며, 「상여노래」의 앞소리 사설이나 가락은 대부분 보편적인 것이나 둔내면에서는 느린 염불가락으로 시작한다. 뒷소리는 보통 “어허 넘차 어허”를, 오르막 등 위험한 곳에서는 “어 호이”를 사용하여 속도를 조절한다. 청일면에서는 “오∼호 오∼호/어이나가리 에∼호”와 “오∼호”를 사용한다.

「달구노래」는 천천히 시작해서 빨라지는데, “에헤∼으리이 달호야.”라는 뒷소리의 여음을 길게 뺀다. 세시의식요로는 안택 · 고사 · 풍년기원 등을 읊는 무가류가 불린다.

비기능요로는「아리랑」이 중심을 이루는데,「횡성아리랑」은「강원도아리랑」과 사설과 가락이 비슷하다.「강원도아리랑」 · 「정선아리랑」도 널리 불리며, “안방문이 펄러덕 뒷방문이 와지끈지끈/마른 차대기 바싹 걷어들고 난장치는 걸 내가 담당할거니……”라고 엮어내리는「엮음아리랑」도 불린다.

이 밖에도「신고산타령」 · 「창부타령」이 불리나「아리랑」의 사설과 넘나드는 것이 많고,「새타령」 · 「장타령」등도 불린다.

산업 · 교통

대부분이 산지로 경지율은 13%에 지나지 않는다. 2008년 현재 경지면적 1만 309㏊ 중 논이 3,857㏊, 밭이 6,452㏊로 밭이 많다. 농가수는 6,770가구이고 인구는 1만 8097명이다. 가구당 경지면적은 152.3a이다. 평야로는 횡성읍의 화성(花城)들과 우천면의 문암(文巖)들이 군내에서 대표적으로 기름진 평야이고, 각 하천 유역에 규모는 작으나 기름진 충적지가 형성되어 농경지와 취락의 분포지를 이룬다.

주요 농산물은 쌀 · 보리 · 콩 · 감자 · 옥수수 등이며, 1972년 홉의 시험재배에 성공하여 1977년부터 청일면 · 갑천면을 중심으로 재배되고 있다. 청일면 · 둔내면 · 공근면 및 횡성읍을 중심으로 인삼재배가 활발하고 둔내면 · 청일면을 중심으로 채소 중심의 고랭지농업이 활발하다.

잎담배는 공근면 · 서원면 · 둔내면 및 횡성읍에서, 약초는 안흥면 · 둔내면 · 청일면 등에서 재배가 많다. 한편, 농가가구와 인구의 감소와는 반대로 농기구의 보급은 증가 추세에 있다.

목축업은 축산단지 조성책에 의해 활기를 띠고 있다. 일반적으로 가구수는 감소하나 가축의 사육두수는 증가하는 추세에 있어, 목축업이 점차 부업적인 성격에서 점차 기업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한우 사육은 횡성읍 · 공근면 · 갑천면 · 둔내면 · 우천면, 젖소 사육은 서원면 · 공근면 · 우천면 · 둔내면과 횡성읍, 양돈은 서원면 · 안흥면 · 우천면 · 공근면과 횡성읍, 양계는 공근면 · 우천면과 횡성읍, 양봉은 갑천면 · 서원면 · 우천면 · 청일면 · 강림면 등지에서 활발하다.

임야면적 7만 2,836㏊ 중 국유림이 2만 7,624㏊, 공유림이 3,724㏊, 사유림이 4만 1,488㏊이다. 임상별 면적은 7만 2,836㏊에 침엽수 3만 8,646㏊, 활엽수 2만 1,914㏊, 혼요림 1만 1,411㏊이고, 무임목지가 865㏊이다. 주요 임산물은 용재 · 버섯 · 종실 등인데, 잣 · 대추 · 버섯류 · 산나물이 많이 생산된다. 유용광물로는 금 · 은 · 구리 · 철 · 망간 등이 매장되어 있는데, 한때 금은 청일면, 철광석은 공근면에서 채광되었다. 현재는 횡성읍에서 석회석과 서원면에서 규석이 생산될 뿐이다.

공업은 부진하여 소규모의 농촌 가내공업이 영위되었다. 1984년 묵계농공단지가 강원도에서 최초로 조성되었고, 1988년 우천농공단지가 지정 · 조성되었다. 1993년 횡성공단이 지방공단으로 지정 · 조성됨으로써 활기를 띠어 음식료 · 화학 · 사료 · 섬유 · 의약품 등의 공업이 행해지고 있다.

상업활동은 예로부터 정기시장인 5일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770년대 군내에는 부내장(읍내장)이 1 · 6일, 둔내에 방내리장(둔방내리장)이 4 · 9일에 개설되는 등 2개가 있었고, 이는 1883년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1912년에는 둔내장 대신 안흥면에 안흥장이 2 · 7일에 개설되어 2개가 유지되었다.

1923년에는 읍내장이 1 · 6일, 안흥장이 3 · 8일, 둔내장(자포곡리)이 5 · 10일, 청일면의 유동장이 4 · 9일에 개설되는 등 4개로 증설되었다. 1926년에는 유동장 대신 갑천면에 동평장(銅坪場, 매일리)이 5 · 10일에 개설되어 4개로 유지되었고, 1938년에는 4개 외에 안흥면 정금리에 정금장이 4 · 9일, 청일면에 유동장이 2 · 7일, 서원면 삼리에 창촌장(倉村場)이 5 · 10일 개설되는 등 7개로 증설되었다.

1963년에는 읍내장이 1 · 6일, 안흥장이 4 · 9일, 둔내장이 3 · 8일, 유동장이 3 · 8일, 청일면 봉명리의 봉덕장이 4 · 9일, 동평장이 2 · 7일, 갑천면의 대관대리장이 5 · 10일에 개설되었다. 이처럼 시장의 수는 7개였지만 개설 일자와 시장의 폐쇄 · 신설 등이 잇따랐다. 1976년에는 읍내장 · 유동장 · 봉덕장 · 동평장 · 대관대리장 등의 변동은 없었으나, 안흥장이 3 · 8일, 둔내장이 5 · 10일로 바뀌었다. 그 대신 새로 강림리에 강림장이 4 · 9일, 서원면에 창촌장이 4 · 9일, 우천면 우항리에 우항장(牛項場)이 4 · 9일에 개설되는 등 10개로 증설되었다. 1994년까지는 읍내장(상설) · 안흥장 · 둔내장 등 3개 만이 남아 있는데, 대부분의 지역이 원주시와 거리가 가깝고 교통이 편리하기 때문에 주민들이 원주시로 가서 물품을 구입하는 경우가 많다.

교통은 철도는 없으나, 예로부터 강릉가도의 요지였다. 영동고속국도가 우천 · 둔내면을 동서로 가로질러 있으며, 중앙고속국도가 공근면과 횡성읍을 지난다. 5번 국도가 공근면∼횡성읍을 지나 춘천∼원주와 연결되고, 6번 국도가 서원면 · 횡성읍 · 우천면 · 둔내면을 지나 서울∼강릉과 연결되고, 42번 국도가 우천∼안흥면을 지나 원주 · 평창 · 정선지역과 연결된다.

특히 안흥면의 상안리와 평창군 방림면의 운교리 사이의 문치(門峙)에 터널이 완공되어 더욱 편리해졌다. 지방도는 406번이 공근에서 홍천군 동면과 연결되고, 44번이 횡성읍에서 갑천∼청일을 지나 홍천군 서석면 풍암리와 연결된다. 442번은 횡성∼안흥을 연결하고 있다. 한편, 군도는 17개 노선이 있어서 고속국도, 국도, 지방도 및 주변의 각 읍 · 면 지역과의 교통이 이루어진다.

이들 노선을 보면 1번 석곡∼석화, 2번 학담∼영영포, 3번 월송∼석화, 4번 읍상∼화동, 5번 유현∼조원, 6번 추동∼마암, 7번 용곡∼압곡, 8번 구창∼서원, 9번 고산∼하일, 10번 묵계∼법주, 11번 자포∼화동, 12번 유동∼마암, 13번 자구∼포동, 14번 부곡∼강림, 15번 주산∼유현, 16번 고산∼학곡, 17번 월현∼둔내 등이 있다.

관광

이 군의 관광지로는 태기산 · 섬강(蟾江)유원지 · 3 · 1공원 등이다. 태기산은 청일면과 둔내면에 인접해 있는데, 이 고장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산이다. 수목이 울창하고, 참나물 · 더덕 · 고사리 등 산채가 많이 난다. 처음에는 덕고산(德高山)이라 불렸는데 진한(辰韓)의 마지막 왕인 태기왕이 신라에 쫓겨 이 산에 들어와 웅거한 일이 있은 후부터 태기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지금도 태기산성지라고 하는 성터의 흔적이 약간 남아 있다. 등산길로는 횡성읍에서 산세가 험준한 청일면 방면과 정상까지 완만하게 오를 수 있는 둔내면 방면이 있다.

섬강유원지는 횡성읍 묵계리와 곡교리에 걸쳐 있는 유원지로 횡성천과 전천(前川)이 합류하여 섬강으로 들어가는 곳에 있다. 버드나무와 미루나무가 맑은 물과 어우러져 빼어난 경치를 이루며, 한 때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이 있었다. 각종 위락시설이 구비되어 있고, 도선장이 있어, 뱃놀이를 하고, 강낚시도 즐길 수 있다. 특히 여름에는 횡성 · 원주에서 많은 피서객들이 찾는다.

둔내면 술이봉 일대 200여 만 평 위에 조성된 성우리조트는 스키장 · 골프장 · 숙박시설 · 위락시설 및 청소년의 정서 함양을 위한 각종 교육 · 문화시설과 다양한 부대시설을 갖춘 4계절 종합 휴양타운이다.

성우리조트에서 승용차로 30분 이내에 갈 수 있는 주변 관광지는 치악산국립공원 · 치악산드림랜드 · 청태산휴양림 · 이승복기념관 · 방아다리약수터 등이고, 오대산국립공원도 1시간 내에 갈 수 있다.

3 · 1공원은 횡성읍 읍상리와 읍하리의 경계에 있는 공원으로 1976년 8월 15일3 · 1운동기념비가 세워지면서 3 · 1공원으로 불리게 되었다. 3 · 1운동 기념비는 강원도 내에서 3 · 1운동을 가장 활발하게 전개했던 이곳의 역사를 기리기 위해 3 · 1운동 기념비 협찬회와 동아일보사가 공동으로 건립하였다. 공원에는 충혼탑 · 네덜란드참전기념비 · 어린이놀이터 · 활터인 태풍정 등이 있다.

매년 9월 경 횡성군 횡성읍 종합운동장 일원에서는 군 최대 규모의 축제행사인 횡성한우축제가 펼쳐진다. 국태민안과 풍년을 기원하고, 백성의 편안을 도모하기 위해 매년 개최되어오던 횡성태풍문화제의 명칭을 변경하여 2004년부터 새로운 목표와 주제를 가지고 개최하는 축제이다. 횡성한우축제는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횡성한우의 우수성을 대 내 · 외에 널리 알리고 횡성한우의 본고장임을 알리는 계기를 마련함은 물론, 횡성군의 대표축제로 발전시켜 나아가는 축제로서 모든 횡성한우를 중심으로 꾸며지게 된다.

매년 음력 2월 개최되는 태기문화제는 횡성의 전통민속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 주민의 화합과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정월 대보름에 횡성군 우천면 정금민속마을에서 개최되는 마을단위 지역문화축제이다. 1984년 횡성회다지소리가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 1985년 강원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을 계기로 정금민속관을 건립하였으며 1986년정금마을이 회다지소리 전승마을로 지정되면서부터 정금민속보존회를 조직하여 이 지역만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 발전시키기 위해 온 군민이 참여하는 태기문화제를 개최하게 되었으며 횡성지역의 문화와 전통의 소리 그리고 민속놀이를 즐길 수 있다.

횡성군 횡성읍 3 · 1공원 및 횡성읍 시가지 일원에서 매년 4월 1일 개최되는 4 · 1만세운동 재현행사는 강원도내 최초로 최대 규모의 조직적 항일운동이었던 4 · 1만세 운동을 기념하고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얼을 기리기 위하여 1997년부터 삼일공원, 삼일광장 등에서 4 · 1기념 행사, 만세운동재연, 경축행사, 부대행사 등 다양한 이벤트 행사를 개최하여 애국의 고장 횡성의 얼을 계승하고 자긍심을 고취하는 횡성군의 정신문화제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안흥찐빵축제는 "전통적 명맥"과 "어머니의 손맛" 속에 고향의 인심을 담아 도시민에게 고향의 그리움을 자극하면서 입소문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된 안흥찐빵의 맛과 상품의 가치 제고하고 안흥찐빵이 가진 브랜드에 대한 대외적인 인지도를 확고히 하여 소비자에게 상품에 대한 신뢰를 높여주기 위해 개최되는 축제이다. 이 축제는 1999년 제1회, 2003년 제2회, 2004년 제3회 이후 매년 개최되고 있다.

읍 · 면
  1. 횡성읍(橫城邑)

군의 남서부에 위치한 읍. 면적 72.40㎢, 7,041세대, 1만 8,905명에 남자 9,587명, 여자 9,327명이다(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읍하리이다.

본래 횡성현의 소재지로 1414년(태종 14)현내면(縣內面)이라 불리다가 1895년군내면으로 개칭되면서, 교항 · 읍상 · 읍하 · 내지 · 마옥 등 13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청룡면(靑龍面)의 갈풍 · 반곡 · 모평 · 곡교 등 8개 리가 병합되어 다시 군내면이라 하여 21개 리를 관할하였다. 1937년 다시 횡성면으로 개칭되는는 동시에 소군리가 마옥리에 폐합되어 20개 리가 되었다. 1973년우천면 조곡 · 생운 · 남산리와 공근면 학곡리 일부가 편입되었고, 1979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우천면의 추동리와 정암리가 편입되었다.

섬강(蟾江)과 그 지류인 금계천(錦溪川), 전천(前川)유역에 형성된 평야지역에서 벼농사와 채소 · 과일 중심의 원예농업이 성하다. 한우 사육은 군내 1위이고, 양계는 2위를 차지한다. 묵계리에는 1984년 농공단지가 지정 · 조성되었고, 마산리에는 의약품 · 도난방지기 등 각종 공업이 발달하고 있다.

교통은 철도는 없으나, 횡성읍은 영동과 영서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일찍부터 상업도시로 발전하였다. 5번과 6번 국도가 횡성읍에서 교차하여 서울∼강릉, 춘천∼원주의 교차점이 된다. 읍내로부터 441번 지방도가 갑천∼청일을 지나 홍천군 서석면과 연결되며, 442번 지방도가 우천면 우항리에서 42번 국도와 연결된다.

군도는 2번이 영영포와 공근면의 학담리를 연결하고, 4번이 읍상리와 둔내면의 화동, 9번이 고산∼하일, 10번이 묵계∼우천의 법주, 16번이 고산∼학곡을 연결하여 매우 편리하며, 읍의 서쪽에 중앙고속국도가 있다.

문화유적은 읍하리에 석불좌상 · 삼층석탑 · 운암정, 정암리에 문정공조충지석 김복이열녀문, 읍상리에 횡성향교와 3 · 1운동기념비, 교항리에 사지 · 삼층석탑 · 법흥사지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5개 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2개 교가 있다.

읍하(邑下) · 읍상(邑上) · 북천(北川) · 내지(奈之) · 마옥(磨玉) · 송전(松前) · 궁천(弓川) · 개전(介田) · 옥동(玉洞) · 영영포(永永浦) · 마산(馬山) · 교항(橋項) · 입석(立石) · 청룡(靑龍) · 곡교(曲橋) · 묵계(墨溪) · 모평(茅坪) · 갈풍(葛豊) · 가담(佳潭) · 학곡(鶴谷) · 조곡(鳥谷) · 생운(生雲) · 남산(南山) · 추동(楸洞) · 정암(正庵) · 반곡(盤谷) 등 26개 리가 있다.

  1. 갑천면(甲川面)

군의 중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123.38㎢, 959세대, 인구 2,084명으로 남자 1,068명, 여자 1,066명이다(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매일리이다.

옛날 진한(辰韓)의 태기왕(泰岐王)이 신라에 패망한 뒤 이곳에 있는 태기산(泰岐山)에서 다시 일어나기를 꾀하여 군사를 훈련하면서 병사들의 갑옷을 냇물에 씻었다는 갑천(甲川)의 이름을 따서 갑천면이라 불렸다.

갑천 · 고시(古時) · 구방 · 매일 · 부동 · 상대 등 12개 리를 관할하다가 1973년신대리의 일부가 둔내면으로, 유평리 · 갑천리 · 고시리와 신대리의 일부가 청일면으로 각각 이속되었고, 청일면 율동 · 삼거 · 전촌 · 추동 등 6개 리가 편입되었다.

남부에 죽림산(竹林山), 정금산(鼎金山), 북부에 태의산, 중앙에 어답산(御踏山) 등이 솟아 있다. 신리지형이 탁월하여 경지는 14%에 불과하고, 그 중 밭이 61%를 차지한다. 섬강의 지류인 대관대천(大官垈川)과 계천 유역에서 약간의 벼농사가 이루어진다.

주요 농산물은 옥수수 · 고추 · 참깨 · 콩 등의 밭농사가 우세하며, 인삼 · 약초 · 홉 등의 재배와 양잠도 활발하고 양봉은 군내의 40%를 차지한다.

교통은 441번 지방도가 면의 중앙을 북동∼남서방향으로 지나며 횡성읍 · 청일면 · 홍천군 서석면으로 이어진다. 군도는 4번이 읍상 · 매일 · 청일 · 유동 · 둔내 화동으로 연결되고, 6번이 추동에서 둔내의 마암리, 13번이 포동에서 안흥면 지구리와 연결되는 등 편리해졌다. 문화유적은 중금리에 삼층석탑이 있다. 대관대리에 청주김씨(淸州金氏)의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분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 교가 있다. 매일(梅日) · 중금(中金) · 화전(花田) · 구방(舊坊) · 포동(浦洞) · 상대(上臺) · 하대(下臺) · 율동(栗洞) · 추동(秋洞) · 대관대(大官垈) · 삼거(三巨) · 전촌(荃村) · 병지방(兵之坊) 등 13개 리가 있다.

  1. 강림면(講林面)

군의 남단에 위치한 면. 면적 96.37㎢, 642세대, 인구 1,469명으로 남자 750명, 여자 719명이다(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강림리이다.

본래 영월군 수주면(水周面)에 속해 있던 강림 · 월현 · 부곡 등 3개 리가 1945년 강림출장소의 관할에 있었다. 1963년횡성군 안흥면에 편입되어 강림출장소로 있다가, 1989년강림면으로 승격되어 안흥면에서 분리되었다.

차령산맥이 관내를 지나고 있어 치악산 · 남태봉(南台峰, 1,182m) · 매향산 등 높은 산지로 둘러 싸여 평지가 적다. 즉 경지면적은 13%에 불과하고, 그 중 밭이 82%를 차지한다. 치악산에서 발원한 강림천이 북동쪽으로 흐르다가 강림리에서 주천강과 합류된 뒤 남류하며 하천연안에 약간의 평지가 전개된다.

주요 농산물은 옥수수 · 감자 등이고, 무 · 배추 등의 고랭지채소와 약초 · 산나물 · 벌꿀 등이 생산된다.

교통은 군도 14번이 부곡∼강림, 17번이 월현∼안흥∼둔내면 두원리를 연결하고 있을 뿐이어서 불편하다. 문화유적은 강림리에 태종대가 있다. 강림리에 달성서씨(達城徐氏), 청송심씨(靑松沈氏), 월현리에 인동장씨(仁同張氏)의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분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강림(講林) · 월현(月峴) · 부곡(富谷) 등 3개 리가 있다.

  1. 공근면(公根面)

군의 북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129.24㎢, 1,587세대, 인구 3,830명으로 남자 2,015명, 여자 1,815명이다(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학담리이다.

본래 횡성군 관할로서 서공근면(西公根面)이라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공근면으로 고쳐져, 가곡 · 공근 · 덕촌 · 도곡 · 매곡 · 부창 · 삼배 · 학담 등 17개 리를 관할하였다. 1973년홍천군 남면 상창봉리가 편입되었고, 학곡리의 일부가 횡성면으로 이속되었다.

섬강의 지류인 금계천과 계천유역에 약간의 평지가 있을 뿐 대부분의 지역이 산지로 경지면적은 약 15%에 불과하다. 그 중 밭이 53%를 차지한다.

주요 농산물은 질이 우수하여 진상품으로 꼽혔다는 수백(水白)쌀과 황률 · 잎담배 · 콩 · 인삼 등이 있고, 버섯류와 양계는 군내 1위이다.

교통은 춘천∼원주간의 국도와 서울∼강릉간의 국도가 신촌리에서 교차하고, 406번 지방도가 학담리와 홍천군 동면과 연결되고 있다. 군도는 2번 노선이 학담리와 영영포리를 연결하여 비교적 편리하다. 한편, 중앙고속국도가 면의 동부를 남북으로 지난다.

문화유적은 상동리에 석불좌상 · 삼층석탑, 매곡리에 육절려 등이 있다. 또한 창봉리에 창복역지, 초원리에 홍안원지(弘安院址)가 있다. 학담리에 초계정씨(草溪鄭氏), 삼배리에 전주유씨(全州柳氏), 상총봉리에 이천서씨(利川徐氏) 등의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개 교(분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학담(鶴潭) · 상동(上洞) · 부창(富蒼) · 어둔(於屯) · 공근(公根) · 가곡(佳谷) · 삼배(三培) · 청곡(淸谷) · 행정(杏亭) · 창봉(蒼峰) · 도곡(陶谷) · 초원(草院) · 매곡(梅谷) · 오산(梧山) · 수백(水白) · 덕촌(德村) · 신촌(新村) · 상창봉(上蒼峰) 등 18개 리가 있다.

  1. 둔내면(屯內面)

군의 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128.04㎢, 2,266세대, 인구 5,495명으로 남자 2,847명, 여자 2,648명이다(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자포곡리이다.

본래 횡성군 지역으로 조선시대에 둔방내(屯坊內) 창촌(倉村) 마을에 역둔(役屯)이 설치되고 대여양곡 저장창고인 둔고(屯庫)가 설치되었다. 사람들이 둔창내(屯倉內)라 부르지 않고 둔내라 부른데서 1937년둔내면으로 개칭 되었다.

이 때 두원 · 둔방내 · 마암 · 삽교 · 석문 · 영랑 · 우용 11개 리를 관할하였다. 1973년영랑리 일부가 안흥면에 이관되었고, 안흥면 궁종리, 갑천면 태기리와 신대리 일부가 편입되었다.

북동쪽 군계에 차령산맥에 속하는 태기산을 비롯한 1,000m 내외의 험준한 산지가 많아 고원지대를 이룬다. 태기산에서 발원한 주천강이 석문천(石門川)과 합류하여 남쪽으로 흘러 그 유역에서만 벼농사가 이루어진다.

주요 농산물은 고랭지채소 · 약초 · 잎담배 · 옥수수 · 감자 · 인삼 등의 밭작물이 많이 생산된다. 특히, 옥수수 · 감자 · 채소 · 대추 등은 군내 1위를 차지한다.

교통은 영동고속국도가 면의 중앙부를 동서로 달리고, 서울∼강릉간의 국도가 지난다. 한편 군도도 발달되어 4번이 횡성읍 읍상리∼화동리, 6번이 갑천면 추동리∼마암리, 11번이 자포곡리∼화동리, 12번이 청일면 유동리∼마암리, 17번이 강림면 월현리∼두원리를 연결하는 등 여러 노선이 주변 여러 지역과 연계되어 매우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현천리에 고분 · 고인돌, 둔방내리에 선사유적 · 샘골사지 · 둔창지(屯倉址), 영랑리에 봉화대와 고분, 화동리에 덕고산성지(德高山城址) · 낙수대(落水臺) 등이 있다. 궁종리에 횡성고씨(橫城高氏), 강릉김씨, 석문리에 청주김씨, 자포곡리에 연안김씨 등의 동족마을이 있다. 두원리 술이봉 일대에는 스키장 · 골프장 · 콘도미니엄 등 종합리조트가 개발되어 새로운 관광휴양지로 유명하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분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 교가 있다.

자포곡(自浦谷) · 현천(玄川) · 둔방내(屯坊內) · 영랑(永浪) · 조항(鳥項) · 우용(右用) · 두원(斗院) · 석문(石門) · 화동(禾洞) · 마암(馬巖) · 삽교(霅橋) · 궁종(弓宗) · 태기(泰岐) 등 13개 리가 있다.

  1. 서원면(書院面)

군의 서쪽 끝에 위치한 면. 면적 123.43㎢, 952세대, 인구 2,287명으로 남자 1,208명, 여자 1,079명이다(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창촌리이다.

본래 원주군(原州郡) 고모곡면(古毛曲面)이었으며, 1895년 지방 관제 개정에 의해 횡성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일(一) · 분일(分一) · 이(二) · 분이(分二) · 삼(三) · 사(四) 등 8개 리를 관할하였다. 1937년산현리에 있던 칠봉서원(七峰書院)의 이름을 따서 서원면이라 불렸다. 그리고 일 · 이 · 삼 · 사 · 오 · 육의 6개 리가 각각 산현(山峴) · 계 · 창촌 · 압곡 · 금대 및 유현으로 개칭되었으며, 분일리가 매호리(梅湖里)로, 분이리가 석화리로 고쳐졌다. 1983년산현 · 매호 및 압곡리의 일부가 원주군 호저면(好楮面)으로 이속되었다.

북동부는 산지지형이 탁월하다. 북부의 성지봉(聖地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섬강으로 흘러드는 서원천(書院川) 유역에 약간의 평지가 발달되어 있다. 군내에서 경지율이 가장 낮은 9%에 불과하며, 그 중 밭이 55%를 차지한다. 밭농사가 중심이고, 젖소사육과 양돈 · 양봉이 활발하며, 특산물로는 잣 · 표고버섯과 옹기그릇이 있다.

교통은 서울∼강릉 간의 6번 국도가 면의 북부를 동서로 지난다. 군도는 1번이 석화∼석고, 3번이 월송∼석화, 5번이 유현∼조원, 7번이 용곡∼압곡, 8번이 구창∼서원, 15번이 주산∼유현을 연결하는 등 여러 노선이 개설되어 많이 개선되고 있다.

문화유적은 압곡리에 취석정지와 백로 및 왜가리번식지, 유현리에 풍수원 천주교회, 금대리에 의병총, 창촌리에 관창지 등이 있다. 압곡리에 강릉최씨, 금대리에 김해허씨 등의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창촌(倉村) · 금대(琴垈) · 석화(石花) · 유현(楡峴) · 압곡(鴨谷) · 옥계(玉溪) 등 6개 리가 있다.

  1. 안흥면(安興面)

군의 남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96.37㎢, 1,082세대, 인구 2,618명으로 남자 1,321명, 여자 1,297명이다(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안흥리이다.

본래 실미원(實美院)의 이름을 따서 실미면(實美面)이라 하였다가, 조선시대에 정곡(井谷)의 이름을 따서 정곡면(井谷面)으로 개명되어, 산전 · 가좌(佳佐) · 정금 · 궁종(弓宗) · 대미원(大美院) · 소사비(所沙非) 등 10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상대미원 · 중대미원 · 하대미원 · 상가좌곡 · 하가좌곡 · 상산전 등 17개 리로 개편되었으며, 1937년안흥역(安興驛)의 이름을 따서 안흥면으로 불렸다. 1953년정금리에 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63년영월군 수주면의 강림 · 부곡 · 월현 등 3개 리가 편입되었으며 그 중심지인 강림리에 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73년하궁 · 정금 · 산전 · 용둔 · 상하가, 하대 · 상대리 등이 우천면에, 궁종리를 둔내면에 각각 이속되었으며, 둔내면 영랑리 일부가 본 면에 편입되었다. 1989년우천면 오원리 일부가 편입되었고, 4월 1일 강림출장소 관내의 3개 리가 강림면으로 승격 · 분리되었다.

남쪽 면계에 차령산맥이 남서방향으로 지나고 있어 백덕산 · 삿갓봉(1,029m) · 사자산 · 매화산(1,084m) 등 연봉으로 둘러싸여 거의가 산지이다. 중앙부를 남류하는 주천강(酒泉江)과 상안천(上安川) 유역에 좁은 평지가 펼쳐진다. 따라서 농업은 평지에서 약간의 벼농사가 이루어질 뿐, 밭농사가 중심이다.

주요 농산물은 잡곡 · 채소 등이고, 산나물 · 약초의 생산도 많다. 소사리에는 우유가공공장이 있다.

교통은 42번 국도가 서울∼강릉 및 동해 지역과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였으나, 영동고속국도가 우천면과 둔내면을 지나 개통되어 그 기능이 쇠퇴되었다. 그러나, 1994년 12월 42번 국도의 문치(門峙)에 터널이 개통됨과 동시에 완전 포장되어 이 지역의 발전이 기대된다.

영동고속국도는 북부의 소사리를 지나고 있다. 군도는 13번이 지구리와 갑천면 포동까지, 강림면 울현리와 둔내면 두원리를 연결하는 17번이 면의 중앙을 남북으로 지나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안흥리에 선사유적지 · 실미원지(實美院址) · 안흥역지(安興驛址), 지구리에 동창지(東倉址) 등이 있다. 지구리에 경주이씨, 가천리에 강릉함씨(江陵咸氏), 안흥리에 해주오씨 등의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분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2개 교가 있다.

안흥(安興) · 가천(佳川) · 상안(上安) · 지구(池邱) · 소사(所思) · 송한(松寒) · 성산(城山) 등 7개 리가 있다.

  1. 우천면(隅川面)

군의 중앙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94.81㎢, 1,926세대, 인구 4, 691명으로 남자 2,409명, 여자 2,282명이다(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우항리이다.

본래 ‘내’의 이름을 따서 우내면(隅內面)이라 불리다가, 우천면으로 개칭되었고 정암(正庵) · 두곡 · 상수남(上水南) · 중수남 · 하수남 · 법주 · 백달 등의 8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청룡면(靑龍面)의 남산(南山) · 생운(生雲) · 조곡(鳥谷) · 추동(楸洞) 등의 4개 리가 병합되었다. 1940년상수남리가 우항리로, 중수남리가 양적리로, 하수남리가 문암리로 개칭되었다. 1973년조곡 · 생운 · 남산리가 횡성면으로 이속되었으며, 안흥면의 하궁 · 정금 · 상전 · 용둔 · 상하가 등 7개 리가 편입되었다.

대부분의 지역이 구릉성 산지를 이루며, 죽림산에서 발원한 전천과 매화산에서 발원한 학곡천(鶴谷川)이 흐르면서 연안에 우항 · 문암 · 두곡 일대에 곡저평야(谷低平野)가 발달되어 중요한 생활무대를 이룬다.

주요 농산물은 쌀 · 잡곡 · 잎담배 및 사과 · 복숭아 등이다. 잣의 생산도 많고 양계 · 양봉도 활발하다. 1988년 5월양적리에 우천농공단지가 지정, 조성되었고, 1993년 1월하대리와 상하가리 일대에 지방공단인 횡성공단이 지정 · 조성되고 있어 이 지역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교통은 영동고속국도가 면의 중앙부를 동서로 지나며, 새말인터체인지가 있어 서울과도 1일 생활권으로 되어 있다. 42번 국도가 면의 남부를 지나 원주∼안흥과 연결되고, 442번 지방도가 횡성∼우항과 이어진다. 한편, 군도는 10번이 묵계∼법주, 13번이 청일면 유동리와 갑천면 포동리와 연결되면서 면의 동부를 지나고 있어 매우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정금리에 개원사지(開元寺址), 오원리에 오원역지(烏原驛址), 정금리에는 향토민속박물관이 있다. 정암리에는 횡성조씨, 두곡리에는 원주원씨(原州元氏), 산전리에는 밀양박씨의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우항(牛項) · 두곡(杜谷) · 법주(法周) · 백달(白0xBB53) · 오원(烏原) · 양적(陽赤) · 문암(文巖) · 용둔(龍屯) · 상하가(上下佳) · 상대(上大) · 하대(下大) · 정금(鼎金) · 하궁(下弓) · 산전(山田) 등 14개 리가 있다.

  1. 청일면(晴日面)

군의 북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133.67㎢, 1,074세대, 인구 2,420명으로 남자 1,199명, 여자 1,221명이다(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유동리이다.

본래 횡성군 지역으로 대관대리(大官垈里)에 있는 개나리굴〔狗出窟〕의 이름을 따서 개나리라 하다가, 그 음이 좋지 못하므로 개나리의 준말인 ‘갠날’, 즉 청일(晴日)로 고쳐져 청일면이 되었으며, 율동(栗洞) · 유동 · 춘당 · 율실 등의 7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대관대 · 추동(秋洞) · 전촌(筌村) · 삼거리(三巨里)가 합쳐져 11개 리를 관할하였다. 1973년율동 · 삼거 · 전촌 · 추동 등 6개 리가 갑천면(甲川面)에 이속되었으며, 갑천면의 유평 · 갑천 · 고시 등 3개 리와 신대리의 일부가 편입되었다.

북쪽에 발교산 · 수리봉 · 운무산, 동쪽 봉복산(鳳腹山, 1,022m) 등 산지가 대부분이다. 봉명리와 율실리에서 발원한 유동천(柳洞川)과 태기산에서 발원한 갑천이 남서방향으로 흐르며 연안에 약간의 평지가 있을 뿐이다. 주요 농산물은 홉 · 인삼 · 옥수수 · 감자 등이 있고, 산나물과 버섯류가 많이 난다.

교통은 441번 지방도가 횡성 · 갑천 · 홍천군 서서면으로 이어지면서 본 면의 서부를 남북으로 지나고, 군도는 4번이 읍산∼둔내 화동으로 이어지면서 본 면의 중앙을 동서로 지난다. 12번이 유동리에서 둔내면 마암리와 연결되나 불편한 편이다. 문화유적은 신대리에 사지와 삼층석탑, 유동리에 고인돌유적, 율실리에 운무산성지(雲霧山城址)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분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유동(柳洞) · 봉명(鳳鳴) · 율실(栗實) · 춘당(春堂) · 초현(草峴) · 유평(楡坪) · 갑천(甲川) · 고시(古時) · 신대(新垈) 등 9개 리가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횡성군통계연보』(횡성군, 2008)
『강원의 설화Ⅱ』(강원도, 2006)
『지방행정구역요람』(행정자치부, 2000)
『강원향토대관』(강원도민일보사, 1999)
『강원도사』(강원도청, 1995)
『한국구비문학대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횡성의 맥』(횡성군, 1983)
『한국지명요람』(건설부국립지리원, 1983)
『한국민요집』(임동권, 집문당, 1981)
『횡성군지』(횡성군청, 1980)
『한국민속종합보고서』(문화재관리국, 1977)
『태백의 읍면』(강원일보사, 1975)
『강원총람』(강원도, 1975)
『한국지명총람』(한글학회, 1967)
『횡성군지』(횡성군, 1967)
횡성군(http://www.hsg.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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