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구(서울특별시) ((서울))

강서구청
강서구청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서울특별시 남서부에 위치한 구.
정의
서울특별시 남서부에 위치한 구.
개관

동쪽은 양천구·영등포구·마포구, 서쪽은 경기도 부천시, 남쪽은 양천구, 북쪽은 경기도 고양시와 접해 있다. 위치는 동경 126°45'~126°52', 북위 37°31'~37°35'이다. 면적은 41.43㎢이고, 인구는 58만 9074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20개 행정동(13개 법정동)이 있으며, 구청은 서울특별시 강서구 화곡6동에 있다.

자연환경

한강 하안(河岸)의 김포평야에 속하는 지역으로 선캄브리아기에 속하는 화강편마암·호상편마암 등의 기반암이 오랫동안 침식을 받아 이루어진 구릉지이다. 북쪽의 한강 하안 일대는 두터운 퇴적층이 발달한 범람원지대로 제방을 구축하여 비옥한 농경지로 이용해온 곳이었다.

구릉지에 개화산(131.2m), 매봉산(117.7m), 우장산(93.6m), 궁산(74.8m), 까치산(75m) 등 낮은 잔구가 남아 있다. 이 산들을 중심으로 완경사지(緩傾斜地)가 넓게 펼쳐져 있다. 또한 북류하여 한강으로 유입하는 가양천, 방화천 등의 하천이 있는데 특히 방화천은 한강의 역호수위(逆弧水位)를 이용한 관개수로가 발달되어 있다.

연평균 기온은 13.3℃, 1월 평균기온은 0.4℃, 8월 평균기온은 26.5℃, 연 강수량은 1,212.3㎜이다.

역사

최초의 지명은 “제차파의(齊次巴衣)”로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등장한다. 제차(齊次)는 제계(齊戒)로 제사를 말하며 파의(巴衣)는 ‘바위’를 뜻하는 고대 언어로 즉 ‘제사를 드리는 바위’이다. 한성 백제 때 백제의 왕이 허가바위 굴속에서 토지 신에게 풍요로움을 기원하며 제사를 드리던 곳이다. 이후 제차파의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강서구는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점령했던 지역으로 검포현(黔浦縣)과 제차파의평회파(齊次巴衣平淮把)·동자홀(童子忽)·수이홀현(首爾忽縣)의 5개 현을 두었다. 통일신라시대인 757년(경덕왕 16)에 검포를 김포현(金浦縣)으로 고쳐 장제군(長堤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1018년(현종 9)에는 양광도(楊廣道)에 속하여 수주(樹州: 현 부천시)에 딸렸으며 1391년(공양왕 3)에 경기를 좌·우도로 나눌 때 양천현을 제외한 나머지 현은 경기우도에 편입되었다.

1414년(태종 14) 김포와 양천(陽川) 두 현을 합하여 금양현(衿陽縣)이라 하였다. 이 해 10월에 두 현을 다시 나눌 때 김포는 부평부(富平府)에 편입되었다가 1416년에 김포현으로 복귀되었다. 1632년(인조 10)에 군으로 승격되었다가 1895년(고종 32) 전국을 23부로 나눌 때 김포·통진(通津)·양천(陽川)의 3개 군이 되었는데 강서구 지역은 김포군과 부천시 북단의 일부였다. 특히 양천고성지는 궁산에 위치하는 약 29,370㎡ 넓이의 옛 성터로 축성연대는 알 수 없으나 역사의 흐름에 비추어볼 때 백제가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쌓은 성으로 조선 성종 때까지 218m의 요새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 교육문화를 주도해온 문화유산으로 유가(儒家)의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제사를 모시는 문묘행사와 지방 향리들의 자제를 교육시키던 기관인 양천향교가 있다.

1914년 일제가 전국의 부·군·면을 통폐합할 때 통진·양천의 2군은 김포군으로 병합되었다.

1963년 경기도 김포군에서 서울로 편입된 이래 영등포구에 속했으나 1977년 강서구로 분리·신설되었다. 중심지역은 화곡동으로, 서울시가 부도심의 하나로 개발한 곳이다. 화곡동·가양동 일대에는 대단위 주택 부지가 개발되어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었다. 안양천 주변의 염창동·목동도 거의 아파트·연립주택 등 공동주택 단지가 되었다. 강서구는 날로 증가하는 인구의 분산과 서울특별시 남서부 지역의 균형 있는 발전을 위해 계획되었던 목동신시가지계획이 마무리되자 1988년 목동·신정동·신월동의 15개 행정동을 따로 관할하는 양천구를 분구 신설하였다. 김포공항을 중심으로 한 서부지역은 아직 농경지가 남아 있어 서울의 대표적인 농업지역이었으나 대규모 아파트가 조성되어 주택지구를 이루고 있다. 관할구역은 염창동, 등촌1∼3동, 화곡본동, 화곡1∼8동, 가양1∼3동, 발산1∼2동, 공항동, 방화1∼3동의 20개 동이다. 법정동으로 마곡동·과해동·내발산동·외발산동·오곡동·오쇠동이 있다.

유물·유적

개화산 약사사(藥師寺) 경내에 있는 약사사 삼층석탑(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1980년 지정)과 약사사 석불입상(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1980년 지정)은 고려 중기 탑파건축(塔婆建築)과 고려 말기 석불의 변천과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풍산 심씨 문정공파 묘역(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1991년 지정)은 중종 때 정국공신 심정(沈貞)과 그 후손인 심사손(沈思遜)·심사순(沈思順) 형제와 손자 심수경(沈守慶) 등 풍산 심씨 가문의 분묘 약 50여기가 있는 묘역이다.

김덕원묘 출토 의복 일괄(보물, 1980년 지정)은 1662년(현종 3)에 정시에 급제하여 1689년에는 우의정을 지낸 김덕원(金德遠)과 부인의 합장묘로, 조선 중기 상류사회의 복식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서울 양천고성지(사적, 1992년 지정)는 가양동 양천향교지 뒷산인 궁산에 위치한 옛 성터로 삼국시대 이래 서북대안의 행주산성, 파주의 오두산성 등과 더불어 한강 하구를 지키던 요새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이 주둔하였고, 한국전쟁 때 미군과 국군이 차례로 주둔함으로써 산 정상이 심하게 변형되었다. 1994년에는 산 정상 동편에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소악루(小岳樓)가 아름답게 복원되어 강서구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양천향교(陽川鄕校)는 조선시대 교육문화를 주도해 온 문화유산으로 유가, 공자를 비롯한 동양 5성과 송조 4현 및 동국 18현 등 성현들의 제사를 모시는 문묘행사를 담당하며, 조선조 공립 중등교육기관으로 지방향리들의 자제를 교육하는 기관이었다. 1411년(태종 12)에 창건되었고 1981년에 복원하였다. 양천향교 터가 1990년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허가바위(서울특별시 기념물, 1991년 지정)는 탑산 아래 있는 천연적인 바위동굴로 옛날 석기시대 사람들이 한강가에서 조개와 물고기를 잡으며 이곳에서 살았으리라 짐작되는 혈거동굴이다. 이 동굴은 올림픽대로가 건설되면서 육지로 변하였으며 현재는 영등포공고 정문 앞에 위치한다. 강서구의 최초 지명은 재차파의현(齊次巴衣縣)으로 ‘제사 드리는 바위’라는 의미를 지님으로서 강서구 최초의 지명이 이곳 허가바위로부터 나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양천 허씨(陽川 許氏)의 시조 ‘허선문(許宣文)’이 태어났다는 설화가 있기 때문에 이 동굴을 양천 허씨의 발상지라고 부른다. 양천 허씨의 자손은 번창하여 조선 세조 때 북병사로 이시애(李施愛亂)의 난을 평정한 허종, 『동의보감』을 저술한 의성 허준, 허옹, 허침 등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특히 허가바위는 구암(허준)선생이 『동의보감』을 집필하였고 또한 생을 마친 곳이기도 하다.

『진산세고(晉山世稿)』는 1998년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세계 최초의 화훼재배 전문 기술 서적으로 1476년(성종 7)에 강희안(姜希顔)이 지은 것이다. 『신찬벽온방(新纂辟溫方)』은 2006년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1613년(광해군 5)에 허준(許浚)이 왕명을 받들어 새로 편찬한 책이다. 『구급간이방(救急簡易方』권6은 2006년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1489년에 편찬 간행한 의서로서 질병을 중풍, 두통 등 127종으로 나누고 그 치료 방문을 모아 엮은 것이다.

조선장(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1992년 지정)은 전통 배인 한선을 만드는 기술로서 남한강과 북한강이 교차하여 교통과 상업의 거점이던 배알머리에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기능보유자는 방화동의 박정옥이다.

교육·문화

조상들의 교육문화 산실이었던 양천향교는 강서구민은 물론 서울시민들의 정신적 근간으로 자리 잡아 옛 선비정신을 되살리며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정신적, 교육적 가치를 드높이는 교육기관이자 문화유산이다. 양천향교에서는 봄과 가을 2회에 걸쳐 석전대제를 지내고 있으며, 이와 함께 지역주민과 초·중학생을 대상으로 한문과 서예 및 사군자를 가르치는 등 옛 전통문화 재현에 노력하고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2015년 현재 초등학교 36개교, 중학교 22개교, 고등학교 23개교, 특수학교 1개교가 있다. 직업전문학교로 시사전문학교, 서울호서직업전문학교가 있으며, 전문대학은 서울강서대학, 대학은 그리스도대학이 있다. 습지생태공원은 담수지, 저습지, 관찰로 등 습지생태계를 복원하여 하천의 자연정화기능을 제공하고 시민들에게 자연관찰 학습장의 기회를 주고 있다. 강서정보도서관, 강서문화센터, 염창동지역정보센터, 개화정보화마을 등을 운영하여 문화와 사회, 정보에 힘쓰고 있다.

문화시설로는 공연장, 문화의집, 전시관, 영화관, 도서관 등을 비롯하여 지역문화 증진을 위해 활동하는 강서문화원이 있다. 구민회관 대강당은 종합공연장 구실을 하며 연극·영화·음악회 등의 공연과 전시실로 이용되고 있고, 강서청소년회관, 강서문화센터 등 문화 활동에 이용되고 있다. 강서구립합창단, 강서구립금관5중주단(맥파이브라스앙상블)이 활동하고 있다. 영화관은 김포공항에 위치한 강서구 최대의 멀티플렉스 9개관 엠파크가 있다. 지역 언론매체로는 강서구보, 강서까치뉴스가 있다.

갤러리 서(西)는 다양한 장르의 우수한 예술작품을 가까운 곳에서 감상할 수 있는 생활 속의 문화 공간이다. 허준박물관은 구암 허준 선생의 희생적인 삶과 의술에 대한 열정을 알리며 생활 한방 체험 프로그램 및 전문적인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강서구민올림픽체육센터는 수영장, 관람석, 청소년교육장, 헬스장, 유아방, 체육관, 탁구장, 에어로빅장, 운동처방실 등의 각종 체육시설이 설치된 종합관이다. 습지생태공원 내에 축구장, 농구장, 게이트볼장 및 육상트랙 등의 시설을 갖추어 지역주민의 여가와 스포츠 공간으로서의 기능하고 있다. 구민회관, 문화센터, 청소년수련관 등에서 실내 체육관을 갖추고 있다.

민속

도당제(都堂祭)는 개화산 정상에 오방기를 꽂고 산신을 꽃가마에 태워 제단으로 인도해 마을의 안녕과 부흥을 축원하고 마을의 일체감을 도모하기 위하여 매년 10월 1일에 치르는 산신제이다. 이때 산 정상에 위치한 군부대 내에서도 ‘주룡도사제’를 함께 지낸다. 강서구에서는 개화산 산신제 외에도 우장산 도당제, 검덕산 도당제, 증미산 산신제, 궁산 산신제 등이 10월을 전후하여 열리고 있다.

설화·민요

강서구에는 곰다래길, 우장산 약수터 소나무, 영벽정(暎碧亭), 초록동자 이야기 등의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 중에서 귀신바위와 김말손(金末孫) 장군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귀신바위가 마을을 향해 굴러내려 와서 지나가던 한 농부를 깔아 죽이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날 이후 마을 사람들은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집 밖 출입을 삼가게 되었고 마을 분위기도 점점 스산해져갔다. 한편 사람 죽인 귀신바위 이야기는 이웃동네로 계속 퍼졌고 마침내 한양에 사는 김말손 장군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소문을 들은 김 장군은 무기를 준비해서 염창동에 있는 귀신바위를 찾아갔다. “마을 사람을 괴롭히는 이 요상한 귀신아, 어서 나와 내 활을 받아라”고 장군이 커다란 소리로 귀신바위 앞에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갑자기 바위가 빛을 내면서 장군에게 달려들었다. 장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굴러오는 바위를 향해 활을 쏘았다. 장군에게 굴러오던 바위는 쏜살같이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지 못하고 피를 흘리며 그 자리에 떨어져 죽었다. 결국 김 장군의 용감한 행동으로 바위에 붙은 귀신은 죽었고 마을도 다시 평화를 찾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귀신을 잡아준 장군을 기리기 위해 귀신바위 옆에 정자를 지었다. 이 정자가 바로 ‘영벽정(暎碧亭)’이다.

산업·교통

강서구의 전체면적은 41.44㎢로 녹지지역은 56.4%, 상업지역은 0.3%, 주거지역이 33.3%이다. 주택지역·공업지역·개발제한구역·녹지구역 등으로 명확한 구분을 할 수 있는 도시구조 형태를 갖고 있다. 녹지가 다른 지역보다 비교적 많은 도시, 농촌 혼재 지역으로 김포평야 언저리에 위치한 가양동·방화동·외발산동 일대가 전형적인 농촌지역으로 품질 좋은 김포미의 산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주택지역은 강서구의 중심지인 화곡본동의 대로변에 가지런히 분포되어 있다. 교통의 왕래가 잦은 화곡1동 아파트 간선도로 연변과, 공항로와 남부순환로가 만나는 공항동·방화2동의 주택가 중심지에 대규모의 상가가 형성되어 있다. 농경지였던 가양동, 방화동, 마곡동 등에 아파트가 건립되어 주택지구로 변모되었다.

경인고속도로와 남부순환도로가 관통하여 서울과 경기도의 교통 중심지를 이룬다. 올림픽대로는 서쪽의 김포공항에서부터 동쪽의 고덕동에 이르는 동서간 교통의 중요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공항로가 성산대교와 연결되고 까치산 터널의 개통으로 공항로와 경인고속도로가 직결되었으며, 남부순환도로와 나란히 달리는 강서로가 완공되어 주변 교통이 편리해졌다. 양천길은 개화로와 이어져 행주대교를 거쳐 경기도 고양시, 김포시, 강화로 나갈 수 있다.

주요 도로로는 경인고속도로와 남부순환로가 서울·경기도를 연결하여 주며, 올림픽대로는 서울의 동서 간 교통처리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공항로, 강서로, 등촌로, 개화로와 함께 양천길, 개화동길, 곰다래길, 방화동길, 까치산길 등이 있다.

1996년 12월 지하철 5호선 여의도역∼왕십리역의 개통으로 강서·강동 지역을 관통하게 되었다. 지하철 9호선은 김포공항∼종합운동장∼방이동까지 연결되는 동서축 노선이다. 한편, 서울역에서 인천국제공항으로 이어지는 공항철도도 강서구를 통과한다.

관광

푸른 녹지가 다른 지역보다 비교적 많으며 도시와 농촌이 섞인 쾌적한 곳으로 옛 전통과 선비정신이 살아 숨쉬는 지역이다. 우장산 근린공원 문화광장, 매화공원, 우장공원, 구암공원 등 도시인들의 정서함양을 위해 자연과 문화를 쉽게 접하면서 생활 속의 여유를 누릴 수 있도록 조성되었다.

1995년 개설된 화곡 그랜드마트는 강서·양천지역 최초의 지역토착 대형할인점이며, 강서그랜드마트가 있다. 숙박시설로는 한국청소년단체협의회가 2000년 국제 청소년센터인 드림텔을 개원하였다. 객실과 각종 세미나, 연회 및 기업체의 연수가 가능한 최신 시설의 세미나실, 연회장, 레스토랑, 커피숍, 실내수영장, 헬스장 등 부대업장을 갖추고 있다. 이 밖에 푸른 자연과 맑은 공기에 둘러싸여 있는 붐호텔, 호텔에어포트, 메이필드호텔, 호텔노스탈자, 리버파크, 뉴리젠트호텔, 그린월드 등이 있다.

송화골목시장, 동남부시장, 서남부시장, 화곡본동시장, 까치산시장, 화곡중앙골목시장 등 17개의 시장이 있다. 등촌동에서 시작된 등촌칼국수는 근처 김포공항의 근무자들에게 맛있다고 입소문이 퍼져 유명해져 현재 전국적으로 체인점이 있다.

구암 허준 축제는 강서구를 동양의학의 성지로 가꾸어 전 세계 한의학의 메카로 조성하기 위해 1999년부터 매년 허준공원에서 개최하고 있다. 또한 동의보감진서의(東醫寶鑑進書儀)는 국조보감감인청의궤(國朝寶鑑監印廳儀軌)에 기록되어 있는 절차를 바탕으로 어옥쇄를 찍고 역대 임금의 위패를 모신 종묘에 가서 보고 드리던 옛 궁중의식을 재현한 행사이다. 석전제는 양천향교에서 충효사상 고취와 조상들의 생활풍습을 재현시켜 잊혀져가는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행사이다. 공자를 위시한 27성현을 추모하고 덕을 기리는 행사로 매년 2회 춘기와 추기에 지낸다. 겸재 진경 사생대회는 소악루 일대가 겸재선생이 작품 활동을 한 ‘진경산수화’의 발상지인 것을 기념하여 겸재의 회화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궁산에서 진경사생대회를 개최한다.

동(洞)
  1. 가양동(加陽洞)

강서구의 동쪽에 위치한 동이다. 북쪽은 올림픽대로를 끝으로 한강에 접해 있고, 서쪽은 궁산(宮山)의 능선을 경계로 마곡동과 이웃하며, 남쪽은 공항로가 경계가 되어 내발산동·외발산동·등촌동, 동쪽은 염창동과 접해 있다. 가마동(加麻洞)과 고양리(古陽里)가 합쳐지면서 가마동의 ‘가(加)’자와 고양리의 ‘양(陽)’자를 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1963년 영등포구에 편입되면서 가양동이 되었고, 1977년 강서구의 신설로 이에 속하게 되었다. 이 동은 가양1∼3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곡동도 관할하고 있다. 가양 3동은 한강변의 뻘이었는데 올림픽대로가 개설되면서 비로소 육지가 된 곳이다. 인구 증가율이 다른 지역보다 낮아 동 면적의 많은 부분이 농경지로 되어 있었으나, 가양 지구 개발로 많은 아파트가 들어섰고, 한강변의 습지를 메워 택지를 조성함으로써 탑산을 중심으로 새로운 주거지가 형성되었다. 산이라기보다는 구릉에 가까운 탑산에는 공암나루터가 있었고, 양천 허씨의 발상지로 알려진 허가바위가 있다. 조선시대의 명의 허준(許浚)의 생가 터와 양천향교도 가양 지구 옆에 있다.

  1. 개화동(開花洞)

강서구의 서북쪽에 위치한 동으로 북쪽은 경기도 고양군 지도읍, 동쪽은 방화동, 남쪽은 과해동, 서쪽은 김포시 고촌읍 전호리와 인천시 북구 하야동과 접해 있다. 이 마을 면적 절반 가까이 차지하는 개화산(開花山, 높이 130m)이 있는 데서 동명이 유래하였다. 1914년 경기도 김포군 양서면에 소속되어 개화리가 되었다. 1963년 영등포구에 편입되고 양서출장소가 설치되었는데 개화동은 양서출장소 관할 아래 있었다. 1977년 영등포구로부터 강서구가 분리 신설되어 양서출장소가 폐지됨에 따라 개화동은 강서구의 관할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체면적의 42%가 산지이며, 김포쌀의 산지로 유명하다. 공암나루는 서울특별시계에서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 나루로 강화도 쪽으로 가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였다.

  1. 마곡동(麻谷洞)

강서구의 북쪽에 위치한 동으로 동쪽은 가양동, 서쪽은 방화동, 북쪽은 한강, 남쪽은 공항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옛날 이 마을 일대에서 삼[麻]을 많이 재배했던 데서 유래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김포군 양동면 마곡리가 되었고, 1963년 서울특별시의 확장으로 영등포구 양동출장소 마곡동이 되었다. 1977년 영등포구에서 분리·독립되어 강서구 마곡동이 되었다. 1985년 마곡동 일부가 가양동과 공항동에 편입되었다. 마곡동은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가양 1동 관할 하에 있다. 공공시설로는 가양하수처리사업소, 배수펌프장 등이 있다.

  1. 공항동(空港洞)

강서구의 중앙에 위치한 동이다. 동쪽은 외발산동, 서쪽은 과해동, 남쪽은 오곡동·오쇠동·방화동과 접해 있다. 이 마을에 김포비행장이 있는 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1963년 영등포구에 속하면서 공항동으로 개칭되었으며, 1977년 강서구가 분리 신설되자 공항동은 강서구 소속이 되었다. 공항이 건설되기 이전까지는 넓은 김포평야의 한가운데 비교적 습지가 적은 밭 지역으로 형성되어 주거지역으로 안성맞춤이었다. 따라서 주민들은 이곳 공항동 일대에 거주하면서 농경지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김포공항은 서울의 관문이며, 공항로, 남부순환로, 올림픽대로 등이 진입하는 개화로의 종점으로 교통의 중심지이다.

  1. 오곡동(五谷洞)

강서구의 서쪽 끝에 위치한 동으로 북쪽은 과해동·공항동, 동쪽은 오쇠동, 서쪽은 부천시 대장동, 남쪽은 부천시 고강동·원종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지금의 김포공항 자리에 골짜기 다섯 개가 있었던 데서 유래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주화곶면 오곡리와 내촌을 통합하여 오곡리가 되었다. 1963년 서울특별시의 확장으로 영등포구 오곡동이 되었다가 1977년 9월 강서구 오곡동이 되었다. 오곡동은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공항동 관할 하에 있다.

  1. 오쇠동(五釗洞)

강서구의 남쪽에 위치한 동으로 북쪽은 공항동, 동쪽과 남쪽은 경기도 부천시, 서쪽은 오곡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노(努)를 만들던 다섯 사람이 이곳에 도망 와서 숨어 살았던 데서 유래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부천군이 신설되어 부천군 오정면 오쇠리가 되었다. 1963년 서울특별시 확장으로 영등포구 오쇠동이 되었다가 1977년 강서구 오쇠동이 되었다. 오쇠동은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공항동 관할 하에 있다. 일부가 김포공항 확장 부지로 흡수되었으며, 흡수되기 전에는 부천으로 가는 길목이기 때문에 매우 번성하였다. 보호수로는 수령 400년, 높이 12m, 둘레 3m의 향나무가 있는데, 김포공항 확장 이전에는 해마다 당산제를 지냈다.

  1. 과해동(果海洞)

강서구의 서쪽에 위치한 동으로 북쪽은 개화동, 동쪽은 방화동, 남쪽은 오곡동, 서쪽은 인천광역시 북구 상야동과 접해 있다. 대한제국 때 경기도 양천군 가곡면 내과해리와 외과해리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양천군 내과해리, 외과해리, 신선리(新旋里), 장산리(獐山里) 등을 통합하여 김포군 양서면 과해리가 되었다. 1963년 서울특별시의 확장으로 영등포구 양서출장소 과해동이 되었다가, 1977년 강서구의 신설로 강서구에 편입되었다. 과해동은 법정동으로 1998년부터 행정동인 공항동 관할 하에 있다. 과해란 지명은 오이줄기가 바다로 향한 형국이라고 하여 과해(瓜海)라 하다가 한자가 바뀌어 과해(果海)가 되었다. 일부는 전형적인 농촌지역으로, 1923년과 1965∼1969년에 대대적인 경지 정리가 시행되었다.

  1. 등촌동(登村洞)

강서구의 동쪽에 위치한 동이다. 동쪽은 염창동, 서쪽은 내발산동, 남쪽은 화곡동, 북쪽은 가양동과 접해 있다. 1963년 영등포구 양동출장소 관할아래 있다가, 1968년 영등포구로 직할되었다. 1977년 강서구를 분구 신설하자 강서구에 편입되었다. 우장산 북쪽 공항로 건너의 드넓은 농경지로 얼마 전까지 김포공항에서 서울 시내로 들어가는 길 양쪽에 누런 벼이삭이 황금바다를 이루던 곳이었으나 1990년대 이후 택지 개발로 오늘날에는 고층빌딩과 고층아파트가 들어선 주상복합단지로 탈바꿈하였다. 농촌마을이었던 이 지역의 도시화가 시작된 것은, 1975년 제3차 경제개발계획 이후 서울특별시 전입 인구가 급증하자, 한강 남쪽 주택 개발사업을 추진하면서부터이다. 다른 지역에 비해 단독주택이 많으며, 국립동물검역소가 있다.

  1. 염창동(鹽倉洞)

강서구의 동쪽에 위치한 동이다. 동쪽은 목동과 안양천을 경계로 영등포구와 마주하고, 서쪽은 등촌동·가양동, 남쪽은 목동·화곡동, 북쪽은 한강과 접해 있다. 조선시대 말 서해안 염전(鹽田)으로부터 채취해 온 소금을 보관하기 위해 이곳에 소금 보관창고를 지은 데서 동명이 유래하였다. 1963년 영등포구에 편입되었고, 1977년 강서구 신설로 이에 속하게 되었다. 양천길이 동서로 관통하고 있으며 북쪽에 올림픽대로·한강과 연접한 지역으로 자연부락에서 공장지대로 발전하였고, 중소공장·노후건물 부지의 활발한 재건축사업으로 급속한 인구 유입, 주민 구성 및 생활수준이 다양화되고 공동주택이 계속 건축되고 있다. 소금배가 드나들던 염창탄도 없어졌고, 한강변에도 많은 변화가 있어 옛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지만 자연마을 이름에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소금장수를 상대로 한 주막거리를 주막거리, 염창 또는 시염창이라고 하였고, 마을 입구 장승이 있던 곳을 장승배기라고 하였다. 동의 유일한 산으로 남아 있는 염창산은 모양이 쥐가 웅크리고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쥐산으로도 불린다. 이 산은 양화진 근처에 있는 괭이산[仙遊峯]과 대칭되는 이름이다.

  1. 화곡동(禾谷洞)

강서구의 남쪽에 위치한 동이다. 동쪽은 등촌로를 경계로 양천구와 접해 있고, 서쪽은 우장산 능선을 경계로 발산 2동과 강서로를 경계로 발산 1동과 연해 있으며, 남쪽은 신월2동과 신정2동에 접해 있고, 북쪽은 공항로를 경계로 등촌로와 접해 있다. 땅이 기름져 벼가 잘되는 마을인 데서 동명이 유래하였다. 1963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편입되었고, 1977년 강서구 신설로 이에 속하게 되었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호랑이와 여우, 늑대 등 맹수들이 출몰하는 한적한 농촌이었으나, 늘어나는 강북 인구를 강남으로 분산 유치시키기 위해 산 전체에 국민주택들이 들어서고 화곡시범아파트가 세워지면서부터 오늘날 거대한 빌딩숲으로 변하였으며 강서구의 중심지가 되었다.

  1. 내발산동(內鉢山洞)

강서구의 중앙에 위치한 동이다. 내발산동의 동쪽은 화곡동, 서쪽은 외발산동, 남쪽은 화곡동, 북쪽은 가양동과 접해 있다. 이 마을의 주산(主山)인 수명산(壽命山)의 모습이 주발처럼 생겼으므로 ‘발산(鉢山)’이라는 데서 동명이 유래하였다. 발산의 안쪽이 내발산동이다. 1963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편입되었고, 1977년 강서구 신설로 이에 속하게 되었다. 내발산동은 우장산의 산록에 발달한 취락지이다.

  1. 외발산동(外鉢山洞)

강서구의 남쪽에 위치한 동이다. 발산동은 동쪽은 발산을 경계로 내발산동, 서쪽은 공항동, 남쪽은 신월동과 경기도 부천시, 북쪽은 가양동과 접해 있다. 이 마을의 주산(主山)인 수명산(壽命山)의 모습이 주발처럼 생겼으므로 ‘발산(鉢山)’이라는 데서 동명이 유래하였다. 바깥쪽에 형성된 마을은 외발산동이다. 1963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편입되었고, 1977년 강서구 신설로 이에 속하게 되었다.

  1. 방화동(傍花洞)

강서구의 북쪽에 위치한 동이다. 동쪽은 마곡동, 서쪽은 과해동과 경기도 고촌면과 연해 있고, 남쪽은 공항동, 북쪽은 개화동·한강과 접해 있다. 꽃이 피는 모습과 같이 생긴 개화산(開花山) 옆에 위치해 있어서 붙여진 데서 동명이 유래하였다. 1963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편입되었고, 1977년 강서구가 분리, 신설되면서 이에 속하게 되었다. 1970년대 이후 단독주택이 들어서다가 1992년 방화지구 택지개발계획에 의거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시가지로 형성되었다. 주거와 상업지구가 혼합된 지역이며, 방화동길을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되어 있다. 방화공원과 개화산공원이 있고, 개화산에는 봉수대가 있었는데 지금은 통신대가 주둔한다. 155번지에는 서울특별시지정보호수인 향나무가 있는데, 높이 14m, 둘레 2.6m, 수령은 200년이 넘는다.

참고문헌

『서울통계연보』(서울특별시, 2006)
『통계연보』(강서구청, 2005)
『서울민속대관』11(서울특별시, 1996)
『서울의 전래동명』(이재곤, 1994)
『서울민속대관』3(서울특별시, 1993)
『동명연혁고』15(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91)
『서울민속대관』1(서울특별시, 1990)
『서울의 가로명연혁』(서울특별시, 1986)
『서울의 전통문화』1, 2(서울특별시, 1982, 1986)
강서구(www.gangseo.seou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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