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 (Taiwan)

타이완의 국기
타이완의 국기
외교
지명/국가
유라시아 대륙 동남부와 태평양 서부의 사이에 놓여 있는 섬나라.
이칭
이칭
대만(臺灣), 중화민국(中華民國)
정의
유라시아 대륙 동남부와 태평양 서부의 사이에 놓여 있는 섬나라.
개설

타이완의 수도는 타이베이(臺北, Taipei)로, 타이완 섬 북부의 분지 내에 위치해 있고, 행정 구역은 12개 구(區)로 구분되어 있다. 타이베이 시민은 원주민·민남인(閩南人)·객가인(客家人)·외성인(外省人)·신이민·외국인 등으로 이루어져 있어 다원적 사회를 구성하고 있다. 타이베이의 기후는 아열대 지역에 속하여 연평균 기온이 23.6℃로 1년 내내 따뜻한 편이다. 타이베이는 타이완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이며 현대화된 국제도시로, 도시는 경제 건설이 진보하고 교통이 완비되어, 대형 국제회의와 전람 활동이 빈번하다. 타이베이의 표준시간은 중국 베이징[北京]과 동일하나, 서울보다 1시간이 늦다.

타이완 인구는 2341만 5126명(2015년)으로, 주민의 대부분은 한족(漢族)으로 총인구의 약 98%를 차지하고, 나머지는 타이완 원주민으로 약 2%이다. 98%의 한족 중 84%는 명·청 시기부터 이주해 온 대만인(臺灣人, 내성인 內省人)이고, 14%는 1949년을 전후해서 국민당 정부와 함께 이주해 온 대륙인(大陸人, 외성인 外省人)이다.

타이완 총인구의 69.94%가 도시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인구밀도는 1㎢ 당 637명으로 세계적으로 1천 만 이상의 인구 국가에서 제2위이다. 인구 구조에서, 15세 미만 유년 인구는 총인구의 16.95%를 점하고 비율이 점차 하락하고 있으며, 15∼64세의 노동 가능 인구는 72.62%이고, 65세 이상의 노년 인구는 10.43%를 점하고 있어 비율이 점차 상승하고 있다. 부양비율이 37.7%로 하락하고 있으며, 노령화 지수는 61.51%로 증가하였다. 출생률은 2007년의 8.92%에서 2008년의 8.64%로 떨어졌고, 동 기간 사망률은 6.16%에서 6.25%로 증가하여 자연 증가율은 2.76%에서 2.4로 하락하였다. 1984년부터 가임연령 여성의 총출산률이 인구대체 수준 2.1명보다 하락하였고, 2008년에는 1.07명으로 떨어졌다. 타이완의 평균수명은 점차 증가하여, 2007년 타이완 양성 평균수명은 78.38세이며, 그 중 남성은 75.46세, 여성은 81.72세이다. 2008년 등록된 출생 영아는 19만 8,733명으로, 그 중 남녀 영아 성비는 109.64이다.

타이완의 화폐 명칭은 신타이삐(新臺幣, New Taiwan Dollar, NT$)라고 불리고, 기본 단위는 위앤(元)이다. 지폐로는 1,000위앤, 500위앤, 100위앤의 세 종류가 있고, 동전으로는 50위앤, 10위앤, 5위앤, 1위앤의 네 종류가 있다.

타이완의 언어는 타이완 정부가 관할하는 타이완(臺灣)·진마(金馬) 지구 주민이 사용하는 언어로 남도어계(南道語系)와 한장어계(漢藏語系)로 구성되어 있다. 남도어의 사용자는 타이완의 원주민이고, 그 중에는 태아어(泰雅語)·추어(鄒語)·배만어(排灣語) 민족이 있고, 이들 언어는 타이완 섬과 타이완 섬 밖 즉 난위다오(蘭嶼島) 등에 분포되어 있다.

타이완의 한장어계는 주로 민어(閩語) 중의 민남(閩南) 방언과 객어(客語) 중의 해륙(海陸)·사현(四縣) 방언이고, 그 중에서 민남 방언을 말하는 사람이 대다수이다. 민남어·객가어 사용자는 대부분이 약 4백 년 동안의 복건(福建)·광동(廣東) 한족 이주민 후예이다. 그리고 1949년 국민정부의 타이완 천도와 함께 한 새로운 이주민은 대륙 각 성(省)의 출신이므로 어종(語種)도 복잡하지만, 대체로 모두 당시의 관화(官話, mandarinm), 즉 북경어(北京語)를 할 수 있었다. 타이완에서는 북경어를 국어(國語, Guoyu)로, 중국에서는 보통화(普通話, 표준어)로, 해외 화교들은 화어(華語)로도 칭한다. 교육의 보급에 따라, 북경어는 이미 타이완 각 민족의 공통어가 되었고 현재 타이완의 공식 표준어이며, 대표적인 방언으로는 민남어(閩南語)와 객가어(客家語)가 있고, 원주민은 그들의 고유어를 사용하고 있다.

공용 문자는 한자(漢字)를 사용하고, 고산족은 문자를 가지고 있지 않다.

국가 제도는 입헌공화국이고 국회는 일원제이며, 국가원수는 총통(總統)이고 현재 총통은 차이잉원(蔡英文, Tsai Ing wen, 2016년 5월 취임)이다. 1992년 8월 이전까지 우리나라와는 정식 수교 국가였으나, 1992년 8월 24일 한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국교를 수립하면서 한국과 중화민국의 수교 관계는 단절되었고, 1993년 7월 이후부터 한국은 타이완의 중화민국 정부와 비공식 외교관계를 새로 수립하여 유지하고 있다.

명칭 유래

타이완의 공식 국호는 중화민국(中華民國, the Republic of China, ROC)이지만, 올림픽 대회 또는 국제기구에 참가할 때는 중화타이베이(中華臺北, Chinese Taipei)라고도 하며,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나라에서는 보통 타이완(Taiwan) 혹은 타이완 정부로 칭한다.

자연환경

지리 형세에 있어, 타이완 섬은 양쪽 끝이 좁아지는 담배잎 모양을 하고 있으며, 아시아 대륙의 남동부에 위치하고, 타이완 해협을 사이에 두고 중국대륙과 마주하고 있다. 태평양 서안에 있는 독립적인 섬들 중 하나로 타이완 북쪽으로는 오키나와 섬과 일본이 있고, 남쪽으로는 필리핀이 위치한다. 태평양 서쪽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는 타이완은 먼 과거부터 지속되어온 지각운동으로 인해서 웅대한 산봉오리와 언덕, 평평한 분지, 구불구불 이어지는 해안선 등 자연 경관들이 만들어졌다. 타이완 섬의 동북에서 서남으로 이어진 중앙산맥(中央山脈)은 태평양 쪽으로 치우쳐져 있어 태평양 연안은 급격한 절벽 지형을 이루고, 중국대륙 쪽의 타이완 해협 연안은 완만한 구릉과 평원이 발달되어 있다. 중앙산맥에는 3,000m 내외의 높은 봉우리가 잇달아 솟아 있고, 서사면으로는 많은 지맥(支脈)이 뻗어 내린다. 주맥의 최고봉은 수고만산(秀姑巒山, Xiuguluan Shan: 3,833m)인데, 지맥인 위산산맥(玉山山脈)의 위산은 높이가 3,997m로 타이완의 최고봉이다.

타이완에서는 여러 유형의 자연 기후를 만날 수 있어, 열대성, 난대성, 온대성 기후가 공존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타이완의 사계절은 일반적으로 아열대성 기후에 속해, 날씨가 덥고 비가 많이 오며 바람이 많다.

타이완 섬에는 약 1만 8천 4백여 개의 야생종이 번식하고 있으며, 이 중 약 20% 이상의 종이 멸종위기에 처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사쿠라 연어, 타이완 산양, 타이완 원숭이, 타이완 흑곰, 파랑까치, 로얄 꿩, 풀 도마뱀 등이 있다.

역사

네덜란드 식민지 시기 이전

선사시대에는 말레이·인도네시아 계통의 종족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타이완 내의 약 500여 곳에서 선사유적지의 출토물이 발견되었다.

1590년 일단의 포루투갈 선단이 타이완에 도착한 후, 타이완 북부지역에 잠시 거주하였고, 타이완을 Ilha Formosa(아름다운 섬)라고 부르며 이 명칭으로 서양에 소개하였다.

네덜란드 식민지 시기(1624∼1662)

1624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타이완 남부에 Zeelandia 요새와 현재의 대남(臺南) 지역에 안평(安平)이라는 소규모 거주지를 건설하였다. 1642년부터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를 통해 타이완을 직접 관할하고 총통을 임명하여 중국인 및 토착인에 대해 과세를 실시하였다.

1644년 만주족의 명(明)나라 침입으로 중국대륙이 혼란에 휩싸이자, 중국 복건성 남부와 광동성 동부 지역의 많은 중국인들이 타이완으로 이주하였다.

반청 항쟁기(1662∼1683)

정성공(鄭成功)과 그의 아들 정경(鄭經)은 타이완에 진출하여 유교 교육을 실시하고 중국식 법제를 시행하는 등 타이완에 중국식 관습과 문화를 이식하였다. 그러나 1682년 하고 12세의 어린 아들이 그의 뒤를 승계하자, 청(淸)나라는 1683년 군대를 파견하여 타이완을 점령하였다.

청나라 통치 시기(1683∼1895)

제국주의 열강의 타이완에 대한 침탈이 계속되자 청나라는 심보정(沈葆楨) 및 정일창(丁日昌) 등을 파견하여 타이완의 계속적인 개발과 방어를 시도하면서, 1822년타이완을 청나라의 22번째 성(省)으로 편입시키고, 1823년유명전(劉銘傳)을 최초의 성장(省長)으로 파견하였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자 일본과의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청나라는 타이완을 일본에 할양하였다.

일본 식민지 시기(1895∼1945)

식민지 통치 50년 동안 일본은 타이완을 일본 본토에 대한 식량 공급기지 및 일본 공산품의 소비기지로 만들기 위한 정책을 지속적으로 실시하였다.

중국국민당 이주 시기(1949 이후)

1945년 8월 일본이 타이완을 연합국에 양도한 후, 국민당은 정부군을 타이완에 파견하면서 인수 작업을 실시하였다.

1949년 5월 중국국민당은 공산군의 공격이 거세지자 타이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30만명의 국민당 군대를 타이완에 진주시켰다. 같은 해 10월에는 광동(廣東) 등지의 대규모 접전에서 공산군에게 패배하자, 12월부터 타이완으로 중화민국의 정부를 완전히 이전하였다.

정치

정부 조직

타이완의 중앙정부는 선거민의 직접 선거에 의해서 총통(總統)·부총통(副總統)을 선출하고, 그 아래에 행정·입법·사법·고시·감찰의 5원(院)을 두어 각각 직권을 행사한다. 5개의 정부 조직에 의해 권력의 견제와 균형을 유지함으로 중화민국의 정치체제는 보통 5권 분립 제도라고 한다.

총통

총통은 국가원수로서, 임기는 4년이고, 연속으로 1회 연임할 수 있다.

행정원(行政院)은 국가의 최고 행정기관으로, 원장(院長) 1명은 총통이 직접 임명하고, 부총통 1명과 다수 정무위원(政務委員)은 모두 행정원 원장이 추천하여 총통이 임명하며, 이들이 공동으로 행정원을 구성한다.

입법원(立法院)은 국가의 최고 입법기관으로, 선거민에 의해 직접 선거로 선출되는 입법위원(立法委員)이 조직하며, 국민을 대표하여 입법권을 행사한다. 입법원은 행정원 원장에 대해 불신임안을 제출할 수 있다. 원장 1명과 부원장 1명은 입법위원의 선거에 의해 선출된다. 2008년부터 입법위원의 수는 225명에서 113명으로 감소되고, 임기는 4년이다.

사법원(司法院)은 국가의 최고 사법기관으로, 17명의 대법관(大法官)을 두고, 그 중 1명은 원장, 다른 1명은 부원장으로 총통이 추천하고 입법원의 동의를 받아 임명한다. 대법관은 종신직이고, 회의방식으로 「헌법」 해석 등의 직권을 행사하며, 헌법법정을 구성하여 총통·부총통의 탄핵 등 사항을 심리한다. 사법원은 각급 법원과 행정법원 및 공무원징계위원회를 설치한다.

고시원(考試院)은 국가 최고 고시기관으로, 원장 1명과 부원장 1명 및 고시위원(考試委員) 약간명을 두고, 임기는 6년이며, 총통이 추천하고 입법원의 동의를 얻어 임명한다. 고위위원은 독립적으로 직권을 행사하며, 주로 국가 고시, 공무원의 임면·고과·퇴직·상벌 등 직무를 수행한다.

감찰원(監察院)은 국가의 최고 감찰기관으로, 탄핵권·감사권 등을 행사한다. 감찰위원(監察委員) 29명을 두고, 그 중 원장 1명, 부원장 1명을 총통이 추천하고 입법원의 동의를 받아 임명하며, 임기는 6년이다.

최근 정세

민주적인 정권 교체

타이완 출신으로서 최초로 1988년 총통에 취임한 리 덩후이(李登輝, Li Denghui) 총통은 복수정당의 허용 등 민주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1991년 5월 중국공산당과의 내란상태 종식을 선언한 이후, 타이완의 민주화 진행은 계속되었다. 1992년 12월 최초 입법원에 대한 민주선거가 실시되고, 1996년 3월 최초의 직선제 총통 선거를 실시하여 리 덩후이가 총통으로 당선되었다.

2000년 3월 총통선거에서 야당 민진당(民進黨)의 후보 천 수이볜(陳水扁, Chen Shuibian)이 39.3%를 득표하여 총통으로 당선되어, 정권 교체가 실현되었다. 그리고 2004년 3월 20일 총통 선거에서 천 수이볜 총통이 50.12%의 지지를 얻어 연임에 성공하였다.

2008년 3월 22일 총통선거에서는 마 잉주중국국민당 후보가 765만여 표(약 58%)를 득표하여 총통으로 당선되어, 타이완에서 2차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2016년 1월 제14대 총통선거에서 민진당 차이잉원[蔡英文] 후보가 당선되었다. 차이잉원은 최초 여성 총통이다.

입법위원 선거

2001년 12월 제5기 입법위원 선거에서 민진당이 87석을 차지하여 제1당으로 도약하였다. 나머지 정당의 입법위원 의석은 국민당 68석, 친민당(親民黨) 46석, 대련(臺聯) 13석, 신당(新黨) 1석, 기타 10석이었다.

2004년 12월 제6기 입법위원 선거에서 야당(국민당, 친민당, 신당)이 입법원 의석 과반수(113석) 이상을 확보함으로써 여소야대 구도가 형성되었다.

2008년 1월 제7기 입법위원 선거에서 국민당 81석, 민진당 27석, 기타 5석을 확보하여, 국민당이 전체 의석(113석)의 2/3를 넘는 절대 다수를 확보하고, 득표율은 국민당 51.23%, 민진당 36.91%, 대련 3.53%이었다.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2005년 12월 23개 현(縣)·시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실시되어, 국민당은 14곳을 확보하여 6곳을 차지한 민진당보다 크게 승리하였다. 이 선거 이전에 민진당은 9곳, 국민당은 9곳에서 현·시 지방자치단체장을 확보하고 있었다.

마 잉주 정부의 양안정책과 대외정책

양안 정책

마 잉주(馬英九) 총통은 2008년 5월 20일 취임사에서, 양안관계에서 ‘불통·불독·불무(不統·不獨·不武)’의 ‘3불정책(三不政策)’을 강조하며, 1992년 합의된 ‘92공식(共識)’에 기초하여 양안이 민감한 정치적 문제는 뒤로 하고 경제교류를 우선적으로 증진할 것을 제의하였다.

또한 마 잉주 총통은 양안이 윈윈 전략에 입각하여 경제·무역·문화 교류의 정상화를 희망하고 ‘외교 휴전’을 제의하여, 양안 간 소모적인 외교 경쟁을 지양하고 타이완의 국제기구 가입에 협조해 줄 것을 기대하였다.

그리고 국민당 집권 이후 양안 간 긴장완화에 따라, 2008년 7월 4일부터 주말 직항 전세기를 통해 중국인의 타이완 관광이 시작되었으며, 타이완 측은 양안 교류를 통한 경제 발전을 적극 추진한다는 기본 입장 하에서, 타이완 기업의 중국 투자 제한을 완화시키고, 중국 자본의 타이완 투자 허용 등의 양안 교류 활성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대외정책

마 잉주 정권은 ‘존엄·자주·무실’을 기초로 대외관계를 개척하고 국제활동 공간을 확보하면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다한다는 기본 입장을 강조하였다.

한편 미국을 안보와 경제의 동반자로 중시하여 타이완·미국 관계를 강화하고 여타 국가와의 협력을 모색하며 기존 타이완 수교국과의 협조관계를 지속시킨다는 방침을 세웠다.

더욱이 중국과의 협조를 통해 종전의 양안 간 외교전을 피하면서 타이완의 국제사회에서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유엔·WHO 등 국제기구 참여를 추진한다는 입장을 확립하였다.

수교국 현황

2014년 현재 솔로몬군도, 투발루, 마샬군도, 팔라우, 키리바시, 나우루 등 아·태지역 6개국, 아프리카 지역 3개국, 유럽 지역 1개국, 중남미 지역 12개국 등 22개국과 수교하고 있다.

경제

특징

타이완은 정부 주도로 1960년대부터 시작된 수출 주도형 성장 전략을 통해 안정적인 경제 발전을 추진하여, 2007년에는 1인당 국민소득 17,294 달러, 외환보유고 2,914억 달러를 보유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경제 부국으로 부상하는 등 건실한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타이완의 산업구조는 127만여 개의 기업 중 97.7%가 중소기업으로, 전체 고용인력의 77%를 차지하고 있고, 중소기업에 우호적인 경영 환경이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가족 경영체제와 화교상권 네트워크가 타이완 경제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한편 타이완의 산업구조는 IT산업 등으로의 빠른 업종 전환에는 유리한 점이 있으나, 조선·자동차 등 거대 장치산업과 반도체 등 첨단산업에는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타이완의 산업은 컴퓨터·정보통신 등 중소기업을 바탕으로 한 OEM 수출을 통해 세계 IT분야에서 높은 시장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다. 타이완 정부는 신죽(新竹)·대남(臺南) 등지에 과학기술단지(Science·based Industrial Park)를 설치하여, 산·학·연 협조체제를 구축하고, 정보·통신·하이테크 산업을 유치함으로써 산업 경쟁력 제고에 노력하고 있다.

2002년부터 미국을 제치고 중국(홍콩 포함)이 타이완의 제1수출 대상국으로 부상하였으나, 타이완 기업들의 중국에 대한 투자 확대 및 생산 기지 이전 등으로 타이완 국내에서의 산업 공동화가 우려된다. 2007년 양안 간 교역규모(홍콩 포함)는 1,302억 달러(수출 1,004억 달러, 수입 298억 달러)에 달하였고, 대(對)중국 투자 누계 금액은 648억 달러로 공식 집계 되었으나, 실제로는 1,500억 달러를 초과하였다.

최근 동향

타이완 경제는 과거 50년 간 수출 주도를 통해 연평균 5%이상의 고속 성장을 계속하였으나, 천 쉐이밴 총통 집권 이후 세계적인 경기 침체 및 911 테러 사태 등의 영향으로 2001년에는 사상 최초의 마이너스 성장(·2.2%)을 기록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며, 그 이후 경제가 회복되는 추세이었다.

2004년에는 6.1%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이후, 2005년에는 고유가 등의 영향으로 4.1% 성장에 그쳤으나, 2006년에는 수출 증가 및 213억 달러의 무역흑자 등에 힘입어 4.9%대로 성장하였다

2007년 수출은 2,467억 달러로 전년대비 10.1%가 증가하고, 수입은 2,193억 달러로 전년 대비 8.2%가 증가하여, 무역수지는 약 222억 달러 흑자로 전년대비 28.4%의 증가에 힘입어, 경제성장률은 5.7%를 기록하였다.

2015년 현재 국민총생산은 5억 2900만 달러이고,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2598 달러이다.

과제

중국대륙 투자의 누계액이 1,500억 달러 이상으로 추정되는 등 중국대륙으로의 지속적 투자 유출로 인해 중국에 대한 경제 의존도가 증대되고 있다.

실업문제의 경우 타이완의 산업구조가 전통산업에서 첨단제조산업으로 개편되면서, 그리고 중국대륙으로의 투자 유출에 따라 국내 투자가 부진하면서 실업률이 증가하고 있다.

타이완 경제는 무역의존도가 높고(65%) 전체 수출품목 중 IT상품의 비중이 높아(45%), 세계 IT산업 경기 침체의 영향을 직접 받는 취약성을 띠고 있어 국제 경기 변통에 취약한 경제구조를 취하고 있다.

타이완은 악성대출금(NPL) 비율이 높고(6.8%), 영세 금융기관이 산재하여(450개 이상), 금융구조의 개편이 요구된다. 또한 타이완 3대 은행의 전체 시장점유율이 26%로서, 싱가포르(80%), 홍콩(78%), 캐나다(60%), 미국(50%)에 비해 매우 적게 나타나고 있다.

문화

타이완은 우여곡절의 역사적인 배경들로 인해 다양한 문화적 내용을 내포하고 있으며, 다양한 지역과 출신에서 비롯된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며 타이완의 문화 형성에 나름대로 역할을 하였다. 새로운 문화의 계속적인 발전 속에서도 타이완 주민들은 그들 각각의 관습과 전통을 함께 보전해 나가고 있으며, 그 결과 타이완에서는 원주민에 의한 토착문화를 비롯하여 한족 이주민에 의한 중국문화 심지어 네덜란드와 일본에 의해 남겨진 식민지문화의 자취까지도 발견할 수 있다.

한국과의 관계

중화민국 정부는 1948년 8월 중국대륙에서 우리나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1949년 10월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대륙에 건국되자, 타이완 섬으로 수도를 이전한 국민당 정부는 집권당으로서 타이완을 통치하며, 외교에서는 본토 수복을 정치 구호로 삼고, 반공(反共)·친미 외교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71년 10월중화인민공화국이 유엔에 가입하자 중화민국은 탈퇴하였고, 1972년 일본의 중국 승인으로 대일(對日) 외교관계가 단절되었으며, 1979년 1월에는 중국과 미국의 수교로 타이완·미국의 수교가 단절되면서 국제적으로 고립 상태에 놓였다.

그러나 미국·일본과의 정식 국교는 끊어졌으나, 민간관계의 활동은 계속하고 있다. 미국과는 북미사무조정협의회(北美事務調整協議會)·미국재타이완협회(美國在臺灣協會)를, 일본과는 동아관계협회(東亞關係協會)·일본교류협회(日本交流協會)를 각각 설치해 두고 활발한 경제·문화 활동을 하고 있다.

한편 한국은 1948년 8월 중화민국과 수교를 맺고 상호 상주 공관을 설치하였으며,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중화민국은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유엔군 파견을 승인하였다. 그 뒤 두 나라는 1952년 3월 항공협정을 체결하였고, 1961년 3월에는 무역협정을 체결하였으며, 1965년 5월에는 문화협정을 체결하여 그 관계를 긴밀히 유지하였다. 1949년 8월에는 쟝 제스(蔣介石, Jiang Jieshi) 총통이 한국을 방문하였고, 1966년 2월에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타이완을 방문하였다.

당시 중화민국과 한국은 국제정치면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데, 두 나라는 아시아에서 반공국가의 쌍벽으로 제2차 세계대전 후 굳건히 반공 이데올로기를 견지하면서, 각각 40만 명에서 60만 명이 넘는 대군을 보유하고 국가 예산의 40% 정도를 방위비에 투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말까지 타이완은 미국과 중국의 접근, 일본과 중국의 접근 등으로 인해 자유 진영의 우방을 모두 잃었다.

1992년 7월 말까지 아시아에서는 한국만이 유일하게 타이완과 수교를 유지해 왔는데, 한국도 1992년 8월 24일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를 수립함에 따라 수교가 단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1993년 7월, 그 동안의 경제적·국제정치적 공통점과 지정학적 관계를 바탕으로 협의를 거쳐 호혜평등 원칙 하의 새로운 관계로서 서울과 타이페이에 상호 대표부를 설치하여, 대외 명칭은 ‘주한국타이페이대표부(駐韓臺北代表部)’ 및 ‘주타이페이한국대표부(駐臺北韓國代表部)’로서 영사 업무를 비롯하여 경제·홍보·문화·학술 분야의 협력 관계를 회복하였고, 2005년 초에는 부산에 사무소를 설치하였다.

비록 형식적인 수교는 단절했지만 두 나라의 비공식 상호 대표부를 설치함으로써 실질적인 관계는 여전히 유지하게 되었다.

양국 통상관계에 있어, 우리나라는 타이완과 공식관계가 없는 상황에서 타이완과의 실질 협력 관계의 증진 도모에 중점을 두면서, 양자 간 교역규모는 공식 외교관계의 단절에도 불구하고 계속 증가하고 있다. 1997년 이래 양국 무역 총액이 매년 30% 이상 증가해 왔으며, 2004년 양국 무역 총액은 169억 8,500만 달러로, 이 중 타이완이 53억 5,420만 달러를 수출하고, 116억 3,080만 달러를 한국으로부터 수입하여, 타이완이 약 62억 달러의 무역적자를 기록하였다. 2006년에는 양자 간 무역 총액이 223억 달러에 달하고, 2007년 양국 무역 총액은 약 229억 5천 만 달러로, 그 중 타이완의 한국에 대한 수출액은 77억 9천 만 달러이고, 한국으로부터의 수입액은 151억 6천 만 달러이며, 무역적자는 73억 7천 만 달러이다. 한국은 타이완의 제5위 교역 상대(중국, 일본, 홍콩, 미국의 다음)이고, 제4위 수입 국가(일본, 중국, 미국의 다음)이고, 제6위 수출 대상국가(중국, 홍콩, 미국, 일본, 싱가포르의 다음)이며, 제3위 무역적자 국가(일본, 사우디아라비아의 다음)이다. 타이완도 한국의 제5위 무역 동반자·제5위 수출 대상국·제8위 수입 국가이고, 제10위 무역흑자 국가이다.

인적교류에 있어, 타이완과 한국은 2003년 1월 상호 비자 면제를 실시하고, 2005년 1월부터 양국 국적기의 운항이 회복되었다. 단교 이전 40만 명을 상회하던 양측 방문자수가 단교 및 국적기 운항 중단에 따라 절반으로 감소하였으나, 2004년에 한국을 찾은 타이완 관광객 수는 30만 명, 타이완을 찾은 한국 관광객 수는 15만 명, 양국의 관광객수는 합쳐서 약 45만명으로 증가하고, 2006년에는 60만 명에 육박하였다. 2007년에는 약 68만 명으로 그 중 타이완 관광객수는 약 45만 명이고, 한국 관광객수는 약 23만 명이다. 그 외에 타이완 50개 대학과 한국 92개 대학이 자매관계를 맺어 문화·학술 교류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정계 및 재계 인사 중심의 인적 교류도 활성화되어, 1996년 8월한국·타이완 의원친선협회가 결성되고, 2000년 11월한국·타이완 민간경제협의회가 복원됨으로써 양측 국회의원 및 기업인 간 교류가 수시로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김영삼 대통령의 타이완 방문(2001년 7월, 2005년 10월 및 2007년 1월), 김종필 국무총리의 타이완 방문(2003년 8월) 및 마 잉주(馬英九) 타이베이 시장의 한국 방문(2001년 8월) 등의 고위 인사와 양국 국회의원의 수시 상호 방문이 진행되었다. 또한 1999년 9월 타이완 대지진 발생 시 우리나라 119구조대의 매몰 구조 및 피해 복구 지원으로 타이완에서의 반한(反韓) 정서가 다소 완화되었고, 한국 드라마 등 한류(韓流)가 폭넓게 유행됨으로써 문화교류도 증진되었다.

타이완에 거주하는 우리나라의 교민 총 수는, 1995년 1,029명이고 체류자도 1,584명이었으나, 2008년 주재지 거류증 소지자 기준으로 약 3천 명이고, 유학생은 1,410여 명(단기 언어연수 850명과 정규 과정유학 560명), 영주 교민은 약 700명(대부분이 음식점, 의류점, 소규모 무역업 등 자영업 종사)이며, 기타 상사 주재원과 종교인 등이 있다. 그리고 타이베이와 까오슝(高雄, GaoXiong)에는 한국학교가 운영 중이다.

한편 홍보·문화·관광 분야에서의 교류도 활발하여, 2008년 타이완 방송에서 방영되고 있는 우리나라 드라마는 10여 편에 이르며, 타이완은 ‘한류’의 발생지이자 중국 등 여러 지역에 대한 ‘한류’ 확산의 거점지로서 큰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고 한국과 타이완의 전통 우호 관계 및 문화적 유사성에 기초한 문화·학술·교육·체육 분야 등의 교류도 활발히 진행되어, 한중문화협회(韓中文化協會) 등 친선단체가 활동하고, 중국문화대학(中國文化大學)·국립정치대학(國立政治大學)을 중심으로 한국어 학과가 설치되어 학술 교류도 유지되고 있다. 타이완에서 한국어에 대한 관심도 증진되어, 제12회 한국어 능력시험(2007년 9월 국립정치대학)에 740명이 참가하여 전년(2006년 530명 응시)에 비해 약 40% 증가하였다.

참고문헌

『타이완의 힘』(안천, 교육과학사, 2009)
『대만: 아름다운 섬 슬픈 역사』(주완요, 신구문화사, 2003)
『중화민국과 공산혁명』(신승하, 대명출판사, 2001)
『台灣政治史』(丹尼·羅伊, 商務印書館, 2004)
주한국타이페이대표부(www.roc·taiwan.org)
대만정부(www.gio.gov.tw)
대만관광청(http://tourtaiwan.or.kr/taiwan)
대만 타이베이(www.taipei.gov.tw)
외교통상부(www.mofat.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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