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유격대 ()

정치
개념
1931년에 만주 일대에 설립된 비정규 항일무장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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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항일유격대는 1931년에 만주 일대에 설립된 비정규 항일무장단체이다.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에 대한 대규모 무력 침공을 전개함에 따라 중국 전역에서 대규모의 반일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중국 공산당은 일제의 무력 침공을 규탄하면서 전민족적인 항일운동을 주창하였고, 이에 여러 항일유격대가 창설되어 항일유격 전쟁을 전개하였다. 1935년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항일구국 선언인 8·1선언을 발표하였고, 3로군 11군에 달하는 동북인민항일연군을 조직하였다. 14년 동안 항일투쟁을 포기하지 않았던 항일유격대는 만주 일대 여러 항일무장세력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 역할을 담당하였다.

정의
1931년에 만주 일대에 설립된 비정규 항일무장단체.
개설

1931년에 일제가 만주를 침공하면서 대규모 반일운동이 일어났다.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지시를 받아 만주 일대에서는 반일유격대, 항일구국유격군, 수녕반일동맹군 등이 창설되어 항일유격 전쟁을 전개하였다. 그 뒤 1933년에 ‘1월 서한’에 따라 같은 해 5월 중공만주성위원회에서는 통일된 인민혁명군을 조직하기로 결정한다. 이에 따라 남만주와 동만주 유격구에서는 기존의 유격대를 토대로 9월 남만특위 산하의 유격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제1독립사, 1934년 3월 동만특위 산하의 유격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1독립사로 각각 개편 및 통일되었다. 동북인민혁명군은 1935년에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8 · 1선언’ 및 1936년 2월 「동북항일연군통일군대건제선언」에 따라 같은 해 3월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이 동북항일연군 제1군으로 재편성되었다. 3로군 11군에 달하는 동북인민항일연군은 1940년 경에 일제와 만주국의 무장 ‘토벌’로 소련의 연해주로 근거지를 옮겼지만, 동북항일연군교도려를 설립하고서 해방 전까지 항일투쟁을 계속 전개하였다.

연원 및 변천

1931년 9월 18일에 일제는 만주에 대한 대규모 무력 침공을 전개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 전역에서는 국민당 장개석 정부가 ‘부저항 정책’을 제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규모의 반일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공산당은 여러 형식의 선언, 결의, 지시 등을 통해 일제의 무력 침공을 규탄하면서 전민족적인 항일운동을 주창하였다. 10월 12일에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원회에 항일유격대와 항일유격근거지의 창설을 지시하였다. 다음해 봄에 파언(巴彦) · 반석(磐石) · 해룡(海龍) · 연길(延吉) · 혼춘(琿春) · 왕청(汪淸) · 안도(安圖) · 화룡(和龍) · 주하(珠河) · 밀산(密山) · 영안(寧安) · 탕원(汤原) 등에서는 여러 반일유격대, 항일구국유격군(抗日救國遊擊軍), 수녕반일동맹군(綏寧反日同盟軍) 등이 창설되어 항일유격 전쟁을 전개하였다.

1932년 6월에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북방의 각 성위원회 대표들이 참석하는 북방회의를 소집하여, 중국 전역에서 토지혁명의 추진, 소비에트 정부의 수립, 홍군(紅軍)의 건설 등 공산혁명 확대 방침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성격을 달리하는 ‘의용군’ · ‘구국군’ · ‘자위군’ 등 반일부대와의 공동 항일투쟁은 점차 어렵게 되었다. 때문에 1933년 1월에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원회에 ‘1월 서한’을 보냈다. 이 서한에서는 항일통일전선의 구축, 다른 항일부대와의 공동전선 형성 등을 주장하였다. 남만주와 동만주 유격구에서는 기존의 유격대를 토대로 하여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제6군이 조직되었다. 특히 조선인이 많이 거주하였던 동만주 일대에서는 연길 · 화룡 · 왕청 · 혼춘 등 각 현에 조직되어 있던 유격대를 합하여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1독립사가 결성되었고 사부(師部)가 발족되었다. 당시 사장(師長)은 조선인 주진(朱鎭)이 맡았고, 정치위원은 중국인 왕더타이〔王德泰〕가 취임하였다. 제2군 제1독립사는 독립하여 연길 · 화룡 · 왕청 · 혼춘 등 4개 현의 유격대를 개편한 뒤 1단 · 2단 · 3단 · 4단과 독립단을 통솔하였다. 이들 부대는 중국 공산당의 지도 아래 조직된 군대였으나 조선인이 다수를 차지하였기에 사실상 ‘조선인 부대’였다.

1935년에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중화소비에트정부와 동북 각지의 항일정권을 단일적 · 전국적 국방정부로 조직하고, 홍군과 동북인민혁명군 및 각지의 반일의용군을 하나로 하여 전중국적 항일연군을 조직하라’는 항일구국 선언인 ‘8 · 1선언’을 발표하였다. 선언에 따라 동북인민혁명군을 유지해 온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원회는 동북인민혁명군을 항일연합군 조직으로 전환하였다. 곧 기존의 동북인민혁명군 뿐 아니라, 그 밖의 모든 반일무장대를 항일구국의 기치 아래 단결시켜서 3로군 11군에 달하는 ‘동북인민항일연군’을 조직하였다. 제1로군에는 제1군 · 제2군, 제2로군에는 제4군 · 제5군 · 제7군 · 제8군 · 제10군, 제3로군에는 제3군 · 제6군 · 제9군 · 제11군이 각각 소속되었으며, 전체 병력은 가장 많을 경우 4만 여명에 달하였다. 동북인민항일연군에는 많은 조선인 대원들이 활동하였다. 제1로군에는 김일성(金日成) · 서철(徐哲) · 최현(崔賢) · 오백룡(吳白龍) · 임춘추(林春秋) · 안길(安吉) 등이 있었고, 제2로군에는 최용건(崔庸健)이 속하였으며, 제3로군에는 허형식(許亨植)이 활동하였다. 김책(金策)은 중국공산당 북만성위원회 서기를 맡았다.

1940년 경에 동북인민항일연군은 일제와 만주국의 잔인무도한 ‘토벌’로 부득이 소련의 연해주로 근거지를 옮겼다. 그 뒤 동북항일연군교도려(소련적군88특별저격여단)를 설립하고는 소부대 활동을 통해서 1945년 8월 해방을 맞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항일투쟁을 벌여 나갔다.

의의와 평가

항일유격대는 비정규 무장단체로, 적의 통치구역과 점령구역, 인접 지역에서 분산, 유동, 습격이라는 방식으로 적을 공격하였다. 곧 적이 공격하여 나오면 퇴각하고, 적이 퇴각하면 진공하였으며, 적이 피로하면 타격하고, 적이 도망가면 추격하는 등 여러 전법을 구사하였다. 따라서 항일유격대는 편제를 될수록 간소하게 하였고, 경무장을 갖추고 비정규 습격을 주요 작전 수단으로 삼았다. 또한 유격전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고도의 이동성 · 기민성 · 주동성 · 진공성 · 신속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중국 동북 지역은 중국의 여러 항일 전장(戰場) 가운데서 가장 여건이 어려운 지역이었다. 하지만 항일유격대는 일본 관동군과 만주국의 살벌한 무장 ‘토벌’ 속에서도 다른 반일무장대와 공동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14년 동안 항일투쟁을 포기하지 않았다. 자연히 항일유격대는 만주 일대 여러 항일무장세력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이자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 저항하는 주춧돌 역할을 담당하였다.

참고문헌

「동북항일연군의 민족운동사적 성격」(황민호,『한국 항일민족운동과 중국』, 국학자료원, 2001)
「항일유격대 집단의 형성과정 연구」(김광운,『한국독립운동사연구』15,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0)
「이홍광 연구―항일유격대 및 동북인민혁명군내 주요 한인지도자의 활동사례 검토」(장세윤,『한국독립운동사연구』8,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4)
「허형식 연구-동북항일연군내 주요 한인지도자의 항일투쟁 사례검토」(장세윤,『한국독립운동사연구』7,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3)
『동북항일연군두쟁사(东北抗日联军斗争史)』(东北抗日联军斗争史编写组,人民出版社,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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