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석이 1867년(고종4) 진주목사로 부임하여 이듬해 의기사(義妓祠)를 중건하고, 그해 6월의 좋은 날을 택해서 ‘의암별제’를 유교식으로 거행했다. 제사에는 3인의 제관(祭官) 이하 필요한 모든 인원은 진주 관기 300여 명이 담당했다. 그 중 노래하는 사람[가자(歌者)라고 함] 8명, 춤추는 사람[무자(舞者)라고 함] 12명, 당상악공(堂上樂工) 5명, 당하악공(堂下樂工) 6명이 음악과 춤을 담당했다. 의암별제가무는 이때에 연행되는 노래와 춤을 말한다.
『교방가요』의 별제의식과 가무의 사용 순서는 다음과 같다.
① 영신례(迎神曲, 신을 맞는 예식): 당상에 있는 악공 5인이 ‘영신악곡’을 연주한다. 향을 3회 사르는데, 이때 가자(노래하는 사람)는 ‘상향악장’(上香樂章)을 여창가곡의 계면조로 노래한다. 무자(춤추는 사람)는 춤을 춘다. 노래를 할 때는 당상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출 때는 당하에서 함께 연주한다.
② 초헌례(初獻禮, 첫 잔을 올리는 예식): 축문(祝文)을 읽고 난 후 초헌관이 절을 하는데 음악이 연주되고 가자는 ‘초헌악장’을 계면중창(界面中唱)으로 노래한다. 음악이 연주되면 무자는 춤을 춘다. 음악이 그친다.
③ 아헌례(亞獻禮, 두 번째 잔을 올리는 예식): 아헌관이 절을 하면 음악이 연주되고, 가자는 ‘아헌악장’을 계면삼창으로 노래하며, 무자는 춤을 춘다. 음악이 그친다.
④ 삼헌례(三獻禮, 셋째 잔을 올리는 예식): 종헌관(=삼헌관)이 절을 하면 음악이 연주되고 가자는 ‘삼헌악장’을 우락조(羽樂調)로 노래한다. 무자는 춤을 춘다. 음악이 그친다.
⑤ 음악이 연주되면 가자가 ‘의암별곡’(義巖別曲)을 처사가조(處士歌調)로 노래한다. 음악이 연주되면 제관 이하 제사에 참여한 모든 기녀들이 다함께 춤을 춘다.
⑥ 철변두(撤籩豆, 제기를 철수하는 예식): 헌관 이하 여러 집사들이 절을 하고 물러가면 제사가 끝난다.
⑦ 음복(飮福): 다함께 제사에서 물린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최순이(崔順伊, 1884~1969)에 의하면, 행사 후 여흥가무가 3일씩이나 연행되었다고 한다.
전북 장수 출신 기녀 노은개(魯隱介: 논개(論介)를 말함)가 절도사의 소실로 진주 병영에 있을 때, 임진왜란으로 진주성이 함락되자 왜적이 6만 여명의 사람들을 구덩이에 파묻는 것을 보았다. 이에 분개한 논개가 꾀를 써서 왜장을 촉석루 아래 바위 위로 유인하여 서로 노니는 듯하다가 왜장의 허리를 끌어안고 강물로 떨어져서 함께 죽었다. 이로 인해 왜군이 병졸들을 수습하여 달아났다는 이야기다.
논개의 의로운 애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조선의 조정에서는 논개의 사당인 의기사(義妓祠)를 세워서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진주목사 정현석이 의암별제를 덧붙여 제정하였다.
의암별제는 일제강점기에 폐지되었는데, 해방 후 기녀들이 의기창렬회(義妓彰列會)를 조직하여 제사를 모셔왔다. 1992년 10월 4일에 (사)진주민속예술보존회 회장 성계옥(成季玉, 1927~2009)의 숙원으로 복원 · 재현되었다. 이후 봄 · 가을로 연 2회 제사를 모시다가 2002년부터는 진주시에서 주최하는 진주논개제에서 매년 5월 넷째 금요일에 의암별제를 거행해 오고 있다.
유교사회에서 신분적 하층민인 기녀(여성)를 주신(主神)으로 모신 것은 논개의 애국충절을 최고의 귀감으로 삼으려 한데 의의가 있다. 또 종묘대제 · 사직대제 · 석전대제와 같이 국가적 규모의 큰 제사처럼 노래와 춤으로써 집행된 점이 진주의 독자적 교방문화라고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