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홍천군 서면 두마리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문 서당을 거쳐, 남궁억이 설립한 모곡보통학교를 1925년에 졸업했다. 온 가족이 서울 정릉의 외가댁으로 이사한 후 1932년 동명학교를 졸업했다. 부모의 권유로 하급 공무원 시험에 응시해 합격한 1934년에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현재의 안암동 로터리 부근) 면사무소 서기가 되었다. 유년 시절 남사당패 공연을 본 이후 공연예술에 대한 동경이 싹텄고, 면서기 시절에 단성사의 연극 공연을 자주 보러 다니면서 연극에 대한 열정을 품게 되었다. 특히 「춘향전」을 관극한 후 연극배우가 되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사표를 냈다. 1936년에 동양극장 연수생으로 입단하여 연출가 홍해성으로부터 연기술, 분장법 등을 배웠다. 동양극장의 전속 극작가 임선규와도 가까웠는데, 그의 예명 ‘설봉’을 지어준 이가 임선규이다.
데뷔 무대는 「청춘송가」(임선규 작·홍해성 연출, 1937)의 대사 없는 단역이었고, 두 번째 무대는 「사비수와 낙화암」(임선규 작·홍해성 연출, 1937)의 사령 역으로 대사 두 마디의 단역이었다. 1939년에는 지방 순업도 따라 다니는 등 동양극장의 거의 모든 작품들에 출연했으나 여전히 비중 작은 단역들이었다.
1939년에는 황철 등과 함께 극단 아랑의 창단 멤버로 참여해서 부민관에서 올린 「동학당」(임선규 작·박진 연출, 1941) 등에 출연했고, 1940년대 국민연극 시기에는 친일 연극에도 출연했다.
해방이 되자 극단 자유극장, 낙랑극회, 신청년, 예술극회 등에 참여했다. 이 시기 주요 작품은 「여명」(낙랑극회, 임선규 작·안영일 연출, 1947), 「사랑의 가족」(신청년, 김영수 작·박진 연출, 1948) 등으로 역시 단역이었다.
이렇게 단역만을 맡으며 빛을 보지 못하던 그는 1950년 국립극장의 발족과 함께 전속극단 신협의 창립단원이 되면서 일대 전기를 맞이한다. 배역도 제법 비중있는 조역을 맡았고, 매월 급료를 받는 직업배우가 되ᄋᅠᆻ기 때문이다. 또 영화 「꿈」(신상옥 감독, 1955), 「사도세자」(안종화 감독, 1956) 등에 조역으로 출연하는 등 활동 분야를 넓혔다.
그러나 그의 주 무대는 연극으로, 1962년 재발족한 국립극단의 정단원이 되어 정년으로 퇴직하게 되는 1976년까지 노역 중심의 배역을 맡았다. 1976년 극단 대하의 창단 멤버로 참여했고, 이후 극단 시민극장, 신협 등에 참여하며 1990년대까지 줄곧 무대에 섰다.
그는 60여 년 동안 연극,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에 500여 편 출연함으로써 최다 출연, 최고령 연극배우라는 기록을 세웠고, 이는 1993년 한국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사실주의 연기로 일관한 그는 조역이나 단역에 머물면서 큰 인상을 남기지 못했으나, 뛰어난 기억력으로 근대연극사나 많은 연극인들에 대한 증언을 남겼다. 물론 편견과 왜곡이라는 기억의 한계가 다소 보이긴 하나, 그의 증언이 문헌연극사의 빈틈을 채우는 데 큰 기여를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1993년 최다 출연, 최고령 현역 배우로 한국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