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목계서원(牧溪書院)

교육유적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에 있는 조선후기 이조를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확대하기축소하기프린트URL의견제시

트위터페이스북

의견제시
항목명목계서원
이메일올바른 형식의 이메일을 입력해 주세요.
의견
10자 이상 상세히 작성해 주세요.
첨부파일
의견제시 팝업 닫기
이칭
두릉서원(杜陵書院), 두릉사(杜陵祠), 목계정사(牧溪精舍)
분야
교육
유형
유적
성격
서원
건립시기
1700년(숙종 26)
소재지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방목리 239,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석대로525번길 40-13
시대
조선-후기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에 있는 조선후기 이조를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1700년(숙종 26)에 산청의 유림들이 동곡(桐谷) 이조(李晁, 1530∼1580)의 학문과 정신을 추모하고자 두릉사(杜陵祠)를 건립하였다. 1708년(숙종 34)에 이건하여 두릉서원(杜陵書院)으로 승원하여 급고재(汲古齋) 김담(金湛, 1560∼1626), 동계(東溪) 권도(權濤, 1575∼1644)와 동산(東山) 권극량(權克亮, 1584∼1631) 등을 아울러 향사 지냈다. 1719년(숙종 45)에 단성현감에 의해 훼철된 후 다시 사림의 공의에 의해 1778년(정조 2)에 복설하였다. 이때부터 이조와 김담만을 향사 지냈는데, 목계(牧溪)에 서원을 설립하여 목계서원(牧溪書院)이라 불렀다. 1868년(고종 5)에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된 후 1883년(고종 20)에 이르러 강당과 재실인 농운재(隴雲齋)를 중건하면서 목계정사(牧溪精舍)라 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역사적 변천
목계서원은 현전하는 자료마다 창건 연대가 달라서 정확한 연대를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현재의 목계서원에 이르기까지 두릉사, 두릉서원, 농운재, 목계정사 등으로 불렸던 사실은 다양한 자료에서 확인된다. 「목계정사강당중수기」에 의하면 1700년에 처음 건립되었으며, 『증보문헌비고』·『서원지총서』·『서원가고』·『연려실기술』 등에 따르면 1708년에 건립 내지 이건(移建)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명칭도 두릉사, 두릉서원으로 나타난다.
또한 「목계정사강당중수기」에 원래 네 명을 제향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처음 두릉사를 창건할 당시에는 이조만을 제향하다가 이건하면서 김담, 권도, 권극량을 합향하고 사림의 공의에 따라 서원으로 승원한 것으로 보인다. 1719년(숙종 45)에 이르러 1714년(숙종 40) 이후 신설한 서원을 금지한다는 명이 있자 단성현감이 명을 받들기에 급급하여 두릉서원을 아예 철거하였다고 한다. 사림도 그 법령의 기한에 어두워 명백히 분별하지 못하였다가 이를 알았을 때는 일이 이미 끝나고 사당도 폐허가 된 상태였다.
그 후 1778년에 복설을 추진하여 목계에 자리를 정하면서 위패를 봉안하고 예에 따라 향사를 올렸다고 한다. 초기 4인 중 2인은 도천서원(道川書院)과 완계서원(浣溪書院)으로 이봉(移奉) 하였으며, 전일과 같이 봉안한 사람은 이조와 김담이었다. 이봉된 인물은 안동권씨 가문의 권도와 권극량이었는데, 완계서원은 안동권씨의 문중 서원이었으며, 도천서원은 충선공(忠宣公) 문익점(文益漸)을 제향하던 곳이었다.
1868년에 훼철되었지만 1883년에 강당을 중수하여 목계정사라 하였는데, 서원이라 하지 않은 것은 훼철을 피하기 위한 조처였다. 한편, 1930년대에 편찬된 『교남지』에는 1713년(숙종 39)에 건립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오기(誤記)로 보인다.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현전하는 목계서원의 건물은 강당과 동재만 남아있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형태이다. 기둥의 형태는 외진주가 원기둥이고 내진주는 네모난 기둥이다. 두 칸의 대청을 사이에 두고 방은 서쪽에 2개, 동쪽에 1개가 있다. 양 측면의 방 출입구는 분합문으로 구성하였다. 강당의 외미(外楣)에 목계정사 현판이, 동쪽 협실에 농운재 현판이, 서쪽 협실에는 목계서원 현판이 걸려 있다. 특히 농운재 현판은 원래 동재에 걸려 있었던 것을 옮겨 달은 것이다. 외문(外門)은 1칸으로 협소하다. 향사일은 음력 3월 7일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의의와 평가
숙종 당시 서원의 남설과 첩설 등으로 많은 폐단이 발발하자 조정의 명으로 서원 신설을 금지하였다. 그 당시의 금령(禁令)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다시 복설한 사례로서 조선시대 서원이 향촌사회의 사족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음을 확인시켜주는 서원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2016년)
이우진(충북대학교)
페이지 상단으로 이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