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수(金德秀)
기묘사화 이후의 정국은 경빈 박씨 사건을 계기로 심정이 사사되고, 심정을 이어 권신으로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던 김안로(金安老, 1481∼1537)마저 패퇴하면서 기묘인들에 대한 신원(伸寃)이 이루어졌다. 그도 이 무렵인 1538년(중종 33)에 사면(赦免)되었으며, 이후에는 조정에 진출할 생각을 접은 채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의 문하에서 수학한 명사들이 많은데, 윤근수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사면된 뒤에는 20여 년을 학문과 제자 양성에 힘쓰다가, 1552년(명종 7) 향년 53세의 일기로 생을 마쳤다. 효종대 재상을 지내며 대동법 시행에 힘썼던 김육(金堉, 1580∼1658)은 그의 증손이다. 부친의 망명으로 도피 생활을 한 것과 사면 후 제자들을 양성한 일은 그의 행적 가운데 특기할 만한 일이다. 특히 그의 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