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당시 고려의 영역은 청주·웅진 이북으로부터 평양에까지 이르고 후백제의 배후인 나주를 차지하고 있었다. 왕건을 추대한 개국공신들은 주로 무장으로서 호족의 기반이 약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왕건은 각지의 호족들을 포섭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건국과 동시에 왕건에 대한 반발세력도 적지 않게 나타났다.
특히 청주 지방이 반기를 들었으니 환선길(桓宣吉)·임춘길(林春吉) 등의 난이 그것이다. 청주·
웅주(熊州)주 06) 등지는 후백제에 귀속하기도 하였다.
고려태조는 후삼국을 통합하기 위한 정책으로, 대외적으로는 중국 오대와 외교관계를 맺어 대외관계의 안정을 도모하면서, 대내적으로는 신라에 대한 적극적인 우호정책을 표방하고 후백제와는 대립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또 각 지방의 독립된 호족세력에게는 포섭과 회유정책을 취하였다.
고려가 건국하자 후백제의 견훤은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주도권을 잡기 위하여 사신을 파견하는 등 평화정책을 폈다. 그러나 920년 후백제가 합천 지방을 점령하면서 고려와 후백제가 서로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고 두 나라 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되었다. 뒤에 경상도 북부지방 호족들 다수가 왕건에게로 내투하였다.
925년
조물성(曹物城)주 07)싸움에서 후백제와 고려는 쉽게 승부를 짓지 못하자 화의를 맺고 인질을 교환하였다. 왕건은 당제(堂弟) 왕신(王信)을 후백제에 보내고, 견훤은 외생(外甥) 진호(眞虎)를 고려에 보냈다.
그러나 이듬해 진호가 고려에서 병으로 죽자 견훤은 고려에서 고의로 죽였다 하여 왕신을 죽이고 군사를 일으켜 공주지방을 공격하였다. 이로써 고려와 후백제의 본격적인 통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때 신라의 경애왕은 “견훤이 약속을 어기고 군사를 일으키면 반드시 하늘이 돕지 않을 것이니 대왕이 군사의 위엄을 보이면 견훤은 반드시 패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왕건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왕건이 후백제를 칠 때 신라를 돕기까지 하였다.
이것은 약소국의 위치에 있던 신라의 활로를 모색하려는 경애왕의 자구책이었을 것이다. 927년까지 경상도 북부일대에서 심한 격전이 펼쳐졌는데, 9월에 견훤은 신라의 수도경주를 기습하였다.문경 지방을 공격하다가 갑자기 영천을 거쳐 경주를 습격한 것이다.
견훤은 경애왕을 죽이고 궁궐 등을 약탈한 뒤
김부(金傅)주 08)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견훤이 영천에 쳐들어 올 때 신라는 고려에 원병을 요청했는데, 견훤의 군이 퇴각하다가 대구 공산(公山)에서 고려 왕건의 원군과 마주쳐 대결하게 되었다.
이 공산전투에서 고려군은 참패를 당하여 개국공신 신숭겸과 김락(金樂) 등이 전사하고 왕건은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았다. 후백제군은 경상도 서부일대까지 휩쓸고 약탈하였다.
견훤의 경주기습은 일시적인 무력시위로 위세를 떨쳤으나 신라의 민심은 대신라우호정책을 표방한 고려에 기울게 되었으며, 경상도 일대의 호족들이 대거 왕건에게 귀부하였다. 결국 싸움에서는 견훤이 이겼지만 소득은 왕건에게 돌아가게 된 것이다.
이 해 12월과 다음 해 1월에 견훤과 왕건은 외교문서를 교환하면서 각각 중국과의 외교를 앞세워 상대방을 위협하는 등 서로 정책의 우월함을 과시하였다. 이후 경상도 북부 안동 지방에서 공방전이 계속되었으나 고려군이 극히 열세에 놓여 있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930년 고창군(古昌郡) 병산(甁山)싸움은 고려에 하나의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고려군이 열세에 놓여 곤경에 처하였을 때 유금필(庾黔弼)이 선전하여 후백제군 8,000여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둔 것이다. 이 싸움 이후 그 동안 군사적으로 열세에 있던 고려는 군사적으로도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후백제는 이를 만회하기 위하여 서해안 일대를 노략하기도 하였다.
한편, 왕건은 견훤이 경주를 습격한 이후 경주를 방문하는 등 경순왕 이하 신라세력의 환심을 샀다. 그리하여 경상도 일대 호족세력의 대부분이 고려에 귀속하게 되었으며, 특히 강릉에서 울산까지의 지역에서 110여 성이 항복했다고 한다. 이 때 후백제 견훤가에는 형제간의 내분이 있었다.
견훤에게는 큰아들 신검(神劍)을 비롯하여 양검(良劍)·용검(龍劍)·금강(金剛) 등이 있었다. 이 중 넷째 금강은 신체가 건강하고 뛰어나 견훤의 총애를 받았다. 금강이 후계자로 유력해지자 세 형들은 이를 시기하여 935년 3월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金山寺)에 유폐시킨 뒤 신검이 왕이 되었다.
6월에 견훤이 금산사에서 나주로 탈출하자, 왕건은 유금필을 보내어 그를 개경으로 데리고 왔다. 한편, 경주 일원만을 다스리고 있던 신라의 경순왕도 계속 후백제의 위협을 받고 있던 터에, 견훤이 고려에 귀순하여 환대를 받는 것을 보고 935년 11월 고려에 자진 항복하였다.
이렇게 되자 왕건은 후백제에 대한 대비와 경략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충지인 천안지방에 대도독부(大都督府)를 두고 후백제 공격의 전진기지로 삼았다. 936년 9월에 태조 왕건은 3군(三軍)을 이끌고 천안에 가서 군사를 집결하여 출전하였다.
왕건은천안을 출발하여
일선군(一善郡)주 09)으로 진격, 후백제 신검의 군사를 맞아 일리천(一利川)에서 대결전을 치러 승리하였다. 이 때 3군의 총수는 4만 3000명이었고, 지방호족과 북방민족의 부대를 합하면 고려의 총군사력은 8만 7500명에 달하였다.
여기에는 왕과 태자
무(武)주 10), 홍유·박수경(朴守卿)·왕순식(王順式)·유금필 등이 참여하였다. 고려군이 후백제군을 추격하여
황산군(黃山郡)주 11) 탄령(炭嶺)을 넘자 후백제신검군은 항복하였다. 이에 태조 왕건은 후백제의 서울
완산(完山)주 12)에 들어가 항복을 받고 백성을 위무하였다.
이로써 후삼국으로 분열되었던 민족이 재결합하는 통일을 이루었다. 고려태조의 후삼국 통일정책은 융화정책과 통일전쟁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는 각지의 호족을 포섭하여 고려의 지배체제에 끌어들이는 것과 후백제와의 무력대결을 통하여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었다.
호족에 대해서는 정략혼인과 같은 유화정책을 썼고, 후백제와의 대결에 있어서는 일면 친신라정책을 쓰면서 후백제를 포위, 고립하게 하는 정책을 취했다. 태조는 후삼국통일을 최고의 과업으로 인식하여 남방으로 후백제·신라 방면에 시간과 정력을 쏟았을 뿐만 아니라 북방개척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것은 북진정책(北進政策)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고구려의 계승자로서 고구려 고토의 회복을 목표로 삼은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삼고 패서호족(浿西豪族)의 일부를 이 곳으로 사민(徙民)하여 민호(民戶)를 채우고 관부(官府)를 설치하는 등, 도성으로서의 시설을 갖추었다.
또, 새로 개척한 북방 영토에 진(鎭)을 설치하여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그러는 한편, 926년 거란에게 멸망한 발해의 유민들이 내투해 오자 이들을 동족으로 인정하여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특히 발해왕자 대광현(大光顯)에게는 왕씨(王氏)의 성을 주는 등 민족융화정책을 폈다. 이리하여 후삼국뿐만 아니라 발해의 고구려계 유민까지도 포함한 민족통일을 이룩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