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1928년 신민부(新民府) 민정위원회는 민족주의 세력의 결집을 위해 참의부(參議府)·정의부(正義府)와 통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김좌진(金佐鎭)·정신(鄭信)·민무(閔武)·김종진(金宗鎭) 등 혁신의회 군정파는 이에 동조하지 않았다. 김좌진 등은 북만주 중동선(中東線) 일대 각 마을 단위로 조직되었던 농무회(農務會)와 대종교계 독립운동가, 무정부주의자 단체인 흑색동맹파(黑色同盟派)의 남대관(南大觀)·전회관(田晦觀)·이강훈(李康勳)·이붕해(李鵬海) 등 일부 인사들과 연합하여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결성하였다.
한족총연합회는 신민부 계열 인사들을 중심으로 여러 계파의 통합과 연대를 도모하였으나, 점차 사회주의 세력이 유입·증가하면서 내부적으로 분열을 초래하였다. 더욱이 1930년 1월 지도자인 김좌진이 암살되자 정신 등이 주축이 되어 한족자치연합회(韓族自治聯合會)로 개편하였다.
한족농무연합회는 한족자치연합회와 같은 시기에 설치된 것으로 보이며, 한족자치연합회의 별도 조직으로서 각 지역의 농무계를 서로 연계시키는 역할을 했다. 각 자료별로 한족농무연합회의 결성 시점에 대한 기록이 다른데, 1930년 4월 한족자치연합회의 농무계 연합 조직으로서 조직되었다가, 1931년 초 해체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족농무연합회는 김좌진의 암살과 한족총연합회의 분열 시점에 북만주 재만한인사회를 통솔하기 위해 각 지역 단위로 조직된 농무조직을 상호 통합하기 위해 설치된 것으로 판단된다.
한족농무연합회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자료만 보여 활동 내용을 잘 알 수 없다. 즉 한족농무연합회의 일원이었던 박래춘(朴來春)은 1930년 3월 “조선○○운동에 뜻을 두어 현주지에 이르렀으나 조선○○운동단체 한족총연합회가 평판이 좋지 못함으로 이에 가입하지 아니하고” 해림(海林) 소학교 교원의 임무를 보아오다가 1931년 1월 초순경 산시참에서 열린 한족총연합회 인민대표대회에서 이를 해체시키고 한족농무연합회를 조직하고 문화부 책임자가 되었다. 이후 이 회의 미온적 활동에 분개하여 8월 중순경 사직하였다. 이명한(李明漢)이라는 인물은 강일(姜一)의 권유로 1931년 3월 한족농무연합회에 가입하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1930년 7월 홍진·지청천·민무(閔武)·조경한(趙擎韓)[안훈(安勳)]·황학수(黃學秀)·신숙(申肅)·이장녕(李章寧) 등은 한족총연합회의 조직과 생육사(生育社)를 중심으로 한국독립당과 휘하 군 조직인 한국독립군을 조직하였다. 이후 한국독립당은 여러 곳의 주민회를 연합하여 재만한인사회를 결속하고, 사회주의자의 활동을 둔화시키기 위해 1931년 2월에 ‘북만한족자치연합회(北滿韓族自治聯合會)’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북만주 일대 민족주의 세력의 결집과 함께 남만주의 정의부와 일부 신민부 계열 인사들 주도로 결성한 국민부·조선혁명당·조선혁명군의 성립에 영향을 미쳤다.
한족농무연합회는 북만주 각 지역의 농무조직을 통합하려는 시도로서 이후 북만한족자치연합회의 결성에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후 북만주 민족주의 세력 계열이 중심이 된 국민부·조선혁명당·조선혁명군의 성립에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