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원종(元宗)의 비 순경태후(順敬太后) 김씨의 능이다. 1237년(고종 24)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14세에 궐에 들어가 경목현비(敬穆賢妃)로 책봉되었고 1235년(고종 22) 원종이 태자가 되면서 태자비가 되었다. 1236년(고종 23) 충렬왕을 낳고, 이듬해 7월 세상을 떠났다. 석 달 뒤인 10월 7일 가릉(嘉陵)에 안장되었다. 1262년(원종 3) 정순왕후(靜順王后)에 추봉되었고, 1274년(충렬왕 즉위년) 순경태후로 추존되었다.
조선 현종 때 강화유수 조복양(趙復陽)이 보수하였고, 1867년(고종 4) 능 앞에 표석을 세우는 등 관리가 이루어졌으나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훼손되었다. 1974년 봉분과 능역이 파괴된 것을 보수, 정비하였다. 2004년 발굴 조사를 통해 석실과 능역의 구조가 확인되었고 조사 결과를 토대로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되었다. 1992년 3월 10일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2011년 가릉에서 강화 가릉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004년 왕릉 정비, 복원을 위한 학술 자료 확보를 위해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 결과 가릉은 일반적인 고려 왕릉과 구분되는 특징이 확인되었다. 가릉의 석실(石室)은 지상에 설치되었는데, 이는 고려 왕릉 가운데 지금까지 가릉에서만 확인된 것이다. 고려 왕릉의 석실은 지하 또는 반지하에 석실이 위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석실 상부에 설치된 8각 호석도 강화 석릉과 가릉에서만 보이는 구조인데 고려 왕릉의 호석은 12각이 전형적이다. 이 밖에 석실의 구조나 출토 유물은 당시의 능제가 잘 반영되어 있다. 석실은 이미 도굴되어 자기류는 거의 확인되지 않았으나 당 · 송대 동전 86점, 은제 경첩, 나비 장식, 호박 장식, 구슬, 새 장식 옥 장식품, 석간(石簡) 등 금속 유물과 장신구 등이 출토되었다.
강화 진강산(441.3m) 정상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 사면에 자리한다. 현재 능역과 봉분은 발굴 이후 복원된 것이다. 발굴 이전 가릉의 능역은 남북 25m, 동서 12m의 규모로 장대석을 이용하여 크게 3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단에는 직경 760cm의 봉분이 있고, 봉분 북쪽 양쪽 모서리에 석수가 각각 1기씩 배치되어 있었다. 2단에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고, 3단에는 석인상 2기가 마주하여 배치되어 있었다.
발굴 결과 봉분이 조성되어 있던 자리에는 지상에 석실을 조성하고 주변에 동서 9m, 남북 8m의 규모로 깬돌을 석실 주위에 사각형으로 쌓아 올린 것이 확인되었다. 적석부 남측에는 석축단이 추가로 조성되어 있고, 이 석축단 중앙 남쪽에는 너비 480cm, 길이 555cm의 규모의 진입 시설[踏道]이 설치되었다. 능역의 장대석과 석인상은 70년대 보수 과정에서 새로 설치되거나 위치가 옮겨졌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석실은 길이 255cm, 너비 168cm, 높이 178cm의 규모이며 다듬은 장대석을 5단 쌓아 올려 벽체를 구성하였다. 동, 서벽 입구 쪽 최상단과 최하단에는 사각형의 홈이 설치되어 있다. 입구인 남벽에는 문지방석과 문기둥을 설치하고 바깥에 대형 판석 1매를 세워 막았다. 천정은 3매의 판석을 덮어 조성하였다.
석실 바닥에는 막대형 석재로 관대를 설치하였다. 석실 상부에는 장대석으로 8각 구조물을 시설하고 내부를 할석으로 채운 뒤 봉분을 조성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석실 벽면은 전반적으로 회칠을 하였으나 대부분 탈락되었다. 벽화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나 내용은 확인되지 않았다.
석인상 2기는 사각기둥 형태의 몸체에 복두와 조복 차림으로 홀(笏)을 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석수는 사각기둥 몸체에 눈, 코, 입만 세부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석호(石虎)로 추정된다.
강화 천도기(1232~1270)에 조성된 왕릉 가운데 하나이다. 고려시대 일반적인 능제와 구분되는 지상식 석실과 8각 호석 등 특징이 확인되어 학술적 가치가 있다. 남북 분단의 현실에서 고려 왕실의 능제를 직접 살펴볼 수 있는 유적이자 몽골과의 전쟁 기간 동안 공식적으로 개경을 대체한 강도(江都)의 위상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