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농민은 일제의 소위 조선토지조사사업(1910∼1918)에 의하여 토지와 이에 관한 권리마저 잃고, 거의 대다수가 소작 농민으로 전락하였다.
그리고 뒤이어 시행된 일제의 미곡수탈정책인 산미증식계획(1차 : 1920∼1925, 2차 : 1926∼1934)으로 말미암아 농민들은 굶주림 속에서 신음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일제의 식민농업수탈정책에 희생되어 농촌을 떠나 국외로 이주하거나 화전민으로 전락하는 농민의 수가 급증하였다.
이러한 화전민들이 모여 살던 함경남도 갑산군 보혜면 대평리의 펑퍼물에서는 1929년에 일제의 화전민축출정책에 대항하여 격렬한 화전민들의 항쟁이 있었다. 함경남도 갑산화전민촌도 이농민(離農民)들과 1928년함경도 일대에서 이주한 수재민들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1929년 항쟁이 일어날 당시 이곳에는 1000여명의 화전민들이 약 200호의 집을 짓고, 촌장을 중심으로 한 자치 조직과 동칙(洞則)을 만들어 주민들을 통제하며 영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는 산림 보호라는 미명으로 1929년 4월부터 혜산진영림서의 관리를 앞세워 화전민들을 추방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맞서 함경남도 갑산군 보혜면 대평리의 펑퍼물 지역의 화전민들이 거세게 저항하자, 일제는 6월 16일부터 5일간 완전 무장한 혜산경찰서 경관 11명과 영림서 직원 6명 등 17명의 식민 관리들로 하여금 민가와 화전을 방화, 파괴하게 하였다. 그 결과 가옥 63채가 불태워지고 3채가 파괴되었으며, 농작물을 무참히 짓밟혔다.
이에 분격한 5백여 명의 화전민들은 경찰서·영림서 등에 몰려가 항의하는 한편, 대표를 함경남도청과 총독부에 파견하여 진정하고 신간회(新幹會) 등 사회단체에 호소하였다.
그 결과 동아일보·조선일보 등 언론 기관에서는 특파원을 현지에 보내 진상을 보도하여 여론을 일으키고, 신간회에서는 중앙집행위원인 김병로(金炳魯)를 파견하여 진상을 조사한 다음, 진상보고대회를 개최하여 총독부에 항의하였다.
그리고 각 사회단체의 대표 34명은 갑산화전민사건대책강구회를 발기하여 화전민들을 후원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각 지방의 신간회지회와 청년동맹에서도 후원 활동을 적극 벌였다.
여기에 고무된 화전민들은 피검자의 탈환을 위하여 심문장(審問場)을 습격하는 등 식민 권력에 대항하며 지속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마침내 화전민들은 일제통치당국으로부터 그 해 수확의 보장과 백채동(白菜洞)으로의 이주를 약속받았다.
그 뒤 이와 같은 항쟁은 1920년대 말기의 항일 민족운동으로 번져 사회 각계 각층에서 광범위한 연대 관계를 형성하며 전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