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군 ()

대동여지도 중 평안남도 강동 부분
대동여지도 중 평안남도 강동 부분
인문지리
지명
평안남도 중남부에 위치한 군.
정의
평안남도 중남부에 위치한 군.
개관

동쪽은 성천군, 서쪽은 대동군, 남쪽은 중화군과 황해도 수안군, 북쪽은 순천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5°53′∼126°17′, 북위 38°57′∼39°16′에 위치하며, 동서길이 약 22㎞, 남북길이 약 32.5㎞로 남북으로 길게 펼쳐져 있다. 면적 668.23㎢, 인구 8만 409명(1944년 현재)이며, 1개 읍 5개 면 110개 이로 되어 있다. 군청 소재지는 승호읍 승호리이다.

자연환경

동북쪽은 북대봉(北大峰) 산줄기와 지맥이 뻗어 내려 태을덕산(太乙德山, 526m) 같은 높은 산이 솟아 있고, 중앙부에도 그 여맥이 미쳐 대체로 산지가 많으나, 서쪽에는 대동강이 북에서 서남으로 흘러 낙랑준평원이 전개된다. 이 평야는 비교적 토지가 비옥하고 관개시설도 잘 되어 있어 중요 생산지대를 이루며, 주요 주거지대가 된다.

북쪽으로 강동면의 진산인 대박산(大朴山)은 산세가 가파르고 봉우리가 많아 아름다우며, 남쪽 기슭에 단군릉(檀君陵)이 있다. 서북쪽의 진산인 봉화산(烽火山)에는 봉화대 자리가 남아 있다.

남쪽으로는 만달산(晩達山)이 있는데 곳곳에 굴이 있고 영천(靈泉)이 샘솟으며, 약초와 버섯이 많이 난다. 서쪽으로는 손자산(孫子山)·진사봉(進士峰) 등이 있으며, 동쪽으로는 봉두산(鳳頭山)·제석산(帝釋山)이 있다.

하천으로는 수정 같이 맑다 해 이름 붙여진 수정천(水晶川)이 만류제(萬柳堤)를 거쳐 서강(西江)으로 들어간다. 서강은 군을 남북으로 관류하며, 대동강의 상류에 해당한다. 남쪽으로는 남강(南江)이 서쪽으로 흐르는데, 삼등에서 능성강(能成江)이 되어 계속 서쪽으로 흐르다가 대동군의 법수(法首)에서 서강과 합류해 대동강을 이룬다.

지질은 대체로 중생대의 평안계(平安系)에 속하는 석회암으로, 석탄의 매장도 많을 뿐 아니라 카르스트지형을 이루어 도처에 동굴과 종유동이 형성되어 있어 이 지방의 독특한 경관을 이룬다.

내륙지방에 위치하므로 겨울의 북서계절풍을 막아 주는 산맥이 없어 대륙성 기후의 특징을 그대로 나타낸다. 연평균기온 7.3℃, 1월 평균기온 -9℃, 8월 평균기온 25.2℃, 연강수량 1,079㎜이며, 서리는 보통 10월 13일경부터 내려 이듬해 3월 10일쯤에 끝난다.

역사

[고 대]

강동면 문흥리의 고인돌은 강동지방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입증하나, 고조선시대의 사정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칠포리의 아달산 서쪽에 있는 능이 단군의 능묘로 전해지고 있으나 그 진위를 가릴 증빙자료가 없다.

압록강의 지류인 동가강(佟佳江)가에서 발전하기 시작한 고구려의 세력이 강동지방까지 미치게 된 것은 낙랑군을 몰아낸 4세기 초로 추정되는데, 만달산 기슭의 고분에서 고구려시대의 유물들이 발굴되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전성기에 충주지방까지 뻗쳤던 고구려의 세력이 점차 신라의 북진정책에 밀려 마침내 668년(신라 문무왕 8)나당연합군에 의해 고구려가 망하고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그 뒤 통일신라의 북방국경이 대동강 하구와 원산을 연결하는 곳으로 정해짐에 따라 이 군은 220년간 신라의 북변에 위치하게 되어 북방의 호족(胡族)과 겨루는 최전선에 놓이게 되었다.

[고 려]

고려 건국 후 태조가 북진정책을 내세워 평양을 서경으로 정하고 주변의 여러 고을에 성(城)·진(鎭)을 설치해 북진의 거점으로 삼을 당시, 변방의 인구를 늘리기 위해 황해도지방으로부터 서북지방으로 주민을 이주시켰다. 989년(성종 8)에는 서경에 설치된 서북면병마사의 관리구역에 편속되었다.

오늘날 강동군으로 부르는 지역은, 고려 문종대에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경기4도(西京畿四道:東道·西道·南道·北道)를 철폐하고 6현(縣)을 두게 되었을 때 강동현과 삼등현의 두 현을 합한 지역이다.

1136년(인종 14) 네 향촌(仍乙舍鄕·班石村·朴達串村·馬灘村)을 강동현으로, 성천현(成川縣)에 속하던 세 부곡(新城·蘿坪·拘牙)을 삼등현으로 편제하였다.

1216년(고종 3) 몽고군에 쫓긴 거란족이 압록강을 건너오자 강동땅은 격렬한 전란에 휘말려들게 되었다. 쫓겨온 거란족들이 약 2년간 서북 각지에서 만행을 자행하던 끝에 1218년 12월 강동성에 주저앉게 되자, 합진(哈眞)이 이끄는 1만 명의 몽고군과 완안자연(完顔子淵)이 지휘하는 동진(東眞)의 군사가 이를 토벌하려고 강동성으로 진군해 왔다.

이 때 고려는 서북면원수 조충(趙沖)과 서북면병마사 김취려(金就礪)로 하여금 몽고·동진의 군과 연합해 5만여 명의 거란인을 격파하였다.

이 때 생포한 일부 거란인을 각도에 분속시켜 살게 한 결과 거란장[契丹場]이 생겨나게 되었다. 강동성싸움이 있은 지 10년 뒤부터 약 30여 년간에 걸쳐 몽고군의 고려침략이 자행되었고 이 때 강동땅은 전란에 휩싸여 황폐해졌다.

[조 선]

조선이 건국된 뒤 전국 지방행정구역이 8도로 구분되면서 서북면으로 불려 오던 서북지방이 평안도로 개명되고 관찰사가 파견되었다. 이 때 강동현은 현감, 삼등현은 현령이 수령으로 시무하게 되었다.

강동땅은 사람이 드물게 살아 조공의 영송(迎送) 및 교역을 담당하기에 너무 힘에 겨웠다. 이에 세종은 1438년(세종 20)과 1440년 두 차례에 걸쳐 남쪽의 하삼도(下三道:慶尙道·全羅道·忠淸道) 사람을 서북 각지로 옮겨 살게 하는 이주정책을 적극 펼쳤다. 이로써 강동현·삼등현에 사람이 많이 살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1435년에 강동 사람 곽거(郭巨)가 현감을 폭행한 사건이 발생해, 강동현이 폐현되고 삼등현에 합쳐지게 되었다. 이 때 현의 명칭은 삼등현으로 되었지만 치소는 강동현 자리로 옮겨졌다. 1482년(성종 13)에 다시 삼등현에서 분리되어 강동현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평양을 점령했을 때 이일(李鎰)의 5,000명의 군사가 강동지구에 포진했다가 평양수복작전에 참가했으며, 1811년(순조 11)에 서북지방을 휩쓴 홍경래(洪景來)의 난 때는 강동현감 이진연(李晉淵)이 강동의 군사를 이끌고 토벌에 참전하였다.

[근 대]

이 군의 장정들은 한말 의병운동에 적극 참여해 국권수호의 애국운동에 헌신하였다. 이 군을 근거로 해 활약한 의병장으로는 김성률(金成律)·김흥석(金興錫)·박장손(朴長孫)·서광도(徐光道)·신병두(申炳斗)·장정원(張正元)·정홍근(鄭弘根) 등이 있다. 주로 삼등지방에서 게릴라식 전투를 전개해 일본관헌을 혼란시켰다.

지하자원이 풍부해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의 경제수탈이 심해 승호리의 시멘트와 각지의 무연탄광이 강제로 개발되었다. 이에 인적·물적 희생이 컸으므로 8·15광복의 기쁨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 가슴 벅찬 일이었다.

유물·유적

고천면 고성리에 있는 토성인 고읍성(古邑城)은 한때 강동현의 치소가 있던 성터로 고려 고종 때 3년간이나 거란족에게 점거되었으며,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에게 섬멸된 격전지이다. 강동면 칠포리아달산에는 둘레 136m의 거대한 능묘가 있는데, 예로부터 단군릉으로 전해져 현아(縣衙)에서 관리해 왔다.

한편, 봉진면에는 고구려 동천왕릉(東川王陵)으로 전해지는 한왕묘(漢王墓, 일명 皇帝墓)가 있으나 정확히 누구의 묘인지 확인할 수 없다.

조선 선조 때의 유학자인 조호익(曺好益)이 이곳에서 15년 이상이나 귀양살이한 유적이 여러 곳에 남아 있는데, 고지산(高芝山)의 풍뢰당(風雷堂)은 제자를 가르치던 서재이고, 청계서원(淸溪書院)은 강동의 선비들이 그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설립한 서원이다.

서도팔경의 하나인 삼등면에 있는 황학루(黃鶴樓)는 1667년(현종 7)에 재건되었으며, 주위의 경치가 아름다워 문인들의 시상(詩想)을 키워 주는 곳으로 유명하다. 고천면 열파리에 있는 사각 정자는 본래 서강원(西江院)이라 불렀으나, 중종의 부마인 여성위(礪城尉) 송연(宋宴)이 열파정(閱波亭)이라고 개칭하였다. 수정천의 북안에는 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축조한 만류제가 있어 지역주민의 소풍지가 되기도 하였다.

사찰로는 삼등면 가산 절벽 위에 있는 가산사(架山寺)가 유명하다. 갈현(葛峴) 길가에는 이공림송(李公林松)으로 불리는 반송(盤松)이 있는데, 근처 솔밭을 모두 벌채할 때 이동욱(李東郁)이 아깝게 여겨 길 일대를 매입해 보호했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되었다. 이 밖에 삼등면의 봉두산 기슭에 고려 때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동림사(東林寺)가 있으며, 강동면 문흥리에는 고인돌이 있어 그 부근의 지명을 고인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교육·문화

교육기관은 문헌상으로는 1672년(현종 13)에 청계서원이 건립되었고, 향교가 있어 유교적 교화기능을 담당하였다. 한말 국권수호 및 애국계몽운동의 기풍이 이곳에도 미쳐, 기독교를 통해 개화문명을 깨우친 인사들과 애국지사에 의한 교육구국투쟁의 방법으로 근대교육이 시작되었다.

1907년 박도현(朴道鉉)이 경신학교(敬信學校)를, 김상준(金尙俊)이 광명학교(光明學校)를 설립하였다. 이듬해에는 이석문(李錫文)이 숭덕학교(崇德學校)를, 이용균(李龍均)이 보성신숙(普成信塾)을 세웠고, 일본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선각자 김순석(金淳奭)은 신흥학교(信興學校)를 세워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1920년에는 승호읍의 김병두(金秉斗)와 오복원(吳復元)이 삼성의숙(三成義塾)을 설립, 이 군의 근대적 중등교육의 효시가 되었다. 또 1920년에는 만달면에 삼성소학교(三成小學校)가 건립되어 신학문교육에 기여하였다. 8·15광복 당시 이들 사립학교를 개편하거나 공립학교를 신설해 총 6개의 국민학교가 있었다.

한편, 한말 평양으로부터 장로교가 전도되어 신흥·숭덕·계명(啓明) 등의 기독교학교가 건립되었다. 강동읍에 종리원(宗理院)을 두었던 천도교는 민족사상을 심어 주었으며, 향교를 중심으로 한 유림회(儒林會)에서는 학술강습소를 조직하고 자주 명사초청강연회를 개최해, 산협지대로 인한 폐쇄적인 지역의 낙후성을 극복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1931년에는 명륜학원(明倫學院)을 설치해 유교도덕을 진작하였다.

이 고장에 전래되고 있는 설화에는 「이부평전설(李富坪傳說)」·「황학루전설(黃鶴樓傳說)」·「관굴전설(官窟傳說)」 등이 있다. 「이부평전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등면 아차천 서쪽에 있는 들을 이부평이라 하는데, 옛날에는 송림산 아래에 큰 못이 있었고 이부라는 사람이 근처에서 고기를 잡아 근근히 생계를 이어 가고 있었다. 어느 날 이부가 못에 가 보니 물 위에 이상한 생물체가 떠 있었다.

그가 놀라 용이라고 소리쳤더니, 그 날 밤 꿈에 푸른 옷을 입은 소년이 나타나, “나는 이 못에 수천 년이나 있었지만 아름다운 이름을 얻지 못해 승천을 못했는데 당신이 나를 용이라 불러 주어 승천하게 되었으니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연못을 옥토로 변하게 해주겠다.” 하고는 사라졌다.

다음 날 큰비가 쏟아져 부근의 능성강이 범람해 물길이 남쪽으로 바뀌어 흐르게 되니 못은 큰 평야가 되었고, 이부는 이 땅을 부지런히 경작해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황학루전설」은 삼등면 능성강 기슭에 있는 누각에 얽힌 이야기이다. 옛날 이곳에 마음씨 고운 노부부가 주막을 차려 놓고 술을 팔아 살아갔다.

하루는 백발노인이 찾아와 술을 청하므로 정성껏 대접했더니 먹고 그냥 가 버리기를 닷새 동안이나 하다가 엿새째에 누런 종이로 학을 한 마리 만들어 주면서 잘 간직하라고 한 뒤 갑자기 사라졌다.

그 부부는 학을 장롱에 넣어 두었다가 다음 날 장롱문을 열어 보니 누런 학이 살아 나오면서 춤을 추었다. 그 소문이 널리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이에 장사가 잘 되어 부부는 큰 부자가 되었다. 그들은 하늘이 주신 복이라 생각하고 황학을 기념해 이 누각을 세웠다고 한다. 관굴전설은 봉진면 봉당리에 있는 굴에 얽힌 이야기이다.

산업·교통

대동강 유역의 평야지대에서는 대체로 밭농사가 이루어져 보리·조·밀·콩·수수 등의 농산물이 풍부하며, 양잠·담배재배·축우사육 등을 부업으로 한다.

특산물로는 누에고치·땅콩·밤이 산출되는데 땅콩은 한때 1만2000석 이상 산출되어 전국에서 수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누에고치는 강동고치[江東繭]라 해 전국적으로 유명했고, 이곳 평양밤은 맛이 좋아 함종·강서·성천 밤과 함께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광업은 평안남도 남부탄전 동부구역의 주요부를 이루며, 무연탄의 매장량이 많다. 동부구역의 탄전은 대략 삼각형을 이루는데, 동서 26㎞, 남북 18㎞에 걸쳐 분포해 있다. 만달산·강동·삼등의 각 탄광에서 비교적 많이 채굴되었고, 이 밖에 질이 좋은 석회암이 도처에 많아 승호리 시멘트공장의 원자재가 되었다.

산간 각지와 대동강 연안의 오지에는 정기시장이 개설되었다. 강동면 아달리의 현내장(懸內場)은 3·8일장이고, 삼등면 문왕리의 조양장(朝陽場)과 원탄면 고비리의 고비장(高飛場), 봉진면 봉당리의 봉진장(鳳津場)은 1·6일장이며, 승호읍 승호리의 승호리장(勝湖里場)은 5·10일장이고, 고천면 열파리의 열파장(閱波場)은 2·7일장이다.

조양장에서는 주로 농산물이 거래되며, 승호리장에서는 직물과 수산물의 거래가 활발하다. 현내장·승호리장·열파장에는 가축시장도 병설되어 있으며, 특히 열파가축시장은 거래가 활발하다.

교통으로는 평덕선(平德線:승호리∼덕천)이 남쪽 경계를 따라 동쪽으로 달리다가 흑령 부근에서 북행하는데, 입석(立石)·승호·화천(貨泉)·흑령·석름(石廩)·강동의 여러 역이 설치되어 군내 교통의 중요한 구실을 한다. 도로는 평양∼원산간의 1등도로가 원탄·고천·강동의 각 면을 통과하고, 평양∼삼동, 사인장∼열파, 강동∼승호리간에는 3등도로가 완성되었으며, 강동∼삼동, 강동∼사인장간에는 등외도로가 개통되었다.

대동강의 수운은 뗏목과 신탄(新炭)을 운반하는 데 이용될 뿐이다. 이 고장은 산수가 아름다운 곳이 많으며, 강동군이 아직 현으로 있을 당시의 ‘강동팔경’과 조선시대 삼등현 일대의 ‘삼등팔경’ 등이 특히 유명하다.

강동팔경은 대박산에서 고사리 꺾는 모습(大朴山採薇), 대산사에서 울려 퍼지는 저녁 종소리(臺山寺暮鐘), 수정천에서의 낚시질(水晶川釣魚), 사인암에서의 매사냥(舍人巖放鷹), 봉악의 맑은 날 설경(鳳岳霽雪), 날 저물 때 용교에 배를 댄 풍경(龍橋晩泊), 진사봉에서의 달구경(進士峰玩月), 모운대에서의 관등놀이(暮雲臺觀燈) 등 여덟 곳의 빼어난 정경을 말한다.

삼등팔경은 가산사의 저녁 종소리(架山暮鐘), 묵촌의 봄밭갈이 풍경(墨村春耕), 매바위에서 낚시 드리우는 모습(鷹巖垂釣), 앵무주와 배 떠 있는 풍경(鸚洲泛舟), 황학루 가을달(黃鶴樓秋月), 봉두산과 아지랑이(鳳岑晴嵐), 고산에 내려앉은 기러기(孤山點雁), 광한정에 눈 날리는 풍경(廣亭飛雪) 등의 정경을 말한다.

읍·면

[승호읍 勝湖邑]

군의 서부에 있는 읍. 면적 86.32㎢, 인구 1만 7909명(1944년 현재). 읍 소재지는 승호리이다. 본래 만달면(晩達面)이었으나 1941년 승호읍으로 승격되었다. 동북쪽 끝으로 흑룡산(黑龍山)이 원탄면과 경계를 이루고, 서부 중앙에는 만달산이 있다. 하천은 능성강이 서류해 남강이 되면서 중화군과의 경계를 지난다.

농산물로는 쌀·밀·보리·콩·팥·땅콩·조·수수·옥수수·메밀·녹두·고구마·감자 등과 잎담배·목화·대마·깨 등이 생산된다. 특히 누에치기와 축산업은 예로부터 농가소득에서 큰 몫을 차지하였다.

삼등면까지 뻗은 남부탄전을 대성리와 신장리 지역에서 일본인 회사가 개발했는데, 채탄의 일부는 발전용과 시멘트공장용으로 사용되었고 대부분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공업으로는 승호리 시멘트공장이 있다. 교통은 평원선이 남부를 통과하고 평등선(평양∼삼등) 3등도로가 중앙을 관통한다.

교육기관으로 김병두와 을사오적암살사건에 관련되었던 독립지사 오복원이 파통리에 설립한 삼성의숙은 이곳에서 항일애국정신을 고취하며 신교육운동을 펴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폐쇄되고 공립학교에 흡수되었다.

승호(勝湖)·괴음(槐陰)·입석(立石)·광청(廣淸)·대성(大成)·운학(雲鶴)·신장(新壯)·화천(貨泉)·동서(東西)·인흥(仁興)·금옥(金玉)·응암(鷹巖)·파릉(巴陵) 등 13개 리가 있다.

[강동면 江東面]

군의 동부 중앙에 있는 면. 면적 65.97㎢, 인구 1만 2834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아달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성천군 문헌면(文憲面)과 군내의 현내면(縣內面)이 병합되어 강동면이 신설되었다. 북쪽에는 대박산이 있으며, 성천군에서 발원한 수정천이 면 중앙을 서북류해 고천면에서 서강과 합류한다.

농산물로는 쌀·밀·보리·콩·팥·땅콩·조·옥수수·수수·고구마·감자 등과 잎담배·목화·깨 등을 생산하며, 농가부업으로 누에치기·농우사육·양돈 등이 활발하고, 지리·송학리 등에서는 양계업도 활발하다. 무연탄광과 금광이 있으며, 천연슬레이트·공작석 등도 생산된다. 교통은 평양∼원산간 1등도로가 면의 중심을 통과하고, 평덕선이 동쪽 주변을 지난다.

칠포리의 대박산 중턱에는 종유석과 석순으로 이루어진 청계동굴이 있다. 유적으로는 칠포리아달산 서쪽에 주위 약 136m나 되는 단군능묘가 있는데, 해마다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면서 성역화 작업을 추진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중지되었다.

고지산 밑에는 조호익이 제자를 가르쳤다는 서재 풍뢰당의 옛터가 남아 있고, 칠포리에는 1672년(현종 13)에 창설된 청계서원이 있으며, 금곡리에는 고분군이 있다. 남쪽에 제석산이 있는데 산 아래에는 제석사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1907년 김상준과 김성숙이 광명학교를 설립해 항일애국정신을 고취시키며 민족운동을 전개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국민학교에 편입되었다.

아달(阿達)·지례(智禮)·하(下)·숭의(崇義)·효덕(孝德)·화강(花岡)·원효(源孝)·명례(明禮)·명의(明義)·와룡(臥龍)·용복(龍伏)·용흥(龍興)·송학(松鶴)·문평(文坪)·문흥(文興)·지(芝)·칠포(漆浦)·상(上) 등의 18개 리가 있다.

[고천면 高泉面]

군의 서북부에 있는 면. 면적 45.91㎢, 인구 7,339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열파리이다. 1895년 당시 고천방(高泉坊)으로 강동현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1910년 고천면이 되었다.

서쪽 중앙에는 손자산이 솟아 있고 대동군과의 경계에는 국사봉이 있다. 동부 중앙에는 서강이 남북으로 관류해 원탄면으로 흘러 들어가며, 동쪽 중앙에는 수정천이 흘러들어 서강에 합류된다.

농산물로는 쌀·밀·조·콩·팥·수수·옥수수·녹두·고구마·감자 등과 잎담배·목화·대마·깨 등이 생산된다. 또한 누에치기·농우사육·양돈 등으로 농가소득을 올린다. 교통은 평양∼원산간 1등도로가 동부를 관통하며, 여기서 분기한 도로가 순천군으로 통한다.

유적으로는 동쪽 서강변에 사각 정자로 된 열파정이 있다. 그 뒤로 병풍산이 둘러져 있으며, 강 건너 서쪽에는 손자산이 높이 솟아 있어 절경의 명승지로 알려져 있다. 고성리에는 둘레 1,745m의 토성이 있는데, 성의 서쪽으로는 강이 흐르고 동쪽으로는 절벽이며, 북쪽은 급경사의 산이 있고 남쪽에는 수정천이 흘러 자연의 요새지를 이룬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3개교가 있다. 열파(閱波)·수(壽)·맥전(麥田)·명(明)·향교(鄕校)·고성(古城)·도덕(道德)·선광(先光)·구암(龜巖)·광덕(廣德)·용천(龍泉)·반석(盤石)·관학(冠鶴)·삼성(三成)·천답(泉畓)·동서(東西)·마학(馬鶴)의 17개 리가 있다.

[봉진면 鳳津面]

군의 북단부에 있는 면. 면적 74.62㎢, 인구 9,145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한왕리이다. 1929년 면 단위 구역의 개편이 이루어질 때 마산면(馬山面)과 구지면(區池面)이 없어지면서 그 일부지역과 고천면 고성리, 고읍면 북삼리·동삼리가 병합되어 봉진면이 되었다.

동쪽으로는 현명산(玄明山)이 성천군과의 경계를 이루며 그 남쪽으로 취봉산(鷲峰山)이 경계를 이룬다. 하천은 성천의 비루강이 면의 중앙을 동서로 관류해 서강이 된다.

농산물로는 쌀·밀·보리·조·콩·팥·수수·옥수수·메밀·녹두·고구마·감자 등과 잎담배·목화·대마·깨 등이 생산되며, 양잠·농우사육·양돈 등도 농가의 재산증식에 큰 몫을 차지한다. 광업으로는 봉당리에 철광이 있고, 하단리에서 대리석이 산출된다.

교통은 3등도로가 북부를 통과한다. 유적으로는 한왕리에 고구려시대의 토총인 한왕묘(漢王墓, 일명 皇帝墓)가 있고, 고성리에는 고성지(姑城址)가 있는데 서강의 넓은 구릉지대 곳곳에 석축의 흔적이 있으나 축조연대는 알 수 없고 기록도 없다.

성터 안에는 서창(西倉)의 유적이 있고 고성이라는 동리명이 있으며, 할미성이라고도 부르는 점으로 보아 유서 깊은 곳임이 분명하다.

서강변의 암벽에는 관굴이 있는데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강동현감 홍내범(洪乃範)이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면서 가족들을 이곳으로 피난시켜 난을 피해, 이 굴을 ‘관청의 굴’, 즉 관굴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2개교가 있다. 한왕(漢王)·봉호(鳳湖)·고성(姑城)·외단(外端)·중단(中端)·하단(下端)·신(新)·용연(龍淵)·금곡(金谷)·운룡(雲龍)·봉당(鳳塘)·향목(香木)·건천(乾泉)·변희(卞希)·문왕(文旺)·동삼(東三)·북삼(北三)·동(東)·연(蓮) 등 19개 리가 있다.

[삼등면 三登面]

군의 남부 동단에 있는 면. 면적 151.05㎢, 인구 2만 2530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봉의리이다. 1136년(인종 14) 삼등현이 되었다가 1430년(세종 12) 강동현에 통합되었고, 1455년(세조 1) 다시 현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에는 군이 되었으며 후에 강동군에 합쳐졌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영주면(靈宙面)을 병합해 삼등면으로 되었다.

남쪽에 봉두산이 있고 서북쪽에 제령산(祭靈山)이 있으며, 북쪽에는 시루봉·함지봉이 있고 중앙에는 흑령산(黑嶺山, 852m)이 있다. 문성강이 서류해 능성강이 되어 황해도 수안군과의 경계를 지나며, 봉화산에서 발원한 아차천이 서남류해 능성강과 합류한다.

능성강 기슭에는 1666년에 건립한 황학루가 있고, 그 밑으로 앵무주가 펼쳐져 있으며, 건너편에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는데 벽면에는 시인과 묵객들의 묵흔이 남아 있다. 또 능성강변에는 강물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36곳의 경승을 이루어 ‘삼십육동천’이라 부르는 명승지가 있다.

원봉산 중턱에는 종유석이 천태만상으로 달려 있으며 ‘지하금강’이라 하는 종유굴이 있다. 사단리 산상에는 능성진이 있는데 지금은 성터만 남아 있으며, 태잠리에는 고성지가 있는데 성곽이 426m로 석축이 군데군데 남아 있고 남쪽에는 석문이 있어 석문리라는 동리명이 생겨났다. 성 안에는 절터가 있고, 밭을 갈 때 솥조각·화살촉 등이 나오기도 하였다.

또 남쪽 봉두산 동편 기슭에 고려 때 세운 동림사가 있고, 그 옆으로 한 줄기의 폭포가 있어 경관이 빼어나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구룡산에는 용복사(龍伏寺)가 있으며 가산에는 가산사가 있다.

농산물로는 쌀·밀·쌀보리·콩·팥·땅콩·조·수수·옥수수·메밀·녹두·고구마·감자 등과 잎담배·목화·대마·깨 등이 생산되며, 양잠업·농우사육·양돈 등이 농가소득에 기여한다. 광업으로는 삼등탄광이 있었으며, 천연슬레이트도 다량 채석되어 평양으로 반출되었다. 공업으로는 제지공장이 태잠리에 2개, 영대리에 1개 있고, 봉의리에는 양조장이 있었다.

교통은 평등선(平登線)의 3등도로가 중앙을 관통해 성천으로 이어지고, 평덕선(平德線)이 중앙을 통과한다. 교육기관으로는 1907년 설립되어 항일애국사상을 고취하며 민족운동을 전개하던 신광학교가 있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공립국민학교에 흡수되었다.

봉의(鳳儀)·문명(文明)·용연(龍淵)·생금(生金)·고류(古柳)·명학(鳴鶴)·송석(松石)·자양(紫陽)·석문(石門)·태잠(太岑)·고봉(古鳳)·봉오(鳳梧)·석름(石廩)·봉래(鳳來)·옥정(玉井)·상동(上東)·속추(束芻)·반룡(攀龍)·대(垈)·영대(靈臺)·제령(祭靈)·송가(松街)·청탄(淸灘)·사탄(沙灘)·사단(社壇)·봉서(鳳瑞) 등 26개 리가 있다.

[원탄면 元灘面]

군의 서부 중앙에 있는 면. 면적 100.91㎢, 인구 1만 652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상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원당면(元堂面)과 마탄면(馬灘面)이 병합되어 원탄면이 되었다. 동남쪽에는 흑룡산이 승호읍과의 경계를 이루고, 서쪽에는 봉황산이 서강을 굽어본다.

하천은 양덕과 맹산에서 발원한 물이 성천에 와서 비루강이 되었다가 서류해 서강이 되어 면의 중앙을 지나 대동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농산물은 쌀·밀·콩·팥·조·수수·옥수수·고구마·감자 등과 잎담배·목화·대마·깨 등이 생산되며, 양잠업과 축산업이 농가소득에서 큰 몫을 차지한다. 교통은 평원선 1등도로가 면의 북변을 통과한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3개교가 있다. 상(上)·하(下)·원흥(圓興)·내(內)·신룡(新龍)·원신(元新)·문우(文隅)·남경(南京)·표대(表垈)·마산(馬山)·봉도(鳳島)·송오(松塢)·삼청(三靑)·탑하(塔下)·흑룡(黑龍)·고비(高飛)·훈암(壎巖) 등의 17개 리가 있다.

강동군(북한)

평양시의 북동부에 있는 군. 동쪽은 회창군, 서쪽은 승호구역과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삼석구역, 남쪽은 상원군과 황해북도 연산군, 북쪽은 성천군·평성시와 접해 있다. 동경 125°57′∼126°25′, 북위 38°55′∼39°14′에 위치하며, 면적 516㎢, 인구 18만 3500여 명(1996년 추정)이다.

1952년 12월 승호읍과 원탄면 일부를 분리해 신설된 승호군에 이관하고, 강동면·고천면·봉진면과 삼등면·원탄면 일부와 성천군 삼흥면 일부의 면 행정단위를 폐지하고 이단위로 통폐합해 군 행정구역을 개편, 조정하였다.

1959년 10월 광덕리·도덕리·삼성리·원신리·원흥리를 분리해 삼석구역으로 이관하고 회창군 구빈리를 편입하였다. 1967년 10월에는 북부지역의 하단리·한왕리를 분리해 평성시로 이관했으며, 1983년 평안남도에서 분리, 평양시에 편입되었다.

행정구역은 강동읍과 봉화(烽火)·문흥(文興)·향목(香木)·동(東)·맥전(麥田)·용흥(龍興)·명의(明義)·삼등(三登)·송석·남강·구빈(九賓)·난산(卵山)·태잠(太岑)·문화(文化)·순창(順昌)·화강(花岡) 등 16개 리, 흑령(黑嶺)·고비(高飛)·송가(松街)·대리(垈里)·하리(下里) 등 5개 노동자구로 되어 있다.

[자연환경]

서부 평양준평원지대와 동부 내륙산간지대의 중간지대에 속해 동고서저의 강동분지를 이룬다. 북부에는 현명산(826m)·추봉산(513m) 등이 솟아 있고, 동부에는 태을덕산(526m)·각흘산(630m), 남부에는 사봉산(618m)·풍어산(766m)·제령산(498m) 등이 솟아 있다.

대동강이 군의 서북쪽 경계를 따라 남쪽으로 흐르고, 수정천이 군의 중심부를 서북방향으로 흘러 대동강에 유입하면서 보평평야를 이룬다. 남쪽 경계에는 남강이 동서방향으로 흐르고, 지류인 우아천 유역에는 아치내평야가 펼쳐져 있다.

지질은 상부고생대의 평안계지층에 속하며, 석회암이 넓게 펼쳐져 있으므로 카르스트지형이 발달해 종유굴이 많다. 토양은 대부분 인 성분을 많이 포함한 갈색산림토양이다. 연평균기온 9.7℃, 1월 평균기온 -10℃, 8월 평균기온 23℃이며, 연평균강수량은 1,100㎜이다.

산림이 군면적의 76%를 차지하고 대부분의 지역은 소나무 단순림을 이루며, 500m 이상 고지대에는 참나무류·물푸레나무·박달나무·수수꽃다리 등 석회암지표식물과 다래·머루·고사리·도라지·버섯 등의 약초류·산열매·산나물 등이 식생한다. 군의 상부고생대 지층에는 무연탄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으며, 이 밖에 형석·석회석·철·동을 비롯한 유용광물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

[산업·교통]

경지는 군면적의 20%이며 그 중 논이 17%, 밭이 68%를 차지한다. 주요 농산물은 옥수수·쌀·밀·보리·콩이고 공예작물로 담배를 많이 재배한다.

교외농업지역으로 무·배추를 비롯한 채소가 많이 생산되고, 대규모 닭·오리·돼지사육장이 갖추어져 있다. 과수지·뽕밭이 경지면적의 10%를 차지해, 양잠이 활발하고 사과·대추·살구·밤나무가 많이 자란다. 특산물로 약밤이 유명하다.

이 군은 북한의 주요 석탄생산기지의 하나로 강동지구탄광연합기업소 산하의 흑령·강동·영남·덕산탄광 등이 있다. 그 밖에 식료·일용품·기계·방직 및 피복·건재 등 여러 공업부문들이 새로 발전하고 있다.

교통은 평덕선(평양∼덕천)이 군의 중심부를 통과하고 평양∼원산을 연결하는 간선도로가 북부를 지난다. 그 밖에 강동읍을 중심으로 평성시, 회창군, 황해북도 연산군으로 통하는 자동차도로가 있다.

[교육·문화]

관광지로는 삼등 종유굴과 명승지로 널리 알려진 36동천이 있다. 또 문흥리에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향목리에 고인돌 무덤, 이달산 기슭에 단군묘라고 전해지는 큰 무덤이 있으며, 봉화리에는 고려시대의 강동읍 성터가 있다. 순창리에서는 기원전 24세기 이전의 도기류가 출토되었다. 군의 남부 삼등리에는 동천왕릉·동림사·가산사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2개의 고등전문학교를 비롯해 30여 개의 각급학교들이 설치되어 있으며, 유치원·탁아소·문화회관 등이 갖추어져 있다. → 평양특별시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안남도지』(평안남도지편찬위원회, 1977)
『강동지』(강동지편찬위원회, 1982)
『북한행정구역 및 산천지세』(국토통일원, 1983)
『강동군지』(강동군지편찬위원회, 1984)
『인물의 고향』-북한편-(중앙일보사, 1991)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93)
『지방행정구역요람』(내무부, 1996)
집필자
노도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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