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개태사지 석조 여래삼존 입상은 논산시 연산면 개태사에 있는 고려 시대의 삼존불상이다. 고려의 태조 왕건이 개태사를 짓고 940년에 불상 세 개를 건립하였다. 이 삼존불상 중 가운데 본존 불상은 약 4.15m로 큰 장륙상에 가깝다. 왼쪽 보살상은 약 3.5m, 오른쪽 보살상은 약 3.21m이다. 삼존불상의 표정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짧은 코와 인중, 미소 띤 입, 넓은 뺨의 형태는 동일하다. 삼존불상이 세워진 곳은 고려가 후백제로부터 항복을 받은 장소이다. 역사적 장소에 거대한 삼존불상을 건립하여 후삼국 통일을 기념한 것이다.
논산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은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태조 왕건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개태사를 건립하고 세운 삼존불상이다. 삼존불상은 개태사의 건립과 동시에 조성되어 940년(태조 23)에 완공되었다.
삼존불 중 본존 불상은 약 4.15m의 크기로 장육상에 가깝다. 좌협시 보살입상은 약 3.5m이며 우협시 보살입상은 약 3.21m이다. 본존상은 나말여초기에 보기 드문 편단우견식 착의로 넓은 방형 연화대좌 위에 서 있다.
머리에는 폭이 좁고 높은 형태의 육계가 표현되어 있고 나발은 마모되어 일부만이 남아 있다. 얼굴은 크고 둥근 편인데 이마가 유난히 좁고 눈매가 길며 두 뺨이 넓다. 코는 길이가 짧고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다. 귀는 상당히 길며 귓바퀴가 얼굴 방향으로 달팽이처럼 휘어져 있다.
얼굴에 비해 어깨는 좁고 가슴 부분은 평평하다. 편단우견한 대의 주름은 넓은 띠 주름으로 아래에 입은 군의 주름도 일정한 간격의 세로 띠 주름을 이루고 있다. 오른손은 손가락 세 개가 보수되었으며 어깨 높이로 들어 시무외인을 결하고 있다. 왼손은 손가락이 거의 후보된 것으로서 배 위에 대고 있는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괴체적인 불신인 데다가 목이 굵고 손이 너무 커서 낯선 느낌을 준다.
그러나 넓은 띠 주름의 표현을 비롯해서 뭉툭하게 짧은 코, 짧은 인중, 입가에 미소를 띤 얼굴은 나말여초기 불상에서 흔히 보이는 특징이다. 이러한 점은 매산리 석조보살입상, 골굴암 마애불입상이나 청량사 석불좌상과 같은 나말여초 시기에 제작된 석불이나 원주에서 출토된 고려 초기 철불들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팔각연화대좌 위에 서 있는 좌우의 협시보살상 역시 본존상처럼 괴체적이며 둔중하다. 전체적으로 신체가 밋밋한데 천의(天衣)의 표현이나 팔찌, 군의(裙衣)의 화문 등에서 섬세함이 나타난다. 협시불상의 상호는 본존상에 비해 천진하고 부드럽다. 이들 삼존불상은 표정에서는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짧은 코와 인중, 미소 띤 입, 넓은 뺨의 형태는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세 불상 모두 턱에 세로의 홈이 파여 있다. 앞머리 부분에는 한 단의 턱이 있어 원래 금속제 보관이 씌여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두 손은 들어서 손가락을 살짝 구부린 시무외 · 여원인의 통인(通印)을 결하고 있다.
두 보살상 중 발굴조사를 통해 새로 발견된 좌협시보살상의 머리는 흙 속에 오랫동안 묻혀 있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상태가 더 양호할 뿐만 아니라 얼굴의 표현에서도 생동감이 느껴진다. 세부표현에 있어서도 우협시 불상보다 뛰어나다. 불상간의 이러한 차이는 여러 조각가가 함께 참여하여 작업하면서 발생한 결과라고 이해될 수 있다.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을 건립하게 된 배경은 태조 왕건이 개태사를 창건하고 직접 지은 「개태사화엄법회소(開泰寺華嚴法會疏)」를 통해서 살필 수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고려군은 일리천 전투에서 후백제군을 대파하고 후퇴한 신검을 추격해 마성(馬城)에 주둔하였다고 한다. 이때 후백제의 신검이 찾아와 항복을 청하였고 마침내 왕건의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당시 마성의 위치에 관해서는 고산자 김정호를 비롯해 여러 학자에 의해 다양한 의견이 개진되었는데, 최근의 연구를 통해서 현재 개태사 주변에 있는 토성이 마성임이 논증되었다. 개태사 석조여래삼존입상이 세워진 곳은 고려가 후백제로부터 항복을 받아 후삼국 통일을 완성한 의미있는 장소이다. 태조 왕건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 역사적 장소에 거대한 삼존불상을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