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4m. 기림사(祇林寺) 골짜기에 위치한 골굴암에는 자연 굴을 이용하여 조성한 12개의 석굴이 있는데, 이 중 가장 높은 암벽에 불상이 새겨져 있다. 마애불은 석질이 고르지 않아 무릎 아래가 떨어져나갔다. 그리고 가슴과 광배 일부가 손상되었으나, 전체적으로 강건한 조각 수법을 보인다. 조선시대 화가가 그린 「교남명승첩(嶠南名勝帖)」 가운데 「골굴석굴(骨窟石窟)」에는 목조 전실(木造前室)이 묘사되어 있지만, 지금은 보이지 않고 곳곳에 가구(架構) 흔적만 남아 있다.
소발(素髮)의 머리 위에는 육계(肉髻)가 큼직하게 솟아 있다. 윤곽이 뚜렷한 얼굴에 반쯤 뜬 눈이 길게 조각되었다. 코는 크지 않지만 뚜렷하게 각이 져서 타원형의 눈썹으로 이어져 있다. 그 사이에는 백호공(白毫孔)이 큼직하게 표현되었다. 인중은 짧고 입술은 작고 두꺼운데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감돈다. 오른쪽 귀가 떨어져나갔지만, 남은 왼쪽 귀는 길고 크다. 어깨는 거의 수평을 이루면서 넓다. 목과 가슴 윗부분은 손상되었다.
입체감이 두드러진 얼굴에 비하여 신체는 평면적이어서 신체의 조형성이 감소되어 있다. 옷은 통견(通肩)이며 옷주름은 평판(平板)을 겹쳐놓은 듯이 두 팔, 가슴, 하반신에서 규칙적인 평행선을 그리고 있다. 겨드랑이 사이에서는 V자형으로 표현되어 팔과 상체의 굴곡을 나타내고 있다. 가슴 좌우에는 아래로 처진 옷깃이 보이며 옷깃 사이로 평행의 옷주름이 비스듬하게 표현되었다.
유난히 작게 표현된 왼손은 배 앞에서 손바닥을 위로 향하여 넷째 손가락과 엄지손가락을 맞대고 있다. 오른팔은 손상되었으나, 어깨에서 내려오는 윤곽선으로 보아 무릎 위에 얹은 듯하다.
암벽에 그대로 새긴 광배는 머리 주위에 끝이 뾰족한 홑잎의 연꽃을 배치하여 두광(頭光)으로 삼았다. 두광과 불신 사이에는 율동적인 불꽃무늬가 음각되어 있다. 대좌 부분은 마멸이 심하여 윤곽이 불분명하나, 구름무늬 같은 각선(刻線)의 흔적이 보인다.
이 마애불은 평면적인 신체와 얇게 빚은 듯한 계단식 옷주름, 양 겨드랑이 사이의 V자형 옷주름 등이 867년(경문왕 7)에 조성된 경상북도 봉화의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1989년 지정)과 유사하다. 따라서 조성 시기는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후반기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