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본존 높이 8.2m. 이곳은 예로부터 김유신(金庾信)의 수도처로 알려져 왔다. 석실의 규모는 길이 약 18m, 너비 3m의 ㄷ자형으로 자연 석실 내부에 10구의 불보살상과 400여 자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동북쪽의 독립된 바위 면에는 깊은 돋을새김[高浮彫]으로 표현된 여래입상이 있는데 둥근 얼굴에 고졸한 미소가 가득하며, 머리 위에는 2단의 작은 육계(肉髻)가 솟아 있다. 법의는 통견(通肩)이며 U자형으로 트인 가슴 사이로 군의(裙衣)의 띠 매듭이 노출되어 있다.
양손은 손마디가 짧고 둥근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여 시무외(施無畏)·여원인(與願印)을 지었으나 팔목은 표현되지 않았다. 양 무릎 위에는 상체에서 이어진 동심타원형 옷주름을 성글게 표현하였으며, 발은 가지런히 모아 정면을 향하였다.
동쪽 면에 새겨진 보살입상은 나형(裸形)의 상체에 보관은 생략되었으며, 왼손은 들어서 가슴에 대었고 오른손은 몸 앞에서 보병(寶甁)을 잡고 있다. 마멸이 심하여 분명하지 않지만 남면에도 광배가 없는 1구의 보살입상을 새겨 앞의 불보살상과 함께 삼존을 이루고 있다.
이 보살상의 동쪽 면에는 ‘慶州上人巖造像銘記(경주상인암조상명기)’라는 400여 자의 명문이 음각되었는데, 이 중에 “神仙寺作彌勒石像一區高三丈菩薩二區(신선사작미륵석상1구고삼장보살2구)”라는 문구가 보인다. 북면에는 모두 7구의 불보살상과 인물상이 상하 일렬로 얕게 부조되어 있다.
뒷면에는 왼쪽에서 오른쪽을 향하여 우견편단(右肩偏袒)의 여래입상, 보관이 생략된 보살입상, 우견편단의 여래입상, 상체가 나형인 반가사유상을 나란히 배치하였다. 반가사유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왼손을 본존 쪽으로 내밀어 아래쪽의 인물상을 인도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머리 위에는 보주형(寶珠形)의 광배를 갖추고, 발밑에는 단판(單瓣)의 연꽃을 배치하여 대좌로 삼았다.
아랫면에는 일렬로 서서 본존을 향하여 걸어가는 모습의 인물상 2구와 여기서 조금 동떨어진 곳에 동안의 여래상 1구가 새겨져 있다. 이 중 인물상은 모두 버선처럼 생긴 관모(冠帽)를 쓰고 긴 저고리에 통바지 같은 것을 입고 있어 당시의 복식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손에는 각각 손 향로와 나뭇가지형을 쥐고 있어 이 인물상은 공양상이 분명하다.
이 마애불상군은 우리나라 석굴사원의 시원적 형식을 보여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클 뿐만 아니라, 당시 신앙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조성 연대는 7세기 초경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