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체가 ()

악장가사 / 한림별곡
악장가사 / 한림별곡
고전시가
개념
고려후기에 발생하여 조선전기까지 약 350년간 지속된 장형의 교술시가. 경기하여가 · 속악가사 · 별곡체.
이칭
이칭
경기하여가, 속악가사, 별곡체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고려후기에 발생하여 조선전기까지 약 350년간 지속된 장형의 교술시가. 경기하여가 · 속악가사 · 별곡체.
개설

연이 나누어지고 여음이 있는 속악가사의 형식을 따라 만든 사대부들의 노래이다.

대부분 ‘경(景) 긔 엇더ᄒᆞ니잇고’ 또는 ‘경기하여(景幾何如)’라는 구절이 제 4․6행에 있으므로 “경기”를 따서 붙여진 갈래 상의 명칭이다. 이외에도 이 구절 전체를 따서 경기하여가(景幾何如歌) · 경기하여체가(景幾何如體歌)라고 하기도 하고 노래 제목에 붙은 ’별곡‘ 때문에 별곡체(別曲體) · 별곡체가(別曲體歌) 등으로 불린다. 지금까지 발견된 작품은 고려 후기의 작품이 3편, 조선시대의 작품이 23편으로 모두 26편이다. 조선시대 작품 중에서 「관산별곡(關山別曲)」은 전해지지 않으므로 현존하는 고려~조선시대 경기체가 작품은 모두 25편이 된다.

최초의 작품은 고려 고종조(1214∼1256)에 지어진 「한림별곡(翰林別曲)」이고, 최후의 작품은 민규(閔圭)가 1860년(철종 11)에 지은 「충효가(忠孝歌)」이다. 이 가운데 반석평(潘碩枰)의 「관산별곡(關山別曲)」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들 작품을 수록한 문헌은 「한림별곡」이 수록된 『고려사』「악지: 속악」을 비롯하여 『세종실록』 및 15세기 전후의 조선조 문헌 『악학궤범』 · 『악장가사』등이다. 경기체가는 수록문헌의 성격에 의하면 궁중 종합공연예술인 정재의 일부로 악장적 성격을 띄고 있다. 이외에 족보 및 개인의 문집류에 수록되어 가문 찬양 등의 구실을 한 것도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작품을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창작 순서 제명 작자 구성장수 창작연대 수록문헌
1 한림별곡(翰林別曲) 한림제유(翰林諸儒) 8 고종조(1216~1259) 『고려사(高麗史)』『악장가사(樂章歌詞)』
2 관동별곡(關東別曲) 안축 (安軸) 9 충숙왕 17년(1330) 『근재집(謹齋集)』
3 죽계별곡(竹溪別曲) 안축 5 충숙․충목왕대(1330~1348) 『근재집』
4 상대별곡(霜臺別曲) 권근 (權近) 5 태종대(1401~1409) 『악장가사』
5 구월산별곡(九月山別曲) 유영 (柳潁) 4 세종 5년(1423) 『문화유씨세보(文化柳氏世譜)』
6 화산별곡(華山別曲) 변계량(卞季良) 8 세종 7년(1425) 『세종실록』ㆍ『악장가사』
7 가성덕(歌聖德) 예조 (禮曹) 6 세종 11년(1429) 『세종실록』
8 축성수(祝聖壽) 예조 10 세종 11년(1429) 『세종실록』
9 오륜가(五倫歌) 미상 6 세종14년(1432) 경 『악장가사』
10 연형제곡(宴兄弟曲) 미상 6 세종14년(1432) 『악장가사』
11 미타찬(彌陀讚) 기화 (己和) 10 세종대(1418~1450) 『함허당득통화상어록(涵虛堂 得通和尙語錄)』
12 안양찬(安養讚) 기화 10 세종대(1418~1450) 『함허당득통화상어록』
13 미타경찬(彌陀經讚) 기화 10 세종대(1418~1450) 『함허당득통화상어록』
14 서방가(西方歌) 의상 (義相) 10 세종대(1418~1450) 『염불작법(念佛作法)』
15 기우목동가(騎牛牧童歌) 지은 (智訔) 12 세조대(1455~1468) 『적멸시중론(寂滅示衆論)』
16 불우헌곡(不憂軒曲) 정극인(丁克仁) 7 성종 3년(1472) 『불우헌집(不憂軒集)』
17 금성별곡(錦城別曲) 박성건(朴成乾) 6 성종 11년(1480) 『함양박씨세보(咸陽朴氏世譜)』
18 배천곡(配天曲) 예조 3 성종 23년(1492) 『성종실록』
19 화전별곡(花田別曲) 김구 (金絿) 6 중종대(1519-1531) 『자암집(自菴集)』
20 관산별곡(關山別曲) 반석평(潘碩枰) 8 중종 16년(1521) 실전(失傳)
21 도동곡(道東曲) 주세붕(周世鵬) 9 중종 36년(1541) 『무릉잡고(武陵雜稿)』
22 엄연곡(儼然曲) 주세붕 7 중종 36년(1541) 『무릉잡고』
23 태평곡(太平曲) 주세붕 5 중종 36년(1541) 『무릉잡고』
24 육현가(六賢歌) 주세붕 6 중종 36년(1541) 『무릉잡고』
25 독락팔곡(獨樂八曲) 권호문(權好文) 7 명종·선조대 (1531~1587) 『송암선생속집(松巖先生續集)』
26 충효가(忠孝歌) 민규 (閔圭) 6 철종 11년(1860) 『고흥유씨세보(高興柳氏世譜)』
〈표〉 현존 경기체가의 내역

연원 및 변천

경기체가의 형성에 관한 견해는 세 가지 유형으로 정리할 수 있다. 즉, 국내기원설과 외래기원설 및 절충설이 그것이다. 국내기원설은 향가, 고려 속악가사, 민요에 기원을 두거나 혹은 향가와 민요의 결합 등에 근거를 두고 있다. 민요기원설의 경우는 민요를 궁중 음악으로 편입한 오랜 내력에 바탕을 둔 것이다. 고려가요라고 하는 고려 속악 가사들의 형성과 맥락을 같이 하는 부분이다.

외래기원설은 중국의 사(詞)와 변려문(騈麗文)에 기반을 두거나, 고려시대에 들어온 송사(宋詞)와 송악(宋樂)으로부터 생겨났다고 하는 것이다. 경기체가의 창작연대를 고려하면 후자가 타당하다고 하겠는데 한문가요로서 형식의 유사성에 근거를 둔 것이다. 음악적으로 비교해 보면 송사보다는 우리 속악(俗樂)인 진작(眞勺)에 가깝다고 한다.

절충설은 중국의 변려문 · 송사 · 송악과 우리의 전통적인 시형인 향가 등을 절충하여 경기체가가 형성되었다는 주장이다.

다양한 주장을 고려할 때 경기체가의 형성문제는 간단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대부분 절충론에 동의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경기체가는 위로는 향가의 전통 속에서 우리 민요의 영향과 중국의 송사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으며, 그 형성 시기는 대략 송사와ᆞ 송악이 유입된 예종조에서 본격적으로 민요를 수집했던 의종조 사이로 본다.

앞의 표에서 본 바와 같이 지금까지 발견된 경기체가 26편을 통해 이 양식의 변천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학자들마다 조금씩 견해가 다르지만 대체로 발생과 발전 · 융성, 변천, 쇠퇴로 나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문제는 최후의 작품인 「충효가」인데 형식적 이탈도 심하고, 시기적으로 다른 일군의 작품에 비해 300년간 떨어져 있는 단 한 편의 작품이어서 사적 전개를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주고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발생기(13세기) · 발전기(14세기) · 변천기(15∼16세기) · 쇠퇴기(17∼19세기)로 본다.

발생기는 「한림별곡」을 비롯한 「관동별곡」,「죽계별곡」등이 창작되면서 경기체가가 형성된 고려후기이다. 고종 때 당시 신진 관료였던 신흥 사대부들에 의해 처음 불리어졌는데 교술적인 내용과 개인적인 정서가 일부 드러난다.

발전기는 조선조에 들어오면서 초기 관학파 혹은 훈구파의 사대부들이 창작을 주도하고 승려 지은(智訔)과 기화(己和)가 참여하던 시기로, 「상대별곡(霜臺別曲)」에서 「기우목동가(騎牛牧童歌)」까지 12편이 창작되었다. 조선 왕조의 정통성과 칭송, 관인으로서의 이상을 노래하는 교술적인 악장의 성격과 불교적인 작품이 등장하여 경기체가로서의 융성기를 맞이한다.

변천기는 「불우헌곡(不憂軒曲)」으로부터 「독락팔곡(獨樂八曲)」까지 9편이 창작된 시기로 형식이 크게 붕괴되고 악장적 성격보다는 유교 의식을 위한 교술적인 내용과 개인의 서정을 노래하는 경향이 짙어진다. 이후를 경기체가가 가사문학에 의해 대체되면서 자취를 감추어간 쇠퇴기로 볼 수 있다.

내용

초기 경기체가가 연행된 상황을 짐작해보면 최충헌(崔忠獻)의 주관 또는 문인들로 이뤄진 연회에서 여러 사람이 같은 형식의 시를 돌아가며 부르고 그것을 악곡에 올렸을 것이다. 이런 노래들 중에 「한림별곡」이 뛰어나자 악장으로 편입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림별곡」의 경우 조선조에 와서는 임금과 고위직 관료들이 모이는 잔치에서 불렸으며, 특히 예문관의 신참례에서 공식적으로 불린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등의 기록에 의하면 「한림별곡」은 임진왜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활발하게 연행되었다. 이 때의 잔치는 기생들이 동석하며 악공들이 악기로 반주하고 술과 고기가 준비되는 향락적인 것들이었다. 이러한 연행상황은 작품의 내용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이렇게 오랜 기간 연행된 「한림별곡」은 개별적인 노래에 후렴구가 붙어 계속 이어지는 형태의 노래이다. 후렴구는 “위”라고 시작하는 뒤의 두 구절로, 민요의 교환창 혹은 선후창의 방식으로 불리울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집단 가창적 성격과 「한림별곡」에 나타나는 찬양 · 과시적 성격이 군신간의 모임에 적합하였기 때문에 자주 연행되었고 다른 경기체가의 모범이 되었다.

「한림별곡」을 비롯한 조선 초기의 경기체가는 주로 사대부계층의 만족스럽고 화려하고 도도한 생활과 삶에 대한 기쁨과 즐거움을 과시하고 칭송하거나 그들의 이념에 적합한 유교적이고 도덕적인 훈계를 노래하였고, 승려들도 불교와 부처를 찬양하는 내용을 노래하였다. 따라서 현실을 마음껏 즐기고 자랑하며, 찬양하여 현실자체가 이상과 조화를 이루고 있어 우아미를 구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실에 대한 비판적 자세나 골계적인 시선은 보이지 않는다.

경기체가의 성격은 수록된 문헌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최초의 경기체가 「한림별곡」이 수록된 곳은 『고려사』「악지」의 속악조로 이미 궁중 음악에 편입되어 있었다. 이후에도 『조선왕조실록』 · 『악학궤범』 · 『악장가사』등에 대부분 수록되었고(표 참조), 『조선왕조실록』 등에 수록된 연행 관련 기록을 통해서 악장으로서의 성격을 확실히 한다.

따라서 경기체가는 악장으로서의 기능을 중심으로 분류하면 악장 계열과 비악장 계열로 나뉜다. 악장 계열은 고려조의 「한림별곡」을 필두로 조선 초기 악장인 「상대별곡」 · 「화산별곡(華山別曲)」 · 「가성덕(歌聖德)」 · 「축성수(祝聖壽)」 · 「오륜가(五倫歌)」 · 「연형제곡(宴兄弟曲)」 · 「배천곡(配天曲)」등을 들 수 있다. 「한림별곡」이후 조선 초기의 작품에서는 「한림별곡」의 연행상황을 유지하면서도, 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제시하고 유교적 이성에 입각한 질서 의식을 노래하는 악장으로서의 성격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다.

국가 악장적 성격이 변모된 경기체가는 가문을 칭송하거나 불교 포교나 유교 의식을 노래하는 작품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가문이나 특정 집단을 칭송하는 것으로 「죽계별곡(竹溪別曲)」 · 「구월산별곡(九月山別曲)」 · 「금성별곡(錦城別曲)」이 있다. 가문이나 집단에 기억할 만한 일이 일어났을 때 가문의 명예를 드러내고 조상들에게 찬사를 보내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가문의 악장 구실을 한다. 특정한 집단의 공식적인 행사에서 부르기 위해 지은 것으로 「한림별곡」의 특성과도 통한다.

불교포교를 위한 경기체가는 「미타찬(彌陀讚)」 · 「안양찬(安養讚)」 · 「미타경찬(彌陀經讚)」 · 「서방가(西方歌)」 · 「기우목동가」등이 있다. 모두 세종조 전후의 시기로 경기체가 전성기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승려들의 작품인 이 노래들은 모두 아미타불과 서방의 안양정토(安養淨土)에 대한 찬양으로 불교적인 교리를 노래를 통해 전달하고 있다.

주세붕의 작품인 「도동곡(道東曲)」 · 「엄연곡(儼然曲)」 · 「태평곡(太平曲)」 · 「육현가(六賢歌)」는 작자가 백운동 서원을 세우면서 안유(安裕)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는데 사용할 목적으로 지었다. 개인의 정서를 노래했다기보다 유학을 숭상하는 계층을 찬양하는 유교의식을 위한 노래이다.

비악장 계열의 가장 큰 특징은 연행 장소의 차이를 들 수 있다. 악장 계열의 노래가 궁중 혹은 의식의 장소에서 불리었다면 비악장 계열의 노래는 자연 속에서 불리었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노래 내용에도 영향을 미쳐 잔치 노래로의 성격에서 개인의 노래로 정착하게 되었다.

악장이 제작되는 시기의 비악장계 작품으로는 「관동별곡(關東別曲)」 · 「불우헌곡」이 있고 악장 제작 종식 이후의 작품 「화전별곡(花田別曲)」 · 「독락팔곡」 · 「충효가」가 있다. 「관동별곡」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성종조 이후의 작품으로 경기체가 본연의 악장적 기능이 축소되고 상실되면서 갈래의 본질과 멀어지고, 형식상, 악곡상의 제약으로 개인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워지자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경기체가의 갈래 성격은 일반적으로 율문으로 표출된 서정시가라는 주장이 지배적이었다. 이에 대해 조동일은 서정시가 아니라, 악장의 기능이 중요한 교술시라고 주장한다. 서정 · 서사 · 희곡 등으로 3분 하던 종래 분류체계에서 서정 · 서사 · 희곡 · 교술 등의 4분법을 취하면서 경기체가는 교술 갈래로 분류한다. 즉, 서정은 세계의 자아화로 이뤄지는데, 경기체가를 이루는 원리는 자아의 세계화로 교술 갈래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경기체가는 실제로 존재하는 작품외적 세계상을 작품 안에 그대로 옮겨놓았으며, 함축적인 서정과 달리 열거적 서술을 특징으로 하는 교술이라 한다. 후기 경기체가의 서정적 성격을 고려할 때 교술성과 서정성이 복합된 갈래라는 설도 있다.

경기체가는 첫 작품인 「한림별곡」이 『고려사』에 부분적으로 이두식 표기를 포함한 순 한문으로 창작 · 정착되었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에는 한글과 병기하거나 필요에 따라 노래 본문에 한글을 혼용하기도 하였다.

경기체가의 형식은 작품에 따라 시대에 따라 변화가 많아서 학설이 다양하지만 대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작게는 4연, 많게는 12연까지로 구성되며 각 연의 형식이 일정한 정형양식이다. 한 연은 대개 6행으로 앞 4행, 뒤 2행의 전대절(前大節) · 후소절(後小節) 형식이다. 전절과 후절은 엽(葉)이라는 음악 용어로 분절되어 있기도 하다.

각행의 구성은 최초이자 정제된 형식으로 인정되는 「한림별곡」을 중심으로 논의된다. 조윤제는 전절이 “3·3·4 / 3·3·4 / 3·3·4 / 위 2(4) 경기하여”로, 후절은 “4·4 / 위 2(4) 경기하여”로 구성되었다고 설명한다. 정병욱은 “3·3·4 / 3·3·4 / 4·4·4 / 3·3·4/ 4·4·4·4 3·3·4”로 정리하는데 감탄사에 해당하는 ‘위(爲, 偉)’를 포함하지 않고 있다.

각 행은 3·3·4 혹은 4·4·4를 기본 음수로 하는 3음보로 구성되어 있고 5행은 4·4·4·4조의 4음보 구성이다. 대개 4행과 6행은 ‘위 –경(景)긔 엇더 ᄒᆞ니잇고’라는 후렴구로 이뤄져 있는데 대체적인 기본형식은 다음과 같이 제시할 수 있다.

제1행 3 3 4 (3음보)

제2행 3 3 4 (3음보)

제3행 4 4 4 (3음보)

제4행위 … 景긔 엇더ᄒᆞ니잇고(3음보)

제5행 엽(葉) 4 4 4 4 (4음보)

제6행 위 … 景긔 엇더ᄒᆞ니잇고(3음보)

1-3행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으나 4-6행의 경우 특히 제 5행이 문제이다. 5행은 4·4의 가사 내용을 반복하거나, 재창(再唱)이라 하여 생략된 원문도 있기 때문에 조윤제는 제 5행을 4·4의 반복으로 보아 반복 부분을 생략하였고 조동일은 반복부분을 오히려 두 행으로 나누어 4·4 / 4·4로 파악하고 있으며, 김문기는 제 4행과 제 6행의 ‘위’를 독립된 한 음보로 보아 4음보로 파악하고 있기도 하다.

이와 같은 율격으로 구성된 6행 1연의 작품적 질서의 원리로는 조동일이 ‘개별화’의 원리와 ‘장면화’의 원리를 제시하였다. 6행 가운데 1,2,3,5행은 개별화의 원리에 의해 열거된 사물 혹은 세계상을 담고 있으며, 4, 6행은 개별적으로 나열된 세계를 하나의 종합적인 개념으로 묶는 포괄화의 원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특히 4, 6행의 핵심문형인 ‘위 –경’을 통하여 이 원리들이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위’의 기능은 개별적인 사물을 열거하는 대목이 끝나고 포괄적인 말이 나타남을 알려주는 구실을 하여 개별적인 대목과 포괄적인 대목을 선명하게 구별해준다. 또한 감탄사로 표현되는 감격은 무엇보다도 사물에 대한 관심을 모아 포괄적인 것을 발견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경’의 기능은 나열한 개별적인 사물을 동명사로 포괄하여 눈 앞에 살아 있는 복합적인 광경 또는 경치로 전환시킴으로써 적극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의의와 평가

경기체가가 형성된 고려 후기는 권문세족이 국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신흥사대부가 경쟁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 권문세족들은 무신란 · 몽고란을 겪고 원나라의 간섭이 지속되는 동안 나라의 재건보다는 이념적 긴장을 풀어버리고 유흥적이고 향락적 기풍의 속악정재와 속악가사를 즐겼다. 이에 개별적인 사물의 실제성과 사실을 존중하는 사고 방식과 실무적 능력을 갖추고 문학적인 교양과 학식을 지닌 집단이 중앙 정계로 진출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신흥사대부들이다.

이들은 중세 전기에 일방적으로 존중되던 ‘심’에서 ‘물’로 관심을 돌려 중세 후기의 새로운 이념을 실천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교술이라는 문학 분야를 개척하였다. 특히 운문으로 선택한 교술 문학이 경기체가로서, 경기체가에 나타난 사물의 열거에서 그 성격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중세의 시작을 알리는 징표가 ‘심’의 문학, 서정문학의 등장이었다면, 교술시인 경기체가의 등장은 문학사에서 중세 후기를 여는 징표가 된다.

결론적으로 경기체가는 한글이 창제되기 이전에 한문을 주요 표현수단으로 한 우리말 문학으로 중세 후기를 여는 교술시라는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사라진 문학 갈래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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