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복남 ()

고대사
인물
고구려 시대 보장왕의 태자.
이칭
이명
고남복(高男福)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출생지
고구려
주요 관직
태자
내용 요약

고복남은 보장왕의 태자이다. 665년 10월 중국 당나라에 파견되어 666년 정월에 열린 봉선(封禪) 의례에 참석하였다. 복남의 봉선 의례 참석은 그 무렵 고구려와 당의 국제관계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주목된다. 668년 9월 고구려의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당으로 잡혀갔다.

정의
고구려 시대 보장왕의 태자.
가계 및 인적 사항

고복남(高福男, ?~?)은 보장왕의 태자로, 『신당서(新唐書)』에는 남복(男福)으로 나온다.

주요 활동

보장왕의 태자로, 665년 10월 당에 파견되어 666년 정월에 열린 주1 의례에 참석하였다. 봉선은 태산(泰山)에서 하늘에 천하통일을 보고하고 감사하는 의례였다. 진한(秦漢) 시기에 행하여졌고, 당에서는 666년 정월에 처음 열렸다. 이때 당의 봉선 의례는 주2가 주도하였다. 측천무후를 중심으로 한 정치 권력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많은 주변국에서 참석할수록 의례 효과가 높아질 수 있었다. 복남의 봉선 의례 참석은 그러한 당의 요구에 부응한 것으로, 그 무렵 고구려와 당이 우호적인 관계를 추구한 일면을 보여준다.

복남의 파견을 전후하여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이 사망하였다. 그런데 연개소문의 사망 시점은 분명하지 않다. 기록에 따라 665년 10월 이전으로 나오기도 하고, 이후로 나오기도 한다. 이에 태자 복남의 봉선 의례 참석이 연개소문이 추진한 것인지 아니면 연개소문의 사후 연남생(淵男生) 또는 보장왕이 추진한 것인지에 이견이 있다. 고복남은 668년 9월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부친 보장왕과 왕자 덕남(德男) 및 주요 대신과 함께 당으로 잡혀갔다.

참고문헌

원전

『구당서(舊唐書)』
『삼국사기』
『신당서(新唐書)』
『일본서기(日本書紀)』
『자치통감(資治通鑑)』
『책부원귀(册府元龜)』

단행본

김영하, 『신라중대사회연구』(일지사, 2007)
하워드 J. 웨슬러 지음, 임대희 옮김, 『비단 같고 주옥 같은 정치-의례와 상징으로 본 당대 정치사-』(고즈윈, 2005)

논문

이성제, 「당 고종의 태산 봉선과 고구려의 대응을 둘러싼 몇 가지 문제」(『고구려발해연구』 64, 2019)
채미하, 「666년 고구려의 당 봉선의례 참여와 그 의미」(『동북아역사논총』 56, 2017)
서영교, 「건봉 원년(666) 봉선문제와 당의 대고구려 정책」(『대구사학』 120, 2015)
주석
주1

옛날 중국에서, 천자(天子)가 흙으로 단(壇)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 지내고 땅을 정(淨)하게 하여 산천에 제사 지내던 일.    우리말샘

주2

중국 당나라 고종의 황후(624?~705). 성은 무(武). 이름은 조(曌). 중국 역사에서 유일한 여제(女帝)로 고종을 대신하여 실권을 쥐고, 두 아들을 차례로 제왕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으며, 스스로 제왕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성신 황제(聖神皇帝)라 칭하였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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