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거문총 ()

공거문총
공거문총
조선시대사
문헌
조선후기 정조 · 순조 · 철종 · 고종대의 상소문과 차자를 연월일 순으로 모아 엮은 소차집. 장주문.
정의
조선후기 정조 · 순조 · 철종 · 고종대의 상소문과 차자를 연월일 순으로 모아 엮은 소차집. 장주문.
서지적 사항

편년 미상. 필사본. 현재는 37책만 남아 있다.

개설

정조는 영조 52년간의 상소·차자·비답(批答)을 등서(謄書)·편책(編冊)한 것을 모아서 정리해 ≪장소휘편 章疏彙編≫을 편찬하도록 한 적이 있는데, 자신이 즉위한 기간 동안의 공거문(公車文)도 모아서 편집하도록 하여 ‘공거문총’이라 일컬었다. 정조가 재임한 기간의 모든 상소와 차자의 전문을 수록해 모은 결과가 총93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정조가 지은 ≪공거문총≫의 제(題)에 따르면 공거문은 총 200여 책에 이르렀다 한다. 양자간의 관계는 명확하지 않으나 정조대만 하더라도 공거문이 거질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작업은 순조 이후에도 이어지면서 같은 이름으로 편집되었다. 그리하여 정조 이후 고종까지의 상소와 차자를 모아서 편집한 ≪공거문총≫이 남게 되었다.

그러나 정조대 이후 편찬된 것은 어느 시대의 것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고, 헌종대의 것은 남아 있는 것이 전혀 없다. 적어도 정조대만 하더라도 200여 책에 달하고, 순조대까지만 하더라도 117권인 것을 보면 전체 분량은 방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현재 남아 있는 것을 중심으로 살펴볼 수밖에 없다.

내용

≪공거문총(규장각 12864·37)≫의 내부 번호를 중심으로 책의 하단에 표시된 권수에 따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권1은 1789년(정조 13) 6월∼12월의 상소와 차자 등 140건을 편집한 것이다. 규장각제학 김학성(金學性) 등의 연명차자, 영부사(領府事) 조인영(趙寅永), 판부사(判府事) 정원용(鄭元容), 평안감사 조두순(趙斗淳) 등의 상소·차자를 비롯해 좌참찬 김좌근(金左根)의 상소 등을 실고 있다.

권3은 1800년(순조 즉위) 11월·12월의 상소와 차자 53건을 편집한 것이다. 판부사 홍양호(洪良浩), 홍문제학 윤행임(尹行恁), 상호군(上護軍) 김문순(金文淳), 병조판서 김조순(金祖淳), 호조판서 이서구(李書九), 도승지 남공철(南公轍) 등의 상소와 차자가 실려 있다.

권10은 1801년(순조 1) 10월의 상소와 차자 34건을 편집하였다. 우의정 서용보(徐龍輔), 호조참판 서미수(徐美修), 영의정 심환지(沈煥之), 장령 이기경(李基慶) 등의 상소와 차자가 실려 있다.

권11은 1801년(순조 1) 11월·12월의 상소와 차자 48건을 편집한 것이다. 호조판서 김조순(金祖淳), 부수찬(副修撰) 박종경(朴宗慶), 영부사 이병모(李秉模), 이조판서 서매수(徐邁修) 등의 상소와 차자가 실려 있다.

권14는 1855년(철종 6) 8월∼12월의 상소와 차자 110건을 편집하였다. 영부사 정원용, 병조판서 이돈영(李敦榮), 영의정 김좌근(金左根), 상호군 이계조(李啓朝), 우의정 조두순, 함경감사 이시원(李是遠) 등의 상소와 차자가 실려 있다. 그 외에도 팔도유생 오혁(吳爀) 등의 연명상소와 경기유생유학 임수철(任秀喆) 등의 상소가 있다.

권15로 분류된 것으로 2가지가 있다. 각각을 소개하면, 권15(奎 12864·37·6)는 1802년(순조 2) 9월∼10월의 상소와 차자 53건을 편집한 것이다. 호조판서 조진관(趙鎭寬), 우의정 서용보, 영돈녕(領敦寧) 김조순, 부교리(副校理) 홍석주(洪奭周), 헌납(獻納) 정만석(鄭萬錫), 영의정 심환지, 동부승지 서유구(徐有榘) 등의 상소·차자, 그 외에도 지방의 유생 진사 유지화(柳之和) 등의 상소를 싣고 있다. 이 책은 권14와는 다른 본으로서 ≪공거문총≫으로 묶어 정리하면서 잘못 끼어 편집된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권15(奎 12864·37·7)는 1856년(철종 7) 정월∼6월의 상소와 차자 67건을 편집한 것으로 권14와 연결된다. 행 병조판서 이돈영, 행 예조판서 김병기(金炳冀), 함경감사 이시원, 검교직각(檢校直閣) 정건조(鄭健朝), 형조참판 남병진(南秉哲), 이조참의 김세균(金世均) 등의 상소·차자, 그 외에도 충청도경상도 유생유학 구문호(具文鎬)을 비롯한 다수의 연명상소를 실었다.

권18은 1803년(순조 3) 윤 2월∼6월의 상소와 차자 78건을 편집한 것이다. 이조판서 이서구(李書九), 좌승지 심상규(沈象奎), 좌의정 서용보, 영의정 이병모, 영부사 이시만(李時秀) 등의 상소와 차자가 실려 있다.

권23은 1804년(순조 4) 6월∼8월의 상소와 차자 90건을 편집한 것이다. 평안감사 이서구, 예조판서 서매수, 경기감사 서영보, 호조판서 이만수(李晩秀), 전집의(前執義) 이기경, 수원유수 김문순(金文淳), 전우참찬(前右參贊) 서매수, 좌의정 서매수, 도승지 서형수(徐瀅秀) 등의 상소와 차자를 실었다.

권24는 1860년(철종 11) 7월∼12월의 상소와 차자 88건을 편집한 것이다. 영부사 정원용, 행 병조판서 김문근(金輔根), 행 공조판서 이돈영, 행 판돈령 김병기(金炳冀), 행 판부사 김좌근, 행 판부사 김홍근(金興根), 영돈령 김문근(金汶根), 우의정 조두순, 행 대호군 이유원(李裕元), 행 병조판서 정기세(鄭基世), 좌의정 조두순 등의 상소와 차자가 실려 있다.

권26은 1805년(순조 5) 1월∼6월의 상소와 차자 106건을 편집한 것이다. 영부사 이병모, 좌의정 서매수, 판부사 이시수, 영돈령 김조순, 호조판서 조진관(趙鎭寬), 이조참판 박종경(朴宗慶), 판부사 김관주(金觀柱), 대사성 서유구, 상호군 김재찬(金載瓚), 좌의정 서매수(徐邁修) 등의 상소와 차자를 실었다.

권28은 1805년(순조 5) 8월∼9월의 상소와 차자 63건을 편집한 것이다. 이조참판 박종경, 판부사 서매수, 영돈령 김조순, 형조판서 서영보, 교리 이기경, 영부사 이병모 등의 상소와 차자가 실려 있다. 그 외에도 충청도유생유학 신충(申漴)을 비롯한 다수의 연명상소를 실었다.

권29는 1805년(순조 5) 10월∼12월의 상소와 차자 61건을 편집한 것이다. 교리 이기경, 영의정 이병모, 판부사 서매수, 대호군 서영보, 전지중추 김재찬, 영돈령 김조순, 겸호조판서 조진관 등의 상소와 차자가 실려 있다. 그 외에도 공충도유생유학 이도연(李道淵)을 비롯한 다수의 연명상소를 실었다.

권36은 1807년(순조 7) 1월∼3월의 상소와 차자 57건을 편집한 것이다. 호조판서 서영보, 부호군 홍석주(洪奭周), 좌의정 이시수, 응교 여동식(呂東植), 공조판서 남공철(南公轍), 수원유수 조진관, 수찬 김이재(金履載), 이조참판 민기현(閔耆顯) 등의 상소와 차자가 실려 있다.

권40은 1808년(순조 8) 1월∼3월의 상소와 차자 63건을 편집한 것이다. 호조판서 이시원(李始源), 우의정 김재찬, 검열 정원용, 행이조판서 조윤대(曺允大), 영부사 서용보, 좌의정 이시수, 형조판서 이면긍(李勉兢), 상소와 차자가 실려 있다.

권41은 1808년(순조 8) 4월∼5월의 상소와 차자 46건을 편집한 것이다. 함경감사 이만수(李晩秀), 이조판서 남공철, 좌의정 이시수, 우의정 김재찬, 판의금 서영보, 행부제학 심상규(沈象奎) 등의 상소와 차자가 실려 있다. 그 외에도 사학유생유학 이종각(李鐘珏) 등의 연명상소, 황해도유생생원 유육(柳堉) 등의 연명상소와 경상도유생유학 강숙환(姜肅煥) 등의 연명상소를 실었다.

권43은 1808년(순조 8) 9월∼10월의 상소와 차자 73건을 편집한 것이다. 좌의정 김재찬, 영부사 이시수, 좌의정 김재찬, 행 호조판서 서영보, 경상감사 정동관(鄭東觀), 전라감사 이면응(李冕膺), 지평 이지연(李止淵), 지사 남공철 등의 상소와 차자가 실려 있다.

권47은 1809년(순조 4) 7월∼10월의 상소와 차자 54건을 편집한 것이다. 행호군 박종경(朴宗慶), 영부사 이시수, 좌의정 김재찬, 교리 이지연(李止淵), 도승지 홍석주(洪奭周) 등의 상소와 차자가 실려 있다.

권52는 1809년(순조 4) 11월∼12월의 상소와 차자 64건을 편집한 것이다. 호조판서 심상규, 좌의정 김재찬, 부제학 홍석주, 공조참판 정만석(鄭萬錫), 이조판서 박종경 등의 상소와 차자가 실려 있다.

권56은 1812년(순조 12) 1월∼5월의 상소와 차자 78건을 편집한 것이다. 형조판서 이면긍(李勉兢), 행부호군 홍석주, 좌의정 김재찬, 영부사 이시수, 판의금 남공철, 겸병조판서 심상규, 대사헌 이면응, 영의정 김재찬, 평안감사 정만석, 행좌승지 김시근(金蓍根) 등의 상소와 차자가 실려 있다. 그 외에도 사학유생유학 심상진(沈象鎭) 등의 연명상소가 있다.

권57은 1812년(순조 12) 6월∼8월의 상소와 차자 67건을 편집한 것이다. 겸병조판서 심상규, 행 이조판서 남공철, 영부사 이시수, 영의정 김재찬, 좌의정 한용주(韓用龜), 영돈령 김조순, 호조판서 이면응, 행 병조판서 남공철, 호조판서 박종경, 예조판서 홍석주 등의 상소와 차자가 있다.

권60은 1813년(순조 13) 1월∼4월의 상소와 차자 58건을 편집한 것이다. 좌의정 한용구, 우의정 김사목(金思穆), 행호조판서 남공철, 영의정 김재찬, 행 병조판서 서용보, 수원유수 이익운(李益運), 함경감사 김이양(金履陽), 평안감사 정만석, 예조판서 박종경 등의 상소와 차자가 실려 있다.

권64는 1814년(순조 14) 6월∼7월의 상소와 차자 54건을 편집한 것이다. 호조판서 이상황(李相璜), 영돈령 김조순, 영부사 이시수, 지사 심상규, 지사 남공철, 지돈령 서영보, 병조판서 박종래(朴宗來), 행공조판서 박종경, 이조판서 이조원(李肇源) 등의 상소와 차자가 실려 있다. 그 외에도 경외유생유학 송재선(宋在善) 등의 연명상소가 있다.

권66은 1815년(순조 15) 1월∼5월의 상소와 차자 71건을 편집한 것이다. 우의정 김사목, 영돈령 김조순, 적성현감 남달손(南達孫), 별겸춘추 홍경모(洪敬謨), 이조판서 이조원, 판의금 서영보, 평안감사 조만영(趙萬永), 부교리 조만영, 영의정 김재찬, 전라감사 김계온(金啓溫), 평안감사 이상황, 경상감사 이시수 등의 상소와 차자가 실려 있다.

권68은 1815년(순조 15) 10월∼12월의 상소와 차자 44건을 편집한 것이다. 영의정 김재찬, 좌의정 한용구, 이조판서 이조원, 병조판서 남공철, 영돈령 김조순 등의 상소와 차자가 실려 있다.

권69는 1816년(순조 15) 1월∼5월의 상소와 차자 83건을 편집한 것이다. 이조판서 이조원, 행이조판서 박종래(朴宗來), 호조판서 정만석, 평안감사 이상황, 행 이조판서 박종경, 경상감사 이존수, 영의정 김재찬, 우의정 김사목, 영돈령 김조순, 수원유수 서영보, 좌의정 한용구 등의 상소와 차자가 실려 있다. 그 외에도 경기여주유생유학 정재주(鄭在柱) 등의 연명상소와 경외유생유학 한경유(韓景裕) 등의 연명상소가 있다.

권70은 1816년(순조 16) 6월∼8월의 상소와 차자 60건을 편집한 것이다. 호조판서 정만석, 평안감사 이상황, 좌의정 한용구, 판돈령 이만수, 행이조판서 박종경, 우의정 김사목, 남연군 구(南延君球) 등의 상소와 차자가 실려 있다. 그 외에도 팔도유생유학 이규(李圭) 등 수백 명이 연명한 상소가 있다.

권73은 1817년(순조 17) 4월∼7월의 상소와 차자 77건을 편집한 것이다. 영부사 이시수, 겸이조판서 남공철, 영돈령 김조순, 행대사간 홍석주, 우의정 김사목, 병조판서 이상황, 대호군 이익운, 이조참의 김유근(金逌根), 행이조판서 이조원, 이조판서 이희갑(李羲甲) 등의 상소와 차자가 실려 있다. 그 외에도 사학유생유학 조병직(趙秉直) 등과 경외유생유학 한광운(韓光運) 등의 연명상소가 있다.

권74는 1817년(순조 17) 8월∼12월의 상소와 차자 79건을 편집한 것이다. 판부사 김사목, 전지사 남공철, 좌의정 김재찬, 병조판서 이상황, 이조참판 이존수(李存秀), 우의정 남공철, 대사성 이면구(李勉求), 영돈령 김조순, 공청감사 권상신(權常愼), 강원감사 조봉진(曺鳳振), 집의 홍경모(洪敬謨), 사간 강준흠(姜浚欽), 호조판서 이상황, 광주유수 김시근(金蓍根) 등의 상소와 차자가 실려 있다.

권73과 권74 사이에 번호가 없는 1책(奎 12864·37·29)이 있다. 이 책은 1877년(고종 14) 7월∼12월 76건을 편집한 것이다. 형조판서 민겸호(閔謙鎬), 지사 조영하(趙寧夏), 영부사 이유원, 충청감사 조병식(趙秉式), 이조참의 김병익(金炳翊), 경연관 송병선(宋秉璿), 행 대호군 김병시(金炳始), 강원감사 김세균(金世均), 영의정 이최응(李最應), 지사 정기세(鄭基世), 경상감사 신응조(申應朝), 전한(典翰) 민영익(閔泳翊) 등의 상소와 차자가 실려 있다.

권77은 1818년(순조 18) 6월∼8월의 상소와 차자 46건을 편집한 것이다. 우의정 남공철, 행도승지 홍석주, 검열 권돈인, 호조판서 이상황, 겸이조판서 심상규, 영부사 이시수 등의 상소와 차자가 실려 있다.

권79는 1819년(순조 19) 1월∼3월의 상소와 차자 62건을 편집한 것이다. 이조참의 정원용, 병조참판 김유근, 우의정 남공철, 광주유수 정만석, 영돈령 김조순, 행 우승지 이지연(李止淵) 등의 상소와 차자가 실려 있다.

권82는 1820년(순조 20) 1월∼6월의 상소와 차자 62건을 편집한 것이다. 우의정 남공철, 영의정 서용보, 판부사 김재찬, 영돈령 김조순, 전라감사 이서구, 수원유수 이만수, 판윤 김시근 등의 상소와 차자가 실려 있다. 그 외에도 사학유생유학 백규진(白奎鎭) 등의 상소가 있다.

권94는 1824년(순조 24) 8월∼12월의 상소와 차자 57건을 편집한 것이다. 호조판서 이상황, 이조참의 홍경모(洪敬謨), 행호조판서 정만석, 행 대호군 이서구, 영의정 남공철, 도승지 서준보(徐俊輔) 등의 상소와 차자가 실려 있다.

권98은 1826년(순조 26) 7월∼12월의 상소와 차자 50건을 편집한 것이다. 우의정 심상규, 이조판서 조만영, 이조판서 김이재, 충청감사 서준보, 행호조판서 정만석, 지의금(知義禁) 홍석주 등의 상소와 차자가 실려 있다.

권99는 1827년(순조 27) 1월∼3월의 상소와 차자 86건을 편집한 것이다. 우의정 심상규, 판윤 홍석주, 전라감사 정원용, 행 호조판서 정만석, 왕세자, 보덕(輔德) 김난순(金蘭淳), 강화유수 서유구, 강원감사 정원용 등의 상소와 차자가 실려 있다.

권117은 1834년(순조 34) 8월∼11월의 상소와 차자 50건을 편집한 것이다. 영부사 이상황, 좌의정 홍석주, 영의정 심상규, 우부승지 유성환(兪星煥), 행대사헌 정기선(鄭基善), 행부제학 권돈인, 행공조판서 김유근 등의 상소와 차자가 실려 있다.

≪공거문총≫은 적어도 정조·순조·헌종·철종·고종대에 각기 편찬되었으며, 여러 종류의 것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권15가 2개의 다른 책으로 합철되었고, 내용면에서도 두 책은 시기적으로 50년이나 차이가 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사실을 살필 수 있다.

즉, 두 책은 처음부터 같이 묶인 것이 아니며, 다만 같은 제목하에 각 시대별로 달리 만들어진 것이다. 각 시대별로 정리된 ≪공거문총≫들을 일일이 구분하지 않고 같은 제목으로 묶었기 때문에 이러한 착종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대체적으로 여기에서 다룬 ≪공거문총≫은 크게 순조대를 중심으로 정리하고, 나머지는 각 왕대별로 정리한다면 원래의 편차를 복원할 수 있다. 그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권1은 정조대에 정리된 ≪公車文叢≫의 일부로서 앞부분과 뒷부분은 모두 흩어진 것으로 보인다.

헌종대의 ≪공거문총≫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철종대의 것으로는 권14, 권15(奎 12864·37·7), 권24를 들 수 있다. 따라서 철종대의 ≪공거문총≫은 권1∼권13, 권16∼권23, 권25권 이하의 것은 모두 흩어져 버린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고종대의 ≪공거문총≫의 일부로 1책(奎 12864·37·29)이 있으며, 나머지는 모두 흩어져 없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순조대에 작성된 ≪공거문총≫이라 하겠다. 그러나 순조대의 책도 많은 양이 없어졌다.

순조가 1800년 7월에 즉위한 것을 감안한다면, ≪공거문총≫의 권1과 권2는 없어졌고 권3부터 남는다. 권4∼권9까지는 결본으로 거의 1개월 혹은 2개월 단위로 상소와 차자를 묶어서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권12∼권14, 권16, 권17, 권19∼권22, 권25, 권26, 권30∼권35, 권36∼권39, 권42, 권44∼권46, 권48∼권51, 권53∼권55, 권58, 권59, 권61∼권63, 권65, 권67, 권71, 권72, 권75, 권76, 권78, 권80, 권81, 권83∼권93, 권95∼권97, 권100∼권116, 권118 이하의 책들은 모두 흩어져 없어져 버린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여러 질이던 ≪공거문총≫은 현재 비록 흩어져 없어진 것이 많다 해도 현존하는 것을 이용하여 당대의 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에서 소략한 형태로 기록된 상소나 소차 등의 전문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자료로서도 가치가 충분하다. 자료의 이용이라는 측면에 한정하더라도, 공거문은 정치사·언론사·사회사 등을 비롯한 다양한 방면에 이용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공거문류의 소장상황과 그 사료가치」(최승희, 『한국문화』 10, 1991)
『공거문총서(公車文叢書)』(서울대학교한국문화연구소, 아세아문화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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