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아버지는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곽충보(郭忠輔)이다.
음보(蔭補)로 무관직에 나가 1399년(정종 1) 별장이 되었다. 이때 아버지와 함께 사적인 감정으로 황문(黃文) 등을 처벌한 일로 탄핵을 받아 한때 청주로 유배되었다.
그 뒤 1404년(태종 4) 호군(護軍)으로 승진해 무신으로서의 역량을 발휘했다. 그러나 부친상을 당하고도 자세가 오만하다는 이유로 대간(臺諫)으로부터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뒤에 다시 기용되어 1408년 상호군(上護軍)으로서 풍해도조전첨절제사(豊海道助戰僉節制使)가 되었으며, 1410년 경원부병마절도사(慶源府兵馬節度使)가 되었다.
이때 우디거[尤狄哈]·오도리[吾都里]의 야인들이 침입해오자 이들을 막아 싸웠으나 패했다. 죽은 자가 73인, 부상자가 52인이며, 전마(戰馬) 120필과 병갑(兵甲) 24부(部)를 모두 적에게 빼앗겼다.
이리하여 두 능을 함주(咸州)로 옮기고, 민가를 옮겨 경성군에 합병하고, 그 땅을 비우게 되었다. 이러한 패전의 책임을 물어 대간에서 논란이 많았으나, 호분시위사총제(虎賁侍衛司摠制)로 전직되었다가, 다시 탄핵을 받아 동래부에 귀양갔다.
그 뒤 1411년 동지총제(同知摠制)가 되고, 이듬해 내금위절제사(內禁衛節制使)와 중군총제(中軍摠制)를 지냈다. 1413년 동지총제와 내금위중군절제사(內禁衛中軍節制使)를 지낸 뒤, 1418년 이번절제사(二番節制使)가 되었다. 1430년(세종 12) 중군총제를 거쳐, 이듬해 전라도처치사(全羅道處置使)로 활약하던 중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