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996년(성종 15) 과거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였다. 1015년(순종 6)에 민부시랑(民部侍郎)으로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거란이 해마다 침입함을 고하고 위태할 때 구원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송나라는 이를 거절하였다.
이듬해 돌아와서 형부시랑(刑部侍郎)·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었다. 1017년 예부시랑·한림학사가 되었으며, 그 해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정배걸(鄭倍傑) 등 진사 11인을 뽑았다.
1019년 왕에게 아뢰어 과거에서 대책(對策)을 제외하고 논(論)으로써 시험하되, 반드시 『예기(禮記)』 중의 의리로 제목을 삼게 하였다. 1022년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가 되었으며, 그 해 상서우승(尙書右丞) 왕서(王諝)와 함께 사신으로 거란에 다녀왔다.
1023년 중추원사가 되었고, 이듬해 형부상서가 되었으며 다시 같은해 서북면행영부도통(西北面行營副都統)이 되었다. 1025년 추성문리공신 상주국(推誠文理功臣上柱國)이 되었고, 1027년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
1029년(현종 20) 거란의 동경장군(東京將軍) 대연림(大延琳)이 반란을 일으켜 흥요국(興遼國)이라 스스로 칭하자, 거란이 원군을 요청하였다. 곽원은 그 틈을 타서 압록강 동쪽 기슭을 차지하자고 국왕에게 요청하였다. 하지만 그가 다른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하였다가 이기지 못하여 분사하였다. 성품이 청렴하고 문장이 능했으며, 대성(臺省)에 있을 때 행정실무능력으로 칭찬을 받았다.